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산다는 것
박은미 지음 | 초록북스
나답게 산다는 것
박은미 지음
초록북스 / 2024년 6월 / 312쪽 / 19,000원
CHAPTER 1 내가 나를 만나다
내가 나를 만나려면 혼자일 줄 알아야 한다
혼자인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 혼자일 수밖에 없어서 또는 관계가 불편해서 혼자 있는 것은 혼자임을 잘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임을 누린다는 것은 고독을 즐긴다는 것이고, 한적하게 있을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되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느낌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내가 언젠가는 존재하지 않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려면 혼자라는 두려움, 언젠가 삶이 중단될 것이라는 두려움부터 느껴야 합니다.
‘나답게 산다’는 말에 주목하는 이유: 나 자신이 언젠가는 죽고 만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운 진실입니다. 언젠가는 죽고 말 텐데 왜들 악착같이 사는지 의아스럽고, 죽음과 상관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다 보면 ‘나답게 사는 것’이 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모르니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해 답답해집니다. 혼자일 줄 모르면 나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혼자라서 느끼는 적적함 속에서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느껴보면 그때부터 내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나를 느끼기 시작해야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할 수 있습니다.
공허감과 고독감을 회피하려고만 하면
공허감과 고독감으로 인해 마음에 빠져 있게 된다: 마음 들여다보기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마음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따라 반응하기 바빠 마음 자체를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나려고 할 때 ‘나 지금 외롭구나’ 하면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누구를 만나야 외롭지 않을까’ 쪽으로만 마음과 생각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 들여다보기를 힘들어하는 데는 고독감을 직면하기가 겁이 나기 때문인 이유도 있습니다. 직면하기 두려운 이유는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직면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죽어가는 삶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은 죽음으로부터 도망가느라 자신 안의 불안에 직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고, 자기 자신에게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불안이라는 기분을 인수해야 불안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다: 저도 삶의 고통이 심했을 때 ‘죽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슬퍼할 사람들이 있었기에 죽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1년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본 뒤 그래도 죽고 싶으면 죽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사니 그렇게 무서울 일도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1년 뒤에 다시 생각하겠다’는 결심마저 잊고 어느새 저는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인데 죽음으로부터 도망가면서 불안이라는 기분을 인수하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삶을 채우게 됩니다. 혼자 있기 무서워 타인을 옆에 두려 하고 자신을 마취시킬 것을 찾게 됩니다. 공허감과 고독감을 회피하려고만 하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인생이 담배 연기보다도 더 허무하지만
마음의 서랍에 넣어둔 물음, ‘살아간다’가 뭐지?: 제가 중3 때 생물 선생님이 수업하러 들어오셔서 “여러분, ‘살아간다’가 뭐예요?”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애가 “죽어간다요!” 했습니다. ‘어, 죽어간다 맞네?’ 이 자각은 제 존재를 흔들었습니다. ‘죽어야 한다면 왜 살고 있는 거야’ 하는 의문이 가슴을 쳤습니다. 그러나 고민해도 답이 없었기에, 판단을 유보한 채 대학생이 된 후 고민해보기로 했습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철학과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등록금을 벌던 어느 날, 노상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제 얼굴을 때리고 알바비를 빼앗아 갔습니다. 저는 피를 흘렸고 몇 바늘 꿰매야 했습니다. 그 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강도가 등 뒤에서 칼을 꽂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를 감싸고 있던 무언가가 와장창 깨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삶은 이토록 위태로운 것이었구나!’ 그때 닫아두었던 마음의 서랍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이 너무 무섭게 느껴지고 무얼 해야 할지도 몰라 막막했습니다.
