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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생성되지 않는다

박주용 지음 | 동아시아


미래는 생성되지 않는다

박주용 지음

동아시아 / 2024년 6월 / 340쪽 / 19,800원





1장 미래를 달리는 모터사이클



모터사이클을 고치는 가장 빠른 방법 [고전과 낭만]


대학교수가 모터사이클을 타게 된 사연:
모터사이클은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자연의 법칙을 온몸으로 맞게 한다. 당연히 불편한 점도 있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쓴맛이 주는 쾌감이 매력인 맥주와 같은 모터사이클의 본질이다. 햇살과 바람, 더위와 추위를 가리지 않고 그대로 만끽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성적 즐거움 그 자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솔로라이더에게는 끝없는 고독과 소중한 사색의 시간이다.

이러한 경험을 나만 한 것은 아니다. 『선과 모터사이클 정비의 예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의 저자인 로버트 퍼시그는 모터사이클의 탠덤 시트에 어린 아들을 태우고 미네소타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미국을 횡단한 경험을 기반으로 이 책을 썼다. 그는 책에서 만물의 가치의 척도인 ‘질(quality)’을 화두로 던지고, 그것을 고양할 방법을 사색한다. 그리고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할 때 대상에 대한 분석적이고 이성적 접근을 뜻하는 고전적 사고와, 그 과정을 정확하게 기술하기는 어려운 직관과 통찰로 이루어진 낭만적 사고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해야 한다는 철학을 설파한다.

퍼시그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쳤다. 하지만 새로움을 추구하는 창작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을 A부터 F까지 딱딱한 학점 체제로 평가하고, 그에 맞춰서 ‘객관’이라는 가치를 강요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높은 질을 갖춘 창작이 불가능한 학생들만 양산해 내고 있다는 사실에 깊이 고민하며 우울증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의 책은 모터사이클 여행을 통해 그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 여정처럼 읽힌다.

낭만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
퍼시그는 고전적 사고와 낭만적 사고가 동시에 적용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왜 굳이 모터사이클 정비를 꼽은 것일까? 간단하게만 생각하면 모터사이클 정비에 필요한 것은 철두철미한 고전적 사고로 보인다. 모터사이클은 직선에서 시속 150킬로미터까지는 쉽게 가속할 수 있는 기계인데, 라이더의 안전을 위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작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터사이클을 정비하는 데 직관이나 감성, 이른바 ‘때려 맞히는’ 불확실성의 자리는 없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매뉴얼을 순차적 논리적으로 따라가는 고전적 사고만으로는 모터사이클 정비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모터사이클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 어떤 특정한 부품이 고장 났는지 곧장 알기 어렵다. 모터사이클에 들어가는 부품의 수는 1만 개 정도(자동차는 약 3만 개, 여객기는 약 600만 개라고 한다)라고 하는데, 수만 개에 달하는 부품 가운데 문제를 일으키는 단 하나를 순차적으로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 나아가 그 1만 개의 부품은 서로 연결된 복합계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부품 하나가 고장 나면 연결된 다른 부품들도 고장 나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루에 5시간 일하는 정비공이 1만 개의 부품 전부를 보는 데 3.5일이 걸리고, 부품들 간의 연결 조합까지 생각하면 전체를 훑어보는 데만도 한 달은 넘지 않을까? 기계가 고장 날 때마다 이렇게 기다려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당연히 고전적인 사고만으로 충분할 것 같았데, 기계의 무한한 복잡도 속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면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직관과 통찰로 이루어진 낭만적인 사고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퍼시그의 깨달음이었다. 퍼시그는 모터사이클 정비와 마찬가지로 바로 눈앞에 있는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비전형적이고 낭만적인 사고가 반드시 필요하고 더 나아가 이는 진정한 가치를 찾는 토대가 된다고 보았다. 『선과 모터사이클 정비의 예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던 시기에 공허함을 느낀 독자들의 정신세계에 새로운 가치를 채워 넣어주었고 전 세계적으로 약 500만 부가 팔리면서 역사상 제일 널리 읽힌 철학책에 오르기도 했다.

