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일의 믿음 수업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한동일의 믿음 수업
한동일 지음
흐름출판 / 2024년 10월 / 304쪽 / 22,000원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보통 서아시아 일대를 일컬어 ‘중동’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도 여기에 포함이 됩니다. 사실 ‘중동’이라는 말에는 유럽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유럽의 관점에서 본 극동과 근동의 중간 지역을 의미하는 말이니까요. 저는 이스라엘에서 지내는 동안 이 지역의 문화를 보며 우리가 지극히 서구적인 관점에서 이슬람을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아랍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더 절실해졌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문화를 아는 아주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스라엘에서는 인종에 따라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스라엘은 유대인과 아랍인, 그리고 다양한 기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 국가입니다. 이 중에서 ‘유대인’은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에 속하며 전체 인구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히브리 민족에서 기원한 민족적, 문화적 유산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유대교를 전통 신앙으로 가지고 있지요.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던 사람과 동등한 유대인으로서의 지위를 갖기 때문에 유대인 사회의 구성원은 다채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류 유대교에서는 개종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권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결혼하면 대부분 신분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는데, 어머니 쪽이 유대인이면 그 자녀는 자동적으로 유대인 신분을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아랍인은 유대인 다음으로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들은 2등 시민도 아닌 3등 시민입니다. 아랍인은 다시 아랍계 그리스도인, 아랍계 팔레스타인인, 아랍계 가자 팔레스타인인으로 나뉩니다.
이스라엘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1970년대와 2020년대를 오가는 것 같았습니다. 유대인 지역은 부유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너무 낙후했기 때문이었지요. 제가 머물던 곳만 해도 하루에 전기가 몇 번이나 나갔는지 모릅니다.
기도 소리가 없는 평화: 유대교의 새해는 9월 말 내지 10월 초순입니다. 왜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가 하면 유대인의 역법은 전 세계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그레고리력과 달의 변화에 따른 음력을 혼합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기본적으로 음력을 사용하지만, 양력에 의해 조정되는 독특한 달력을 쓰면서 명절과 계절을 조화시킵니다.
이슬람의 달력도 음력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새해는 매해 달라지는데, 이슬람은 대체로 8월에 새해를 맞습니다. 2020년 이슬람의 새해는 8월 19일이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저는 2020년의 첫날을 예루살렘에서 맞았지만 아무런 설렘도 기대도 행사도 없는 그런 새해를 보냈지요. 그렇게 무덤덤하게 새해를 맞으며 예루살렘에서 지낸 지 2주가 넘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새벽마다 모스크 첨탑에서 크게 울리는, 이슬람의 새벽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알림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늘 그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는데 그날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곤히 잠든 겁니다. 그러나 습관이 무서운 것이, 잠을 자면서도 ‘오늘은 첨탑의 기도 소리가 없네’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비록 잠에 빠졌기 때문이지만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던 예루살렘 아침의 고요와, 그 순간 제가 느꼈던 평화를 잊지 못합니다. 한편으로 온 세상이 평화롭게 느껴졌던 이유가 기도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역설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영적인 존재를 통해 영원과 소통하기를 갈망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바람과 갈망, 평화를 기원하고 기도할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저는 그 고요 속에 누운 채로 인간이 기도하지 않는 세상이 될 때, 그때야말로 세상은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날이 완전히 밝은 뒤에 일어나 주변 사람들에게 오늘 아침에 첨탑의 기도 소리가 없었냐고 묻자, 이곳에서 기도 소리가 없는 날은 하루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제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하니, 누군가가 저더러 이제 이곳 생활에 적응했다는 증거라고 말하며 웃더군요. “기도 소리가 없는 날은 하루도 없다”라는 게 현실이었지요. 저는 너무 깊은 잠에 들어 큰 꿈을 꾼 겁니다.
