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충무공
김오수 지음 | 동아시아
공직자 충무공
김오수 지음
동아시아 / 2024년 11월 / 404쪽 / 26,000원
충무공의 공직생활
충무공의 공직생활 개요1576년 과거 무과시험에 합격한 충무공은 1598년까지 22년 동안 무관으로 재직하며 무려 22회 인사발령을 받았다. 그 22회에는 파직 3회, 백의종군 2회, 부친상을 치르기 위한 사직 1회와 임지에 가지 않은 서류상 인사 2회가 포함되어 있다. 충무공은 22년 동안 직급이 없는 백의종군에서 종1품 숭정대부까지 18개 등급 관직 중 17개 등급을 오르내리며 승진과 좌천, 파직, 재임용을 되풀이했다. 선조와 간신들의 농간으로 압송되어 투옥되고 의기소침해 낙향한 적도 있었다. 정말 온갖 수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쉽지 않은 공직생활을 이어갔고,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왜군에 승리하고 명예롭게 전사했다.
충무공은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한양보다 최전방인 함경도와 전라도, 경상도에서 주로 근무했다. 함경도에서 동구비보 권관, 조산보 만호 등으로 약 4년, 전라도에서 발포만호, 전라감사 군관, 정읍현감, 전라좌수사 등으로 약 11년, 경상도에서 도원수 권율 휘하 백의종군,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사 등으로 약 4년을 보냈다. 한양에서 훈련원 봉사 등으로 보낸 2년과 충청도에서 충청병사 군관으로 재직한 9개월 등 약 3년을 빼면 16년 동안 여진족이 준동하는 함경도, 왜구의 침입이 빈번한 전라도와 경상도 등 최전방에서 보낸 것이다. 특히 공직생활의 절반이 넘는 11년 동안 전라도에서 보냈다.
필자도 서울, 부산, 인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에서 32년 동안 공직생활을 했다. 충무공보다 10년 더 길다. 그런데 충무공처럼 파직되거나 백의종군 등 징계처분을 받은 적 없이 사직하고 공직을 마쳤다. 한편 이 기간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럼에도 파란만장하고 힘들었으며, 많은 분의 도움으로 대과가 없이 공직생활을 마쳤다고 생각한다.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충무공의 공직생활 구분충무공의 22년 공직생활을 간략히 살펴보면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겠다. 1차 시기는 충무공이 31세 때인 1576년 12월부터 36세 때인 1582년 1월까지 약 5년이다. 충무공은 1576년 12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으로 임명되어 2년 2개월 동안 근무했다. 1579년 2월 한성 훈련원 봉사(종8품)가 되어 8개월 동안 근무했고 1579년 10월 충청도 해미 충청병사 군관으로 9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리고 1580년 7월 전라좌수영 발포만호(종4품)로 승진했다. 초고속 승진이었는데, 무관이 되어 4년 만에 10등급을 승진했다. 하지만 발포만호로 18개월이 지난 1582년 1월 파직되었다.
2차 시기는 충무공이 37세 때인 1582년 5월부터 42세 때인 1588년 6월까지 6년이다. 충무공은 발포만호 파직 후 4개월이 지난 1582년 5월 훈련원 봉사(종8품)로 재임용되어 1년 2개월, 1583년 7월 함경도병사 군관(종8품)으로 발령받아 4개월 동안 근무했다. 이후 1583년 11월 함경도 건원보 참군(정7품)으로 승진했지만 부친상을 당해 사직하고 3년상을 치렀다. 이후 부친상을 마친 1586년 1월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 주부(종6품)에 재임용되었다가 함경도 경흥 조산보 만호(종4품, 이후 녹둔도 둔전관 겸직)로 승진해 1년 7개월 동안 근무했다. 하지만 1587년 8월 녹둔도를 침입한 여진족에게 패전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5년 만에 다시 파직된 것이다. 그리고 1588년 1월부터 백의종군 명령을 받고 5개월 동안 백의종군한 후 1588년 6월 아산 고향집으로 낙향했다.