마지막 르네상스인과의 인터뷰:
생각해 보면 과학을 한다는 것 역시 고전과 낭만의 결합이다. 과학은 매 순간 논리적 정합성과 엄격성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역사 속에 수없이 많다. 흔히 다방면에서 탁월한 실력을 갖추었거나 업적을 남긴 사람을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른다. 1000년 동안 유럽의 모든 것을 지배했던 교회의 도그마가 벗겨지며 건축, 기술, 미술, 생물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다빈치와 같은 르네상스기 인물들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표현일 텐데, ‘앙리 푸앵카레’는 ‘인류의 마지막 르네상스인’으로 불리며 그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푸앵카레는 그의 이름이 붙은 수많은 수학적 정리와 개념을 남겼으며, 현대 카오스 이론과 비선형 동력학의 선구자로도 유명하다. 창의성을 연구하던 심리학자 에두아르 불루는 푸앵카레를 인터뷰한 뒤 “푸앵카레가 생각하는 방식은 예술가의 그것에 가까워서 즉흥적이고 무의식을 헤매는 것 같고 이성적이기보다는 꿈꾸는 것 같고 순전한 상상력의 작업에 적합해 보였다”라고 증언했다.

현대과학의 아버지 가운데 하나인 사람에게서 순차보다는 즉흥, 의식보다는 무의식, 이성보다는 꿈, 현실보다는 상상을 보았다는 것. 그리고 모터사이클 정비를 위해서는 반드시 낭만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논리만을 이용하려다가 세계의 복잡성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우리 생활인들 모두가 한번 생각해 볼 만하다.



2장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사람들을 지배하는 AI를 지배하는 인간 [AI와 창작]


SF 작가 프랭크 허버트는 1957년 미국 북서부의 오리건 사구(Oregon Dunes)를 찾아갔다가 “도시, 호수, 강, 그리고 고속도로를 한입에 삼켜버릴 만한” 그 가공할 위력에 깊이 감동한다. 허버트는 그때 받은 느낌과 메시아(구세주) 개념을 핵심으로 봉건적 사회제도와 생태환경, 첨단 과학기술과 신비주의적 의례가 엮인 영웅 서사를 구상한다. 그 결실이 바로 1965년 발간된 <듄Dune>이라는 소설이다. 그리고 이후 5편의 후속작을 엮은 ‘듄 유니버스(the Dune universe)’가 완성된다.

죽음의 공포가 도사린 사막의 수많은 사구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멸문시키고자 아버지를 암살한 황제와 숙적 하코넨 가문의 추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어린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가 훗날 우주를 뒤흔드는 영웅으로 등극하려면 풀어야 할 인생이라는 수수께끼를 상징하며 줄곧 그를 위협한다. 소설 <듄>의 전반부를 영화화한 영화 <듄>에서 폴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생존을 위한 도전들을 극복하며 자신의 길을 닦아가는 창의적인 영웅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우주 영웅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
이 장대한 서사의 영화를 중심으로 ‘호모 크레안스(Homo Creans; 창작하는 인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현대의 AI 같은 신기술이 어떻게 쓰이는지 묻는 질문 앞에서 주로 그 기술의 경제성(상품성)이나 그 기술로 해결되는 특정 문제에 주목하곤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AI는 유통, 의학, 안면 인식 등 축적된 기존 데이터를 학습하여 정해진 패턴을 찾아내는 영역에서는 실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나, 인간의 창의성이 작동하는 창작 영역에서는 아직까지 그 정도 수준의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다.