다른 삶을 통해 나를 마주하다: 사는 공간이 달라지면 거기에 맞춰 신경 써야 할 것도 달라지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제 생활방식은 한국에서 살던 때와 크게 다른 게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서 저는 그저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순례객일 뿐이었으니까요. 다만 20년 전에 방문했을 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앞서 잠깐 말씀드린 대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점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과거 청년 시절에는 글과 사진으로만 보던 유적지를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배낭 하나 메고 길거리에서 파는 빵 하나로 허기를 때우며 걷고 또 걸어도 마냥 행복했던 때였지요. 그러나 20년 만에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예전에 찾았던 유적지를 다시 방문하더라도 건물이나 과거의 자취가 아닌, 현재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살아가는 모습, 일상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서 편차가 있는 사회 기간 시설을 보고 이스라엘을 후진국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터넷 속도는 느리고, 대중교통망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고, 물건에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아 불편하다고도 하고요. 유대인 지역에는 상점마다 상품에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넘어오면 가격표가 없고 물건을 살 때마다 흥정을 해야 합니다. 현지 시세를 잘 모르고 흥정에도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으로선 내가 지금 제값을 주고 물건을 사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택시를 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택시를 타기 전에 목적지를 말하고 택시비를 정하지만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면 다른 비용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저 역시 모든 게 낯설고 당황스러웠어요. 하지만 이런 삶의 양식을 놓고 우리보다 ‘낫다’ 혹은 ‘못하다’라고 구분하기보다 그냥 우리와 ‘다른 삶’을 살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그 시절에 소매치기도 많았고 택시 바가지요금도 흔했지만, 그런 단편적인 모습으로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전체를 업신여기고 낮춰 봤다면 누구든 결코 유쾌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삶을 제삼자의 위치에서 보는 게 아닙니다. 그들 삶 속에 투영된 내 삶을 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타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내 삶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거나 풀 길이 없는 문제를 내려놓는 힘을 얻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스라엘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의 삶을 바라보면서 다시 우리의 삶, 제 삶을 마주 보게 되었습니다.
‘식별’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분별하여 알아봄’을 의미하는 이 말은 라틴어로 ‘디스크레티오(discretio)’입니다. ‘갈라놓다, 분리하다, 식별하다’라는 의미의 ‘디셰르노(discerno)’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지요. 이 단어는 베네딕토 성인의 중용사상을 나타내는 말로, “과격하거나 지나치지 않음과 깊은 생각에서 나온 절도 있는 태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에서 지내는 동안 이 식별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새벽의 기도 소리는 이른 시간에 잠을 깨워 힘들었고, 물건을 살 때 피할 수 없는 흥정의 과정은 때로 피곤했어요. 시시때때로 들리는 폭발음이나 총성은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요. 그곳에서 마주하는 많은 상황과 사건들은 제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거기에 있었고, 그곳에 머물러야 했으며, 제가 맞닥뜨린 상황은 제가 바꿀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고,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단념하고 미련을 두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태도는 특별히 철학적이거나 다른 깊은 뜻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만난 최초의 타자인 부모의 삶을 통해 체득하게 된 자세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대입 학력고사가 있던 날, 아침부터 부모님이 다투셨습니다. 여느 집 부모 같으면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대입시험을 앞둔 자녀를 위해서 좀 참았을 텐데, 제 부모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날 아침 저는 소란 속에 빈속으로 조용히 집을 나섰고, 그런 채로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왔으므로 그때라고 해서 부모님의 모습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씁쓸했던 마음은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부모님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야기한다고 해서, 뭘 어찌한다고 해서 두 분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지 않을 것을 일찌감치 알았고, 일찍부터 그 문제에 대해 불평하기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로마에서 유학하던 중에도 내내 마치 전장 속에 있는 것 같았지만, 그때도 현실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냉정하게 구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공부만이 유일하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외의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었어요.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실은 나의 마음과 달랐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잠시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없다는 사실이 참 마음 아팠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을 비롯해 어느 누구든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마음먹고 행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에 속했습니다. 저는 그 앞에서 ‘그럼 나는 그저 불평만 하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자문하게 됐습니다. 제가 그 질문에 내놓은 답은, ‘그저 나의 일상을 살자. 불평과 탄식은 이 순간 나에게 필요 없는 일이니 한숨과 함께 날려 보내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탄식과 한숨이 제 기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나를 살리는 1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아주 단순하게 시작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은 내적 성찰을 거듭해가면서 ‘식별’이라는 지혜로 남았고,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힘으로 불필요한 감정을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제가 맞닥뜨리는 문제들 앞에서 차가운 이성으로 좀 더 명확히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나가면서 살고 있습니다.
