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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착각

그레고리 번스 지음 | 흐름출판


나라는 착각

그레고리 번스 지음

흐름출판 / 2024년 3월 / 360쪽 / 22,000원





편집된 자아(自我)



우리는 시뮬레이션이다


자아는 뇌의 발명품:
인간은 자신의 뇌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자각할 수가 없다.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신의 뇌를 들여다보거나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뇌는 몸의 모든 곳에서 오는 감각을 해석한다. 예로, 배가 아프면 뇌가 이 고통을 알아채고 이를 해석한 후 필요한 신체의 부위에 전달해 대응하도록 한다. 그러나 뇌는 그 자체의 촉각과 감각은 느낄 수 없다. 뇌는 몸을 통제하기 위해 그 자체를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에 대해 복제품(simulacrum) 즉, ‘저해상도 시뮬레이션’을 구성한다. 우리가 자아라고 지각하는 것도 이러한 ‘가공의 구성물’이다. 다시 말해, 자아는 뇌의 시뮬레이션이다.

여기에서는 “당신이 어떻게 자신을 인지하고, 그것이 현재의 자아를 어떻게 결정하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출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자신에 관한 지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거울 앞에 서보라. 자기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 이미지가 객관적인 실체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한 지각은 ‘나만의 것’이다. 세상 그 누구도 당신이 보는 내 모습으로 당신을 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거울로 보는 당신은 다른 사람이 보는 (좌우가 바뀐) ‘거울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신체도 완전히 대칭적이지 않다. 어쩌면 나처럼 이색증(odd-eye)을 가져서 양쪽 눈동자의 색깔이 다르거나, 어깨의 높이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남이 보는 대로 나를 보는 법은 없을까? 사진을 찍으면 된다. 사진은 그 밖의 모든 사람이 당신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당신을 포착한다. 이 때문에 자신의 사진을 바라보면, 종종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자아에 대한 오인은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보면 더 두드러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녹음된 목소리에 콧소리가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처럼, 당신이 말할 때 듣게 되는 목소리는 나만의 특징적인 지각의 결과물이다. 세상 사람들이 공기를 통해 음파에 실린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 당신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더해서 머리뼈를 통해 진동하는 것까지 듣는다. 이것은 뼈와 같은 고체 물질이 공기보다 소리를 더 잘 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깊게 울려 퍼지는 소리의 전달이다.

이러한 자아의 오인은 목소리를 녹음해 듣는 것 같은 실험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실제 목소리로 생각하고 거울 속 얼굴이 사실 그대로의 내 모습인 줄 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머릿속에서만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모습은 뇌가 당신의 모습과 목소리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실행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시뮬레이션의 결과는 입력값에 따라 달라진다. 뇌에 거울 이미지들과 저음의 무거운 뼈 전도 소리같이 타인이 인식하는 나와 다른 정보가 꾸준히 입력된다면,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런 차이를 감안하면 ‘나’라는 실체적 진실조차 뇌가 만들어낸 왜곡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2초다:
우리 몸 각 부분에서 나오는 신경 활동전위가 뇌에 도달하는 데에는 기관마다 시간 차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물리적으로 연속되어 있다’라는 관념 자체는 마음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간단한 실험을 한 가지 해보자. 신발을 벗고 엄지발가락을 쳐다보라. 빛은 거의 즉시 이동하므로, 광자가 발에 부딪혀 튕겨 나와 우리 망막으로 들어가서 발가락에 관한 즉각적인 인상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제 욕실로 들어가서 발가락 위로 뜨거운 물을 부어보라. 열과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 섬유는 말초신경 중에서 가장 두께가 얇은데, 이 신경 섬유들은 약 1초당 1미터의 느린 속도로 전기신호를 전달한다. 따라서 뜨거운 물에 발이 화상을 입고 있음을 뇌가 느끼는 데에 대략 2초가 걸린다. 반면 물이 발가락에 부딪히는 것을 우리는 ‘즉시(10~20밀리세컨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뇌는 이들 신호, 즉 순간의 시각 신호와 2초 전에 시작된 감각 신호를 어떻게 통합할까? 인간의 뇌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발가락으로부터의 감각 신호전달이 지연됨을 학습하게 됐다. 깜짝 놀랄 만한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뇌는 2초 후에 발가락이 무엇을 느끼게 될지 예측하여, 그것을 눈에서 보내는 정보와 일치하도록 진화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 뇌는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시스템이 동기화되지 않을 때는 나도 모르게 책상 모서리에 발가락을 부딪치는 것 같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뿐이다.

