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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에 핀 무궁화꽃

김홍기 지음 | 미다스북스


브라질에 핀 무궁화꽃

김홍기 지음

미다스북스 / 2024년 4월 / 320쪽 / 30,000원





해방과 북한 탈출, 피난민 생활과 서울 정착



유소년 시대 고향 이야기


나는 1933년 평양에서 김규훈 씨와 오선희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평남 안주시의 만석꾼인 오정도 씨의 막내딸이며, 아버지는 평남 평원군의 오천석꾼 김대철 씨의 외아들이었다. 2대 독자인 아버지는 당연히 가문을 이어 가산을 지켜야 했었다. 그럼에도 모험성과 기업가 정신을 가졌던 아버지는 일찍이 할아버지에게 유산의 일부 토지를 달라고 하여 이를 팔아서 일제 강점기 초기 건설업 붐이 한창이었던 함경도로 단신 외유의 길을 떠나 건설업에 투신하였다. 함경북도 흥남시에 ‘환금조’라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크게 성공한 아버지는 내가 7살 되던 해에 비로소 어머니와 나를 데려갔다.

산전수전 끝에 밟은 자유의 땅 38 이남


해방을 맞은 38선 이북 땅에는 가장 포악한 소련군이 점령하였다. 아버지는 그 많은 땅과 재산을 버리고서라도 하루빨리 이남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으로 금괴와 현찰을 모았다. 참고로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라진 축항공사’와 ‘강원선 철도 공사’(일부) 등을 통해 축재를 한 대표적 친일 부르주아로 몰려 소련 군정에 의한 공판 및 즉결 총살처분 대상인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아무튼 낮에는 깊은 산림과 수풀 속에 숨어 가며 밤길에 산등을 타고 또 넘고, 강을 건널 때는 숨을 죽여 가며 약 2개월에 걸친 야행 도주 끝에 드디어 개성 외곽의 자유의 땅 이남에 도달하였다.

서울 중구 필동에 안착, 고향의 보물 찾아 북으로 / 평양 생활 1년, 황해도 피난길에 오르다
그 후 우리 세 식구는 어머니 6촌 언니 집에서 그해(46년) 말까지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고향 친구들을 만나 필동에 살 집도 한 채 마련하고, 한 친구와 소규모의 토건업도 동업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 전 필수조건으로 한국어학원과 영수학원에 다니게 됐다. 나처럼 얼마 전까지 ‘조선학생 소학교’를 다녔더라도 한국어를 정식으로 배운 바가 아닌 터라 해방 초기에 유행한 한국어학원과 영어·수학원에 입학시킨 것이었다. 아마도 나의 영어 실력은 거기서부터 발굴되어 소질과 취미의 융합으로 정진한 것 같은데, 길거리에서 만나는 미군들과 쉽게 대화를 하곤 했다.

한편 어머니는 집에 파묻어놓고 온 금괴 및 보석 그리고 비단 등을 항상 아쉬워해 왔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못 견디겠다며 가지러 보내달라고 아버지께 떼를 쓰셨다. 아버지는 전문 38선 장사꾼 한 명을 가이드로 샀고, 나더러 어머니를 호송 동행하라고 했다. 1948년 2월 북녘 땅 우리 집에 도착해 보니 친구의 말대로 우리 집을 그 지역 소련군사령부가 점령해 쓰고 있었다. 우리는 소련군 경비원들이 설치는 바람에 여러 곳 가운데 처음에 파본 한 구덩이서 찾은 금목걸이와 금팔찌 몇 개만 건지고, 특히 가장 큰 보물고인 금괴 구덩이는 파보지도 못한 채 잡힐 뻔까지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도망쳐 나왔다.

이후 황해도 해주시에 나가 후퇴하고 있는 미 군병들을 보며 우리도 남하할 수 있는 방편을 찾던 중 후퇴군들 가운데 다른 지름길을 찾고 있는 ‘미 종군기자단’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 영어학원에서 배운 영어 덕분으로 그들에게 지름길을 찾아주기로 하고, 나와 어머니도 같이 남하했다. 이후 부산 범일동에 산다는 아버지의 친구 이름을 기억했던 어머니의 기억력 덕에 범일동 동회사무소를 찾아 그분의 주소를 알게 되었고, 그분과 가족들이 모두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며 방 한 칸을 기꺼이 내어줘 짐을 풀게 되었다. 그리고 약 한 달쯤 지나서야 기차로 피난 온 아버지가 찾아와 우리와 합류하게 되었다. 버거운 친구 신세를 한 반년 지고 나서 아버지는 피난민수용소에서 쌀과 밀가루를 배급하며 구제품도 준다고 하여 우리 가족을 데리고 부산 영도 피난민수용소로 이사했다.

