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질병 이야기
사카이 다츠오 지음 | 시그마북스
세상을 바꾼 질병 이야기
사카이 다츠오 지음
시그마북스 / 2024년 4월 / 284쪽 / 18,000원
제1장 그리스·로마를 변화시킨 질병
아테네 역병 - 스파르타에 승리를 가져다준 숨은 공로자
스파르타군에 포위된 성안에서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가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하나의 강대한 통일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크고 작은 폴리스가 언어와 신앙을 공유하는 가운데 발전해 갔다. 4년에 한 번 열린 고대 올림픽 등도 서로가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기 위한 행사였다. 고대 그리스는 말하자면 점과 선으로 구성된 세계였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가 되어 그리스 원정을 온 페르시아군을 격퇴했을 무렵에는 유력한 폴리스들이 점의 지배를 하는 도시 국가에서 면의 지배를 하는 영역 국가로 변모해 갔다. 그중에서도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강대한 힘을 자랑해, 스파르타가 맹주인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아테네가 맹주인 델로스 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두 세력이 패권을 놓고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404년)을 시작하면서 그리스 문명권 전체가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해군력에서 우위였던 아테네는 강력한 정예 보병 부대를 보유한 스파르타를 상대로 농성전을 선택했다. 스파르타군의 군량이 바닥나기를 기다렸다가 반격으로 전환해 단숨에 포위 섬멸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농성을 시작한 지 2년째가 되었을 때 생각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아테네 성안에서 역병이 돌아 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아테네의 지도자이자 고대 민주제를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는 페리클레스를 비롯해 아테네 인구의 약 25%가 사망했다. 그리스의 군사력과 재력, 민주정 등 온갖 노력의 결정체가 적의 무력이 아닌 역병에 의해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후 아테네는 한때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그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무모하게 시칠리아 원정을 강행한 것이 치명타가 되어 결국 항복하고 만다. 페리클레스가 병사한 시점 혹은 인구가 격감한 시점에 평화를 모색하는 등 어떤 형태로든 전략을 전환했어야 했건만, 과거의 영광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던 것일까?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페르시아군이 성벽 앞까지 들이닥치는 위기를 겪었지만 결국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번에도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아테네 전체에 침투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록에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팬데믹: 아테네를 덮친 역병에 관해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저서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무런 원인도 없이, 건강한 상태에서, 갑자기 두부에 심한 열, 그리고 눈에 충혈과 염증이 발생했다. 또한 입속에서는 인두와 혀에서 출혈이 발생했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숨을 토해냈다. …대다수는 7일째나 9일째에 내부의 심한 열 때문에 아직 체력이 남아 있음에도 사망했다. 설령 그 시기를 버텨 내더라도 병은 복부로 내려가서 그곳에 심한 궤양을 일으켜 음식물이 섞여 있지 않은 설사가 나왔으며, 이 때문에 쇠약해져 결국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이상이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팬데믹의 기록이다. 감염증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질환의 정체에 관해서는 전문가마다 견해가 분분하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굉장히 무서운 병이 아테네를 덮쳤다는 것뿐이다. 원인을 알 수 없어 예방도 치료도 불가능하기에, 발병자와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뿐이었다. 이 역병은 아테네의 몰락을 결정짓는 데 그치지 않고 고대 그리스가 세계사의 최전선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장 열쇠는 이슬람 세계에 있었다
고전 의서와 십자군 - 그리스·로마 시대의 결실을 이슬람 세계로부터 역수입하다십자군이 가져온 한센병과 천연두: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중세 서유럽의 문화를 연결하는 경로는 서유럽의 수도원과 비잔티움 제국 외에 또 하나가 있었다. 바로 아랍 이슬람 세계다. 십자군 운동을 계기로 상선의 왕래가 늘면서 아랍의 서적이 유럽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의학을 포함한 고대 그리스·로마의 학문이 중동의 이슬람 세계에 잘 보존되어 있으며 그것도 상당히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십자군 운동이란 교황의 부름 아래 이교도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함으로써 누구나 안심하고 순례를 갈 수 있게 만들려 했던 운동이다. 11세기 말,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를 통해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십자군 국가들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13세기 말에 멸망할 때까지 이슬람 세력과 공방을 거듭했다.
