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맥주 이야기
무라카미 미쓰루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사를 바꾼 맥주 이야기
무라카미 미쓰루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4년 4월 / 413쪽 / 20,000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맥주 이야기
19세기에 아메리카로 수출된 독일 아인베크 맥주병 라벨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까닭중세 시대의 교회가 저지른 최악의 부패를 꼽으라면 단연 ‘면벌부(免罰符)’ 판매였다. 면벌부란 사람들이 지은 죄를 로마교회가 사해 준다는 증명서다.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돈을 받고 면벌부를 판매하는 부도덕한 행위에 분노를 느꼈다. 마르틴 루터는 그 유명한 <95개 논제>를 썼다. 이후 논제는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효과는 놀라웠다. 독일 전역에서 면벌부 판매를 반대하는 물결이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논제 철회를 요구하기 위해 루터를 제국회의에 소환했다. 이것이 보름스 제국회의의 ‘마르틴 루터 심문 사건’이다.
제국회의가 열렸다. 황제와 제후들이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담이 큰 루터도 이때만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루터의 비서이며 신교도이던 여성이 1리터들이 맥주잔을 들고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잔을 받아 든 루터는 맥주를 마신 뒤 의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의 두 뺨에는 홍조가 번져 있었다. 이후 루터의 격정적 연설과 뚝심 있는 행동은 유럽 종교사와 세계 역사를 바꿔 놓았다.
중세의 맥주는 장기 보관이 가능해야 했다. 마차에 실어 이국까지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양조업자들은 잡균에 오염되지 않게 하고 맛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원맥 즙 진액 농도가 높아 알코올 농도가 높고 다량의 홉을 첨가하여 진한 빛깔을 띠는 맥주가 그런 맥주였다. 이런 수출용 맥주를 ‘강한 맥주(strong beer)’라고 불렀다. 다시 마르틴 루터로 돌아가자. 그는 아인베크에서 양조된 수출용 ‘강한 맥주’로 체력을 강화하여 황제에게 맞서기 위해 당당하게 회의장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린 황제 카를 5세, 가톨릭 사제였던 루터와의 대결에서 패배하다제국회의에서 루터가 보여 준 용기 있는 태도와 자기 변론은 유럽을 움직였다. 그런 흐름 속에서 루터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제후의 숫자가 늘어났다. 카를 5세는 루터를 풀어 주었는데, 그는 그 사태를 어떻게든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더욱 과격한 행동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했다. 급기야 카를 5세는 반가톨릭 단체인 ‘슈말칼덴 동맹’과 무력으로 충돌한다. 황제 군은 반가톨릭 연합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카를 5세는 측근 작센공 모리츠의 배신으로 패배를 겪는다. 결국 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역사적 선언을 하게 된다. 카를 5세가 마르틴 루터에게 완벽하게 패배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브라운슈바이크의 영주가 루터에게 맥주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쩌면 제국회의장에서 그가 마신 맥주가 이 맥주일 가능성이 크다. 아인베크의 길드는 루터에게 맥주를 보내 용기를 북돋아 준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타고난 장사꾼인 그들은 그 사건을 자신들의 맥주 홍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미국 수출용 맥주 라벨에 루터의 초상화가 새겨진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히틀러는 왜 비어홀을 정치 집회 장소로 자주 이용하고 그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을까
호프브로이하우스를 유명하게 만든 두 역사적 인물, 빌헬름 5세와 아돌프 히틀러바이에른에서 생산된 맥주는 북부 독일의 맥주에 비해 품질이 떨어졌다. 15~16세기의 상황이다. 그 무렵 북부 독일은 맥주에 대한 평판이 높았는데, 특히 아인베크 시의 ‘아인베크 비어’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5세는 이 맥주를 유난히 사랑했다. 그가 맥주를 열정적으로 수입해서 마셔 대는 바람에 궁정 재무 담당자는 늘 골머리를 앓았다. 빌헬름 5세가 아인베크 비어를 양조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는 전용 양조장을 짓는 일에 몰두했고, 그 장소로 뮌헨 마리엔플라츠의 호프브로이하우스가 낙점되었다. 그러나 호프브로이하우스 궁정 양조장의 수명은 짧았다. 궁정 양조장이 시민 양조장으로 바뀐 까닭이다. 이곳에서 양조된 궁정용 맥주는 뮌헨에서 란츠후트와 슈트라우빙, 그리고 레겐스부르크 세 궁정 별관의 부속 양조장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다가 서민에게도 판매되기 시작했다.
