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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라질 날들을 위하여

오은경 지음 | 흐름출판


언젠가 사라질 날들을 위하여

오은경 지음

흐름출판 / 2024년 12월 / 252쪽 / 19,000원





살아있는 자의 무게



무너진 삶을 추스르며 시작된 애도


당신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죽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에게 남편이 위암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흔이 되도록 건강으론 걱정 한 번 안 끼치던 양반이 건강검진에서 위암 의심 소견을 받았다는 것이다.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가 나에게 큰 도움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병원에서 오래 일했으니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이라도 구할 생각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병원과 의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의 남편은 위암이 맞았다. 남편의 수술과 항암치료를 함께하다가 종종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어려움을 토로하며 우는 목소리에는 남편을 떠나보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선명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유기농 식재료로 극진히 매 끼니 건강식을 챙겼고, 남편의 상태 변화를 일지로 작성해서 진료 때마다 의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노력 덕분인지 1차 항암이 무사히 끝났고, CT 결과도 아주 좋게 나왔다. 부부는 한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기쁨을 주변과 나누었고, 일도 다시 시작하고 여행 계획을 세우며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안도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3개월 만에 추적 관찰 중 남편의 간에 무언가 보였다.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암이 다시 뿌리를 내렸다. 끝난 줄 알았던 항암이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의지를 다지며 치료와 돌봄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는 달랐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심한 무력감을 느꼈다. 힘겨운 치료를 강행해도 암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남편은 치료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남은 인생 하고 싶은 대로 막살겠다고 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래도…’였다. 힘에 겨운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예전처럼 힘이 나지 않아서 매 끼니를 건강식으로 준비하기도 어려웠고, 경제적 부담도 엄청났다. 처음처럼은 안 된다고 눈물을 쏟는 그녀를 위로할 방법이 없었다. 암환자를 돌보는 일은 피 말리는 날들의 연속이다. 예후가 좋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우여곡절 많은 두 번째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항암제를 몇 번씩 바꿔가며 치료를 계속하던 중 더 이상 항암제가 소용이 없게 되자 병원에서는 호스피스 케어를 권했다. 그때는 부부 모두 현실을 격렬히 부정했다.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최선을 다해서 남편을 간병했는데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환자와 보호자가 현실을 부정해도 암은 빠르게 자란다.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몇 달 만에 환자가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좀 빠지는가 싶더니 하반신이 안 움직이고 소변을 못 누었다. 당황한 가족들이 구급차를 타고 인근 병원의 응급실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암세포가 척추로 전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족들은 몹시 당황했지만 환자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는 그때부터 가족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식사도 잘했다. 즐겨 부르던 하모니카 연주를 녹음해 두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망설이지 않았고, 사이가 안 좋던 동생과도 화해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며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더니 정말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보다고 불안에 떨었다. 금방이라도 남편이 자신을 떠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정성을 다했건만 남편은 하반신 마비 2개월 만에 욕창이 생겼다. 점점 커지는 욕창을 보며 더는 집에서는 간병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구급차를 타고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는 길에 남편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이제 우리 집으로 못 돌아오겠지?”

의외로 그는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한 후 정서적으로 더 안정되었다. 하지만 24시간을 꼼짝없이 병원에 갇혀 지내게 된 그녀는 양가감정에 시달렸다. 호스피스 입원료의 본인부담률은 5퍼센트 남짓이었지만 부대 비용 등으로 지출되는 간병비가 만만찮아 부담이 컸다. 한창 코로나로 전 세계가 난리였던 시기라 외부 면회도 안 되었다. 사람을 만날 수 없고, 하반신이 마비된 남편의 뒤치다꺼리를 혼자 다 감수하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한계에 부딪쳤다. 좁디좁은 보호자 침대에서 그녀는 잠시도 깊고 편히 잠들 수 없었다.

“내심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나 싶어요. 너무 오래 사는 건 아닌가…. 이러다 힘들어서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어쩌나 싶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다가도 한편으로는 이렇게라도 오래 살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갈팡질팡해요. 그런 내가 역겹고 이해하기도 싫고.”환자를 간병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모르지 않아서 더 안쓰러웠다. 끝났으면 좋겠고 한편으로는 이렇게라도 이어지기를 바란다.“그동안 오늘은 못 넘길 것 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요. 처음엔 가슴이 철렁하면서 눈물부터 나더니, 이제는 사람이 죽는 게 이렇게 힘든 건가 싶어요.” 사이 좋은 부부였던 만큼 이 시간이 그녀에게 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통화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고 연락이 왔다. 늘 곁을 지키던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운명했단다. 어떤 환자는 가족에게 자신의 죽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 역시 그랬을까?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절대 보여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준비해도 준비되지 않는 마음:
그녀는 장례가 끝나고 완전히 넋이 나갔다. 적막강산 같은 집으로 돌아가니 남편의 부재가 서늘하고 따가운 감촉으로 피부에 닿았다. 집 안을 이리저리 서성여도 남편은 없었다. 몇 날 며칠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운 어머니를 걱정해 자식들이 번갈아 오갔지만 다들 먹고 살아야 하니 오랜 시간 같이 있어주지는 못했다. 자식들 생각해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는데, 딱히 어디랄 데 없이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남편을 간병하는 동안 그녀는 죽음 바로 옆에 서 있으면서도 죽음을 멀게만 느꼈다. 남편이 떠나고 한동안은 매일 남편의 무덤을 찾았다. 자식들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숨이 쉬어졌고 하루가 버텨졌다. 집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언덕을 올라야 하는 곳이었는데도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서는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울다가 넋두리를 했다.“나 혼자 어떻게 살지? 차라리 나도 죽을까?”



