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물이 말한다

PPI 기술연구소 지음 | 예미


물이 말한다

PPI 기술연구소 지음

예미 / 2024년 6월 / 272쪽 / 19,000원





1장 문명의 역사와 함께한 물의 역사 - 세계 4대 문명을 창조한 물



물이 있는 곳에 문명이 있었다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세계 4대 문명은 인류 문명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두 개의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인류 최초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두 개의 강이 제공하는 풍부한 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광활한 토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최고의 자연환경을 만들어주었고 의식주가 해결되는 그곳에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점차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듯 사람을 모여들게 한 도시화의 핵심은 바로 물의 힘이었다. 지금도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수메르인들이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장한 모습과 도시 곳곳에 물길을 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있었던 고대문명으로 기원전 6,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갈대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아카드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강이 많아 농업과 축산업이 발전했으며 건설기술도 발달한 문명이었다.

나일강 치수기술과 함께 성장한 이집트 문명:
아프리카 북동부의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집트 문명 역시 풍부한 물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은 커다란 위험 요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일강은 상류 쪽 흙을 하류로 이동시켜 주었기에 나일강 유역은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농작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나일강이 이처럼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었기에 이집트인들은 일찍이 별자리 관찰로 농사에 필요한 물의 양을 조절할 수 있었고 강에 둑을 쌓아 범람하는 물을 모아 수로를 통해 물이 밭으로 흘러가게 하는 이른바 치수를 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우기와 건기에도 풍족한 농작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관개와 치수의 힘 덕분이었다.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 왕조의 수립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이어지는데, 폐쇄적인 지형 덕분에 오랫동안 통일을 유지하였고 전제군주인 파라오가 통치하였다. 사회는 파라오 - 신관·관료 - 서기·상인·공인 - 부자유농민·노예의 피라미드 형태의 신분 구조를 보인다.

정교한 배수로와 하수구 시설을 보여 주는 인더스 문명:
인더스강과 갠지스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인더스 문명은 ‘하라파 문명’이라고도 부르는데,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문명과 같이 강 계곡의 충적평야에 국한되지 않고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성립되었다. 기원전 2,500년경에 시작된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문명으로 강과 산, 해안 지역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거주하는 주민들을 위하여 홍수와 관개시설도 중점적으로 관리해야 했으며 물을 공급하는 수로도 발달하였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내용은 주거 유형이다. 인더스 문명은 고대에서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정교한 배수로와 하수구 시설을 가졌다. 도시계획은 인더스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잘 확인되는데 성채 안에 있는 주요 공공건물은 대목욕탕과 곡물창고, 넓은 광장이 있다. 대목욕탕의 경우 사회 상류층 계급이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상당한 규모로 형성되어 있고 넓은 회랑과 방과 함께 개인 목욕실까지 있었다는 것은 인더스 문명이 체계적인 물 관리를 통해 도시화를 확대시켜 나간 문명국가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잦은 홍수를 다스리며 발달한 황허 문명:
황허 문명은 황허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문명이다. 기원전 2,000년경의 황허 유역은 고온다습한 아열대기후였고 대홍수가 자주 발생하자 사람들이 힘을 합쳐 대규모의 관개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문명이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중국의 역사는 ‘강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황허강의 잦은 홍수는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홍수가 심한 경우엔 백성들의 원성으로 왕권이 흔들리고 국가가 붕괴될 위험도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중국의 건국신화에는 홍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전설의 왕조라 불리는 순임금 때 황허의 범람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자 순임금이 ‘우’라는 신하에게 황허의 홍수를 막으라는 특명을 내렸고 인력과 자재 사용도 무한대로 제공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우는 황허의 바닥을 깊게 파는 준설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인력과 장비를 동원해서 황허의 바닥을 파내는 것으로 하천을 정비했다. 또한 엄청난 강물의 양을 줄이기 위해 방수로를 팠다. 기록에 의하면 우가 황허의 치수(治水)에 성공한 이후 1,500년간 강물이 범람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생 황허의 홍수를 막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던 우는 중국 최초의 국가인 하(夏)의 왕에 오르게 된다. 비록 설화이지만 그만큼 황허의 유용성과 함께 중국의 치수 관리가 국가 형성과 권력 유지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세계 최초의 상하수도 시설


세계사에서 최초의 수도관이 발견된 곳으로 로마를 자주 거론하지만 역사적 증거물이 발견된 곳은 놀랍게도 로마보다 앞선 ‘에게 문명’의 발굴 현장이었다. 에게 문명은 에게해 주변의 청동기 문명으로, 최초의 해양문명이자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볼 수 있다. 지중해의 크레타섬에서 시작된 고대문명인 미노아 문명은 에게 문명의 한 줄기로 서양 문화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항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크노소스 궁전에서 인류 최초의 상하수도 시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과 물의 역사를 논할 때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다.