발가락에 뜨거운 물이 닿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봤다면, 통증이 뇌에 전달되기도 전에 잠시 후 얼마나 많이 아플지를 미리 판단하여 발을 움츠릴 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다. 아무튼 현재의 자아는 일시적으로 통합된 것처럼 보이지만, 반응이 퍼져나가는 데에는 몇 초가 걸린다. 우리의 몸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순전히 인지 과정과 추측하는 신경 처리 과정의 통합 때문이다. 사실 살아가는 데 현재의 자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현실을 직시해 보면, 우리의 마음은 현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언제나 과거를 향하고 있다. 우리의 주의력은 과거와 미래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현재의 자아는 그저 과거의 자아와 미래의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2초짜리 출입구일 뿐이다.

과거는 편집된 기억이다:
이제 과거의 자아를 들여다보자. 과거의 자아에는 2가지 근원(내부적 근원과 외부적 근원)이 있다. 내부적 근원은 우리의 기억에서 유래한다. 기억에는 서로 다른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크게 사실, 경험, 근육의 기억으로 분류할 수 있고, 이러한 각각의 기억은 뇌의 서로 다른 곳에 저장된다. 한편 외부적 근원은 크게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사진, 영화, 오디오, 그리고 일기나 신문 같은 문자로 쓰인 매체를 포함하는 ‘기록’인데, 기록은 순간촬영사진처럼 변하지 않는다. 두 번째 외부적 근원으로는 ‘타인의 기억’을 들 수 있는데, 기록과는 다르게 기억은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가 친구, 가족과 함께 과거에 대해 추억하기 위해 모인다면, 이는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10년, 20년, 30년 전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정확히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사촌은 당신만큼이나 유년 시절의 사건을 잘못 기억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인간은 누구나 기억 속에 빈 곳이 있다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내부적, 외부적 근원을 사용하여 이를 메우려 한다. 이는 본능이다. 신경학자들을 이런 기억 메꾸기를 작화증(confabulation, 허구로 우리 기억의 빈틈을 채우는 행동)이라고 부른다.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있음이 명확해졌다. 우리의 정신 구조로 인해 우리는 과거 자아의 기억이 현재 자아와 연속선상에 있다고 믿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누구의 기억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인가? 신체의 나머지 부위처럼 뇌는 적어도 20대 중반까지 발달한다. 그래서 유년기의 기억을 포함한 과거의 기억은 그 신빙성을 의심해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일반적으로 출생, 죽음, 중대한 사건과 충격적인 사건처럼 상당히 중요한 기억에 대해서는 그 정확성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하버드대학교의 로저 브라운과 제임스 컬릭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섬광기억이라고 명명하고 이에 대해 연구했다. 1970년대에 그들은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마치 전구 불빛이 팍하고 켜질 때처럼 그 사건이 조사 대상자들의 뇌에 새겨져, 굉장히 높은 수준의 정확도로 당시의 상황을 회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연구팀이 시간을 두고 섬광기억의 정확성을 검토한 결과, 섬광기억도 시간에 따라 정확성이 떨어졌다. 9/11 기억에 관한 종단적 연구(longitudinal study)에 따르면, 사람들은 1년이 지나자 중요한 세부 사항을 잊어버렸다. 그 후로도 기억의 정확도는 느리지만 확실히 떨어졌다. 그러나 10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그 일을 정확히 기억한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의 정확도가 떨어짐에도 인간의 자신의 기억을 믿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연구 결과, 기억의 정확도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정확한 기억들은 교정되기보다는 계속 왜곡되어 우리 뇌 깊이 되새겨졌다. 우리 삶의 중요 사건에 대한 가장 생생한 기억들조차 높은 정도의 작화증을 겪는다. 기억은 사각지대가 있어서 뇌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없는 것, 놓친 것을 채워 넣으려 하기 때문이다.

미래는 과거의 거울일 뿐이다:
과거의 자아가 구멍으로 가득하다면, 미래의 자아는 어떠할까? 미래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에 의존해 미래의 나를 예측하는 것뿐이다. 싫든 좋든, 우리의 뇌는 과거의 일을 가져다 미래를 투영한다. 따라서 미래의 자아는 시뮬레이션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앞서 설명했던 듯이 시뮬레이션은 오직 입력값에 따라 설정된다. 그리고 그 입력값이 당신의 기억이라면, 그리고 기억 그 자체에 결함이 있다면, 미래의 자아 또한 허구이다. 그런데 우리 뇌는 과거에 했던 예측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우리 기억 체계의 독특한 특성이다. 참고로 쓸 만한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자신의 실수로부터 학습하는 자기 교정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인간은 확증편향이 가득해서 똑같은 실수, 잘못된 예측을 반복한다. 우리는 곧잘 우리가 옳았을 때는 기억하고 틀렸을 때는 잊어버리곤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당신은 예전의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기억에는 결함이 있고 뇌는 모든 시간 조각을 연결하기 위해 빈 곳을 채우는 방식으로 기억을 보완한다. 그 결과 삶 여정에서 통합된 존재라는 망상이 생기게 된다. 내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결함 가득한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내가 앞으로 소개할 내용처럼, ‘새로운 과학’은 실제로 우리가 초대형 유조선을 조종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고,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망상이 뇌에 의해 만들어지는 방식을 통제할 수도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과학은 변화를 위한 실낱같은 희망인 셈이다. 나라는 초대형 유조선을 조정하려면, 먼저 뇌가 ‘나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용하는 요소들 속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다. 기억에는 결점이 있지만, 기억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기도 하나, 기억의 조각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응집력 있는 순서로 이야기 속으로 끼워 넣어져야 한다.



