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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가지 식물로 읽는 세계사

사이먼 반즈 지음 | 현대지성


100가지 식물로 읽는 세계사

사이먼 반즈 지음

현대지성 / 2024년 12월 / 624쪽 / 33,000원



밀 _ 인류가 먹기 위해 바꾼 대지의 풍경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_「주기도문」



밀속(Triticum)의 풀들이 세계를 정복했다. 선진국 농촌 지역의 상공을 비행하거나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운전만 해봐도 인간이 밀을 얻기 위해 지구를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인간은 오랫동안 밀을 갈아 먹으면서 영양을 얻어왔다. 밀을 재배하기 전부터 그랬다. 대부분 나라에서 밀은 그저 중요한 음식이 아니라 음식 그 자체다. 빵만이 아니다. 파스타와 국수, 세몰리나, 쿠스쿠스, 비스킷, 뮤즐리, 팬케이크, 피자, 케이크, 아침에 먹는 시리얼 모두 밀을 사용해서 만든다.

씨앗은 인간의 식생활에서 언제나 빼놓을 수 없는 일부였다. 그러나 껍질을 깨서 먹으려면 얼마 되지 않는 양을 먹는데도 상당히 힘이 든다. 그래서 씨앗의 껍질을 한꺼번에 벗겨두는 편이 훨씬 낫다. 시간과 에너지를 더 경제적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인류의 두개골에 있는 근육 조직은 우리 조상들의 그것과 다르다. 우리에게는 이제 강력한 근육을 갖춘 단단한 턱이 없다. 근육이 더 붙을 수 있는 시상능도 없다. 시상능과 같은 근육 조직은 음식을 소화하기 쉬운 상태로 만들기 위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와 조금 더 가까운 조상들은 더 효율적으로 영양을 얻는 방법을 발견했다. 음식을 입에 넣기 전에 먹기 쉬운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씨앗의 껍질을 벗기고, 촉촉하고 부드럽게 만들었다. 고대 주거지의 바위들에서 3만여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녹말가루를 발견했다. 더 쉽게 먹으려고 씨앗을 으깨서 만든 녹말가루였다. 시간이 지나자 인류는 그 가루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녹말가루에 물을 넣어 죽을 만들거나, 물을 조금 적게 넣고 반죽해서 구웠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문장은 아마도 인류가 드린 첫 번째 기도였을 것이다. 인류의 첫 기도는 응답받았다.

1만 2,000여 년 전에 인류의 역사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여러 다른 변화가 잇따르는 변화였다. 인간은 농업을 발명해 농부가 되었고, 일정한 장소에 정착했으며,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평생 땀 흘려 일한 대가로 안전해졌고, 기대수명이 훨씬 늘어났다. 농업은 세계 곳곳에서 거의 동시에 발명되었다. 그중 유럽과 서아시아의 농업은 모두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나일강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과 관련 있는 땅이다. 지도로 보면 초승달보다는 부메랑 모양 같다. 기후가 좋고, 강가의 땅이 비옥하고, 물을 얻기 쉬워서 농사를 짓기 좋은 환경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먹을거리를 찾아다니지 않고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동물을 길들여 가축을 기르고, 식물을 재배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식물이 밀속의 풀이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밀이다.

어느 단계가 되자 인간은 발효한 빵을 만들기 위해 곡물 가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빵이 언제 발명되었는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부엌에서 빵을 만들 수 있다. 밀가루에 물을 섞어 내버려두면 공기 중의 야생 효모 포자가 들어가 발효하기 시작한다. 요구르트를 넣으면 젖산균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 과정을 앞당길 수 있다. 발효하도록 두었다가 밀가루를 더 넣고 힘 있게 저어서 반죽을 만든다. 반죽이 부풀어 오르도록 몇 시간을 두었다가 구우면 시큼한 빵 한 덩이가 생긴다. 고대에도 지금의 우리처럼 빵을 만들었다. 발효된 반죽 일부를 보관하면서 균이 밀가루를 먹으며 살아남게 놔두면 언제든 빵을 만들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밀은 전분이라는 형태로 우리가 에너지를 얻기 위해 활용하는 탄수화물을 공급한다. 글루텐이라는 형태로 우리가 근육을 만들기 위해 활용하는 적당한 양의 단백질도 공급한다. 지금 우리가 먹는 밀의 품종들은 이전의 밀보다 글루텐이 더 풍부한데, 그래서 밀을 먹으면 문제가 생기는 사람들도 있다. 글루텐은 반죽을 잘 뭉치게 하는데, 반죽을 치대면 더 잘 뭉친다. 빵은 식이 섬유도 공급한다. 밀의 배젖이 남아 있는 통밀가루에는 섬유질이 풍부하다. 인간은 섬유질을 소화하지 못하지만, 섬유질 덕분에 대변을 배설하는 양이 늘어나면서 음식을 더 잘 소화하게 된다.

