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정치, 직업으로서의 학문
막스 베버 지음 | 현대지성
직업으로서의 정치, 직업으로서의 학문
막스 베버 지음
현대지성 / 2024년 5월 / 248쪽 / 9,900원
직업으로서의 정치
서론여러분의 요청에 따라 이 강연을 진행하게 되었지만, 여러분은 여러모로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먼저 이 강연이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관한 강연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무의식적으로 내가 오늘날의 현안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까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 전체 속에서 정치 행위가 지니는 의미와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을 다루고 나서, 마지막으로 현안들에 대한 입장을 순전히 형식적으로만 제시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나는 오늘의 강연에서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가, 즉 정치 행위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가와 관련된 모든 질문은 완전히 배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은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무엇이고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질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정치와 국가: 정치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치라는 개념은 대단히 광범위해서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온갖 종류의 지도 활동을 포함합니다. 예로 사람들은 은행의 외환 정치, 중앙은행의 할인율 정치, 노동조합의 파업 정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심지어 남편을 조종하려고 하는 영리한 아내의 정치라는 말까지 사용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식의 폭넓은 정치 개념을 기초로 주제를 고찰해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정치라는 개념을, 오늘날에는 국가라고 부르는 정치적 결사체의 지도 또는 그 지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정치적 결사체, 즉 국가란 무엇일까요? 사회학적으로 보았을 때, 결국 근대국가는 모든 정치적 결사체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물리적 강제력이라는 관점에서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직업 정치가
직업으로서의 정치 - 두 가지 방식: 사람이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 의존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은 결코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은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그리고 대부분 물질적으로도 이 두 가지를 병행합니다. 정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내적으로는 정치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권력을 소유해 행사하는 것 자체를 즐기거나, 하나의 대의에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의미라는 인식을 통해 내면의 안정과 자부심을 얻습니다. 이렇게 내적인 측면에서 진정으로 하나의 대의를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분명히 그 대의에 의존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두 가지 방식의 차이는 이 문제와 관련해 훨씬 더 중요한 경제적 측면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은 정치를 자신의 지속적인 수입원으로 삼고자 하는 반면에, 정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참고로 사유재산 제도가 지배하는 곳에서 사람이 정치를 위해 살아가려면 경제적 측면에서 대단히 통속적인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은 일상에서 정치가 그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수입에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재력이 있거나 충분한 수입을 안겨주는 생활 여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그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적인 경제에서는 오직 독자적으로 재력을 갖추고 있을 때만 정치를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경제 활동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즉, 자신의 노동력과 사고의 전부 또는 상당 부분을 계속해서 영리 활동에 쏟아붓지 않아도 수입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력이 없는 정치가는 정치를 통해 자신의 생활을 위한 경제적인 문제만을 오로지 또는 주로 염두에 두고, 대의에는 전혀 또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보다 더 잘못된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입니다. 즉, 정치 지망생이나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그 추종자들을 금권주의적인 방식으로 충원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 지망생들이 정치 활동을 통해 정기적이고 확실한 수입을 얻어야 한다는 자명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업 정치가의 내적 조건
직업 정치가의 자질 - 열정, 책임감, 안목: 그렇다면 직업 정치가라는 길은 내적으로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고, 이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할까요? 직업 정치가의 길을 걷는 사람은 우선 자신이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지위에 있는 직업 정치가일지라도 자기가 모든 일상을 뛰어넘는 높은 곳에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직업 정치가와 관련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직업 정치가가 이러한 권력(사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이 권력은 아주 제한적인 것일지라도)과 그 권력에 수반되는 책임을 제대로 짊어지려면 어떤 자질들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하는 순간 우리는 윤리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정치가에게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질은 열정, 책임감, 안목, 이렇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가의 열정은 대의 자체와 이 대의를 명령한 신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이라는 객관적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 열정은 이미 고인이 된 나의 친구 게오르크 짐멜이 “불임의 흥분 상태”라 지칭하곤 했던, 저 주관적 태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주관적 태도는 무엇보다도 특정한 유형의 러시아 지식인들(아마도 그들 모두는 아니겠지만)이 보여주는 특징이지만, 지금 혁명이라는 의기양양한 이름으로 치장되고 있는 저 광란의 축제를 통해 우리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적인 호기심을 지닌 자들이 추구하는 낭만주의일 뿐인 이러한 태도는 결국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책임감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진정한 열정이라 하더라도 단지 열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정치가가 되려면 하나의 대의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 대의에 대한 책임감이 그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고 주도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정치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심리학적 자질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안목이라는 것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냉정하고 침착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인데, 이것은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거리 두기를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든 정치가가 저지를 수 있는 대죄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지 못할 경우, 동일한 사람의 정신 속에 열정과 냉철한 안목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신체의 다른 기관이나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경박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적인 활동이어야 한다면, 정치에 대한 헌신은 오직 열정으로부터만 태어날 수 있고 열정으로부터만 자양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정적인 정치가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신력에 의한 저 강력한 자기통제는 오직 모든 점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 몸에 배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강력한 자기통제야말로 진정한 정치가가 불임의 흥분 상태 속에서 움직이는 아마추어 정치가들과 다른 점입니다. 강력한 정치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세 가지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결론 -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의 상호 보완성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 특히 궁극적으로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은 윤리적인 역설들을 알고 있어야 하고, 이 역설들의 부담감에 짓눌려 변질된다면 전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해두지만, 그는 모든 폭력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인 힘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초현세적인 인류애와 자비를 따라 살아간 위대한 인물들은 그가 나사렛 출신이든, 아시시 출신이든, 인도의 왕궁 출신이든 폭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가지고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왕국은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습니다. 