3차 시기는 충무공이 43세 때인 1589년 2월부터 51세 때인 1597년 2월까지 약 8년이다. 아산 고향집에서 8개월을 보낸 충무공은 1589년 2월 전라감사의 군관 겸 조방장으로 재임용되어 약 10개월 동안 근무했고, 1589년 12월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 태인현감 겸직)으로 발령받아 1년 3개월 동안 근무했다. 정읍현감은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처럼 사실상 은퇴를 앞둔 발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이 충무공을 가만두지 않았다. 1591년 2월 왜적의 침입이 가시화되자 조정은 뛰어난 장수들을 선발했는데, 충무공도 포함되었다. 충무공은 진도군수(종4품)로 승진 발령받고 임지로 부임하기 전 가리포 첨절제사(종3품)로 승진 발령받았다. 가리포 임지로 가기 전 최종적으로 전라좌수사(정3품)로 승진 발령받았다. 임진왜란을 1년 앞두고 무려 7등급을 승진해 수군 지휘관으로 배치된 것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터지자 충무공은 왜군에 연전연승하며 공을 세웠다. 1593년 8월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종2품)로 승진했고 명과 왜의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4년 동안 남해의 제해권을 지켰다. 하지만 1597년 2월 조선을 재침하는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을 공격하라는 어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충무공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하지만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 명령을 받고 석방되어 도원수 권율 밑에서 1597년 8월 3일까지 4개월 동안 복무했다.
4차 시기는 충무공이 52세인 1597년 8월 3일부터 53세인 1598년 11월 19일 전사할 때까지 약 1년 3개월이다. 충무공은 1597년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한 원균의 후임으로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고, 궤멸된 수군을 겨우 재정비해 1597년 9월 16일 명량에서 열 배가 넘는 왜군 함대를 물리치고 수군 병력을 보전했다. 이후 완도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해 왜군과의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고 1598년 11월 19일 진린 제독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과 연합해 노량해전에서 대승했지만 전투 도중 전사했다. 이제 충무공 공직 생활 중 몇몇 시기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공직 입문과 1차 파직
동구비보 권관 초임 발령1576년 12월 임시직이던 권지훈련원 봉사 충무공에게 처음 부여된 보직은 함경도 동구비보(함경도 삼수 지역) 권관(종9품)이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동구비보는 조선의 국경인 압록강 상류 함경남도 삼수와 갑산 근처의 작은 성이었고 여진족이 수시로 출몰하는 최전방 부대였다. 권관은 무관 말단 벼슬이었으니 휴전선을 지키는 강원도 최전방 부대의 소위로 발령받은 셈이었다. 충무공은 그곳에서 2년 동안 충실히 근무했던 것 같다. 당시 함경도관찰사 이후백은 매우 엄격해 전방을 순시하면 무관 대부분에게 곤장을 내리고 질책했는데, 충무공은 오히려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1994년 3월 필자는 인천지검 초임 검사가 되었다. 우연히 충무공이 처음 공직을 시작한 것과 같은 31세였다. 인천지검에서 2년을 보냈는데 정말 힘들었다. 검사 실무, 검사실 운영 등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며 진짜 검사가 되었다. 초임 검사 2년은 이후 27년이 넘는 공직생활의 바탕이 되었다. 충무공도 비슷했을 것이다. 군관 업무를 수행하면서 춥고 열악한 최전방에서 혼자 생활하기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충무공은 무관으로서 기본을 배우고 소임을 수행하며 2년을 보냈다. 지휘관과 상사로부터 끊임없는 질책과 조언을 받고 정군(正軍, 현역)으로 복무하는 병사와 백성을 지휘하며 그들과 돈독한 신뢰관계를 쌓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지면 생사를 걸고 함께 싸우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예측컨대, 초임 권관 2년은 이후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20년 공직생활을 지탱하는 든든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훈련원 봉사로 승진, 그리고 충청병사 군관으로 발령1579년 2월 충무공은 종8품으로 승진해 한양에 있는 훈련원 봉사 발령을 받았다. 아마 충무공은 훈련원의 병서, 무예 서적 관리와 정리 등의 업무도 훌륭히 수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충무공이 상급자이던 병조좌랑(정6품) 서익(徐益)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익이 지인을 참군(정7품)으로 승진시켜 달라고 충무공에게 청탁했는데, 인사기준에 맞지 않아 충무공은 단칼에 거절했다. 서익의 인사청탁을 단칼에 거절한 것을 보면 충무공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한양에서 훈련원 봉사로 8개월 동안 근무한 1579년 10월, 충무공은 충청병사 군관으로 발령이 났다. 충청병사 군관으로의 발령은 충무공이 인사권자인 상관들의 청탁과 제안을 거절했으니 아마도 좌천이었을 것이다. 충청병사 군관으로 부임한 충무공은 조금 억울했겠지만 근신하며 충실히 복무했던 것 같다. 효종 때의 문신 윤휴는 『백호전서』에 남긴 기록에서 충무공은 상관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적었다.
