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학살을 넘어
구정은, 오애리 지음 | 인물과사상사
전쟁과 학살을 넘어
구정은, 오애리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3년 12월 / 280쪽 / 17,500원
세계를 뒤흔든 우크라이나 전쟁
푸틴, 세계를 흔들다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무차별 폭격을 시작했고, 이후 탱크와 지상군들을 투입해 오데사와 마리우폴 등을 장악했다. 러시아의 전격적인 우크라이나 침략에 세계는 깜짝 놀랐다. 유럽 내에서 한 독립국가가 다른 독립국가를 이처럼 대대적으로 침략하는 전쟁이 일어나기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처음이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벌인 이 전쟁은 미국의 패권 자체를 뒤집어엎으려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러시아의 옛 세력권을 복구해 ‘영광’을 재현하려는 의미로 해석됐다.
푸틴은 침공 직전 연설에서 ‘특별군사작전’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특별한 목적’에 국한된 군사작전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어 러시아가 안전하게 존재하기 어려워졌다”는 말로 침략의 책임을 우크라이나에 돌렸다. 또 우크라이나 정부의 괴롭힘과 집단학살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우크라이나를 비무장화, 비나치화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침공을 감행하기 전까지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하나”라고 여러 번 주장했다. 대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어떻게 위협했다는 것이며, 누구를 괴롭혔고, 우크라이나의 ‘비나치화’는 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하나란 이야기 속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일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한 뿌리인가: 우크라이나는 남쪽의 흑해로 흐르는 드니프로강이 국토를 동서로 나누고 있다. 이 강을 경계로 서부 지역은 과거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며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사람이 많은 반면, 동부 지역은 수 세기 동안 러시아 지배를 받아 러시아계 주민이 많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드넓은 농경지 덕분에 많은 밀을 생산하고, 천연가스 등 자원도 많다. 인구는 전쟁 전인 2021년 기준으로 약 4,400만 명에 달했는데, 우크라이나계가 78퍼센트이고 러시아계가 18퍼센트, 그 외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언어는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함께 쓰는데, 러시아와 가까운 동부에서는 주민 대다수가 러시아를 사용한다.
한편 유럽 역사에서 우크라이나가 부상한 것은 8~9세기 동유럽 최초의 봉건국가 키이우 루시(러시아어로 키예프 루스) 공국이 세워지면서였는데, 키이우 루시가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이후 일부 주민들은 몽골,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투르크 등의 지배를 받았고, 일부는 인접한 모스크바 공국으로 넘어갔다. 러시아는 모스크바 공국이 키예프 루스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해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는데, 푸틴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하나라고 말하는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의 주장은 다르다. 모스크바 공국은 키이우 루시의 지배 아래에 있던 비(非)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일 뿐이며 우크라이나의 정체성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하나로 합쳐진 데에는 1654년 페레야슬라프 협약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는데, 키이우 루시 멸망 후 남아있던 카자크족 자치국이 폴란드의 침략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맺은 이 협약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동남부가 러시아에 귀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러시아는 이 협약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법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됐다고 주장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단순한 군사동맹에 불과했다고 일축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1922년 소련이 탄생하면서 우크라이나도 소련에 합병됐다. 독립 움직임은 모두 실패했고, 소련의 스탈린은 공업화된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실행하면서, 1928~1932년 농촌의 우크라이나인들을 대거 공장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농장 집단화도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1932~1933년에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최대 1,000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 사건을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한다. 배고픔을 뜻하는 ‘홀로드’와 박멸을 뜻하는 ‘모르’가 합쳐진 말이다. ‘유럽의 빵 바구니’라 불릴 정도로 비옥한 토양을 가진 나라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믿기지 않는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참고로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나치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에 필적하는 제노사이드(종족 말살)로 본다.
시위, 혁명?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가 걸어온 길: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유럽 공산국가들에서 반공산당, 반소련, 분리 독립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가운데,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독립선언 법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3,000만 명이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 유권자 84퍼센트가 참여했고 찬성률이 92퍼센트가 넘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은 1994년까지 재임한 레오니드 크라우추크다. 그의 후임 레오니드 쿠치마가 10년을 집권한 뒤 2004년에 대선이 치러졌는데, 지역갈등으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독립 후 자본주의를 도입하기는 했는데 시장경제에 잘 적응하지 못하면서 경제 규모는 20퍼센트나 줄었고, 소련 시절의 공업시설이 많아 부유한 동부와 친서방 성향이 강한 서부 간의 갈등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이 대선에서 동부를 대표한 친러시아파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서부를 대표한 친서방파 빅토르 유셴코가 대결했고, 결과는 49.5퍼센트 대 46.6퍼센트로 야누코비치의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하지만 부정선거 증거가 쏟아지면서 국민은 야당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옷과 목도리를 두르고 재선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후 같은 해 12월에 치러진 재선거에서 결국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시민들이 비폭력으로 이뤄낸 이 같은 변화에 ‘오렌지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셴코가 오렌지 혁명의 동지였던 율리야 티모셴코 당시 총리를 견제하기 위해 덜커덕 야누코비치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로 인해 인기가 급락한 유셴코 대통령은 2010년 대선 때 1차 투표에서 탈락했고, 2차 투표에서 야누코비치가 승리해 대통령이 됐다. 이로써 오렌지 혁명의 두 주역은 몰락하고 친러시아파가 권력 탈환에 성공했다.