영도 피난민수용소에서 ‘제2의 고향’ 부산 생활


나는 미 종군기자들과 헤어지며 “기회가 닿으면 꼭 미국유학을 갈 것”이라고 약속한 후부터 몰두하고 있던 미국유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산 영수학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던 중 부산 미군본부에서 통역관 시험을 보게 되었다. 운 좋게 수석합격을 하고 나니, “어떤 부서로 가고 싶으냐?” 하며 몇 곳을 추천해 주는 가운데 권력사정기관인 한 미군수사기관을 택했다. 그리하여 ‘제3 CID’의 통역관으로 배치되었다. 봉급이 좋아 우리 가족의 호구지책으로 충분하였고, 그때부터 ‘청소년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3대 독자’라는 구실보다도 미군사령부 수사기관에 속해있는 조건으로 인해 전쟁 피크였던 1952년에 강제징집을 피할 수 있는 혜택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미국유학의 꿈을 놓지 않고 미국대학 애플리케이션에 필요한 학적증명서를 얻기 위해 평남도민 사무처를 찾아갔다. 거기서 우연히 ‘고 조영식 박사’를 만났는데, 그는 같은 평양사람이라고 반가워하며 미국유학에 추천서도 해주겠다며 ‘신흥대학교’(경희대 전신) 입학을 강력히 추천했다. 그분 도움으로 평남도민처 발행의 ‘평양중·고등학교 졸업증’을 발부받게 되어 신흥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 후 USIS(미 공보처)가 주최하는 미국 대학 장학생 영어시험에 응하게 됐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한 미국대학의 Full Scholarship(학비 및 숙식비)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리노이주에 있는 Carbondale University의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족회의 결과 유일한 ‘밥벌이 가장’이 나였고, 그때 마침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있어서 떠날 수 없는 처지로 결론이 났다. 이후 53년 7월 휴전을 맞이했고, 우리는 그 이듬해인 54년 봄에 수복된 수도 서울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서울 수복으로 귀경, 4·19와 5·16으로 인생 대전환


나는 서울 미8군본부 제2 CID 수사관으로 승진전근 발령을 받아 출근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옛 친구들과 함께 토건회사 ‘이화상공주식회사’를 건립해 수복재건시장과 정부를 통한 정부청사 복원청부업에 본격 투입하게 되었다. 아버지 사업도 꽤나 잘 되는 편이었고, 나 또한 잘 나가는 편이었다. 나에게는 수사관이라는 직책이 주는 시간의 신축성과 지프차 한 대가 배차돼 있어 학업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정외과 3학년으로 편입해 결국 경희대학을 졸업하게 됐는데, 이것이 앞으로 있을 ‘모교 창립자’ 고 조영식 박사와의 깊은 인연의 출발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붕괴한 1959년부터는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악화돼 회사의 정상운영과 사장직책 수행이 어렵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사장대리 직분으로 회사운영을 맡게 되어 나의 직장에 사표를 내고 회사운영을 8군 건설 청부업으로 돌려 본격 투신하게 되었다.

한편 책깨나 좀 봤다던 20∼30대 젊은이들에겐 4·19에 흘린 젊은 피 덕으로 반만년 만에 처음으로 얻게 된 참 민주주의의 순을 잘라버린 군벌 쿠데타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자유주의에 빠져있던 나도 당시에는 그 무리에 속한 단순, 단견, 단파의 한사람이었다. 집안 내력으로 술을 즐기던 나는 술좌석에서 ‘반(反) 군정타령’으로 떠들다가 치안국 정보과에 한두 번 잡혀가는 신세가 된 적도 있었다. 당시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나라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정치적으로는 암흑시대이며, 경제적으로는 북한이 100불을 육박하는데 한국은 68불의 개인 GNP로 그야말로 “가망이 천리로구나.” 한탄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동대문, 남대문, 평화시장의 ‘38 따라지 또순이들’을 인정과세의 특별 Blitz(급습단속) 대상으로 차별압박을 하는 양상이 비쳐져, 이북 출신인 나로서는 여러 복합적 사정 때문에라도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여 평2중 선배였던 보건사회부 한국진 차관을 통해 그 행정부 산하에 있던 한국이민협회를 찾아 브라질 이민단에 가입하게 되어 인생 개벽의 새로운 운명의 길-한민족 해외 750만 디아스포라 형성 현대사의 초대 한민족 해외 대이동을 인솔한 역사의 길-에 오르게 된다.



