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만나는 대만사 수업
우이룽 지음 | 현대지성
드디어 만나는 대만사 수업
우이룽 지음
현대지성 / 2024년 10월 / 256쪽 / 16,900원
선사시대부터 반청항쟁기까지(선사시대~1683)
대만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 대만 원주민의 창세신화흔히 원주민을 가리켜 ‘대만의 보물’이라고 말하는데, 이들은 주로 남도어족(南島語族)에 속합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만은 남도어족 중에서도 지리적으로 최북단에 위치한 데다 언어가 복잡하게 분화된 점으로 보아 남도어족이 확산한 출발점일 확률이 높습니다. 참고로 대만의 구석기시대는 지금으로부터 5만 년 전에서 5천 년 전까지입니다. 이 시기에 어디선가 ‘용감한 사람들’이 대만으로 와서 활동을 시작했다는 뜻이지요. 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요? 인류학 증거를 따라 생각해보면, 현대 원주민의 조상들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대만에 정착했습니다. 대만에서 이미 6~7천 년 정착했을 법한 부족도 있고 1~2천 년 전에야 대만 땅을 밟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족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상과 문화적 함의를 설명해줄 기록도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문자가 없는 시대에 살던 사람들을 어떻게 조사할 수 있을까요? 대표적으로 유물과 유적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기고 모든 음식은 몸집을 키우는 법이니까요. 고고학자의 발굴과 분석을 통해 고대 인류의 생활 방식을 재건하고 시대적 특징을 복원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세대를 거치며 전해진 전설과 신화를 분석하고 파헤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도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해석하고 자연을 관찰한 태도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섬세한 지적 활동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 대만의 원주민] 대만섬에는 청나라 때 한족이 이주하기 전부터 남도어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약 6,000년 전부터 이 섬에 살았다고 전해지며, 쩌우족, 부눙족 등을 비롯해 16개 부족이 총인구의 2.4%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지역에 따라 고유의 풍습과 언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족이 들어온 이후 터전을 빼앗기고 높은 산으로 쫓겨 올라갔습니다. 이때 고산 지대에 사는 원주민을 제외한 대다수는 사라지거나 한족과 결혼해 혼혈이 되었지요. 근대화 이후에는 한족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한편,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섬 포르모사를 찾아온 두 나라 - 네덜란드와 스페인 통치 시대포르투갈인은 좋아 보이는 섬을 지나갈 때마다 “일라 포르모사(lhla Formosa, 아름다운 섬)!”라고 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래서 흔히 포르투갈인이 대만을 지나면서 “일라 포르모사!”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대만이 ‘포르모사’라고 불리게 된 유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럼 대만은 왜 포르모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걸까요? 이에 대한 답으로, 1580년경 스페인 사람이 대만을 보고 에르모사(Hermosa, 스페인어로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 섬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습니다. ‘Hermosa’가 바로 포르투갈어 ‘Formosa’의 스페인식 표기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그린 지도나 보고서를 봐도 대만을 ‘Formosa’나 ‘Formoso’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로 유럽 사람들은 대만을 포르모사라는 일반 호칭으로 불렀지요.
사실 대만의 역사와 관련이 깊은 나라는 네덜란드와 스페인입니다. 먼저 네덜란드의 이야기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24년 대만섬 남부 다위안(지금의 타이난시 안핑구)에 상륙해 대만 역사상 문자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흔히 대만의 역사를 400년이라고 하는데, 바로 문자 기록이 남아 있는 이때를 기준으로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624년 네덜란드가 대만 남부를 점령하자 스페인은 초조해졌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은 향후 네덜란드 함대의 봉쇄와 간섭을 피하고 마닐라에서 중국까지 가는 항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1626년에 재빨리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습니다.