야누코비치는 러시아의 흑해함대가 크름반도의 세바스토폴 항구를 소련 시절처럼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협정에 서명하는 등 친러시아 외교노선을 취했다. 또 유럽연합(EU)과의 경제협력 협상을 중단하고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관세연맹을 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에 분노한 시민들이 2013년 11월부터 매일 수도 키이우의 중심에 있는 독립광장에서 EU 가입을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참고로 언론은 이 시위에 ‘유로마이단’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후 해를 넘기면서 시위는 격화돼 유혈 진압으로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리고 의회가 만장일치로 대통령 탄핵을 의결하자 야누코비치는 자신의 정치 기반인 동부 지역으로 도망갔다가 러시아로 망명했다. 그러자 푸틴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소치 동계올림픽 때만 해도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올림픽이 폐막된 지 불과 나흘 뒤인 2014년 2월 27일, 우크라이나 동부의 크름반도 자치정부와 의회를 전격 장악했는데, 명분은 크름반도에 있는 러시아 국민 보호였다. 현지 주민들이 러시아를 원한다는 명분도 내세웠다. 이후 같은 해 3월 주민투표에서 96.77퍼센트의 찬성으로 독립이 의결됐고, 뒤이어 크름공화국과 러시아 간의 병합조약이 체결됐다. 그리고 3월 26일, 러시아는 결국 크름반도를 자국 땅으로 병합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물론 국제사회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참고로 우크라이나 동부의 루한스크주와 돈바스주 일대를 통칭해 돈바스(러시아식으로는 도네츠크) 지역이라 부르는데, 러시아의 크름 병합 이후에도 돈바스 일대에서는 정부군과 친러시아 반군 간의 무력충돌이 계속됐다. 그런데 2022년 푸틴은 돈바스 지역에서 살고 있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정부 및 나치를 추종하는 아조우 연대에 의해 집단학살과 고문을 당하고 있다면서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했다. 푸틴이 말한 우크라이나의 ‘비나치화’는 아조우 연대를 염두에 둔 주장이었는데, 아조우 연대는 돈바스 내전 당시 친러 반군에 맞서기 위해 민병대로 출범했으며, 지금은 우크라이나 내무부 산하 국가경비대의 일원으로 편입돼 정규군이 됐다. 정식 명칭은 ‘아조우 특수작전 파견대’다.
우크라이나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나치의 지원을 받은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유대계와 러시아계 주민들을 상대로 인종청소를 저질렀던 비극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조우 연대가 활동 초기에 극우민족주의와 네오나치즘의 색채를 가졌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는 이런 성향이 거의 사라져, 러시아가 내세운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 제거 명분은 침략의 구실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 푸틴은 2022년 2월 21일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더 정확하게는 볼셰비키, 그러니까 소련에 의해 완전히 창조됐다. 이 과정은 1917년 혁명 직후에 시작됐다. 소련 지도자 레닌과 그의 동료들은 러시아의 역사적인 영토 일부를 떼어내어 분리했고, 스탈린은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에 속한 땅 일부를 우크라이나에 붙여 줬다. 또 1954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는 크름반도를 떼어내 우크라이나에 줬다. 이것이 오늘날의 우크라이나가 만들어진 과정이다. 우크라이나는 결코 진정한 국가 지위의 전통을 가진 적이 없다.”