브라질 땅에서 겪은 고난사



고행 끝에 도착한 브라질, 국제고아가 되다 / 박동진 대사의 어이없는 궤변


우리는 두 달간 고난의 항해 끝에 브라질 리오항(港)에 도착했고, 마중 나와 안내를 하기로 한 사람을 기다렸다. 그런데 두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안 나왔다. 당초 한국에도 잠시 나왔었던 지주(地主)회사 사장의 사위가 나오기로 돼 있었는데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것이었다. 해가 떨어지는 저녁 무렵이 되어가자 ‘아 이거 사기당했구나, 국제사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 한국 대사관의 영사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그 영사에게 “우리가 지금 길거리 노숙을 할 판인데 대사관에서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나 그 영사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나는 이 사람하고 이야기하긴 틀렸다고 생각해서 “책임 있는 높은 사람을 불러 달라.”고 요구했다.

이후 두 시간쯤이 지난 뒤 한 신사가 나타나 “내가 박동진 대사요.”라고 인사를 했다. 나도 “이민단 단장인 김홍기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면서 “먼저 왔던 영사인지 하는 사람에게 보고를 받았겠지만 우리는 지금 갈 데가 없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나중에 따지더라도 우선은 잠시 쉴 곳을 좀 마련해줘야겠다.”라고 말을 건넸다. 이에 박동진 대사는 “본국에서 훈령 받은 것이 없는 만큼 아무런 대책이 없다.”며 “여러분들은 사장(社長) 이민으로 원래 상파울루로 가게 돼 있지 않느냐?”고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참다못해 “우리는 한국 정부 승인 아래 브라질 정부의 이민 비자를 받아 “미나스제라스주(州)의 한 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러 온 사람들로 상파울루하고는 관계가 없다. 지금 여기서 논쟁을 할 때가 아니니 하룻밤 잘 수 있는 여관, 아니면 피난민수용소라도 구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박 대사는 “그런 걸 내게 요구하면 어쩌란 말이냐. 여러분들은 말이 정책 집단이민이지 사실은 자유이민 아니냐?”라고 강변을 늘어놓았다. 참고로 우리가 이민을 준비하면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사장이민’, ‘귀족이민’이라는 것이었는데, 박 대사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당장 어떻게든 하룻밤을 보낼 곳을 찾는 것이 다급했기에 통사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박 대사는 예산 타령까지 해가며 대책이 없다고 계속 발뺌을 했다. 나는 박 대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제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 “대사님은 훗날 역사적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던지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이것이 나와 박 대사의 악연(惡緣)의 시작일 줄이야.

이국 땅에서 만난 동포는 친척 / 아리랑 농장 마구간에서의 생활


모두들 한숨을 쉬며 대책 없이 앉아만 있을 때 브라질에 먼저 이민 온 세대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번 이민단에는 1차 이민 때 재산 처분을 다 못해 남았던 부인, 군대 제대가 늦었거나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해 미처 1차에 합류하지 못한 자녀 등 40~50명이 같이 왔는데 그들을 데리러 온 것이다. 나는 어쨌든 브라질 지리를 아는 그들을 만난 것이 반가워서 그들에게 현재 거처를 물었다. 그들은 상파울루에 있는 여관에서 방을 얻어 살거나 혹은 교민회 뒷방, 창고에서 지낸다고 했다. 나는 “외국에서 만난 동포는 모두 친척이다”라는 부산 피난 가서 써먹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에게 이번 2차 이민단 세대들을 맡아 달라고 사정했다. “방이 없으면 부엌이나 뒷간이라도 있을 것 아니냐”고 한 사람 앞에 한 세대를, 또 방이 한두 개 더 남을 것 같거나 창고에서 산다는 사람에게는 두 세대를 맡아달라고 강제로 떠맡겼다. 그렇게 해서 2차 이민단 절반 이상의 거처가 해결됐고 또 많은 세대들이 영어 몇 마디라도 가능한 자녀들을 믿고 근처 여관방이라도 찾아보겠다고 떠났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우리 가족을 포함해 열 세대가 남았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가는 데로 따르겠다고 했다.