호프브로이하우스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역사적인 인물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호프브로이하우스는 히틀러가 대규모 나치스 집회를 연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당대의 비어홀은 왜 그토록 자주 정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을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 점을 짚어 보자.
나치스는 왜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대연회장을 집회 장소로 선택했나마리엔플라츠는 뮌헨 번화가의 중심부에 있고, 이곳에는 시청사가 들어서 있다. 이 시청사 꼭대기에 시계가 있는데, 하루에 두 번 음악 소리에 맞추어 인형이 춤을 추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시청사 건물 지하에 술집(라츠켈러, Ratskeller)이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외적의 공격에 대비해 성벽을 지어 도시를 둘러쌌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빈을 예로 들면, 이 도시 역시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쌓았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성벽은 쓸모없는 시설물이 되고 말았다. 이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성벽을 부수고 수도 빈 시내를 전면 재개발하기로 한다. 1858년의 일이다. 성벽이 세워져 있던 자리는 도시를 둥글게 감싸는 길, 즉 링슈트라세(Ringstraße)로 재탄생한다.
링슈트라세의 안쪽 도시에는 중심부에 시장이 들어서고 시청사와 교회가 세워졌다. 시청사 앞에는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광장은 시민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소통의 공간이었고, 시의 행정을 담당한 주체는 의회였다. 시청 지하에는 식당이 있었는데 의원들의 교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식당에는 양조장이 딸려 있어 맥주가 식사 시간이나 집회 때 제공되었다. 이런 식으로 지하 식당은 집회 장소의 기능도 담당했다. 이후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시청사가 개방되면서 지하 식당은 비어홀, 레스토랑으로 꾸며져 시민 교류의 장으로 변모했다. 이제 유럽 도시의 비어홀은 집회 장소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나치스가 뮌헨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대연회장을 집회 장소로 선택한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세계적인 축제 옥토버페스트의 기원이 된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왕자와 작센 공주 테레제 결혼식 축하 경마대회옥토버페스트는 맥주 축제의 대명사로, 축제 기간에 전 세계인이 뮌헨으로 몰려든다. 축제는 2주 동안 열리는데 항상 10월 첫째 주 일요일이 마지막 날로 정해져 있다. 이런 이유로 10월 1일이 일요일인 해에는 ‘옥토버페스트’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축제는 10월이 아닌 9월에 진행된다.
뮌헨에는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는 맥주 회사가 있다. 파울라너, 슈파텐프란치스카너, 뢰벤브로이, 아우구스티너, 하커프쇼르 그리고 호프브로이하우스다. 이 6개 회사의 양조장만 옥토버페스트에 천막을 설치할 수 있고, 대형 천막을 설치해 비어홀을 운영한다. 천막 수는 9~10개 정도다. 천막 하나당 수용 가능 인원은 약 5,000명으로, 총 5만여 명이 맥주를 마시며 즐길 수 있다. 옥토버페스트의 1일 평균 방문객 수가 50만 명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천막 수는 적절해 보인다.
옥토버페스트는 맨 처음 바이에른주의 시골에서 열렸다. 1810년의 일이다. 바이에른 왕국의 왕자 루트비히와 작센 공주 테레제의 결혼을 축하하는 경마대회가 그 시발점이었다. 경마대회가 열린 들판은 이후 테레제 공주의 이름을 따서 ‘테레지엔비제(테레제 공주의 목초지)’라고 불렸다. 오늘날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장소가 바로 테레지엔비제다.
