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나와 일본
서영찬 지음 | 동아시아
사카나와 일본
서영찬 지음
동아시아 / 2024년 9월 / 576쪽 / 29,800원
1장. 애잔한 서민의 맛
이와시 - 가난한 밥상, 오랜 친구 같은 맛이와시는 통상 정어리로 번역된다. 떼 지어 다니는 회유성 어류로 대표적인 것이 정어리와 멸치다. 우리는 정어리와 멸치를 엄밀히 구분하지만 일본에서는 일상적으로 이와시로 통용된다.
일본인이 식탁에서 접하는 이와시는 대체로 세 종류다. 멸치(가타쿠치이와시), 눈퉁멸(우루메이와시), 정어리(마이와시). 이와시는 태평양 연안 해역에 주로 살며 전국적으로 잡힌다. 일반적으로 이와시는 마이와시, 즉 정어리를 일컫는다. 미에현, 이바라키현, 지바현이 일본 전체 이와시 어획량의 25%가량을 차지한다.
마이와시는 다른 두 이와시와 달리 몸통 양 측면에 검푸른 반점들이 나란히 박혀 있다. 일본인이 주로 먹어왔던 건 마이와시다. 사실 마이와시만 청어과에 속하고, 다른 두 녀석은 멸칫과로 분류된다. 서양에서 안초비로 통하는 종류다. 영어로 사딘(sardine)인 마이와시는 여름이 제철이고, 멸치는 겨울철이 제맛이다. 어쨌거나 일본인에겐 셋 모두 그냥 ‘이와시’다.
이와시는 신석기 조몬시대 유적에서 뼈가 발견될 만큼 오랫동안 일본인과 함께한 물고기다. 사실 이와시는 만만한 생선이었다. 간단한 도구만 있으면 얕은 바다에서 쉽게 잡을 수 있어 흔하고 값이 쌌다. 가진 것 없는 서민이 부담 없이 배를 채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선이었다. 도미, 방어가 지체 높으신 분들의 애용식이었다면, 이와시는 헐벗은 백성을 먹여 살렸다. ‘바다의 쌀’이라는 별칭은 이와시의 정체성을 콕 짚은 말이다.
이와시는 찰기 없고 금세 버석버석해지며, 코를 틀어막게 만드는 냄새를 풍긴다. 실온에 잠깐 놔둬도 쉬이 상해버린다. 여러모로 비호감이었다. 옛날 귀족과 고위 관리는 이와시를 ‘하품’ 취급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귀족의 입장에서는 아랫것들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생선을 같이 즐긴다는 게 영 마뜩잖은 노릇이었을 것이다. 근대화 이전 일본 사회는 서열 관계, 서열 의식이 뿌리 깊었다.
에도시대에 가난한 백성이 부담 없이 먹을 생선이래 봐야 이와시 정도였다. 그렇다고 사시사철 먹을 수는 없었고, 이와시가 동일본 간토 앞바다를 지나가는 6월 이후 서너 달 동안이 이와시 타임이었다. 에도 앞바다에서 잡히는 신선한 고급 어종은 지배계급이나 상인, 요식업자 손에 들어갔다.
금방 상하고 비릿 꼬릿한 냄새가 강한 이와시를 먹기 좋게 만들려면 냄새를 잡는 것이 핵심 포인트였다. 서민의 부엌에서 다양한 이와시 레시피가 생겨났는데, 가장 기본적인 구이 이외에 나마스(회무침)와 즈케(절임) 형태가 많았다. 이와시가 많이 잡히는 고치현에서는 이와시를 씻어 미소된장에 버무려 먹곤 한다. 이와시 나마스는 살만 발라낸 멸치에 채소 및 가지를 넣고 식초를 뿌려 버무리는 한국 남해안의 멸치 초무침과 엇비슷하다. ‘이와시도 일곱 번 씻으면 도미 맛’이라는 속담이 있다. 이와시를 찬물에 여러 번 씻어내면 냄새가 빠지고 도미 식감이 난다는 말인데, 냄새만 걷어 내면 꽤 맛있는 생선임을 인증하는 속담이다. 이와시는 사시미로도 사랑받았다. 또 초밥으로 해 먹을 때는 스(식초)를 치지 않고 그냥 밥에 올렸다.