한편 마침 이번에 온 잔여가족을 만나러 온 사람들 중에는 뭐 장사할 것이 없을까 하여 나온 이들도 몇 명 있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이 “정 갈 데가 없으면 상파울루 근처 ‘준디아이’라는 동네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그곳에는 한국사람 10여 세대가 바나나 농사를 지어볼까 하여 작은 땅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빈 마구간이 4개나 있으니 거기라도 가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그 아리랑 농장 얘기는 서울에서 들은 적이 있기에 어찌나 반가운지 당장 가자고 서둘렀다. 문제는 열 세대 40여 명이 이동할 차편이었다. 나는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서 같이 배를 탔던 브라질 일본인 2세 의사로부터 선상(船上)에서 두 달 동안 배운 브라질 말에 손짓 발짓 섞어 겨우 버스 한 대를 대절할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한국 동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얼마나 반갑게 맞이하는지 역시 ‘동포는 친척!’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흰쌀밥과 고깃국에 김치까지 차린 밥상을 내왔고 자기들 집 거실을 내주어 하룻밤을 지내게 했다. 다음 날 마구간을 찾아갔다. 소똥 말똥도 여기저기 널려 있는 마구간에 칸막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식구가 적은 세대는 서너 세대를 한 마구간에 넣고, 식구가 많으면 한두 세대를 한 마구간에 넣는 식으로 배분을 해서 마구간 네 개를 우리가 차지했다. 그리곤 이불보를 뜯어 칸막이를 만들었지만 천장이 없어 드러누우면 별이 총총한 하늘이 다 쳐다보였다.

그런 생활이 열흘 가까이 지났는데 이번엔 난데없이 방울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누가 물리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더 있다간 브라질 원숭이가 되고 말겠다.’는 걱정스런 이야기가 나왔고 이에 더해 “우리 상파울루에 가보자. 그곳에 우리 동포는 물론 일본사람들도 많이 산다고 하니 한번 구경이라도 가보자”는 얘기가 돌았다. 그리하여 나는 마음을 정하고 상파울루를 들러보러 떠날 채비를 하게 됐다.

교육도시 ‘모지’가 눈에 꽂히다


마구간에서 같이 생활하는 세대주 네 사람과 함께 상파울루에 가기 위해 교통편을 찾던 그때 마침 그라지오라스 꽃을 큰 규모로 재배해 장사를 하는 일본 사람을 만났다. 이 일본 사람은 봉고차를 몰고 상파울루 꽃 도매시장으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는데, 우리는 운 좋게 그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그렇게 한 세 시간여를 달렸을까, ‘모지’라는 도시에 도착했는데, 그 일본 사람이 그곳에도 배달할 꽃이 있다며 우리들에게 잠시 따로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도시 구경에 나섰다.

그 도시에는 일본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내가 일본말을 할 수 있으니까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던 중 조그만 차고에 차린 한 구멍가게가 눈에 띄었다. 한국에서 보던 구멍가게와 똑같은 모양으로 감자, 배추, 토마토에 콩과 쌀도 파는 가게였는데, 주인이 아니나 다를까 한국 사람이었다. 그는 1차 영농이민단으로 빅토리아(에스피리또 산토주)라고 하는 아열대 지방으로 갔다가 팔뚝만 한 뱀들의 출몰에 질겁하고 그곳에서 뛰쳐나온 지 6개월밖에 안 되었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기엔 완전히 자리를 잡은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일본 사람이 주변에서 야채농사를 짓고 있으며 이곳에 있는 중남미에서 제일 큰 양계부화장 세 곳의 주인도 일본인 2세라는 얘기도 들었다.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우리도 잘하면 이곳에서 먹고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우리도 이런 걸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누구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다만 여기 터줏대감으로 있는 성공회 교회의 일본인 신부로부터 후견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안내를 받아 신부를 만났는데, 그는 영국 에피스코팔 교회의 신부로 통통한 체구에 인품이 훌륭한 듯 보이는 영감이었다. 나는 정중히 일본말로 인사를 드린 뒤 땅을 사기당한 사정을 설명하고 여기서 살게 도와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속으로는 우리를 그 교회 교인으로 끌어들일 생각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로서는 신도가 될 가능성이 있는 우리가 반갑고, 우리는 우리대로 도와주겠다는 그가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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