만들어진 자아




우리가 소비하는 이야기들이 자아감을 형성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경험과 우리가 읽거나 듣는 것들 사이의 경계를 그어야 할까?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이는 희미한 구분일 수 있는데, 부분적으로 그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경험을 아직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도,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분명하지 않다. 이번에는 우리가 어떻게 서로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 사이의 경계선을 흐리게 하는지 살펴보자.

진화는 개인주의를 싫어한다


인간 외에도 고도의 사회적 체계를 갖춘 생명체들이 있다. 그러나 타인의 사고를 유추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데, 이 능력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연구자들은 이를 정신 이론(Theory of Mind, ToM)이라 부른다. ToM은 협력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진화적 적응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개인의 생각이 집단에 편입되어 다른 구성원들에게 재분배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즉, 우리의 뇌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쉽게 물들도록 진화했다.

큰 수의 법칙에 따르면, 그룹이 개인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더 높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의 길을 가기보다는 군중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뇌에는 무리를 추종하는 습성이 생존 전략의 하나로 녹아들었다. 확고한 개인주의자라면 이런 주장이 불편하겠지만, 나는 인간의 집단적 사고 경향을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시장 전체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나은 수익률을 얻기란 쉽지 않은데, 우리 뇌는 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서사가 이 본능을 방해한다. 영웅은 무리의 안락함을 떠나 여정을 떠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괴물들을 쓰러뜨리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공동체에 자신의 지혜를 나눈다. 이것은 열망의 신화이다. 분명 유용한 신화이지만, 그래도 신화일 뿐이다.

사슴 사냥 딜레마:
우리 뇌가 달라지기보다 비슷해지도록 진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비슷한 마음을 가지면 협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은 사회의 중심축을 형성하는데, 이 기술은 너무나 중요해서,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사회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참고로 1755년에 출간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장 자크 루소는 사회 속에 위치한 개인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야생 동물처럼 자신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는 ‘자연 상태의 인간’을 루소는 ‘고귀한 야만인’으로 표현했다. 루소에 따르면, 야만인들은 다른 이들과 살아가면서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 고귀한 야만인은 사라지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까지 확장해, 토지 한 덩어리를 차지하고 이렇게 선언한다. “이것은 내 것이다.” 그런데 루소는 이 행위가 사회와 인류 문명화의 시작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이는 부자(토지를 소유한 자들)와 부자가 아닌 자들 사이의 계급 불평등을 법으로 규정한 선언이다.

루소의 관점에서 보면, 소유와 비소유의 분리는 부유하지 않은 자들의 자유를 허용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한 가지 의무를 지웠는데, 이 의무를 루소는 사회 계약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그의 주장은 계몽 시대의 상징이자 미국 독립 선언과 독립 전쟁에 지적 근거가 됐다. 미국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본질적으로, 영국의 조지 왕은 식민지와의 사회 계약을 깨뜨렸고,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국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미시적 수준의 사회 상호작용, 즉 개인이 타인에 대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관해서도 루소는 언급했다. ‘사슴 사냥 딜레마’는 자기 이익과 공동 이익 사이의 긴장을 설명한다. 야만인은 주로 자신의 복지에 관심이 있다. 따라서 타인의 행동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타인들이 자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야만인은 남도 자신과 같이 생각할 것으로 추론하고 각 개인의 복지를 증대시키기 위해 공통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리할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 ‘타인과 협력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와 ‘이해 상충이 일어날 수 있는 때’를 구분하게 된다. 루소는 이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사슴 사냥 비유를 제시했다. 다음은 루소의 주장을 정리한 것이다.

‘사슴은 개인이 혼자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고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사슴은 경계심이 강해 사냥꾼들을 잘 피한다. 그래서 팀을 이뤄 사냥해야 잡을 확률이 높아진다. 두 명의 사냥꾼이 각각 다른 지점을 맡는다면, 성공 확률은 더 증가한다.’ 루소는 이렇게 썼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러나 루소는 인간의 이기적인 면도 지적했다. ‘만약 토끼 한 마리가 그들 중 한 명의 범위 안에 들어온다면 그는 거리낌 없이 토끼를 혼자 소유하려 할 것이다.’ 그는 토끼를 발견한 사람은 사냥에서 자신의 역할과 동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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