지중해 크레타섬에 존재했던 크노소스 궁전의 왕비 침실은 ‘메가론’으로 불렸다. 왕비의 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수세식 화장실인데, 화장실 내부에는 욕조와 변기가 있으며 바닥 전체에 배수관(配水管, distribution pipe)이 깔려 있는 구조였다. 배수관은 흙을 구워 만든 도자기(테라코타 파이프)로 만들어져 있는데 한쪽이 좁아져서 다른 쪽과 압력이 맞도록 되어 있다. 이 배수관을 이용하여 10km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와서 변기와 욕조에 물을 공급했으며, 일을 본 후에는 주전자에 물을 담아 내려보내 오물이 배수관(排水管, drainage pipe)을 통하여 외부로 빠져나가는 구조였다. 이른바 상하수도시설이었다. 이는 고대 로마 시대보다 한참 앞선 것이다. 그 후 미노아 문명은 미케네 문명을 지나 헬레니즘 문화를 형성하였고 마침내 찬란한 로마 문명의 꽃을 피우며 상·하수도 문화를 이어 나갔다.



2장 건강한 물을 향한 인류의 집념 - 생존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 온 우물, 댐, 수로



인구 100만을 수용한 로마의 상하수도 시스템


2천 년 전의 로마는 현대의 시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상하수도 시스템을 구비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는 인구 100만 명의 대도시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로마의 위용이 로마제국을 지탱하는 버팀목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1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기 전에 100만 명의 생명을 유지할 물의 원활한 공급이 없었더라면 인구 100만의 로마는 존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물의 도시’라는 명칭답게 로마인들이 만든 정교한 수로는 현대 토목기술로도 이루기 힘든 대단한 위업이었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물을 운반해 왔는데 이는 100만 명의 로마 시민이 먹고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더군다나 로마에서는 분수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물이 공급되었다. 물을 내보내기 전에 목욕탕 등에서 1차적으로 사용된 물을 화장실로 보내 2차로 재활용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는 것만 보아도 로마인들이 물을 활용하는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엿볼 수 있다.

기원전 312년, 로마 최초의 수도(水道)이자 세계 최초의 수도인 아피아 수도가 로마의 정치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키에쿠스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를 비롯해 로마시에는 총 길이가 350km에 달하는 11개의 수도관로가 있었다. 로마는 수많은 수도관을 건설하여 도시와 산업지역,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면서 문명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수도관은 대부분 지하에 매설되어 있었으며 아치 수도교가 놓이기도 했다. 때로는 50m 높이 차가 나는 수도관이 연결되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 사이펀 원리를 활용하여 물을 끌어올렸다.

로마인은 위생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위생과 사교 목적의 공공 목욕탕 ‘테르미니’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여러 가옥에는 수세식 변기와 상수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도시에 대하수도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가 있어서 늪지대로 배수하고 티베리스강으로 폐수를 처리했다. 수도관을 통하여 공급된 물은 계속 흘러가면서 각 가정과 공공시설의 배수구로 빠져나갔다.

수도, 도로, 목욕탕을 관리하는 ‘아델(Aedele)’이라는 공무원이 따로 있었을 만큼 로마의 수도시설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는데, 당시 로마 시민들에게 공급됐던 물은 하루 한 사람당 평균 190리터 정도에 달했다. 이는 1리터 병, 190개에 달하는 양이었다. 이것은 서울 시민 1인이 하루에 가정에서 소비하는 물의 양과 동일하니 당시에 얼마나 풍부하게 물을 사용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평민들은 공동 물탱크에서 물을 길어다가 썼고 귀족들은 집 아트리움(중정)에 분수와 수도시설을 설치하고 물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물의 사용 방법만으로도 부의 차이와 계급의 격차를 보여 주고 있다. 물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2천 년 전에 지금과 비교해 손색이 없는 시설을 갖추었다는 것은 실로 놀랍다. 또한 고대 로마인이 깨끗한 식수를 공급받고 위생적인 배수를 할 수 있도록 한 상하수도 시설은 로마 공학기술의 우수함을 보여주며, 세계를 제패한 로마제국 번영의 근간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역사적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마의 수도시설은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잊혀졌다. 상수도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인력과 자원이 필요한데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를 감당할 능력 또한 사라져 버렸다. 그 결과 수도시설 관리와 운영은 쇠퇴했고 중세 암흑기를 지나 12세기에 들어와서야 일부 수로의 건설이 행해졌다.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된 체계적인 물 공급 시스템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유럽은 늘어나는 인구로 물이 부족해졌다.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도시화 속도가 가장 빨랐던 영국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그 결과 영국은 수도시설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영국 런던에 처음으로 수도시설이 설치된 1582년 이후 1619년에는 최초의 물 공급 회사인 뉴리버컴퍼니(New River Company)가 설립됐다.

파이프라인 연결망을 통해 각 가정에 물을 공급하기 시작한 뉴리버컴퍼니는 수도 파이프를 목관에서 주철관으로 교체했다. 1761년에는 증기기관을 이용한 펌프를 설치해 더 먼 곳에서 깨끗한 물을 끌어올 수 있었다. 산업혁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 속도를 보인 영국은 이후 안전하고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선두 주자로 나섰는데, 상수도 시스템의 변화뿐 아니라 정수처리 방법을 처음 도입한 것도 영국이었다.

