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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만난 서양사상

리소정 지음 | 힘찬북스


카페에서 만난 서양사상

리소정 지음

힘찬북스 / 2024년 5월 / 288쪽 / 18,000원



제1강 습관은 제2의 천성



만물은 유전(流轉)한다

이 말은 플라톤의 저서 〈크라듀로스〉에 나온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먼저 이렇게 말한다. 만물은 흘러가고 있으며, 무엇 하나도 멈추고 있는 것은 없다고. 다시 존재를 강물에 비유하여,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

세상 만물이 다 수시로 변하고 있다는 관찰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로 전해지고 있으니,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불교의 허무감을 감득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강물같이 만물은 유전하며, 같은 강이라고 생각해도 사실은 시시각각으로 다르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로, 지금 나는 한 시간 전의 나와 다르다. 일순간 전의 나와도 다르다. 변화야말로 만물의 불변한 실상(實相)이다.

이렇게 헤라클레이토스가 소아시아 서해안의 도시 에페소스에서 설교하고 있었던 것이 대략 기원전 540년 무렵에 도를 이루었으니, 누가 앞서고 누가 뒤서고 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석가모니와 같이 원만한 인품은 아니며, 매우 대조적인 사람인 듯하다. 때로 행동이 기발하며, 만만치 않은 기골을 지녔고, 거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눈빛이 날카롭고, 말하자면 우주의 오묘를 그 날카로운 눈으로 투시하여 인생의 진실과 밑바닥에 도달한 듯한 철인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탈레스를 조상으로 하는 이오니아 자연철학자의 계열에 속한다. 탈레스는 천문학에 열중하였다. 하루는 별을 보며 길을 걷다가 개울에 빠진 일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그때 한 노파에게서, “자기 발밑도 모르는 주제에 하늘 일을 알려고 하느냐!”고 창피를 당했다고도 한다. 대체로 이러한 고대의 철학자들은 기인이나 괴짜가 많고, 헤라클레이토스도 늘 ‘어두운 사람’, ‘우스운 소리하는 철인’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 늘 인생의 어두운 점을 헤치고, 비관적인 것에 핀잔을 준 것이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가진 깊은 뜻은 그의 한마디가 한 계열의 철학을 낳을 만한 깊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신에게는 모든 게 미(美)고, 선(善)이며, 정(正)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느 것을 부정이라고 믿고, 어느 것은 정당하다고 믿었다.”라고 한 것이나, “지(知)란 오로지 하나. 모든 길에 통하며, 모든 걸 조종하는 하나의 의지를 인식하는 일이다.”라고 했으니, 이 말에서 종교의 깊은 연원을 볼 수 있겠다.

그의 말 중에 또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박학(博學)은 깨우침(분별)을 가르쳐 주지 못한다.” 하였으며, 이밖에 또, “원숭이는 제아무리 예뻐도 사람에 비기면 못났다.” “숨어있는 조화(調和)는 드러나는 조화보다 뛰어났다.” 이같이 그의 투철한 관찰에서 나온 인생의 비평의 경우가 많다. 이것을 보면, 적어도 철학 면에 있어서는 동서를 통해서 수천 년 전에 우리 선인들의 자각이 이미 그 궁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일곱 현인의 난제


그리스의 중앙부, 코린트만이 깊숙이 들어앉은 구석진 북편에 키르라 항구가 있다. 거기서 북쪽 언덕을 오르면 높이 솟은 파르낫소스 영봉 기슭에 아폴론의 신역(神域)으로 이름이 높은 델포이에 도착한다. 옛날에는 그리스 전역에서 이곳에 바쳐오는 공물이 끊일 새가 없었으며, 신전에 이르는 도로 양측에는 여러 국가에서 헌납해 온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즐비했다.

파우사니아스(2세기 후반의 사람)의 〈그리스 주유기〉에 의하면, 신전 입구에 있는 문간방에는 일곱 현인으로 불리던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금언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일곱 현인이 살고 있던 시대는 기원전 7~6세기였다. 그 금언이란 ‘너 자신을 알라’와 ‘무엇이고 도(度)를 넘지 말라’는 두 가지 말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철학자의 전기를 쓴 디오게네스는 일곱 현인의 한 사람인 탈레스의 전기에서, “무엇이 가장 어려운 것인가?” 하고 물은즉, 탈레스는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대답했다. 탈레스는 별을 보며 걸어가다가 개울에 빠진 일화로 알려진 철인이다. “가장 쉬운 것은?” 하고 또 물은즉, “남에게 충고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가장 즐거운 일은?” 하는 질문에는, “목적에 달했을 때.” 등등 여러 가지 명언을 토했다고 한다.