초급 지휘관 발포만호로의 승진1580년 7월, 9개월 동안 충청병영에서 근무한 충무공은 전라좌수영 발포만호(종4품)로 승진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발포는 전라도 고흥반도 남쪽 바다에 위치해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무려 8등급이나 승진했으니 대단한 것이었다. 충청병사 군관으로 있으면서 인품과 실력이 검증된 덕분이었을 것이다. 충무공은 10년이 지난 1591년 2월 임진왜란을 1년 앞두고 발포진을 관장하는 전라좌수사가 되었는데 발포만호로 있으면서 전라좌수영 관내를 미리 파악해 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발포만호로 1년 6개월 동안 재직하면서 충무공은 초급 지휘관으로서 적잖은 군사와 백성을 지휘하고 전선과 창검, 화포, 활과 화살, 화약, 군량 등 군기(軍器)를 관리하며 활용하는 경험을 쌓았다. 지형과 바다, 해류를 파악하는 한편, 장병들을 훈련시키고 작전에 투입해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지휘하는 방법과 요령을 터득했다. 군량 확보와 관리, 화약과 화살, 각종 화포와 포탄, 창칼을 마련해 유지·관리하는 방법과 실무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정밀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상관과의 불화 그리고 1차 파직발포만호로 있으면서 충무공이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성박은 발포진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고 했다. 충무공은 “오동나무는 관의 물품이고 여러 해 동안 기른 것이니 하루아침에 벨 수 없다”라며 거부했다. 충무공의 강직함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성박은 화가 났다. 그는 전라좌수사를 떠나며 후임 전라좌수사 이용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한편 충무공은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겼음에도 발포만호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결국 파직당하고 말았다. 1582년 1월 충무공은 한양에서 온 군기 경차관(오늘날 감사원 감사관)으로부터 군기 검열을 받게 되었는데, 하필 군기 경차관으로 내려온 사람은 서익이었다. 발포진 검열을 마친 서익은 충무공이 군기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충무공은 대응할 방법이 없었고 결국 발포만호에서 파직당했다. 충무공의 1차 파직이다. 서익은 2년 전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가 치졸하게 복수했던 것이다. 한편 서익의 장계로 파직당한 충무공은 아산 고향집으로 낙향해 가족과 함께 모처럼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했을 것이다. 공직에 임관된 지 겨우 5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복직과 2차 파직
훈련원 봉사 재임명 / 여진족 니탕개의 난 / 함경도 건원보 권관 발령, 그리고 사직충무공의 휴식과 재충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4개월 후인 1582년 5월 충무공은 종전 발포만호보다 8등급 아래인 종8품 훈련원 봉사로 임용되었다. 장수로 있던 충무공으로서는 굴욕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충무공은 충실히 소임을 다하며 훈련원 봉사 업무를 수행했다. 한편 1583년 1월과 5월과 7월에 두만강 주변 여진족 추장 니탕개, 우을기내 등은 여진족 1~2만여 명과 함께 경원성, 방원보 등을 공격해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는데, 이것이 여진족 ‘니탕개의 난’이다. 이 난은 훈련원 봉사로 1년 2개월 동안 여유 있게 지내던 충무공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1583년 7월 조정은 무관 경험이 풍부한 이용을 함경남병사(함경도 남병마절도사)로 임명해 여진족 침입에 대비시켰는데, 이용은 함께 갈 군관으로 충무공을 지명했다. 이용은 2년 전 전라좌수사로 있으면서 발포만호였던 충무공과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장계와 인사평가 문제로 충무공과 악연이 있었지만 충무공의 실력과 역량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583년 7월 충무공은 함경남병영으로 부임해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병방 군관(종8품)으로 남병사 이용을 보좌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충무공은 함경도 경흥군 두만강변 건원보의 권관(종8품)으로 발령받았다. 