왕실 결혼 기념 행사로 마련된 경마대회는 뜨거운 열기에 힘입어 이듬해에 다시 개최되면서 농업 전람회 등과 결합해 가을 축제로 발전해 갔다. 그러므로 뮌헨이 ‘맥주 도시’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 데 있어 경마대회가 기폭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년이 지나 맥주를 판매하는 노점상이 축제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다시 몇 년이 지난 후 왕실 결혼 기념 경마대회는 맥주 축제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맥주의 발상지, ‘신도 포기한 땅’ 남부 메소포타미아
‘신도 포기한 땅’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어떻게 문명 발상지이자 맥주의 발상지가 되었나?맥주의 발상지는 메소포타미아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3500년~기원전 3000년 무렵의 일이다. 이곳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흐르는 지역인데, 두 강이 만나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농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 농작 문화를 정립하고 도시를 발달시킨 민족은 수메르인이었다. 당대의 수메르인은 관개농법을 활용하여 곡물을 수확했고, 이 곡물로 맥주를 만들어 마셨다.
위의 내용만 보면 메소포타미아가 축복받은 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극심한 건조 지역으로, ‘신이 포기한 땅’으로 불리던 지역이다. 한편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어떨까? 일테면 티그리스강 중류 유역에 위치한 모술에 있는 평원은 비옥한 곡창지대였다. 그렇다면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어떻게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상지가 되었으며 맥주의 발상지가 된 걸까?
기원전 3500년~기원전 3000년 무렵 ‘수메르인이 맥주를 발명했다’라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이유대규모 관개농업이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바이드 초기부터 ‘신도 버린 땅’과 뚝심 있게 싸워온 선주민들의 역사의 연장선에서 개발된 기술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관개수로를 설치해 서투르게나마 관개 농업을 시작했고 마침내 곡물 수확에 성공했다. 머지않아 남부 메소포타미아도 농업 생산력 향상이 이루어져 잉여 생산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의 자생력을 갖게 되었다. 우바이드 말기의 상황이다. 그 후 수메르인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선주민의 생활 기반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치수에도 성공해 농업 생산력 향상을 이루어 문명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제 맥주로 초점을 옮겨 보자. 수메르인은 맨 처음 맥주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고대인이 즐겨 먹던 ‘곡물죽’을 이용해 술을 빚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빵’을 이용해 술을 빚는 방법이다. ‘신석기시대에 요리를 담당했던 여성들은 곡물을 발아시켜 소화를 촉진하도록 해서 먹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레이 태너힐이 『음식의 역사』라는 책에서 밝힌 내용이다.
고대의 인류는 홍수가 나서 곡물이 물에 잠기거나 젖는 경우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곡물이 수분을 흡수하면 싹이 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또 그 곡물을 햇볕에 널어 말리면 배젖에 화학 작용이 일어나 부드럽고 향기로운 식품으로 변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잘게 부순 다음 따뜻한 물을 부어 만든 죽은 단맛이 나고 먹기에 좋아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고대의 인류는 단맛이 나는 음식을 한동안 놓아두면 술이 만들어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벌꿀이나 과일 등으로 얻은 간접 경험 덕분이었다. 그런 터라 우바이드 공동체 문화를 일군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선주민 역시 보리를 이용해 많은 술을 마셔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맥주는 기원전 3500년~기원전 3000년 무렵 수메르인이 발명했다’라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영국 에일에 치명타를 안긴 파스퇴르의 미생물 연구
영원할 것 같던 영국 에일의 위상을 추락시킨 파스퇴르의 미생물 연구잉글랜드의 작은 도시 버튼온트렌트에서 개발된 버튼 에일은 1630년대에 이미 여러 나라로 수출되었다. 그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버튼에 에일을 양조하는 대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8세기의 상황이다.