한편, ‘무엇이든 도를 넘지 말라’고 한 말은 역시 일곱 현인의 한 사람으로 아테네의 입법자이던 솔론의 말이며, 그는 늘 중용의 덕을 으뜸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하나의 중도정책(中道政策)을 의미하며,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립을 표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어려움을 그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으로, “모든 사람에게 좋게 하기란 어렵다.”고 항상 개탄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그 당시 변방의 한 소국에 지나지 않았고, 자원도 빈약하고 국력도 약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당파싸움이 그칠 새가 없었다고 한다.

솔론에 관한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다. 솔론은 자식이 먼저 죽자 몹시 슬퍼했다. 그 비탄이 너무 심해 어떤 사람이 위로 겸 간언 비슷하게 말했다. “울어도 소용없는 일이며, 몸에 해로우니 그만하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것이 내가 우는 까닭일세.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 ‘나는 언제나 무엇인가 배우며, 나이를 먹어간다’라고 말한 것도 그의 술회의 하나로 전해져 온다.

유토피아


“하루 세 시간씩, 일주일에 사흘만 일하고 월급은 지금의 열 배나 주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그런 유토피아는 바라지도 마라.” 유토피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꿈, 이상향을 말한다. 이 말을 최초로 쓴 것은 16세기 초엽 영국의 인문주의자인 토머스 모어(1478~1535)이며, 그는 그가 이상으로 삼는 꿈의 나라를 묘사한 〈유토피아〉라는 책을 썼다. ‘유토피아’는 그가 꿈에 생각하고 있는 나라의 이름이며, 그리스말의 ‘우-(ou)’와 ‘토포스(topos)’를 합쳐서 만든 말이다. ‘ou’는 ‘no’이고, ‘topos’는 ‘place’의 뜻으로, ‘Noplace’, 즉 아무 데도 없는 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의미의 이것은 현실과는 너무 먼 세계에 속하고 있다.

토머스 모어는 그의 친구 에라스뮈스와 함께 당시 전 유럽에 알려진 인문학계의 대학자였다.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아 대법관이 되었고, 그의 사회적 위세는 당당했으나 헨리 8세의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런던탑에 감금되었다가, 나중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며, 그 목은 거리에 내걸리는 치욕을 당했다. 〈유토피아〉는 1, 2부로 된 소설인데, 이 책이 출판되자 굉장한 반향이 일었으며, 1530년 프랑스를 필두로 하여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로 각각 출판되었으며, 영역판은 좀 늦은 1551년에 나왔다.

〈유토피아〉는 안토와브시에서 한 포르투갈 수부(水夫)를 만나 유토피아라는 섬 이야기를 들었다는 형식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 수부는 세 번째의 신대륙 탐험선을 타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섬에 들렀다고 하며, 시대적 배경을 나타내고 있다. 이 유토피아 국에서는 모든 재산과 물건은 국민의 공동 소유이며, 가난이 없는 동시에 화폐도 없다. 금은보석 등 오늘날 값진 귀중품은 그 사회에서는 한낱 장난감의 구실을 할 뿐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그런 것을 소중히 하는 자는 경멸을 당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태만은 죄가 되었다. 하지만 하루의 노동시간은 6시간이면 충분하며, 나머지 시간은 독서나 음악, 고상한 대화를 나누며 지낸다. 물론 남녀는 평등하며, 신앙도 각자 자유이며, 군비도 병사도 없으며, 전쟁은 하지 않기로 원칙이 서 있다. 부득이 적이 쳐들어오면 외국 용병을 고용하여 나라를 지킨다. 이 밖에도 결혼에 대한 구절을 보면, 선을 볼 때는 믿을 만한 연배의 어른이 입회한 가운데 남녀 쌍쌍이 모두 나체로 만나는 것이다.