근원적으로 ‘어차피 죽을 인생을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고생하면서 살 필요 없이 일찍 죽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삶을 놓아버리면 가족은 더 힘들게 살 것이 뻔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 삶을 살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담배 연기보다 더 허무해 보이는 삶을 나는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삶’이라는 진실을 딛고 서서: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이왕이면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며칠 고민하고서 ‘공감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답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떤 방식으로 공감하면서 살아갈래?’라고 스스로 물었습니다. 답을 얻을 수 없었던 저는 도서관에 갔습니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수필집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에서 마음을 치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사상이라는 그물로 엮는 철학자는 행복하다.” ‘그렇지, 내가 이 행복을 원해서 철학을 하고 싶었던 거구나!’
저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인생은 담배 연기보다 더 허무하니 엄청난 걸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죽고 맙니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어차피 태어났으니 인생에 충실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을 내팽개쳐 봐야 더 큰 고통만 느낄 테니 말입니다. 헤세의 말을 접하면서 ‘공감할 때 행복한 내가 철학을 통해 인간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며 그 이해에 기반을 두고 이 세상을 사랑하면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 평생을 지탱해준 깨달음입니다. 이후 저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어려운 길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왜 사는지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CHAPTER 2 내 마음을 들여다보다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고는 하는데…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당혹스러움: 마음을 직접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내 마음이 이렇구나, 저럴 때 내 마음이 저렇구나’를 자꾸 알아차리다 보면 마음의 생김새를 점점 더 알게 되기는 합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 내가 이렇게까지 마음 상할 줄 몰랐고 저런 일에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 등의 경험을 하면서 마음의 생김새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저 자신을 속이려 드는 것을 예민하게 파악하게 됩니다. 마음은 편리한 결론에 안주하려고 교묘하게 스스로를 속입니다. 자기 정당화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잘못했으면서 타인이 잘못했다는 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지요.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에는 의식적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파악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무의식적 차원의 이유를 아는 데도 의식적 차원의 이유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기에 의식적 차원의 이유부터 파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나는 그 사람의 존재 방식이 힘들지?’를 자문해봐야 한다: 내 마음의 생김새를 느껴보는 기회 중 중요한 것이 타인과 나의 존재 방식의 차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접할 때 ‘저 사람 이상한 사람이야’ 하면서 자기중심적 인식을 해 버릇하면 내 마음의 특징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나와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한다고 해서 잘못된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설사 존재 방식이 문제가 있다 해도 이해하려고 노력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어느 정도 이해해야 스트레스를 덜 받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야 하니까요. 우리는 다양한 사람과 공통점, 차이점을 느껴보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틀린 측면을 생각하려 노력해야: 다른 사람과 갈등을 겪을 때 그 사람의 잘못은 뭐고 내 잘못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기 잘못을 더 생각하려 노력하다 보면 자신이 인간관계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이 경우 그 사람과 관계를 포기할 거라면 앞으로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내 경계를 어떻게 지킬지 생각해두면 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과 관계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의 잘못으로 가는 내 눈을 ‘내 잘못을 보는 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했을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갈등하는 과정에서 상대방 프레임을 내 프레임과 합쳐 더 큰 프레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더 큰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면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이해되어 조금 더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됩니다.
나 자신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물음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눠보는 것이 좋다: [① 나는 비판에 매우 민감하다] 비판에 민감하다는 것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면 타인의 인정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해서 타인의 인정을 원하면 타인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것이라는 진실을 놓치곤 합니다. 그 사람이 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미워집니다. 심지어 상대방은 그렇게 보지 않는데도 ‘그 사람이 인정했네, 무시했네’ 하는 식으로 인정/무시의 프레임에 꽂히기 쉽습니다.
[② 나는 칭찬이나 아첨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칭찬을 받았는데 펄쩍 뛴다면 내가 나를 인정하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인정을 갈구하면서도 정작 칭찬을 받으면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자신의 무의식이 탄로 난 것 같은 민망함 때문일 수 있습니다. [③ 나는 내 능력에 자신감이 너무 없다] 깊은 내면에서 내 능력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지요. [④ 나는 사회적 상황에서 거북함을 느끼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들 앞에서 거북함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이 받아들여질지 확신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나는 나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불편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매우 비판적인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비판적 경향이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는 데 유능하다는 것이겠지요. 왜 유능할까요? ‘내가 잘난 것이 아니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을 많이 느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약점을 찾고 싶어 합니다. 타인의 약점을 찾아 ‘나만 못난 게 아니다’ 하면서 안심하고 싶어지기 때문이지요.