참고로 플라톤 카라타예프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런 성자들을 가장 가깝게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자신의 영혼이나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하는 사람은 정치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정치에는 전혀 다른 과제들이 있고,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그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정치의 신과 사랑의 신, 즉 교회를 통해 표현되는 기독교의 신은 서로 내적인 긴장 관계 가운데서 공존하고, 이 관계는 언제든지 해결할 수 없는 갈등으로 분출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배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성무금지령은 영혼 구원과 관련된 것이어서 피히테가 말한 칸트적인 윤리 판단이 지닌 냉정한 동의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 시민들은 그들에 대한 징벌로 성무금지령이 반복해서 내려졌는데도, 계속 교황청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마키아벨리는 이 일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쓴 피렌체 역사에 관한 글에 나오는 어느 아름다운 대목에서 글의 주인공 중 한 명의 입을 빌려, 자신의 영혼 구원보다 자신이 태어난 도시의 위대함을 더 소중히 여겼던 피렌체 시민들을 칭송했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가치는 아니겠습니다만, 자신이 태어난 도시 또는 조국이라는 말을 사회주의의 미래 또는 국제적 평화의 미래라는 말로 대체한다면, 여러분도 당시에 피렌체 시민들과 똑같은 문제에 직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의 미래나 국제적 평화의 미래를 추구하려면 정치적 행위를 통해 추구해야 하고, 그리고 정치적 행위를 추구하려면 책임 윤리 아래에서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까닭에, 결국 이는 영혼의 구원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를 신앙투쟁을 할 때처럼 순전히 신념 윤리 아래에서 추구한다면, 목적 달성에 해악을 끼치고,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세대 동안 이러한 목적을 불신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신념 윤리에는 결과에 대한 책임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념 윤리를 따라 행동하는 자들은 모든 정치적 행위에는 악마적인 힘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무력하게 내맡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 악마적인 힘들은 그의 행위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고 가차 없는 결과물들을 만들어냅니다.
“악마, 그는 나이가 많으니, 너희도 나이가 들어야 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나이”는 살아온 햇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토론에서 이기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나 역시 토론에서 나이 때문에 이기거나 진 적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삶의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할 줄 아는 훈련된 시각과 그 현실을 견뎌내고 내적으로 맞설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정치는 머리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결코 머리로만 하는 일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는 신념 윤리 지지자들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사람이 늘 신념 윤리 아래에서 행동해야 하는지, 아니면 책임 윤리 아래에서 행동해야 하는지, 또는 어떤 때 신념 윤리 아래에서 행동하고 어떤 때 책임 윤리 아래에서 행동해야 하는지 정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격앙된 시기인 오늘날을 창조적인 격앙의 시기라고 믿지만─그러나 분명히 격앙이 언제나 진정한 열정은 아닙니다─느닷없이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는 신념에 찬 정치가들이 떼 지어 출현했습니다. “세상이 어리석고 비열하지 내가 그런 게 아니다.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아니라 내가 섬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 나는 그자들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뿌리 뽑을 것이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이러한 신념 윤리를 밑받침하고 있는 그들 내면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가장 먼저 묻고 싶습니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런 사람 중 열에 아홉은 자신이 진정으로 느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낭만적인 감정에 도취되어 그런 식으로 말하는 허풍선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고, 그런 사람들은 나를 전혀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반면에 어느 성숙한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진정한 책임감을 온 마음으로 느끼며 책임 윤리에 따라 행동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것이 나의 신념이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감동적입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인간적이며 감동을 줍니다. 우리가 내면적으로 죽어 있지 않다면, 당연히 우리 중 누구라도 언젠가는 그런 처지에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는 절대적으로 대립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며, 이 둘이 서로 결합할 때 비로소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인간을 만들어냅니다.
여러분, 10년이 지난 후에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온갖 일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때는 우리가 이미 반동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것이라는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여러분 중 다수가, 나 자신도 바라고 희망했던 것 중에 실제로 이루어진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좌절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 것은 당연히 내적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지금 자신을 진정한 신념 정치가라고 느끼고, 이 혁명이라는 열광과 흥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10년 후에 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정말 보고 싶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02번의 두 번째 연(때는 봄이었고, 우리의 사랑은 푸르렀다. / 나는 날마다 나의 노래로 그 사랑을 맞이했지. / 꾀꼬리는 여름의 문턱에서 노래하다가 / 계절이 무르익자 노래를 멈추더라)과 들어맞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어느 진영이 승리하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꽃이 만개한 여름이 아니라, 일단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암흑과 혹독한 고난으로 뒤덮인 극지의 밤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황제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도 자신의 권리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밤이 서서히 물러났을 때, 지금 그토록 봄을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중에서 과연 누가 여전히 살아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여러분은 모두 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비분강개하고 있거나, 속물이 다 되어 세상과 직업을 아무 생각 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여 살아가거나, 신비주의자가 되어 현실을 도피하거나, 시류를 따라 신비주의자인 척하며 현실을 도피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경우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감당할 수 없던 자들이었고, 현실의 세상을 감당할 수 없던 자들이었으며, 이 세상의 일상을 감당할 수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에 대한 소명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 객관적으로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에게는 정치에 대한 소명이라는 것이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소박한 형제애를 행하는 데 마음을 쓰고, 그 밖의 일상적인 일들을 성실하게 해나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정치는 열정과 안목을 동시에 갖고서 단단한 널판지에 끈질기고 강력하게 서서히 구멍을 내는 일입니다. 이 세계에서 불가능성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인류에게 가능한 것들조차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고 모든 역사적 경험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하지만 단지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아주 소박한 의미에서 영웅이기도 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도자나 영웅이 아닌 사람들도 모든 희망의 좌절을 감당해낼 수 있는 단단한 심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오늘 우리에게 가능한 것조차도 이루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