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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이성대 지음 | 부키


미국은 왜

이성대 지음

부키 / 2024년 6월 / 312쪽 / 19,000원





둘 때마다 신의 한 수! … 미국의 탄생



왜 미국은 부동산 투자에 올인했을까


전무후무한 부동산 대박 ‘루이지애나 매입’:
개국한 지 200년도 안 된 미국이 이미 1900년대 초 구대륙의 내로라하는 열강을 제치고 초강대국 지위를 차지한 것은 독보적인 입지 선정 능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미국은 건국 초기 과감한 부동산 투자로 지금과 같은 입지 ‘끝판왕’ 자리에 올랐다고 봐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은 부동산 투자의 귀재라 할 만하다.

대표적인 투자 성공 사례가 바로 루이지애나 구입이다. 미국 3대 대통령이자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토머스 제퍼슨은 1803년에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땅을 사들였다. 루이 14세의 이름을 딴 루이지애나는 ‘루이의 땅’이란 뜻이다. 루이지애나는 지금의 루이지애나가 아니다. ‘재즈의 도시’이자 2005년 카트리나로 수천 명이 죽었던 뉴올리언스가 있으며 미국 50개 주에서 못사는 것으로 늘 상위 5위 안에 드는 남부의 한 주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의 루이지애나는 멕시코만에 접해 있는 지금의 루이지애나주를 비롯해 아칸소, 오클라호마, 미주리, 캔자스, 네브래스카는 물론 캐나다와 맞닿은 미네소타를 거쳐 서쪽의 로키산맥과 연결된 몬태나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땅이었다.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그리고 독일을 다 합친 넓이와 비슷하다.

제퍼슨은 이 광활한 영토를 단돈 1,500만 달러에 매입했다. 지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평당 겨우 0.7원을 지불한 셈이라고 한다. 불과 1,500만 달러로 당시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늘리고 서유럽 전체와 맞먹는 땅을 얻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미국 역사학자 헨리 애덤스는 “미합중국이 투자 대비 이렇게 많은 것을 얻은 일은 이제껏 없었다”라고 말했다.

미국이 루이지애나를 손에 넣자 나라 살림이 눈에 띄게 폈다. 루이지애나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미시시피강은 풍부한 수량과 운송 능력으로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됐다. 미시시피 주변의 평지는 알고 보니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었다. 전 세계에서 씨를 뿌리기만 해도 자라는 1등급 토지 절반이 미국에 있고 상당수가 이곳에 속한다. 못해도 대부분 3등급 안에 들어간다.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호남평야가 5등급이라고 한다. 비료를 뿌려야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정치적으로도 남는 장사였다. 나라가 커지니 국내 정치가 안정되는 효과가 생겼다. 큰 나라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사는 작은 나라에서 지역감정이 더 깊어지기 쉽다. 실제로 제퍼슨은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연합체의 규모가 클수록 국지적인 정서에 덜 흔들리게 된다. 어느 모로 보나 미시시피강 서쪽 지역을 이방인 집안보다 우리 혈육이 차지하는 게 훨씬 바람직하지 않은가?”

입지 끝판왕의 상급지 갈아타기:
루이지애나를 손에 넣은 미국은 서쪽으로 내달려 마침내 태평양 앞바다까지 진출했다. 1776년 동북부 대서양 연안에서 독립을 선언한 지 70여 년 만에 대륙 반대편 태평양 연안까지 4,828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대륙 국가를 완성했다.

그런데 루이지애나가 없었다면? 당시 미국은 동부 지역만으로도 이미 유럽의 여느 나라보다 큰 나라였다. 그런데도 미국은 왜 이렇게 집요하게 부동산 투자에 나섰을까.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조지 프리드먼은 “제퍼슨 등은 대륙 국가로서의 힘이 없으면 미국은 파괴되리라고 믿었다. 북아메리카에 과거에 존재했던 수많은 국가와 정착지들처럼”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이 북아메리카의 일부로 남는다면 자력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는 뜻이다. 북미 대륙에 유럽처럼 수많은 국가가 어깨를 맞대고 빼곡히 들어찬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갈기갈기 찢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영토가 갑절로 커지면서 미국 안보에 전략적 깊이를 더해 줬다. 동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으로 태평양이란 엄청난 자연 장벽을 갖게 되면서 대륙 밖의 어떤 나라도 미국을 넘보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미국은 안보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해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캐나다를 정복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은 1812년 캐나다를 정복할 의도로 공격한 적이 있다.