창작이란 머릿속에 그려지는 착상, 귓가에 맴도는 악상, 말로 표현되기 위해 요동치는 시상을 각각 캔버스, 오선지, 원고지 위에 채워나가고 싶은 욕망,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 내는 실행력,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보여주고 역사에 남기고 싶은 의지가 관여하는 총체적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 없이 입력된 데이터로부터 글자를 뽑아 내뱉은 AI의 ‘작품’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감상자에게 생길까? 반면 ‘인간’ 감독의 작품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쓰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인간’ 관객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AI가 계속해서 발전하여 창작 과정에 조금씩 더 깊이 참여하게 된다 하더라도, 바로 이 점에서 창작하는 인간, 호모 크레안스와는 결정적으로 구별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을 AI와 본질적으로 다르게 하는 ‘인간다움’이란 것이 있는지, 또 있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와 관련해 우리가 되새겨볼 만한 이야기가 소설 <듄>에 나온다. <듄>의 세계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류가 있다.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human)’, 그리고 사고능력을 상실한 ‘사람들(people)’. 인류가 그렇게 둘로 나뉘게 된 계기는 사람의 사고를 대신해 줄 수 있는 AI의 출현이었다. 귀찮고 머리 아픈 생각 따위는 AI에게 맡겨버리는 편리한 길을 택한 ‘사람들’은 삶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AI를 조종하는 ‘인간’들에게 조종당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 지도자이자 메시아가 될 것으로 여겨지는 폴의 첫 시련은 그가 ‘인간’인지 생각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지 시험받는 것이었다.

<듄>의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가 척박한 사막에서 사구와 싸우며 써 내려간 우주적 영웅담이 소설 속 우주의 시민들, 그리고 그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도 감명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진정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 어떠한 기계도 진정한 호모 크레안스는 넘어서지 못할 것 같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남의 지배 아래에 제 발로 들어가지 않는 진정한 인간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말이다.



3장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혼돈의 모서리라는 가능성 [엔트로피와 창의성]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 직장을 따라 가족이 서독(독일 통일 전)에서 몇 년 동안 생활했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동갑내기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 외국인으로서 처음 가던 날, 평생 한국이라는 계(시스템)에 익숙해졌던 몸과 마음이 외국이라는 다른 계와 접촉하며 느꼈던 묘한 자극은 지금도 생생하다.

정상상태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
왜 서로 다른 두 계가 접촉할 때 새로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우리의 몸을 한번 보자. 호흡과 신진대사를 하며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몸은 단기적으로 볼 때 아무런 큰 변화를 겪지 않는데, 이렇게 ‘하던 대로 하는’, ‘있던 대로 있는’ 것을 물리학적으로 ‘정상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상상태라고 해서 모든 것이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정상상태에 있을 때도 몸 안에서는 무수히 많은 자연현상이 벌어진다. 다만 눈에 보이는 큰 변화가 단시간에 일어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정상상태에 있는 이질적인 두 계가 만나면 그 경계에서 생기는 ‘섭동(perturbation; 흔듦)’이 각 계의 정상상태에 충격을 가해 새로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섭동의 결과는 기존 정상상태의 완전한 파괴일 수도 있고, 약간의 변이가 가미된 새로운 정상상태일 수도 있다.

질서의 물리학적 의미:
접촉·섭동·충돌을 탐구하는 ‘경계의 과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질서(order)’다. ‘질서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계의 상태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의 반례를 만나는 순간. 질서가 깨지면서 ‘무질서’가 증가한다.

질서와 무질서의 개념을 과학적으로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친숙한 예를 들어보자. 지하철 출입문 양옆으로 가지런히 줄 선 승객들, 각종 책들이 듀이 십진분류법에 따라 정확히 서가에 꽂혀 있는 도서관의 모습 등을 우리는 질서라고 부른다. 이처럼 질서가 있는 계의 특징은 그 안에 있는 개체(승객, 물건, 책 등)들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그 계의 행위를 잘 통제(유사시 승객 유도)하고, 필요에 따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질서란 반대로 그 계를 잘 통제하거나 활용할 수 없는 상황을 뜻한다.