물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한 근대적인 정수처리 방법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반으로, 영국의 첼시수도회사는 물을 하루 5m 이내의 모래층에 천천히 통과시켜 깨끗한 물을 만드는 완속여과법을 개발해 1829년 런던 템스강에서 처음으로 시행했다. 당시에는 세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여과의 목적은 물을 탁하게 만드는 물질을 제거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 여과법이 상수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음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밝혀지게 된다.

1829년부터 번지기 시작한 콜레라는 순식간에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콜레라가 대유행한 후 그 원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고,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마시는 물로 감염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여과된 물을 마신 지역에서는 사망자가 훨씬 적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완속여과는 물을 천천히 모래층으로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모래층 표면에 얇은 생물막을 형성시킨다. 이렇게 형성된 생물막은 물 속의 작은 입자들과 미생물을 걸러 내므로 병원균들도 걸러 내게 된다.

이를 실험적으로 확인한 사람은 영국의 화학자 에드워드 프랭크랜드였다. 그는 1885년 완속여과된 물 속의 박테리아가 줄어든 사실을 현미경을 통해 확인했다. 완속여과법은 장치가 비교적 간단하고 유지하는 비용 역시 저렴했기 때문에 유럽의 여러 나라로 급속히 확대됐다.

상수도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다. 단순히 물을 공급하는 시설에서 벗어나 정수의 기능을 갖춘 중요한 위생시설이 되었다. 수인성 전염병균을 사멸시키기 위한 소독이 시행되었고, 완속여과법뿐만 아니라 급속여과법도 개발되어 다량의 정수된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1884년에는 미국의 하얏트(A. Hyatt)가 황산철을 사용한 급속여과법으로 특허를 획득하고, 같은 해 뉴저지주의 썸머빌에서 급속여과지가 최초로 만들어졌다. 이 방법은 완속여과법에 비해 여과 속도가 10배 이상 빨랐다. 그렇기 때문에 인구가 많아 대량의 물을 빨리 정수 처리해야 하는 대도시의 정수장에 적합했고, 현재에 이르러 대부분의 정수장에서 사용되는 시스템이 됐다.

반면 급속여과법은 완속여과법에 비해 물에 녹아 있는 유기물이나 악취를 제거하는 데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20세기 후반에는 물에 녹아 있는 유기물질 성분과 맛이나 냄새를 없애 주기 위해 오존 처리나 활성탄 흡착 등의 고도정수법도 개발되어 급속여과에 추가하여 도입되었다.

오존이 정수처리에 사용된 것은 매우 오래전부터이다. 오존은 1785년 독일의 반 마룸이 처음 발견했고, 1801년 프랑스의 크뤽샹이 물을 전기분해하면 발생하는 가스에서 특이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886년에는 프랑스의 드 메리땅이 오존을 발생시켜 곰팡이, 박테리아와 같은 세균을 살균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오존은 강력한 산화력으로 물 속에 있는 미세한 유기물질을 제거하고 세균을 살균할 수 있다. 1893년에 네덜란드 정수장에 오존에 의한 소독처리가 처음으로 도입된 후 오존의 수요는 급속히 증가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중 저렴한 비용의 염소가스가 개발되면서 오존의 수요는 감소했다. 염소 소독은 현재 정수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소독 방법이다.

최초의 염소 소독은 벨기에에서 1902년 실시됐다. 염소 소독의 경우 수돗물에 오래 잔류해서 수도관으로부터 침투하는 세균을 지속적으로 제거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는데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이점이 있다. 이런 장점 때문에 염소 소독은 전 세계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수도꼭지를 틀었을 때 하얀 빛을 띠는 수돗물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염소라고 잘못 알고 있지만 사실은 물 속에 산소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철 집 안과 밖의 온도 차가 커서 산소가 차가운 밖에서 물에 많이 녹아 있다가 따뜻한 집 안에서 대기 중으로 나오려는 성질이 강해질 때 자주 발생한다. 이것은 강하게 분출되는 수돗물에서 물 속의 산소가 미세한 포말을 형성하기 때문이며 수질이 나쁜 것은 아니고 곧 사라진다.

수중의 미생물을 소독하는 방법으로 염소나 오존 대신 자외선을 사용하기도 한다. 자외선은 염소로 사멸시키기 어려운 지아디아 등 원형동물에 강력한 살균 작용이 있지만, 염소와 같은 잔류효과가 없으므로 소독 후 물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다시 미생물에 오염될 가능성도 있다. 이 때문에 정수장에서는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19세기 초 수세식 화장실과 하수도의 보급이 시작됐고, 콜레라 유행을 계기로 대규모의 하수도가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1870년경부터는 하수를 황무지에 유입시켜 오염된 하수를 미생물로 정화하는 관개법이 등장했는데, 1914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활성오니법’에 의한 하수처리장이 건설된 이래 이 방법은 가장 진보된 방법으로 인정되어 현재까지 대부분의 하수처리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