땅덩이가 작으면 외부의 적에게 만만하게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땅 크기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면 외부에서는 침략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설사 침략해도 백전백패다.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했지만 영토가 너무 넓은 탓에 긴 보급로를 유지하지 못해 처참하게 패배했다.

19세기 말에 이르자 신생국 미국은 마침내 누군가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783년 파리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을 인정받은 이래 본토가 공격당한 건 그로부터 200년이 넘게 흐른 2001년 9월 11일이 처음이다. 1814년에 영국이 수도 워싱턴 D.C.까지 쳐들어 와 백악관을 불태운 적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독립 초기인 데다 현재의 미국 국경이 완성되기 전이라 영토 개념이 지금보다 희박했다. 따라서 미국이 대륙 국가를 완성한 뒤 외부로부터 사실상 처음으로 공격받은 것은 1941년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이다. 다만 하와이는 북미 대륙과 떨어진 태평양의 섬이었다.

반면에 미국은 동서 해안에서 유럽과 아시아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떨어져 있다 보니 오히려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국제관계에서도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원칙이 지켜진다. 대다수 국가는 같은 지역에 있는 이웃에 대해서는 언제 침략자로 돌변할지 몰라 경계했지만, 멀리 바다 건너 있는 미국에는 앞다퉈 러브콜을 보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루이지애나 땅을 사야 한다는 순간의 선택을 통해 안으로는 전략적 깊이를 확보함과 동시에 밖으로는 국제 질서에 영향을 끼치는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됐다. 미국은 독립하자마자 생존을 위해서는 북미 대륙을 반드시 하나의 국가로 건설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고, 이 선택은 세계를 지배할 지리적 여건을 만들어 냈다.

‘소련 봉쇄’라는 부동산 리츠 투자:
그런데 미국의 성공 투자 스토리가 여기서 끝났다면 절대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없었다. 20세기 들어 글로벌 강자로 부상했지만 유라시아 대륙에는 여전히 경쟁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구대륙의 신생국 소련이 눈에 거슬렸다. 소련은 미국과 손잡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파트너였지만 전쟁이 끝나자 패권국으로 급부상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이 사실상 초토화되면서 무주공산이 된 유라시아 대륙을 독차지하게 된 셈이었다.

거대하고 단일한 영토는 초강대국으로 가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일단 울타리를 만들었으면 다른 나라가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법.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내부에서 울타리를 더 튼튼히 보강하거나, 아니면 아예 문밖으로 나가 잠재적 위협 세력을 미리 꺾어 놓는 것이다. 미국은 후자의 방식을 택했다. 자기 집 울타리만 튼튼히 보수하는 것으로는 불안하니 아예 동네 전체의 치안에 관여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이게 바로 미소 냉전의 시작이 된 소련 ‘봉쇄 정책’이다. 봉쇄 방법은 간단했다. 소련의 팽창 권역에 들어갈 만한 곳을 선점해 미국의 영향권으로 만들고, 마셜플랜으로 대규모 원조를 제공했다. 말하자면 루이지애나를 매입한 건 부동산에 대한 직접 투자였지만 소련 봉쇄는 주요 지역에 간접 투자하는 부동산 리츠 투자에 가까웠다.

‘봉쇄 정책’은 미국 외교관이었던 조지 F. 케넌이 1947년 7월에 처음 언급한 용어다. 케넌은 1946년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간파한 뒤 본국에 사전 경고를 보낸다.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주요 요소가 소련의 팽창 경향을 장기적이고 끈기 있으면서도 확고하고 주의 깊게 봉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케넌은 소련이 팽창하려는 의지는 서구 진영이 무엇을 하든 말든 아무 관계 없는 소련 정권 내부의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소련의 당 노선은 국경 너머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토대로 정해지지 않는다. 소련 내부의 필요에서 비롯된다. 크렘린 지도자들은 정교하지 못해 억압 말고는 달리 통치하는 방법을 모른다. 바깥 세계를 사악하고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로 그리는 것이 그들이 그러한 핑계를 정당화하는 방편이다.”