쌀을 주식으로 삼는 아시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지역의 문화에서 빵은 아주 중요하다. 기독교 의식에서도 빵은 핵심 역할을 한다. 성찬식에서는 빵과 포도주로 상징적인 식사를 한다. 가톨릭 신자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다.

그러나 농업은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땅을 일구고, 들판의 잡초를 뽑고, 해충에게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고, 농작물을 수확하기까지 몹시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농업은 언제나 불안정한 날씨에 취약했다. 식물을 재배하는 일은 언제나 보상과 함께 위험이 뒤따른다. 밀을 심으면 주인은 원하는 만큼 씨앗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작물만 심으면 땅의 회복력이 떨어져서 취약해진다. 농업이 발달하면서 점점 더 몇몇 작물만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방식이 늘어났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곤충과 곰팡이, 균 모두가 이점을 누린다. 맛이 없거나 못 먹는 식물 종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이 식물에서 저 식물로 쉽게 옮겨 다니면서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농업에서는 늘 자연재해에 맞서야 한다.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극복해야만 한다.

우선 가축의 똥을 비료로 활용해 농토의 질을 높일 수 있다. 그리고 농작물의 종류를 바꿔가며 심으면 생산성이 늘어난다. 밀과 콩을 번갈아 심을 수도 있다. 사료로 쓸 작물로 클로버와 알팔파를 재배할 수도 있다. 그러면 토양에 질소가 풍부해지고, 다음 해에 심는 작물에 도움이 된다. 해마다 농작물을 바꿔 심는 윤작은 적어도 6,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가끔은 농사를 짓지 않고 땅을 묵히는 것도 도움이 된다. 성경의 「레위기」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간 다음, 그 땅이 주께 안식년을 지키게 하라”라고 가르친다.

18세기에 농기구가 연달아 발명되면서 농사짓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지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씨를 뿌리는 기계인 파종기는 사실 고대 바빌로니아와 중국 모두에서 발명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훨씬 나중까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파종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손으로 씨를 뿌렸다. 성경의 씨 뿌리는 사람 비유는 씨 뿌리는 일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는 일임을 잘 보여준다. 땅에 제대로 심기지 않아서 농부가 잃어버린 씨앗을 곧, 하나님을 잃어버린 영혼에 빗댄다. 반면 파종기는 똑같은 간격과 똑같은 깊이로 씨를 뿌리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가지런한 밭을 만든다. 말이 끄는 파종기를 발명한 사람은 18세기의 천재 제스로 툴이다.

농업과 제빵이 점점 더 산업화하고, 세계가 점점 더 서구화하면서 밀은 계속해서 전 세계를 정복해나갔다. 쌀을 재배하는 지역까지 모든 나라에 빵이 파고들었고, 이제 토스트 샌드위치가 인도에서도 인기 있는 간식이 되었다. 콤바인 수확기가 발명되면서 농사 과정은 더욱 쉬워졌다. 수확부터 타작, 탈곡까지 중요한 세 가지 작업을 모두 해낼 수 있는 기계다. 미국에서는 1835년에 처음으로 말이 끄는 콤바인 수확기를 사용했다. 요즘은 디젤 엔진을 단 콤바인 수확기들이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누비며 줄지어 작업한다. 수확기는 옆에서 따라다니는 트랙터 뒤의 트레일러에 탈곡한 밀을 쏟아붓는다. 또한 농작물이 곤충이나 곰팡이, 잡초 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화학적 수단으로 보호한다. 땅에는 화학비료를 뿌리고, 일찌감치 제초제를 사용해 잡초를 죽인다.