종종 많은 이들이 자기가 어쩔 수 없는 것에 휘둘려 힘겨워하곤 합니다. 가정, 학교, 회사와 같은 조직 안에서나 사람들 사이에서나 내가 풀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잘 살펴 분별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새벽을 깨우는 기도 소리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할 수 없는 일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존재이고 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나의 한숨이 웃음으로 바뀌는 그날까지 길 위에서 멈춰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가기. 이것이 제가 선택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가슴 속에 무엇을 품든 우선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때론 많은 것은 한숨으로 날려 보내야 합니다. 그 한숨이 내 속에 계속 남아 자꾸 작아지는 나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면 말이지요.
당신은 지금 어떤 것을 한숨으로 날려 보내고 싶은가요? 날려 보낸 그 한숨 속에 당신이 꿈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페니키아인의 협상법레바논은 이스라엘의 북쪽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처럼 패권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조용히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십자군 전쟁 때는 셀주크 튀르크와 십자군 사이에서 쟁탈의 대상이 되었고,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있기도 했으며, 프랑스 통치하에 놓이기도 했었지요. 그 이후에는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갈등으로 내전이 벌어지기도 했고요. 지금도 이스라엘과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에 둘러싸여 역사적, 정치적, 외교적인 갈등 속에 놓여 있다 보니 이 지역에서 긴장 상태는 여전히 일상이고 분쟁도 많습니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레바논 사람을 미개하거나 폭력적인 모습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레바논의 지인들을 통해 그들의 삶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지요. 이번에 말씀드릴 이야기는 그중 한 가지입니다.
예수를 감동시킨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영어의 알파벳은 페니키아인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는데 이들의 후손이 레바논 사람입니다. 알파벳을 처음 체계화한 만큼 이들은 타고난 언어 감각을 가졌지요. 그 흔적을 레바논의 비블로스(Byblos)라는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15세기 무렵 우가리트에서 알파벳 자음을 사용했는데, 이 문자 체계가 크레타섬과 미케네에 전해져 일명 미케네 문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 문자의 원형이며, 인도 서쪽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문자의 조상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페니키아 문자입니다.
페니키아라는 명칭은 ‘자주색’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포이닉스’에서 유래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에 따르면, 이 색을 처음 발견하고 염색에 이용한 사람들이 페니키아인이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은 ‘푸니쿠스’ 또는 ‘포에니쿠스’라고 부릅니다. 역사적으로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카르타고가 오늘날의 레바논인 페니키아의 식민 도시였기 때문에 페니키아인을 지칭하는 ‘포에니(poeni)’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레바논은 레바논산맥 때문에 시리아 지역과 교류가 단절되어 일찍부터 바다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덕분에 해상 무역업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어요. 또한 레바논은 이런 지정학적인 이유 때문에 이슬람이 세력을 확장하는 와중에도 그리스도교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페니키아인은 고대부터 선박 기술이 뛰어났고, 기원전 2613~2498년부터 이집트와 활발히 교역해 무역업이 발발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셈이 빠르고 정확하며 협상 능력이 뛰어납니다. 이러한 내용은 《레바논 사람처럼 협상하기》란 책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비브는 이 책에서 여러 가지 비즈니스 요령을 설명하는 협상법을 보여주었는데요. 그 가운데 제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이라는 <마르코복음> 7장 24~30절의 성경 내용이었어요. 이 내용은 <마태오복음> 15장 21~28절에도 나오는데 좀 길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이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