아울러 케넌은 이런 내부 요인 때문에 소련이 언젠가는 소멸할 것으로 예측했다. ‘크렘린이 여전히 발하는 강한 불빛이 실제론 소멸하고 있는 별자리의 강한 잔광이 아니라고 그 누가 확언할 수 있겠는가…. 소비에트 권력은 그 안에 자멸의 씨앗을 품고 있으며, 이 씨앗이 싹을 틔우는 과정이 착착 진행될 가능성이 유력하다.” 케넌의 이런 생각은 곧바로 미국의 대소련 정책으로 구체화됐다. 케넌이 ‘소련 봉쇄 정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상대가 살 만한 곳을 미리 확보하기:
그럼 어느 길목을 지키고 누구를 도와줘야 하는가. 바로 여기서 부동산 흐름을 살피면서 핵심 입지를 선점하는 투자 안목이 필요하다. 케넌이 제시한 것은 거점 방어 전략이다. 절대로 소련이나 적대 세력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되는 지역을 선별해 방어하는 개념이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역량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이익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케넌은 당시의 산업화 정도와 군사력 등을 토대로 지정학적 세력권을 5개로 나눴는데 미국, 소련, 영국, 유럽, 일본 등이다. 소련을 제외한 나머지가 거점 방어 지역인 셈인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a. 대서양 공동체 지역, 캐나다, 유럽 대부분. 아프리카 서부 해안의 볼록 튀어나온 지역, 남미 북부 불룩하게 튀어나온 지역부터 시작되는 국가들.b. 지중해 국가들과 이란을 포함해 동쪽 끝까지 아우르는 중동.

C. 일본, 필리핀.



실제 지도를 펼쳐 놓고 a, b, c 지역을 전부 연결하면 소련이 밖으로 팽창하지 못한다. 거점 방어 개념은 선택과 집중 전략이다. 당시 거점 방어 지역에서 한반도는 제외됐다. 그때만 해도 남한은 미국 입장에서 중요한 투자처가 아니었던 셈이다. 만약 한반도가 소련에 먹히면 기분은 나쁘겠지만 딱히 손해는 없는 자투리땅 정도 되겠다. 1950년 1월 미국의 방위 목표에서 한국을 제외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거점 투자에서 자투리땅까지 싹쓸이 투자로:
거점방어 전략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격이 크게 변했다. 애초에 케넌은 봉쇄 전략이 군사적 수단보다 마셜플랜처럼 경제적 수단에 집중해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 소련의 위협이 짧은 시간에 급격히 커지면서 군사적 수단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빠르게 힘을 얻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애치슨 라인으로 거점 방어의 상징이 된 애치슨 장관이 대표적이다. 이제 미국에서는 안보 이익을 필수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으로 나누기 불가능하다는 시각이 커졌다. 핵심 이익이 걸리지 않은 주변부 지역이라도 막상 소련의 공격을 받으면 갑자기 핵심 지역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거점을 선별해 방어하는 기존의 케넌식 전략 대신에 변경을 따라 늘어선 지점들이 골고루 중요한 만큼 모든 변경을 방어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한마디로 미국은 세계 그 어디서든 소련이 영토를 취득하거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해 소련 봉쇄 전략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게 바로 트루먼 행정부가 1950년에 내놓은 군사안보전략 NSC 68이다. ‘냉전의 서문을 연 문서’인 NSC 68은 소련 봉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군사적 대응을 맨 앞에 뒀다. NSC 68은 어떤 도발이라도 그 즉시 대응하지 않으면 결국 이미 때는 늦고 대응할 힘도 없게 되며, 대안이 점점 줄어들어 절박해지는 상황으로 빠져들게 된다고 경고했다. 당시 워싱턴에서는 봉쇄 정책의 방향성을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는데, NSC 68이 힘을 얻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한국전쟁의 발발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애치슨 선언은 스탈린에게 용기를 줬다는 분석이 다수설이다. 남침을 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이 막상 38선을 넘어 내려오자 트루먼은 갑자기 소련과 한판 붙어 보기로 결심한다. 스탈린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한반도에는 관심 없거든’ 하며 선을 그어 놓고 나서는 막상 전쟁이 나자 ‘소련이 먹는 건 못 보겠거든’ 한 셈이니 말이다.