이런 항목들로 자신을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을 좀 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알고 싶다면 이런 물음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눠보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마음이 상하는지를 알아야
내가 어떤 일에 자주 마음 상하는지 살피기: 내가 어떤 일에 자주 마음이 상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렇게 상처받는 내가 이상한 거야, 상처 주는 사람이 나쁜 거야?’ 하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 생각에 매달려 있어 봐야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이상한 사람은 늘 있으니 내 마음을 단속하는 게 중요하다’는 통찰에도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그다음 단계로 생각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 사람은 어찌할 수 없으니 내 측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통사정해봐야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 관심을 두는 것이 낫습니다.
‘갈등할 때 원정서를 인식하라’는 심리학의 요구를 현실화하려면: 심리학에서는 ‘갈등할 때 원정서를 인식하라’고 합니다. 갈등의 요인에는 자신의 충족되지 않은 원정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늦게 들어온다고 싸우는 경우 사실은 ‘남편과 충분히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 원정서입니다. 심리학에서 우리가 가짜 주제로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정서를 인식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 마음에 자꾸 물어야만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내 마음의 원리를 인식할수록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인식하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비논리를 보려고 노력하면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책을 보면 그 효과를 증폭시키게 됩니다.
타인의 이중성만 보지 말고 나의 이중성을 볼 줄 알아야
이중논리를 구사하지 못하게 막는 철학적 성찰: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잘난 존재이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기에 나의 찌질한 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자기 모습은 무의식으로 억압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라고 위장하는 것입니다. 이때 철학적 성찰은 자기 무의식을 보도록 해줍니다. 우리의 자연적 인식 경향성은 ‘내가 옳고 타인은 그르다’로 향하는데 철학은 이를 막습니다. 철학은 타당할 가능성과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나에게도 옳지 않은 측면이 있고 타인에게도 옳은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철학은 사실을 직면하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소설에 빠져 사는 일을 방지해줍니다.
자신이 이중논리를 얼마나 구사하는 사람인지를 직면하면: 자신의 비논리를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대부분 ‘남들은 틀렸고 자신은 옳다’는 생각에 빠져 삽니다. 그렇지만 내 생각은 내가 옳은 것을 입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자신의 믿음의 총합이 자신을 편리하게 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철학은 이를 막고 참되게 인식하기를 요구합니다. 내가 무의식으로 내려보내는 내 모습은 나 자신만 모르고 타인의 눈에는 잘 보입니다. 여러분 눈에 타인의 무의식이 보이듯이 여러분의 무의식도 타인의 눈에 보인다는 것이 인식하기 어려운 중요한 진실입니다.
자신의 이중성을 통합하는 과정: ‘의식의 나’와 ‘무의식의 나’를 통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이중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그 모든 모습이 나라고 인정할 때 ‘내가 모르는 나’의 비중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나’가 말썽을 일으키는 일도 줄어듭니다. 자신의 이중성을 보는 사람은 타인의 이중성에 그리 치를 떨지 않아 타인을 잘 수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문제가 없었으면 그 일로 그렇게까지 속상하지 않았을 수 있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상처의 반은 내 몫’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잘못하더라도 그 영향을 내가 어느 정도 받느냐는 내 경향성에 따릅니다. 모두가 상처받을 만한 말에도 내가 상처 받지 않아 그 사람이 죄를 덜 짓게 만든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그 말을 한 건 그 사람의 자유이고 그 말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또 나의 자유입니다. 그 사람의 의도를 내가 실현해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