18세기 말 호지슨은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위해 인디아 페일 에일(IPA)을 개발했다. IPA는 알코올 농도가 상대적으로 높고 많은 양의 홉을 첨가해 오래 저장해도 변질되지 않는 수출용 담색 맥주였다. ‘맥주가 부패한다’는 것은 잡균이 침투해 ‘산패한다’는 의미다. 맥주에서 신맛이 나서 마시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당대의 맥주 양조업자들은 미생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 시대에는 냉동기가 없었기에 산패를 방지하기 위해 알코올 농도를 높이고 홉을 많이 넣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맥주와 관련해 ‘sub-acid’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약간 신맛이 난다’는 의미다. 이런 제품의 속성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브라운 에일의 장점으로서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사실 여기에서 나는 신맛은 맥주가 젖산균, 초산균 등 야생 효모에 오염되어 나는 맛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가벼운 산패’ 상태다. 호지슨은 이 ‘신맛’을 장점으로 내세워 신제품 IPA를 판매했다.
당대 영국의 맥주 양조 기술은 전 유럽을 압도했다. 특히 ‘온도 관리’ 기술은 매우 중요했다. 효모의 지나친 활동을 억제해 불쾌한 냄새나 나쁜 맛이 나지 않는 맥주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변화가 찾아온다. 에일과 라거의 위상을 뒤바꾸는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과학자 루이 파스퇴르다. 그는 뮌헨에서 개발된 저온저장 하면 발효법이 영국의 상면 발효법에 비해 ‘산패 방지’의 측면에서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또 산패의 원인이 ‘미생물’에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파스퇴르는 연구를 통해 에일의 성공률이 높게 잡아 80퍼센트 정도라는 점도 확인해 주었다. 예를 들어 100개 중 20개 양조장의 맥주는 산패하여 폐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버튼의 대기업들은 담금 과정을 뮌헨의 하면 발효법 양조 절차에 따라 기온이 낮은 겨울로 제한했다. 그리고 개발된 지 얼마 안 된 에테르식 냉동기를 들여 발효 온도를 관리했다. 이렇듯 버튼의 기업들은 전통 양조법에 뮌헨식 하면 발효 기술을 도입하여 품질 향상에 힘을 쏟았으나 전통이 체질 개선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버튼은 유니온 시스템을 이용해 양조를 했는데 이 시스템은 세정, 살균 작업이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생물이 서식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였다.
반면 하면 발효법으로 양조한 라거 맥주는 산패해서 폐기하게 될 위험성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연중 언제라도 양조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19세기 전반기까지 하면 발효법은 맥주 양조가들에게 매력적인 양조법이었다. 여기에 더해 파스퇴르가 발명한 저온살균법은 맥주의 위상을 ‘산패하지 않고 장기 보존할 수 있는 식품’으로 격상시켰다. 이렇게 되자 고전적인 에일양조법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중세 수도원은 왜 맥주 양조에 열을 올렸나
중세 시대의 수도원들은 왜 맥주를 양조하게 되었을까중세 시대에는 유럽의 대다수 수도원에서 맥주를 양조했다. 수도원이 왜 맥주를 양조하게 되었을까? 이 문제를 파고들자면 고대 로마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고대 로마는 라인강을 건너 습격해 오곤 하는 북방 이민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 북방 이민족은 게르만족이다. 그들은 보리로 만든 술을 마시며 거기에 홉의 일종인 풀을 섞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게르만족의 기세는 날로 강대해졌다. 이후 9세기까지 유럽이 게르만족의 영향권 아래 놓이면서 영국 또한 로마인이 물러간 자리에 게르만족의 한 분파인 앵글로색슨족이 들어와 새 시대를 이어 갔다. 로마인이 잉글랜드에 남긴 유산이 ‘와인’과 ‘도로’라는 말이 있듯 와인은 로마인이 마시던 술이다. 그렇다 보니 로마인이 잉글랜드에 들어오며 선주민 켈트족이 마시던 에일은 저급한 술 취급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