생선 비린내는 오직 사람 사는 세상에만 존재한다. 귀신들은 필시 생선 비린내를 싫어할 것이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비린내가 유독 강한 이와시는 악귀 쫓는 용도로 이용됐다. 이와시 머리와 몸통을 둘로 분리해 호랑가시나무 가지에 고정시켜 대문밖에 걸어두면 비리고 구린 냄새가 풍겨 악귀가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문밖에 이와시 매달기’는 입춘 무렵 대길을 비는 풍습으로 전국 곳곳에서 행해졌다. 이와시는 서민의 허기뿐만 아니라 심리적 불안까지 물리쳐 주었다.
이와시가 얼마나 서민형 먹거리였는지 알려주는 좋은 증거 자료가 있다. 바로 반즈케(番付)다. 반즈케는 일정한 부문에 대해 우열을 가려 번호를 매겨놓은 일종의 순위표다. 반즈케는 일본 씨름 스모의 랭킹표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동군과 서군으로 좌우 칸을 나누고, 각 칸마다 최상위 요코즈나부터 최하위 역사까지 순위에 따라 이름을 쭉 열거했다.
이 반즈케 만들기가 에도시대 중기부터 대중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스모의 순위표 형식은 다양하게 차용됐다. 취미가 통하는 사람끼리 모여 한 가지 테마를 정한 후 순위를 매겼다. 특히 맛집, 음식, 술집 등 음식에 관련된 반즈케가 많았다. 그래서 반즈케를 에도판 미슐랭 가이드라고도 한다.
그중에 ‘서민이 자주 먹는 밥반찬은 무엇인가’라는 테마의 반즈케가 있다. 왼쪽 칸은 채소 항목, 오른쪽 칸은 생선 항목으로 나눴다. 채소 항목에서 1위는 두부조림새다. 그리고 생선 부문 1위는 이와시다. 정확한 표기는 메자시 이와시로 줄여서 메자시라고도 하는데, 이와시를 소금물에 살짝 담근 다음 대나무 꼬챙이로 네 마리씩 가지런히 눈을 꿰어 매달아 놓고 말린 것이다. 아침에 널어놓으면 저녁 무렵 적당히 말라 식감이 좋아진다. 저녁 끼니때 반찬으로 요긴했다. 메자시는 일본 근대소설에서 상징어로 곧잘 등장한다. ‘메자시 하나, 밥 한 그릇’ 메자시 한 마리면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울 수 있다는 뜻이다. 메자시만 놓인 빈한한 밥상이지만, 그나마 메자시라도 있으니 먹고는 산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처럼 메자시는 가난과 궁핍을 상징했다.
사회심리학자 미나미 히로시는 매사에 서열 관계를 중시하는 일본 사회를 ‘반즈케 사회’로 정의했다. 사회적 평가가 높은 집단과 낮은 집단이 우열에 따라 순위가 매겨진다는 것이다. 기업은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학교는 일류에서 이류·삼류로, 도시는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가정은 상류층 가정에서 하류층 가정으로, 집단도 지역도 어김없이 서열화된다고 분석했다.
에도시대에 말린 이와시를 먹은 건 사람만이 아니었다. 밭작물도 이와시를 먹었다. 이와시는 그물을 한번 뜨면 엄청난 양이 잡힌다. 날로 먹고, 말려 먹고, 삭혀 먹어도 남아도는 분량이 만만찮았다. 냉장시설이 없었으니 버려지는 양도 상당했다. 썩거나 말라가며 나뒹구는 이와시 쓰레기를 어민들은 밭에다 폐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웬걸, 분뇨 못지않은 거름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후 이와시를 썩지 않게 빠짝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거름으로 쓰기 시작했다. 바로 생선 비료, 어비(魚肥)로 호시카라고 불렸다. 어비는 농가에서 돈을 주고 사야 했기 때문에 금비라고 했다.