당시 서유럽 가톨릭 세계의 사람들은 사실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이교도와 직접 접촉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가톨릭 이외의 크리스트교도와 접촉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런 미지와의 조우는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거나 거의 잊고 있었던 병을 서유럽에 전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한센병과 천연두다. 십자군 시대에는 한센병의 감염 경로도 밝혀지지 않았고 치료법도 없어 그저 감염자를 격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연두의 경우는 지역마다 차이가 컸던 듯하다. 훗날 중남아메리카나 오세아니아에 전파되었을 때는 그곳의 인구가 격감될 정도였지만, 서유럽에서는 유행은 하면서도 치유되면 마맛자국이 남는 것이 걱정스러울 뿐 그다지 심각한 위협은 되지 않았다. 상당히 이후의 이야기이지만,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항상 얼굴을 하얗게 칠했던 것은 마맛자국을 감추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반대로 서유럽에서 아랍 세계로 전해진 병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현지의 주민들에게는 이교도라고 판단하면 무차별적으로 죽이려 하는 유럽의 기사들이 가장 큰 역병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전 의서를 아라비아어에서 라틴어로 다시 번역하다: 서유럽 가톨릭 세계는 이슬람 세계에서 전파된 미지의 병에 골머리를 앓았지만, 의서를 포함한 학문 분야에서는 큰 소득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재발견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서유럽에서는 이제 저자명과 제목만이 전해질 뿐이었던 저작물을 아랍 이슬람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수도사들은 지적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리스어는 물론 아라비아어로 쓰인 문헌까지 닥치는 대로 수집해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시칠리아는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아랍인, 독일, 노르만인의 지배를 받는 등 당시의 유럽에서도 가장 다양성이 풍부했던 지역으로, 번역 작업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으며 인재도 충분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피사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 지역에서 시행된 일련의 작업은 12세기에 집중되어 있었던 까닭에 훗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빗대 ‘12세기 르네상스’로 불린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의학이 이슬람 세계에서 보존되다 십자군 시대에 돌아온 것은 서유럽 가톨릭 세계에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역병이라는 골치 아픈 덤이 따라온 것은 불운이었다.
흑사병과 대항해 시대의 태동 -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 인도 항로를 개척한 공포의 병동쪽에서 찾아온 감염증에 전쟁까지 중단되다: 흑사병이 유럽에서 최초로 확인된 때는 1347년 여름이다. 7월에는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9월에는 시칠리아섬의 북동쪽 끝에 있는 항구 도시 메시나에서 유행이 시작되어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337년에 시작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흑사병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을 몽골 제국이 지배했던 시대이기에 그 영토 중 어딘가에 있음은 분명하지만, 몽골 제국의 영토는 너무나도 광대했다. 동쪽으로는 한반도와 중국 대륙 전역,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서 이란과 우크라이나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러시아와 동유럽도 복속시켰다. 어떤 지역의 풍토병이 다른 지역에서 유행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죽음의 무도’와 검역 등이 탄생하다: 흑사병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수개월 동안 맹위를 떨치다 급속히 진정되고, 다음 마을에서 유행이 시작되기를 반복했다. 어떻게 해서 감염되는지도 모르고 치료법도 알지 못했기에 의사도 성직자도 손을 쓸 방법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까마귀를 본뜬 마스크를 착용하고 환자와 접촉했다. 부리 부분에 허브 등의 약초를 채우면 감염을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또한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흑사병은 신의 뜻’이고 사람들의 부족한 신앙심이 원인이라며 속죄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채찍질 고행 행진’을 하는 집단도 나타났다. 누군가가 우물에 독을 푼 것이 원인이라는 소문도 퍼졌다. 그런 소문에서 범인으로 지목되는 대상은 언제나 유대인이었으며,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에 대한 살인과 폭행 사건이 속출했다. 이때 적극적으로 유대인을 보호한 교회나 왕후 귀족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는 쪽이 더 많았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재위 1198년~1216년) 등이 후자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에, 1215년의 공의회에서는 “영원한 예속과 형벌”이라는 선언 아래 7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성에 대해 고깔모자와 노란색 식별표의 착용을 의무화한다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유럽의 왕후 귀족들은 이 결의를 거역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내에서 같은 명령을 발포했다.
자신도 언제 흑사병에 걸릴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 예술가들의 작품에도 반영되어 해골이 광란의 춤을 추는 모습을 소재로 삼은 ‘죽음의 무도’라는 제목의 그림과 조각이 다수 제작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물론 그런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치유에 효과가 있을 리는 없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어떤 형태로든 남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흑사병의 최초의 유행 장소가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선이 관계가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1377년에 크로아티아의 라구사에서 검역이 시작되었다. 새로 입항한 배에 대해 당장은 상륙도 하역도 허가하지 않고 발병자가 없는지 일정 기간 상황을 지켜보는 제도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도 이를 모방해 검역을 시행했다. 처음에는 격리 기간이 30일이었지만, 이 기간으로는 부족하다고 해서 1448년에는 40일로 확대했다. 이후 40일 동안의 격리는 베네치아가 최초라는 오해 속에서 이탈리아어로 ‘40’을 의미하는 단어가 검역을 의미하는 단어로 확산되었다.