당시 다른 나라는 미국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안보를 의탁할 만한 존재인지 시험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국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결국 트루먼이 한국전쟁에 뛰어들기로 한 것은 남한 자체가 핵심일 정도로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공산주의의 노골적 공격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면 보다 중요한 지역에서 미국이 쌓으려고 애쓰던 신뢰가 산산조각 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작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뺐던 애치슨이 나중에 “한국이 우리를 구했다”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판짜기는 성공할까 … 다 계획이 있는 미국?



왜 미국은 중국과 ‘헤어질 결심’을 포기했을까


2023년 6월 19일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 시진핑 중국 주석이 테이블 가운데 상석에 자리했다. 중국의 외교 수장인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맞은편에서 약간 다소곳한 자세로 시진핑을 바라보는 사람은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었다. 미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한 건 마이크 폼페이오 이후 5년 만이고, 바이든 행정부 들어선 처음이다. 세계적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는데 시진핑은 보란 듯이 블링컨을 하대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대국의 주요 인사를 접견할 경우 나란히 배치된 의자에 앉는다. 대등한 위치에서 면담하는 게 의전의 기본 프로토콜이다. 시진핑 역시 2018년 6월 폼페이오 당시 미 국무장관과 면담할 때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이날 만남은 회담 자체보다 회담 자리 배치가 메시지란 해석이 나왔다. 마치 시진핑이 “미중 경쟁 구도에서 중국은 아쉬울 게 없다. 정작 답답한 건 미국이고, 그러니 먼저 달려온 게 아닌가. 중국은 그저 만나준 것뿐”이라는 메시지 말이다.

공교롭게 블링컨 장관이 중국에 가기 한 달 전 윌리엄 번스 CIA 국장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했다. 블링컨이 다녀간 직후인 7월 초에는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그로부터 열흘 후에는 오바마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존 케리 미국 기후변화 특사가 중국을 찾았다. 모두 미국 측이 먼저 제안한 만남이었다. 바이든 정부의 중량급 인사들이 갑자기 앞다퉈 중국을 찾은 건 이전과 다른 시그널이 분명했다. 인간관계도 그렇지만 국제 외교 관계도 대개 아쉬운 국가가 먼저 관계 개선에 나선다. 이쯤 되면 미중 경쟁은 중국이 주도권을 쥔 모양새다. 그런데 정말 중국이 주도권을 쥔 것일까.

중국 때리기로 대동단결한 미국:
미국 정치권도 우리나라 못지않게 정치 양극화와 팬덤 정치가 심각하다. 하지만 이런 미국 정치권도 어렵지 않게 대동단결하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대중국 전략이다. 최소한 2010년대 들어 “중국을 손봐야 한다”는 데에는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의견 일치를 본 상태다.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으로 정권이 왔다 갔다 하며 이전 정권의 색채를 철저히 지우면서도 중국 때리기는 매번 강화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대외 정책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놀라울 정도로 의견 일치를 보인 건 사실상 냉전 이후 처음이다.

헤어지는 대신 4주간 조정 기간을:
그러면 미국은 어떻게 중국을 손봐야 할까? 그 해답이 바로 ‘디커플링(decoupling; 탈동조화)’ 전략이다. 디커플링은 쉽게 말해 커플 관계를 끊는다는 뜻이다.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것이다. 애초 주식 시장이나 환율, 무역 관계 등에서 쓰이던 생소한 용어가 국제면에 자주 오르내리는 대중적인 표현이 된 것은 대체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을 수정주의 경쟁자로 규정하기 시작한 2018년 전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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