어비 수요가 늘자 어비를 취급하는 전문 상인이 생겨났고, 에도와 오사카 근교에는 상설 장터도 생겼다. 호시카는 면화와 궁합이 잘 맞아 면화 재배에 집중 투입됐다. ‘겐로쿠 버블’이라 불리는 17세기 후반 상업 경제가 성장 가도를 달리면서 면화 수요도 덩달아 수직 상승했다. 때마침 이와시도 풍어기였다. 이와시 어획량은 면화 가격을 좌우했다. 이와시가 적게 잡히면 어비 가격 상승으로 면화 가격이 불안정해졌다.
어비는 농업생산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도 했지만, 화폐 경제를 발달시켰다. 농가는 농기구를 구입하기 위해 환금작물을 늘렸고, 환금작물 재배 바람을 타고 어촌 사람과 상인은 어비를 상품화해 돈을 벌었다. 화폐를 중심으로 농어촌 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쌀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무라이 정권의 체제 기반인 석고제에 서서히 균열이 생겼다. 석고제란 각 번에 쌀 몇만 석 하는 식으로 일정한 봉록을 정하고 그에 비례한 봉사 의무를 부여한 시스템이다. 쉽게 말해 너에게 이 정도의 쌀 생산량을 산출할 땅을 줬으니 부역, 세금 등으로 그만큼의 의무를 지라는 것이다.
에도시대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급료로 쌀을 받았다. 모든 관리들의 봉록도 쌀로 지급됐다. 이 쌀은 농민한테서 징수한 것이다. 세금에 해당하는 연공미였다. 사무라이들은 봉록으로 받은 쌀을 돈으로 교환해 필요한 물품을 샀다. 쌀이 곧 돈이었다. 쌀은 무가사회 시스템을 가동시킨 연료였다. 그런데 쌀 대신 화폐라는 전혀 다른 연료가 주입되자 사회 시스템은 덜컹거렸다.
상업 경제가 발달하면 화폐 유통이 활발해진다. 에도시대 중후반부터 화폐가 힘을 얻어 쌀의 기능을 대체했다. 그러자 쌀값은 하락하고 물가는 상승했다. 임금을 쌀로 받은 사무라이 관리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물가는 뛰었는데 봉급은 그대로인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석고제는 점차 유명무실해지고, 석고제를 기반으로 살아온 사무라이의 살림살이는 위태로워졌다. 하급 사무라이의 고통은 더 컸다. 무사 계급을 돈과 맞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영화 <황혼의 사무라이>에서 보듯이 사무라이는 몰락의 시대를 맞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배층 무사 계급이 천시한 이와시가 무사 계급이 만든 경제시스템을 뒤흔들고 무가사회의 몰락에 한몫한 셈이 되었다.
겐로쿠 버블이 꺼지자 돌연 이와시 흉어기가 닥쳤다. 그때 이와시는 물고기 비료의 지존 자리를 청어에게 넘겨준다. 이와시가 떠난 자리에 청어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한동안 청어 대풍이 이어져 이와시 대신 청어를 비료로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이와시와 같은 족속인 청어도 말리면 훌륭한 비료가 됐다.