농업이 발달하면서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아 자손을 낳는다. 세계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점점 더 많은 음식이 필요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유전자 변형 품종이 식량 문제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일어난 생태학적 문제가 종종 그러하듯, 기술이 의도치 않은 영향을 끼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빵은 실제 삶뿐 아니라 삶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먹을 빵이 없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호소를 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Qu’ils mangent de la brioche.” 보통 ‘그들에게 케이크를 먹게 하라’라고 번역되어온 말이다. 사실 브리오슈(brioche)는 케이크가 아니다. 달걀과 버터가 듬뿍 들어간 반죽으로 만드는 빵으로, 매일 먹기는 힘든 호사스러운 빵이다.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1917년에 농부들에게 ‘평화와 땅 그리고 빵’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누구든 이보다 더 원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빵은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진부한 표현이다. 젊은 시절, 나와 친구들은 돈을 빵(bread)이라고 불렀다. 돈은 밀가루 반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밀은 어디에나 있다. 밀의 전 세계 무역량은 다른 모든 작물을 합한 양보다 많다. 2021년에는 전 세계에서 7억 7,200만 톤가량의 밀이 생산되었다. 밀 생산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밀에는 단백질이 14퍼센트 정도 들어 있어 대부분의 식사에서 식물성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이다. 놀랍게도 밀을 재배하려면 다른 어떤 작물보다 많은 땅이 필요하다. 지구의 땅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자생하던 식물 품종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모조리 바뀌고 관리되었다.

해바라기 _ 고흐가 열정을 바쳐 그린 꽃


나는 해바라기를 바라보며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_ 빈센트 반 고흐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기 훨씬 전부터 남아메리카에서는 해바라기를 키웠다. 먹기 위해 재배했지만, 눈에 확 띄는 모습이 매력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분명 유럽 사람들은 매력적인 모습에 반해 바다를 건너 해바라기를 가져갔을 것이다. 해바라기는 유럽에 정착하고 나서도 마찬가지로 유용하고 소박한 농작물이었다. 그러나 해바라기는 이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한 예술가에 대한 전설, 천재에 대한 열광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해바라기의 꽃은 두상화(꽃대 끝에 많은 꽃이 뭉쳐 머리 모양을 이룬 꽃)로, 해바라기는 각각의 머리가 수많은 개별적인 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꽃의 바깥쪽 부분에 난 것들 하나하나가 사실 꽃이다. 이 바깥쪽의 꽃들은 번식을 하지 않는다. 그 꽃들은 꽃가루를 실어나르는 매개자인 곤충들에게 이리로 오라고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한다. 곤충들은 중앙 원반에 나선형으로 정교하게 배열된 수많은 작은 꽃의 꽃가루를 실어 나른다. 해바라기는 키가 크기로 유명하다. 평균 키는 3미터인데, 9미터까지 자란 해바라기도 있다.

해바라기는 씨앗이 들어 있는 열매를 얻기 위해 재배되었다. 우리가 흔히 해바라기 씨라고 부르는 부분은 엄밀히 따지면 열매다. 실제로는 겉껍질을 이로 벗겨내고 열매 안의 씨앗을 먹는다. 인류는 해바라기를 5,000여 년 동안 재배해왔다. 씨앗은 으깨서 빵을 만들 때 넣거나 콩과 호박, 옥수수와 함께 섞어 죽을 만들기도 한다.

유럽인은 해바라기가 예뻐서 유럽에 들여왔고, 특히 18세기에는 큰 인기를 끌었다. 러시아인은 씨앗을 으깨면 유용한 기름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기름 대부분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는데, 해바라기유를 발견하면서 작은 즐거움들을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바라기는 햇볕이 많이 드는 곳에서 잘 자란다. 해바라기유는 요리할 때 사용하고, 씨앗을 으깨고 남은 부스러기는 가축에게 먹였다. 해바라기는 인류에게 점점 더 유용한 농작물이 되었다. 해바라기는 언제나 인간에게 가깝고 유용한 존재였지만, 눈에 확 띄는 모습 때문에 용도를 넘어서는 의미가 생겼다. 사람들은 해바라기가 해를 뒤쫓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저녁에 서쪽으로 질 때까지 하루 종일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는 것이었다.