그 후 대만 최동단에 위치한 ‘곶’, 산댜오자오에 상륙한 뒤 대만 북부의 지룽과 단수이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의 대만 통치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만 남부에 있던 네덜란드에게는 스페인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고, 1642년 군대를 이끌고 북상한 네덜란드는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며 16년 스페인 통치에 마침표를 찍고, 포르모사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만 남부에서만 살던 네덜란드인에게 타이베이에서의 생활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보고서에는 열악한 기후 조건 탓에 대만 북부에 주둔하던 병사 중 병들거나 목숨을 잃은 비율이 매우 높았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네덜란드를 지켜주던 행운이 다하고 불운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몇 년 후 대만 땅을 밟은 정성공(鄭成功)은 네덜란드의 대만 통치가 이미 종점에 다다랐으며, 대만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국성야’ 정성공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 정성공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정성공의 본명은 정삼이었으며, 아버지 정지룡은 해적이었습니다. 남명 시대 초기에 정지룡은 남명 편에서 당왕(唐王, 주율건)을 황제로 옹립하는 데 힘썼습니다. 당시 당왕은 영리하고 귀여운 어린 정삼이 마음에 쏙 든 나머지 주(朱)씨 성을 하사하고 정삼의 이름을 주성공으로 바꾸었는데, 성공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이라는 대업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후 청나라 병사들이 푸젠을 공격했고, 남명 군대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습니다. 정성공은 동쪽에 위치한 대만섬으로 방향을 틀고, 그 땅을 정복해 항청(抗淸)의 기지로 삼으려 했습니다. 결국 정성공은 끈질긴 전투 끝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몰아내고 대만 땅을 점령합니다. 이로써 대만은 반청복명 운동의 기지가 되었지요. 이후 정성공은 대만에 온 지 1여 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리더십과 시대를 앞선 행보는 대만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청나라 통치 시대(1683~1895)
한족은 왜 목숨을 걸고 대만에 왔을까? - 청나라에서 온 한족 이민자1683년 강희제는 시랑(施琅)을 보내 대만을 공격했는데, 당시 고작 열두 살이던 정극상(정성공의 손자)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며 연평왕국(동녕국)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씨왕국을 없앤 강희제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습니다. 나라 밖에 혼자 뚝 떨어져 있는 이 작은 섬을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시켜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강희제는 고심 끝에 최후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좋다! 대만을 우리 대청의 나라로 편입한다!” 이로써 대만은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되어 푸젠성 관할 구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청의 중앙에서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대만에서 아무도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 반청복명을 부르짖는 역적만 없으면 그만이라는 마음이었지요. 그래서 청나라 정부는 대만에 거주하는 인구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한족의 대만 이주를 엄격하게 제한했습니다. 이를 소위 ‘도대금령(渡臺禁令, 대만 입경 금지령)’이라고 합니다.
이렇게까지 대만으로 가는 걸 금지했건만, 오히려 대만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일까요? 바로 꿈 때문입니다. 그들은 꿈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만큼 대만은 새로운 기회로 가득 찬 땅이었습니다. 참고로 초기에 대만으로 건너오려던 사람 가운데에는 일찌감치 조난해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는 한편, 남보다 일찍 황무지를 개간하고 선점해 거대한 땅을 손에 넣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만에 오는 사람이 늘면서 개간 속도가 대만의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경작하라고 줄 만한 땅이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당시 대만은 이민자들의 황무지 개간으로 발전하던 중이라 비교적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씨를 뿌릴 땅도 없고 마땅한 일자리나 가정을 꾸릴 아내도 없으니 수많은 사람이 ‘나한각(羅漢脚)’으로 전락했습니다. 나한각은 간단히 말해 가족과 아내, 땅, 집, 고정적인 일자리 등 가진 것 하나 없이 그저 매일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할 일을 찾다가 밤에는 길바닥에 누워 잠드는 노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 본성인과 외성인] 대만 인구의 98%를 차지하는 한족은 본성인과 외성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성인은 국공내전 이후 국민당이 대만에 내려오기 전부터 대만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던 사람들로 대만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합니다. 이들은 주로 명나라와 청나라 때 푸젠성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었습니다. 외성인은 국공내전 이후 장제스가 대만으로 내려올 때 함께 건너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본성인과 외성인은 모두 한족이지만, 2·28 사건을 계기로 외성인을 중심으로 한 중화민국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본성인을 억압하는 등 역사 속에서 갈등을 겪었습니다.
당신이라면 무엇을 믿으시겠습니까? - 한족의 종교 신앙대만에 오는 외국인들은 도시 곳곳에 있는 편의점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거리마다 편의점이 있어서 언제든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으니 생활하기 편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르는 말씀입니다. 사당(묘당)에 비하면 편의점은 새 발의 피입니다. 사당이 얼마나 많은지 발길 닿는 대로 어디서나 참배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대만에서는 신령이 머리 위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말도 빈말이 아닙니다. 실제 자료를 보면 2021년 말을 기준으로 4대 편의점의 총 점포 수는 모두 12,537개입니다. 그런데 대만 내정부 통계에 따르면 2021년 대만에 등록된 사당과 교회의 수는 총 15,183개에 달합니다. 가령 사당 하나가 신 하나에 해당한다면, 평균적으로 한 신이 대만인 1,500명을 돌보고 있다는 말이지요.