충무공은 건원보에서 유인작전을 펴 다시 공격해 온 여진족 추장 우을기내를 생포했다. 하지만 함경북병사 김우서가 충무공이 보고하지 않고 작전을 벌였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리는 바람에 충무공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충무공은 이미 장군으로 불리는 발포만호를 역임해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공직사회에서는 보고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상관은 부하 직원이 보고하지 않고 일하는 것에 무척 예민하다. 공무원은 3보가 중요한데 첫째, 보고, 둘째, 보안, 셋째, 보도(홍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김우서는 충무공이 실력을 발휘해 빛나는 공적을 세운 것보다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작전을 편 것에 더 예민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충무공은 얼마 후 건원보 참군(정7품)으로 승진했다. 충무공이 건원보에서 여진족과 싸우던 1583년 11월 15일 부친 이정이 세상을 떠났다. 충무공은 2개월 후인 1584년 1월에야 부친상 소식을 들었다. 충무공은 부친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아산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조산보 만호 / 2차 파직과 백의종군1586년 1월 3년상을 치른 충무공은 1등급 승진해 사복시 주부(종6품)에 다시 임용되었다. 이후 충무공은 곧바로 함경도 두만강 주변 조산보 만호(종4품)로 발령받았다. 4등급 승진해 다시 장군으로 불리는 만호가 된 것이다. 상관에게 불손할 정도로 강직하고 함께 근무하는 데 편하지는 않지만, 여진족 추장 우을기내를 생포할 정도로 충무공의 실력만큼은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1587년 가을 충무공은 두만강 하류에 있는 섬으로 오늘날 러시아 영토인 녹둔도 둔전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녹둔도에서 농사짓는 백성을 보호하는 임무를 병행해야 해 군사를 증원할 필요가 있었다. 충무공은 직속 상관인 함경북병사 이일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했지만 이일은 충무공의 건의를 묵살했다.
1587년 가을 충무공은 녹둔도에 목책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동원해 벼를 수확했다. 조산보 군사 10여 명이 경계 근무를 했고 다른 군사들은 조산보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수백 명이 넘는 여진족이 말을 타고 녹둔도로 몰려와 기습공격을 했다. 녹둔도에 있던 군사 10여 명이 여진족에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여진족은 녹둔도를 지키던 우리 군사를 모두 죽이고 벼를 수확하던 백성 160여 명과 말 15필을 끌고 갔다.
그 소식을 보고받은 충무공은 경흥부사 이경록과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추격해 3명을 죽이고 60여 명의 백성을 구출해 왔다. 하지만 우리 피해가 커 패전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함경북병사 이일은 충무공과 경흥부사 이경록이 녹둔도 전투에서 패했다는 장계를 올렸고 충무공은 파직되어 투옥되었다. 그렇게 이일과의 악연이 시작되었고 충무공은 죽음 직전까지 몰렸다. 하지만 선조는 충무공과 이경록이 녹둔도를 지키고 여진족을 추격해 죽이고 우리 백성을 구출해온 사실을 참작해 곤장을 치는 장형에 처하고 백의종군하게 했다. 이것이 충무공의 첫 번째 백의종군이다.
1588년 1월 함경북병사 이일은 당시 백의종군 중이던 충무공과 이경록을 포함한 2,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여진족을 공격했다. 녹둔도를 공격했던 여진족 시전 부락 200여 호를 불태우고 여진족 380명을 죽이고 말과 소를 빼앗아 왔다. 아군 피해는 전무한 대승이었다. 이후 이 전투에 참가한 충무공과 이경록은 사면되었다. 1588년 6월 충무공은 아산 고향집으로 낙향했고, 이후 8개월 동안 가족이 있는 아산에서 변방생활과 전투로 고갈된 심신을 치유하며 재충전하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