인구 감소로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향신료의 수요가 확대되다: 14세기에 발생한 흑사병의 유행은 유럽 전역에서 네 명 중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정도로 인구가 감소하면 유럽 전체가 쇠퇴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방 제후들만 쇠퇴했을 뿐, 전체적으로는 과잉 상태였던 인구가 감소한 덕분에 세대 당 생활 수준이 향상되는 결과를 낳았다. 1년에 몇 번밖에 입에 대지 못했던 고기 요리를 조금 더 자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축은 많았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진짜 문제는 해체한 고기의 보존과 조리법이었다. 장기 보존을 하려면 많은 향신료가 필요했으며, 고급스러워진 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역시 향신료가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향신료는 매우 값비싼 물품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통과해야만 유럽에 들어올 수 있었기에 엄청난 중간 마진이 붙었다. 풍요로운 식탁을 지키려면 향신료를 저렴한 가격에 입수해야 했으며, 이것은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 이유 중 하나였다. 흑사병이 유발한 인구 감소가 생활 수준의 향상을 불러왔고, 그것이 대항해 시대를 여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제3장 권위로부터 해방되다
천연두와 아메리카 선주민 - 정복자가 가져온 역병은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했다철과 말 이상의 파괴력으로 선주민을 압살하다: 대항해 시대의 선봉에 선 나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국왕의 후원을 얻어서 1492년부터 1504년까지 4회에 걸쳐 대서양을 왕복하며 서인도제도부터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일부에 발자취를 남겼다. 이후 1521년에는 에르난 코르테스가 중앙아메리카의 아즈텍제국을, 1533년에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남아메리카 안데스의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이들과 같은 사람들은 ‘콩키스타도르(정복자)’라고 불렸다. 이를 통해 중남아메리카의 대부분은 스페인의 식민지로,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된다.
만 단위의 병사를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대국이었던 아즈텍제국과 잉카제국이 1,000명도 안 되는 콩키스타도르에게 허무하게 멸망한 것은 그들이 알지 못했던 무기, 바로 말과 철, 화약 때문이었다. 라마(야마)보다 몸집이 크고 다리 힘도 강한 짐승,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검, 화살로도 창으로도 뚫지 못하는 튼튼한 갑주, 굉음을 내면서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죽이는 총기 등 그들이 알지 못했던 무기를 이만큼 갖추고 있었으니, 전투가 일방적으로 전개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또한 콩키스타도르는 자신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무기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연두와 인플루엔자로 대표되는 감염증이었다. 이것이 말이나 철 이상의 파괴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천연두는 공기로 감염되는 병으로 치료법이 없고 사망률이 매우 높다. 콩키스타도르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자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선주민이 알 수 없는 감염증에 걸려 쓰러졌고 목숨을 잃어갔다. 중남미 대륙에서도 전체 인구의 약 90%가 사망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북아메리카 대륙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이 제일 먼저 식민 활동을 시작했고,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도 조금 늦게 참가했다. 1620년에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필그림 파더스(청교도 일행)라는 집단이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에 상륙했다. 매사추세츠를 포함하는 뉴잉글랜드 해안 지방은 3년 전에 전염병이 맹위를 떨쳐 그곳에 살고 있었던 주민이 전멸한 상태였다. 농경지로서 기초를 닦아 놓은 토지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식민지 개척자들은 “신께서 전염병을 보내 우리가 갈 곳을 청소해 주셨다”라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18세기 후반부터 인두법이 보급되다: 천연두의 치료법은 지금도 없지만, 예방법은 확립되어 있다. 천연두에 감염되었다가 회복되면 이후 다시 감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근세 말기의 유럽인들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 지역에서는 천연두를 인위적으로 감염시키는 인두법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인두법은 중국 남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감염자의 몸에 생긴 딱지를 으깨서 녹인 물을 바늘에 발라서 피부에 찔러 넣거나, 바늘에 고름을 묻혀서 피부를 긁는 등의 원시적인 방법으로 감염시켰다. 이후 서유럽에서 인두 접종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접종 후 증상이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는 사례도 있었고 천연두가 유행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안감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런 불안감을 해결한 인물이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다. 그는 목장에서 소젖을 짜는 일을 하는 여성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힌트를 얻어 우두로도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실제로 우두에 감염되었던 여성의 이마에서 짜낸 고름을 어린아이에게 접종했는데, 예상대로 그 아이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1798년에 제너는 이 실험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이후 인두법보다 훨씬 안전하고 확실한 천연두 예방 접종이 세계에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