푸틴의 말 중 관심이 쏠리는 대목은 크름반도에 관한 것이다. 1954년 흐루쇼프가 러시아 땅이었던 크름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양도한 것은 사실이다. 페레야슬라프 협약 300주년을 기념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우호를 표시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당시엔 우크라이나가 소련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상징적인 제스처에 불과했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이 붕괴한 후 크름반도는 우크라이나 영토에 포함됐다. 그리고 1997년부터 크름반도의 항구를 장기 임차해 사용해오던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의 대혼란을 틈타 크름을 병합해 버린 데 이어 2021년 침략을 통해 동부 돈바스 지역은 물론 우크라이나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특별한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우크라이나 땅은 우리가 나눠준 것이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만들었다”라는 식의 푸틴의 주장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크라이나를 소련에 강제병합하는 바람에 둘이 한 나라가 된 것인데 ‘역사적 과거’를 소련 시절로만 한정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또 과거에 러시아 땅이었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땅에 사는 우크라이나계와 러시아계 모두의 선택으로 독립을 해서 현재 주권국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고 침략한 행위는 국제법상 엄연한 범죄다.
갈등의 핵심,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문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 못하는 데에는 역사적 이유뿐만 아니라 군사적·지정학적·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과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인 나토에 가입할 경우 엄청난 부담을 떠안게 된다. 참고로 나토는 유럽과 북미 31개의 회원국(2023년 10월 현재)이 소속된 정치 및 군사 동맹체이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동유럽 국가들이 속속 민주화되면서 나토는 냉전의 유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꾸준히 회원국을 늘리면서 몸집을 키웠다. 폴란드, 체코, 헝가리를 시작으로 루마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구소련 국가들이 속속 가입했다. 2023년에는 군사적 중립을 고수해왔던 핀란드마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위기를 느끼고 나토의 안보 우산 아래로 들어왔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의 위협을 걱정해 오랫동안 나토 가입을 원해왔다. 2002년 쿠치마 당시 대통령이 나토 가입 의사를 공식 천명한 이후 몇 차례 나토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나토는 러시아를 자극할지 모를 우크라이나의 가입에 선을 그었고,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도 우크라이나를 가입시킬 뜻이 없다며 푸틴을 안심시키기에 바빴다. 하지만 러시아가 크름을 병합하고 동부 내전을 부추기자 우크라이나의 입장은 몹시 절박하게 됐다. 그래서 2019년 2월 발효된 개정 헌법에는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아예 명문화되었다. 그리고 2019년 5월 취임한 젤렌스키 대통령 역시 나토 가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고, 나토도 2020년 우크라이나를 ‘향상된 기회의 파트너(EOP)’로 인정했는데, 이는 정식 회원국은 아니지만 협력을 유지, 심화하기 위해 부여하는 지위이다. 우크라이나 외에 호주와 조지아, 요르단, 스웨덴 등도 나토의 EOP이며 스웨덴은 가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토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끝난 후 우크라이나의 공식 가입 절차를 시작하겠다는 입장이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회원국에 합류하면 나토가 집단방위 조약에 따라 러시아와 싸워야만 하는데 나토는 물론 미국 역시 매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편 러시아는 줄곧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라며 반대해 왔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병력을 대거 배치한 뒤 2021년 말 미국에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지 않을 것임을 문서 형태로 확약하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나 나토가 결정하고 약속할 사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의 시민들이 더 나은 삶의 기회와 안전을 위해 나토와 유럽연합 가입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나토 가입을 이유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장기전의 늪’에 빠진 우크라이나 전쟁: 전쟁 초기만 해도 러시아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 것으로 예상됐지만 현실은 달랐다. 푸틴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개전 사나흘 만에 우크라이나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자신했던 듯하다. 하지만 서방의 대규모 군사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군은 판세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양측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전쟁은 장기전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된 것은 누구도 물러설 수 없는 제로섬 게임이 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힘과 영광을 회복하겠다고 부르짖는 푸틴은 2024년 대선에서 재집권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특히 이미 병합을 선언한 우크라이나 동부 4개 주는 그에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전리품’이다. 푸틴은 2023년 6월 자신의 측근이던 용병회사 바그너의 수장 프리고진의 충격적인 반란으로 한때 위기를 맞는 듯했지만, 프리고진은 이내 의문의 항공기 추락으로 숨졌다.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경제제재에 나서면서 경제가 흔들리긴 했으나 그럼에도 러시아는 2024년도 국방예산으로 10조 8,000억 루블(약 52조 원)을 책정하며 총력 태세를 과시했다. 러시아 전체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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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크바’, 유대국가의 건국에서 시작된 비극2023년 10월 7일 토요일 아침, 이스라엘 남부의 가자지구 접경 마을 주민들은 3대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을 지내고 난 후 첫 안식일을 느긋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전 6시 30분, 2,500발 이상의 로켓 포탄이 하늘을 뒤덮더니 가자지구를 장악한 무장 정파 하마스의 무장대원들이 트럭과 오토바이, 패러글라이더 등을 타고 국경 철책을 넘어 이스라엘 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기습공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