‘잘 정돈되다’라는 질서의 일상적인 뜻으로부터 ‘엔트로피(entropy)’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엔트로피는 외부의 자극으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화한 정도를 나타낸다. 지하철에서 승객들이 무질서하게 서 있을수록 약간의 혼란에도 서로 엉키고 넘어지며 언제 사고가 날지 알 수 없는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질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그 상태가 더욱더 심각해진다면 열차 운행 중단이나 역의 폐쇄처럼 정상상태가 완전히 무너지는 파국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엔트로피의 증가가 궁극적으로 우리를 파국에 이끌지 않도록 영원히 안정적인 정상상태를 쟁취할 방법은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해 열물리학에서는 단호히 ‘그런 것은 없다’고 답한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어떤 계의 엔트로피는 스스로 감소할 수 없으며, 다른 계와 접촉시켜서 한쪽의 엔트로피를 줄이더라도 접촉한 다른 계의 엔트로피는 그 이상으로 증가한다. 즉, 우주는 계속해서 더 무질서한 상태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 이 법칙을 근거로 아주 먼 미래 언젠가는 전 우주가 궁극의 무질서 상태에 접어들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극도의 불능상태에 도달하게 되며 이를 ‘열죽음(heat death)’이라고 한다.

천문학자들이 혜성이 지구로 날아들 확률을 계산해 세상의 멸망을 경고하는 영화 <돈룩업 Don’t Look Up>처럼 한순간에 멸망하는 종말의 공포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열죽음을 맞을 확률은 0에 가깝고, 현재 알려진 바로는 100년 내에 지구와 충돌할 확률이 제일 높은 천체는 2095년에 지구에 근접하는 7미터 지름의 소행성 ‘2010 RF12’인데, 그 확률조차 5%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열죽음의 파국을 상상하며 허무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내 동료 물리학자들 모두 열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은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는 열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버릴 만큼 인간의 상상력과 의지를 자극하는 재미나는 일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가능성:
경계를 통해 스며들어 오는 외부의 영향(섭동)에 계가 반응하고, 그 반응의 영향이 다시 경계 밖으로 전해져 섭동이 되는 것을 상호작용이라고 하며, 상호작용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되면서 나의 변화가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상대방의 변화가 다시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피드백(feedback;되먹임)’이라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존재인 ‘복합적응계’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공간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흥미로운 패턴을 보인다.

과거의 정상상태로 회귀하지도 않고,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채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공간의 경계면에 물리학자 노먼 패커드는 ‘혼돈의 모서리(edge of chaos)’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사람, 생물체, 사회 등도 복합적응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혼돈의 모서리는 물리학 이론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개념으로 자리 잡으며 외부로부터 전해지는 자극과 충격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에서 해법을 찾도록 하는 유연성, 창의성 등의 원천으로 이해되고 있다. 새로움이 탄생하는 공간으로서의 ‘경계’를 생각하면 두 명의 걸출한 예술가가 떠오른다. 바로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와 미국의 음악가 존 케이지다.

모네는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특히 야외에서 인간이 감각하는 대로 자연의 모습을 그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예를 들어, 그의 1899년 작품 <수련과 일본식 다리>를 보면, 모네의 인상주의가 당시의 미술에 왜 그토록 큰 충격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네는 외부의 자극(특히 일본 판화)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미술에서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그림이란 빛깔을 띤 화소들이 공간적으로 특별하게 배치된 결과물인데, 비슷한 빛깔의 화소가 큼지막하게 뭉쳐서 주변과 잘 구별되는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모양’이라고 부른다. 인상주의 그림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양의 그림들은 기독교 종교화나 정물화처럼 주제와 배경의 경계가 뚜렷한 것이 특성이었다. 이들 그림과 비교해 보면 주제와 배경의 경계가 없이 빛깔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모네의 화풍이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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