시린 겨울에도 그녀는 매일 남편의 무덤을 찾아갔다.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울면서 ‘슬픔의 꼬리가 이렇게 길 수 있나?’ 생각했다. 한바탕 울고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는 다른 유가족을 만나기도 했다. 켜켜이 쌓이는 슬픔을 소화하지도, 뱉어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우연히 마주쳐 자신들의 슬픔을 공유하고 슬픔을 나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이라는 정체성만으로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밀해졌다. 그녀는 이런 슬픔이 자신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 받았다. 그들 또한 그랬을 것이다.

추운 날 언덕을 오르내리고 차가운 바닥에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인지 얼마 안 가 그녀의 무릎이 망가졌다. 무릎이 퉁퉁 붓고 아파서 꼼짝을 못 했다. 동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도 ‘오랫동안 함께였던 사람은 죽어 차가운 땅속에 묻혀 있는데 나 혼자 살아보자고 치료를 받고 있네.’ 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루는 친구가 심드렁하게 “네 남편만 죽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는 “그래. 네 남편은 얼마나 오래 사나 보자!” 악을 썼다.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몸이 아팠다가도 살짝 괜찮아지면 남편 생각을 떨치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그러다가 다시 아프기를 반복했다. 집에만 있으면 남편 생각이 더 많이 나서 밖으로 나돈 것인데 그러다가 병이 나서 꼼짝없이 집에 있게 되었다.

친구나 자식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야속했다. 자식들도 아버지를 잃었으니 힘들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슬프긴 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면서도, 누군가가 위로를 건네면 “당신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하고 방어적으로 대응했다. 때로는 위로라고 건넨 말들에 오히려 상처를 받았다. 그마저도 ‘내가 남편 없다고 무시하는 거야?’ 싶어 자존심이 상했다.

어느 날 그녀는 사위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 조수석엔 딸이 타고 그녀는 뒷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문득 남편이 운전을 했다면 조수석엔 자신이 앉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조수석에 탈 일은 없겠구나 싶어 눈물을 쏟았다. 딸과 사위는 영문을 몰라 당황했지만 그 이유를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남편의 부재 앞에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무릎이 호전되면서 그녀는 다시 산소에 가기 시작했다. 자식들이 말렸지만 “너희가 썩어 문드러지는 내 마음을 아냐!”고 오히려 화를 냈다. 그렇게 산소를 다시 다니기 시작한 지 며칠, 통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못 자서인지 밥도 안 넘어갔다. 정신이 멍하고 감정도 사라졌다.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이 몸이 붕 떠서 매사 허둥거렸다. 이러다 말겠지 했던 증상이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지속되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서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수면제를 먹으면 푹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수면제를 먹어도 한 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점점 깊고 어두운 늪에 빠져드는 걸 느꼈다. 자꾸 남편이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러기로 했다.

그녀는 소주 한 병과 수면제를 챙겨 산소로 갔다. 여느 날처럼 눈물 섞인 넋두리를 하고, 이제 나도 당신 곁으로 갈래요 다짐하면서 혹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시간을 보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에 소주를 땄다. 수면제도 챙겼다. 남은 일은 입에 털어 넣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느닷없이 주위가 새까맣게 어두워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집어삼켜질 것만 같아 무서웠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죽겠다는 각오로 그곳까지 올라갔건만 칠흑 같은 어둠 앞에서 그녀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도망치듯 언덕을 내려왔다.

무릎이 아픈 줄도 몰랐단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어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무작정 걸었다.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걸었다. 산소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인적에 가까워지자 그제야 주위가 보였다. 조금 전 그녀를 잡아먹을 것 같던 어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사방이 어슴푸레했다. 이윽고 몸의 떨림이 멎었다.