신기하게도 일본의 20세기 버블 경제 시기에도 이와시가 대풍을 구가했다. 일본 수산업계는 1970~1980년대 호황을 속칭 ‘이와시 버블’이라고 부른다. 당시 연간 어획량이 평균 100만 톤에 달했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러나 어획량은 1990년 즈음 하향곡선을 그리다 2000년대 들어와서 연간 수만 톤 규모로 뚝 떨어졌다. 이와시는 어획량 측면에서 부침이 가장 심한 물고기다. 어떤 시기에는 해안가에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것마냥 바글대다가 어떤 때에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와시가 줄면 다른 등 푸른 생선, 즉 전갱이, 꽁치, 청어, 고등어가 순차적으로 서서히 늘어나고, 이와시가 증가하면 다시 차례대로 줄어든다는 점이다. 먹이사슬의 결과물일까? 어쨌든 이와시가 줄고 값이 오를라치면 앞으로 몇 년 뒤엔 청어나 꽁치값이 떨어지겠구나, 그렇게 예상하면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동해에도 정어리가 섬을 이룬다고 할 만큼 정어리가 흔했다. 미국과 전쟁을 치르던 일제는 정어리를 압착해서 얻은 기름으로 군수품을 조달했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일본에 대해 금수조치를 내렸다. 일제의 석유 수입이 원천 봉쇄되자 일제는 더더욱 정어리 기름이 중요해졌다. 불똥이 조선으로 튀었다. 식민지 조선의 정어리 수탈이 심해졌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의 불길이 활활 타오를 무렵인 1940년대 초부터 정어리가 동해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정어리 실종 현상은 정어리 기름으로 군수용 기름 절반가량을 충당해 오던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일제가 패망해 해방을 맞은 조선 땅 민초들은 정어리가 일제의 패망에 한몫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일본을 패망시킨 물고기라는 뜻으로 ‘일망치’라는 통쾌한 이름을 정어리에게 붙여주었다.
이와시는 예나 지금이나 일본에서 어획량 1위를 달리는 생선이다. 단일 어종만 따지면 고등어가 1위지만, 정어리, 눈퉁멸, 멸치를 한데 묶은 이와시 종류는 고등어 어획량을 상회한다. 나약하고 작은 물고기 이와시. 하지만 물량 면에서는 도미도 감히 넘보지 못할 가히 요코즈나다.
2장. 깊은 역사의 맛
가쓰오부시 - 전투식량, 이성이 마비되는 맛누님. 미안한데요. 가쓰오부시란 게 참 희한한 거 같아요. 어렵겠지만 내가 좋아하니 좀 보내주세요. 길게 쓰지는 못하니까 가쓰오부시를 적당히 골라서 보내줬으면 해요. _메이지 37년 3월 16일. 오야마 데쓰사부로.
러일전쟁에 참전한 젊은 병사가 전선에서 가족에게 부친 편지글의 한 부분이다. 이역만리 전쟁터에서 필요한 것도 많을 텐데, 다른 것도 아니고 왜 하필 가쓰오부시를 보내달라고 했을까.
가쓰오부시는 근대 일본 군대의 전투식량이었다. 가쓰오부시는 휴대하기 편하고, 일촉즉발의 전장에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일부 장병들은 대패처럼 가쓰오부시를 깎는 틀을 갖고 다녔다. 필요시 즉석에서 딱딱한 가쓰오부시 덩어리를 얇게 깎아 끓는 물에 넣기만 하면 간단한 국물요리가 된다. 또 밥에 뿌리거나 입안에 넣고 껌처럼 씹어 먹으면 그만이다. 건빵에 뿌려 먹어도 되니 매우 간편하다. 야전에서는 간편식이 진리다. 전쟁터에서는 ‘빨리 먹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차가운 밥이나 딱딱한 식재료를 후다닥 먹게 해주는 도우미로 국물만 한 것이 없다. 미소된장국이 요긴했다. 미소된장국을 전파하고 발달시킨 장본인은 항시 전시체제에 살았던 중세의 무사들이었다. 가쓰오부시 역시 진한 국물요리에 적합해 전장의 무사들이 선호했다.