해바라기는 1870년에서 1900년 사이에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면서 벌어진 유미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상징이었다. 유미주의 운동은 모든 인간을 위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여기는 산업화 제일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유미주의 운동의 가치관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생각에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흔히 집이 기능적일 뿐 아니라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 또한 유미주의적 사고다. 유미주의 운동은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 예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 그림에서는 국화가 중요한 소재인데, 해바라기는 국화와 상당히 닮았다. 따라서 해바라기는 유미주의 운동에서 인기 있는 꽃이다,

1887년 파리에서 혁신적인 그림들을 보여주는 작은 전시회가 열렸다. 그중에는 땅에 누운 해바라기를 아주 공들여 연구하면서 그린 작품이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었다. 또 다른 화가 폴 고갱은 전시회에서 본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 자신의 그림 한 점과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두 점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는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들이 “완전히 빈센트 자신”이라고 말했다. 이후 수많은 사람이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반 고흐는 예술과 아름다움, 우정을 나누며 서로 지지하는 인류애를 기반으로 한 예술가 공동체를 꾸리겠다는 꿈이 있었다. 고갱은 반 고흐와 함께 지내기로 했고, 고흐는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집을 빌렸다. 그는 고갱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해바라기를 계속 그렸다. 이번에는 꽃병에 꽂힌 해바라기였다. 커피와 술을 진탕 마시고 물감을 물 쓰듯이 쓰면서 무시무시한 창조성을 폭발시켜 엿새 만에 해바라기 그림을 네 점이나 그려냈다.

반 고흐가 맹목적이고 본능적인 에너지 덩어리를 폭발시킨 특이한 천재였다는 전설을 너무 믿지는 말자. 그는 의도적으로 네덜란드의 꽃 그림 전통을 따랐지만, 대신 최신 기술을 동원해 새로운 방식으로 그렸다. 반 고흐는 노란색을 사랑했다. 노란색은 그에게 기쁨을 상징했다. 새롭게 만들어낸 황홀한 노란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기쁨을 느꼈다. 가장 유명한 해바라기 그림들에서는 거의 노란색만 사용했다.

그는 흔히 볼 수 있는 꽃이어서 해바라기를 선택했다. 귀하게 온실에서 자라는 꽃이 아니라 수많은 드넓은 들판에서 자라는 꽃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일상적인 삶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고흐 예술의 바탕이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해바라기는 공짜는 아니어도 싸게 살 수 있다. 길가에 떨어져 있기도 하고, 들판의 해바라기를 쉽게 빌릴 수도 있다. 고흐는 “정상성은 포장된 길이다. 걷기에는 편하지만 꽃이 자라지 않는다”라고 쓴 적이 있다.

그는 아를에서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마르세유 사람들이 부야베스(마르세유의 전통 음식)를 먹듯이 그림을 그리고 있어. 내가 열정적으로 커다란 해바라기를 그린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 않을 거야”라고 썼다. 그는 한창때가 지나 꽃잎(꽃차례)이 떨어지며 시들고 있는 해바라기를 많이 그렸다. 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들어가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고갱이 아를에 왔고, 9주 동안의 폭풍우 같은 시간이 지난 후 둘만의 예술가 공동체는 깨져버렸다. 고갱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고흐의 모습을 그리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그림 속 고흐는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었다. 글쎄, 해바라기가 아니면 달리 무엇을 그렸겠는가. 심한 말다툼과 자해, 이후 고흐의 뭉클한 명작들과 개인적인 절망, 끔찍한 최후까지. 그의 남은 이야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몇 년만 더 버텼다면, 오늘날 그의 작품을 향한 엄청난 찬사와 사랑을 그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고흐의 해바라기들은 우리에게 뭉클한 감동을 준다. 매년 500만 명 정도가 그의 다양한 해바라기 그림을 감상한다. 고흐는 해바라기 그림을 파리에서 다섯 점, 아를에서 일곱 점 그렸다. 그중 한 점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일본을 폭격할 때 파괴되었다. 1987년 일본 보험회사 회장 야스오 고토는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한 점을 2,500만 파운드에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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