사람들은 왜 종교를 가질까요? 마음을 의지하면서 위로를 얻고, 인생의 고비를 만날 때 정신적인 피난처를 얻기 위해서 아닐까요? 그렇다면 수많은 사당이 있는 나라, 대만은 심신과 영혼이 연약해서 늘 천지신명에게 기대야 하는 집단이라는 뜻일까요? 어느 정도 그런 면도 있습니다. 초기에 흑수구를 건너 대만을 개척한 이민자들은 하나같이 과감하게 돌진하는 열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지요. 그들은 조난해 물귀신이 되지는 않을까, 전염병에 걸리거나 홍수와 가뭄으로 농사를 망치지는 않을까, 생번(生番)한테 머리를 잘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살아서 두 다리 쭉 펴고 편히 잠들고 싶었던 이주민은 대만에 와서 겪은 갖가지 시련 탓에 종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종교는 대만을 개척했던 한족의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편안한 항해를 기원할 때는 바다의 여신 마조(?祖)에게, 전염병에 걸릴까 봐 걱정될 때는 역병의 신 왕야(王爺)에게, 풍작과 평안을 바랄 때는 토지신인 토지공(土地公)에게 빌고 또 빌었습니다. 심지어 불행하게 죽은 고혼(孤魂)에게 가위에 눌리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유응공(有應公) 신앙도 있었지요. 아무튼 신령에 대한 기대와 간구는 한족 이민자들이 개간한 발자취를 따라 남에서 북, 서에서 동으로 번지면서 사당 건축으로 이어져 점차 대만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불티나게 팔렸던 ‘Made in Taiwan’ - 차, 설탕, 장뇌만약 19세기 후반 대만의 세 가지 보물을 묻는다면 너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외칠 것입니다. ‘차, 설탕, 장뇌(녹나무에서 추출하는 천연수지물질로 화약과 셀룰로이드의 주원료)’. 1860년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대만은 정식으로 항구를 개방하고 통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95년 일본에 할양되어 식민지가 되기까지 30여 년간 차, 설탕, 장뇌는 대만 수출품 순위에서 1, 2, 3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세관 자료에 따르면 1860년부터 1890년대까지 차, 설탕, 장뇌가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53.49%, 36.22%, 3.93%였습니다. 이렇게 차, 설탕, 장뇌가 불티나게 팔리면서 상인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졌고, 당시 대만 경제의 생산 및 판매 구조와 사회계층이 변화되었으며, 민족 간 분쟁과 환경 개발 등 새로운 사회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선교사들은 왜 머나먼 대만까지 왔을까? - 19세기 대만을 찾아온 선교사들19세기 산업 기술과 과학 정신으로 무장한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은 세계를 탐색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뛰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1858년 청나라는 영국·프랑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투항했습니다. 전쟁에서 진 청은 자신들이 관할하던 대만에서 안핑, 다거우(지금의 가오슝), 후웨이(지금의 단수이), 지룽 등의 항구를 강제로 개항해야 했습니다. 참고로 개항 전 대만은 청나라 외에 다른 나라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항구가 개방되어 서양 각국에서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와 대만 역사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때로는 이 물결이 거친 파도가 되기도 했지요.
대만을 향한 호기심 어린 눈빛과 함께 군사 전략, 경제 무역, 연구 조사, 복음 전파 등의 목적을 가지고 대만에 건너온 서양인들은 외교관, 공무원, 군인, 상인, 학자, 사진사, 선교사 등 웬만한 직업군을 총망라했고, 이 외래인들은 그저 항구나 번화한 마을 근처에서만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대만의 자원을 충분히 조사하고 측량하겠다는 목적으로 개척 정신을 발휘해 대만 내륙이나 원주민이 사는 외진 산간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 속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주목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의 부르심을 받아 원래 삶의 터전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대만까지 왔던 선교사들입니다. 이 선교사들은 신의 부름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고 고된 대만에서의 삶을 견뎠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이면서 동시에 사랑을 위해 두려움 없이 자신을 바쳤던 복음의 전사들이었습니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의 종교관과 대만의 전통적인 민간 신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유일신 신앙에서 신은 전지전능하고 선하며 강한 존재입니다. 모든 인류는 신성하고 초월적인 단 하나의 존재, 우주의 유일한 주재자인 그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대만의 민간 신앙에는 이런 관념이 없습니다. 만약 토지공을 섬기고 싶다면 아무 신당에나 가서 섬기면 되고, 굳이 특정한 신당에 있는 토지공을 섬길 필요가 없습니다. 대만 어디를 가든 그 지역의 마조나 토지공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대만의 민간 신앙 세계관에서는 강호를 통일할 가장 강한 마조나 토지공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만의 민간 신앙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공명과 이익을 추구한다는 면에서도 기독교 신앙과는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여러 신을 공경하며 조상에게 절하는 전통적인 신앙 문화와 큰 차이가 있고, 기도할 때도 현실적인 이익이나 만족을 주지 않는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까요? 고민 끝에 선교 방법도 좀 더 현실적으로 바뀌어갔습니다. 1865년 대만 최초의 의료 선교사인 영국장로교회의 제임스 맥스웰(1836-1921)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료 선교는 미신과 무지라는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는 최고의 무기다.” 하느님의 말씀은 듣고 싶지 않을지 몰라도, 몸이 아플 때는 있기 마련입니다. 선교사의 말은 듣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의사가 하는 신신당부는 무시하기 어려웠지요. 더군다나 그 의사가 어떤 난치병도 고칠 수 있는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라면요?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볼 마음이 조금은 생기지 않을까요? 그가 믿는 신이 어떤 신인지 조금은 궁금해지지 않을까요?
맥스웰이 바로 그런 의사이자 선교사였습니다. 에든버러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그는 학업을 마치고 영국 런던에서 6개월간 레지던트로 일했습니다. 의대를 졸업한 수재로 영국에서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높은 월급을 받으며 살 수 있는데도 28살의 맥스웰은 영국에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의료 선교를 위해 대만 땅을 밟았습니다. 1865년 6월 16일 맥스웰은 타이난의 작은 주택(지금의 타이난시 중시구 런아이가 43번지)에 병원을 개원했는데, 이곳이 병원이자 전도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