역사상으로 본다면, 플라톤의 ‘공화국’ 역시 하나의 이상국을 그린 것이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시’도 역시 이상향을 말한 것이며, 모어는 이 두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모어 이후에는 캄바네라가 쓴 〈태양의 도시〉가 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사모엘 버틀러의 〈앨폰〉이 있고, H.G 웰스의 〈현대 유토피아〉 등이 있다. 중국의 무릉도원, 혹은 도원경이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유토피아와 같은 뜻으로,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산중의 아르카디아(Arcadia)와 함께 평화로운 목가(牧歌)가 흐르는 전원의 이상향으로서 회자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를 아무리 뜯어고치고 물자가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지상에 유토피아는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망이란 한이 없는 것이며, 결코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니, 그때 다시 새로운 불만을 품게 될 것이고 그와 동시에 유토피아는 소멸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제2강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성적이다



신들은 피에 주려 있다


‘엘도라도’는 남미 아마존의 강변에 있다고 상상되는 ‘황금의 나라’를 말한다. 이 말의 원어(原語)는 스페인어로 황금 사람이란 의미인데, 그 유래는 남미 포고타 고원에 사는 치부챠 종족의 풍습에서 나왔다. 이 부족의 추장은 종교적 의례에 따라 온몸에 금가루를 칠하고 호수에 들어가서 신에게 재물을 바치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유럽에 전해져 그곳이 황금이 많은 것으로 상상되어 황금의 나라라고 한 것이었다.

15세기에 시작된 유럽 사람들의 신대륙에 대한 환상적인 관심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크게 자극된 것인데, 그때 인도는 황금이 많은 곳으로 알려졌으며, 같은 환상이 이 남미 황금의 나라로 집중되었다. 황금의 섬 인도를 찾아가다가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던 콜럼버스의 뒤를 따르듯 스페인 사람 엘도라도가 ‘황금의 나라’ 탐험에 나섰다. 잉카제국의 정복자인 피사로도 안데스를 넘어 탐험대를 보냈었는데, 그들은 아마존강까지 와서 강을 발견했을 뿐 그 이상 발견한 것이 없었다. 거대한 강, 아마존의 이름은 그들이 지은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황금의 환상에 끌려 두 번에 걸쳐 탐험대가 출발하였으나, 그들도 목적하는 황금의 나라는 발견하지 못했다.

원래 ‘황금의 나라’라는 것은 누가 정확히 목격한 것도 아니고, 인간의 황금에 대한 갈망과 동경이 빚어낸 전설적인 존재였으므로 이에 엉킨 전설과 문학 작품도 적지 않다. 밀턴의 〈실락원〉에도 볼테르의 〈캉디드〉에도 ‘엘도라도’의 이야기가 보인다. 19세기 미국의 저명한 작가 에드거 앨런 포도 같은 제목으로 쓴 시가 있다.

아름답게 단장한 기사가 노래를 읊으며 ‘황금의 나라’를 찾아 나섰는데, 드디어 찾지 못하고 힘이 빠져 실망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포의 의도는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한창이던 금광 붐(골드러시)이 일어났을 때, 이를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황금의 나라’의 전설을 전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시문명은 많은 수수께끼 속에 잠겨 있다. 이들 미국의 원주민들은 그리스나 이집트와 같이 제대로 문자를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그 민족도 사방에 흩어져 버렸다. 그들의 문명을 판단할 자료는 겨우 고고학적 유물에 의존하는 길밖에 없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시문명은 중미에서 남미에 걸쳐 번영하였으며, 베링 해협이 육지에서 떨어져 나가기 이전에 시베리아에서 이주한 몽골계 인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 문명의 시초는 인류 문화의 여명을 장식하던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 비교하면 4천 년이나 뒤의 일이다. 아메리카의 원시문명이 이처럼 뒤떨어져 있었던 원인은 우선은 대륙이 고립해 있어 타민족과 교역이 없었다는 점과, 쌀이나 밀 같은 능률적인 곡식이 자라지 못하고 주로 옥수수가 식량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또 가축으로 이용할 만한 동물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미 유카탄반도에서 생긴 마야문명은 6세기부터 수 세기에 걸쳐 번영한 흔적이 있는데, ‘그림문자’를 사용한 마야족들은 독특한 천문대를 만들었으며, 달력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당시의 유물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문자는 아직 해독 못 하고 있다. 그들의 유적 가운데는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괴상한 조각들이 많으며, 만물의 창조신을 비롯하여 군신(軍神), 우신(雨神), 사신(死神) 등 그 밖의 여러 가지 선악의 신이 조각에 나타나 있다. 특히 ‘옥수수의 신’이 자주 눈에 띄는데, 이는 농업의 중심이 옥수수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마야의 제도는 소위 제정일치로서, 신관(神官)이 동시에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200년 무렵, 마야문명은 멕시코 벌판에서 침입한 인디언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 후 다시 멕시코의 아즈텍족이 그 뒤를 이었는데, 스페인의 탐험가 코르테스에게 정복당한 후 크게 세력이 쇠퇴하여 멸망했다. 아스테카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모테스마 1세는 스페인의 무서운 살육을 한탄하면서, “신들은 피에 주려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그 후 프랑스 혁명당의 공포 정치하에서 까뮤 템란이 같은 말을 하였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아나톨 프랑스가 공포 정치를 소재로 한 소설의 제목으로 썼다.