센고쿠시대 무장 호죠 우지쓰나는 전투에 임하기 전에 부하 장수들에게 가쓰오부시를 나눠주며 각자의 휘하 병졸이 필히 지참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이들은 전투를 벌이기 직전 가쓰오부시를 꺼내 먹었다. 그 연유를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1537년 여름 우지쓰나가 배를 타고 가는데 느닷없이 갑판 위로 생선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가다랑어였다. 가다랑어는 일본어로 ‘가쓰오’. 우지쓰나는 이 현상을 길조로 여겼다. 가쓰오는 ‘이기다(가쓰)’와 발음상 매우 유사하다. 우지쓰나는 가쓰오가 뛰어 올라 자기 앞으로 온 것을 ‘승리의 신호’로 해석했다. 이후 그는 가다랑어로 만든 가쓰오부시를 병졸들에게 먹이고 전투를 벌이는 족족 승리를 거뒀다. 이것이 일종의 전투 전 의식으로 굳어졌다. 지금도 시험이나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을 앞두고 돈가쓰를 먹는 관습이 있는데, 그 배경이 가쓰오부시와 같다.
가쓰오부시가 전투식량이 된 연유는 가쓰오부시가 원기를 북돋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병사의 체력과 기력이다. 이를 위한 음식으로 가쓰오부시가 안성맞춤이었다. 휴대보관이 수월한 가쓰오부시는 필승을 위한 필수식량으로 채택됐다. 가쓰오부시가 실제로 원기를 채워주는지, 아니면 플라세보효과일 뿐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쓸모는 있었던 듯하다. 오랫동안 꾸준히 중요 전투식량으로 군림했으니까 말이다. 누나에게 가쓰오부시를 부쳐달라고 부탁한 병사는 가쓰오부시를 먹으면 힘을 얻는다고 믿었을 것이다.
일반인에게는 가쓰오부시가 일종의 자양강장제였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일본 서민 가정에서는 어린이가 감기에 걸리면 가쓰오부시를 감기약처럼 복용했다고 한다. 가쓰오부시를 듬뿍 넣고 우린 국물을 밥에 말아먹으면 감기가 뚝 떨어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식습관은 지금도 일본 곳곳에 남아 있다. 가쓰오부시 국물은 숙취에도 그만이란다. 문득 우리의 콩나물국이 떠올랐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전쟁 시기마다 일본의 가쓰오부시 수요는 급증했다. 대부분 군납 수요였다. 1890년 1관(3.75그램)에 1엔대에 머물렀던 가쓰오부시 시세가 1894년 청일전쟁 직후에는 2.3엔, 러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1905년에는 3엔을 넘어섰다. 당시 쌀 10킬로그램 가격이 1엔 안팎이었으니 놀라운 가격 상승이다.
오늘날처럼 가다랑어를 말려 가쓰오부시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14세기 중반이다. 가쓰오부시의 ‘부시’(원음은 후시)는 무엇일까. 부시, 즉 후시는 ‘호시’에서 음운 전이됐다는 주장이 있다. ‘호시’란 이와시, 청어 등 말린 생선을 일컫는다. 가쓰오부시도 말려서 만든다는 점에서는 호시와 동일하지만, 가쓰오부시는 훨씬 고차원적이다. 아마 호시 대신 후시를 쓴 것도 가쓰오부시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가다랑어 외에도 전갱이, 고등어도 ‘후시’ 기법으로 말린 다음 국물 우리는 용도로 쓴다. 모두 말려놓으면 향이 강하고, 국물에 감칠맛과 단맛을 가미해 준다.
도사부시, 구마노부시, 사쓰마부시 등등. 가쓰오부시 제품은 지역명을 붙여 정체성을 뽐낸다. 그런 만큼 지역 간 품질 경쟁이 치열했던 식재료다. 이름난 술도가마다 술 빚는 비법과 술맛이 다르듯 가쓰오부시도 그랬다. 가쓰오부시의 제조와 판매는 통상 마을 단위로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