그녀는 여전히 남편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2주기가 다가오면서 더디게나마 일상을 회복했다. 한동안 참석하지 못했던 모임에도 나가고, 음식을 만들어 이웃과 나누고, 친구들도 만났다. 불순물처럼 가라앉은 감정이 언제 또 떠오를까 조마조마했지만 그래도 그 감정에 잠식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일상을 살려 했다. 신기한 것은 그러다 보니 단단해지고 그렇게 살아진다는 것이다. 혼자서는 불가능할 줄 알았던 일들을 뒤늦게 하나씩 해냈다. 어떨 땐 그로 인한 깨달음을 또 얻었다. 그러니까 혼자서도 살아진다는 것을, 잃은 만큼 얻는 게 있다는 것을. 무너진 삶을 추스르면서 진정한 애도가 시작되었다.

그 어둠은 무엇이었을까? 내면의 어둠이었을까? 문득 그녀는 남편이 자기를 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무섭다고, 나 살자고 정신없이 산을 내려온 꼬락서니가 가소롭고 그동안의 넋두리가 우스워졌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매일 아픈 다리를 끌고 언덕을 오르고 산소 앞에 앉아 넋두리를 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그렇다고 시간이 약이라고 여기지는 않아요.”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며칠 호되게 몸살을 앓았다. 몸살이 어느 정도 회복되니 차차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이리저리로 어긋나고 아무렇게나 튀어 올랐던 생각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휘몰아친 소용돌이를 거치고 나자 감정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자문했다. ‘내가 정말 죽고 싶었을까?’ 그저 혼자 살아야 하는 현실이 힘겨웠을 뿐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목구멍에 걸린 가시 같던 날카로운 불편함이 가시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금씩 살아갈 방법을 찾아갔다. 집이 견디기 힘들면 산소 대신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혼자서도 가고 사람들과 함께도 갔다. 그렇게 혼자가 된 시간을 견뎠다.



더 나은 생을 위하여



품위 있는 죽음


연명의료에 관한 논의는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지만, 결국 누구나 맞닥뜨리는 주제다.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지에 대해 수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그 끝을 어떻게 맞을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제도가 바로 2018년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이다.

이 법의 정식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존엄을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 제정되었다. 연명의료는 더 이상의 치료 효과는 없지만 생명만 연장하는 의료행위를 말한다. 여기에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장착, 항암제 투여, 혈액투석 등이 포함된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가 생명 연장 장치를 유지할 것인지, 이를 중단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다만 이 법이 말하는 연명의료 중단은 안락사나 존엄사와는 다르다. 단순히 ‘필요 없는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지, 의도적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연명의료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당 의사와 또 다른 전문의가 함께 판단해야 한다. 임종이 임박했는지, 회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인지가 주요 기준이 되기 때문에 법의 취지가 오해되지 않도록 신중한 절차를 요구한다.

연명의료, 존엄사 논란을 일으킨 사건들:
연명의료결정법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만성 알코올 중독이던 58세 남성이 급성 경막하출혈과 급성 경막외출혈로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많은 양의 수혈을 받으며 밤새 수술했고,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환자의 보호자(부인)는 퇴원을 요구했다.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남편이 식물상태가 되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담당 신경외과 의사는 애써 힘들게 수술했는데 뒤늦게 나타난 보호자가 치료도 안 받고 퇴원하겠다고 하니 터무니없는 일이라며 거절했고, 심지어는 “돈이 걱정이라면 환자가 다 나은 뒤에 몰래 도망가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환자의 보호자는 의료비를 지급할 수 없으니 퇴원시켜 달라는 요구를 멈추지 않았다. 환자는 치명적 합병증의 징후를 보였고 회복 가능성도 현저히 낮았다. 의사는 고민 끝에 수술한 지 48시간도 안 된 환자의 퇴원을 허락했다.

수동 인공호흡기(앰부)를 달고 퇴원한 환자는 집에 도착해 의료진이 수동 인공호흡기를 떼자 곧 사망에 이르렀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환자의 동생이 고소를 진행해 경찰이 부인을 ‘살인 혐의’로 수사해 송치했다. 검찰은 담당 의사마저 살인 공범으로 보고 기소했는데, 2004년 대법원에서도 담당 의사에게 살인방조죄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1심 판결 당시에 이미 의료계에서는 인공호흡기를 떼면 살인이라는 인식이 파다했다. 특히나 2004년 판결 이후로는 ‘인공호흡기 제거=살인’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혔다. 그 이후에는 회복 가능성이 없고 사망이 임박한 환자여도 연명의료를 중지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생기면서, 집착적이고 방어적인 진료라는 또 다른 사회문제를 낳았다.

당시 법원은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라도 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할 수 없다고 판결했는데, 이후 각 병원 중환자실이 퇴원할 수 없는 환자들로 가득 찼고 의료계와 가족 모두에게 큰 논란을 남겼다. 특히 이 판결로 가족들의 의료 의존 현상이 높아지고, 병원들은 방어적 진료에 나서는 경향이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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