아즈텍족이 세운 문명과 함께 남미의 페루 지방 일대에는 잉카제국이 있었다. 코스코를 중심으로 한 잉카제국은 안데스산맥의 경사면에 있었으므로 대규모의 석축 공사를 하여, 농사는 층계식 밭을 이루고 있다. 신전이나 궁전에는 놀랄 만한 큰 돌을 쓰고 있는데, 그들은 수레를 이용할 줄 몰랐으니, 아마도 사람의 완력으로 움직인 것 같다. 문자는 없었으나 실의 색깔과 매듭에 의한 기호로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토지제도는 삼등분했다고 한다.국왕은 태양신의 아들로 인정되어 사제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으며, 정치, 군사 등 모든 권력을 수중에 넣고 있었다. 잉카를 ‘태양의 제국’이라고도 부르는 데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백성들은 평생 자기 직업에 결박되어 있었으며, 이동의 자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점은 동방이나 고대 아시아 사회와 통하고 있다. 잉카제국도 16세기 전반 스페인의 탐험대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그들 백성은 사방에 흩어지고 사회 조직 문화도 허물어져 달아났다.

마야와 잉카, 원시 아메리카 대륙을 장식하던 이 두 문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갈래의 학설이 있다. 하나는 외래설이고, 하나는 독립자생설이다. 외래설의 근거는 이들의 문명이 태양 숭배와 피라미드를 비롯해, 거석문화, 미라의 풍습, 그리고 관개에 의한 농사법 같은 것이 이집트 문명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집트 고대문명이 동방으로 이동하여 인도 동남아를 걸쳐 태평양을 건넜을 것이라는 설이다. 매우 흥미 있고 대담한 추측인데, 그것을 증명할 만한 자료는 아직 없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몇백 년 앞서 잉카인들이나 마야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을 태우고 태평양을 건널 만한 큰 배와 항해술을 그들이 갖추고 있었을까? 따라서 현재로서는 독립자생설이 유력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와 같이 역사상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두 제국의 문명이 아직 여러 가지 수수께끼를 담은 채 잠들어 있는 것은 많은 연구 과제를 남기고 있다.

장엄과 웃음거리의 차이


프랑스혁명의 혼돈 속에서 뛰쳐나온 나폴레옹은 우수한 정치적·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국내의 지도권을 잡는 한편, 열강의 간섭을 물리치고 프랑스의 독립을 공고히 한 뒤, 1804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혁명으로 루이 왕실을 넘어뜨린 민중도 그의 천재에 현혹되어 새로운 지배자에게 열광적인 갈채를 보냈다.

혁명 당시 병사들 간에 ‘꼬마 중사’로 알려졌던 그가 지금은 태양과 같은 신성하고도 높은 존재가 되었다. 그의 팽창해 가는 야심은 침략적인 형태를 띠고 국외로 향했으며, 아우스터리츠, 틸지트 등의 큰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뒤 결국 유럽 대륙 전부를 그 지배 아래에 넣고 말았다. 그러나 도버 해협 건너 영국만은 그의 ‘장엄한’ 권위에 굴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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