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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양승훈 지음 | 부키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양승훈 지음

부키 / 2024년 3월 / 432쪽 / 19,800원





울산은 어떻게 산업 수도가 되었나



산업도시 울산, 기로에 서다


미래 - 2030년 울산 스케치:
먼저 현재와 유사한 모습으로 흘러갈 경우, 2030년 울산의 ‘미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저물어 가는 장년 퇴직자의 도시] 2030년의 어느 날,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가 위치한 울산 동구 전하동. 한마음회관 근처에는 노인정이 있다. 건물 밖에 놓여 있는 평상 주변엔 70세가 넘은 남성 노인들이 앉아서 장기나 바둑을 두고 있다. 노인정 입구 주변에는 노인 몇몇이 객쩍은 말을 나누기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람을 맞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중공업(울산에서는 현대중공업을 그렇게 부른다)’을 다니고 퇴직한 사람들인데, 노인들 대부분은 생산직 근무자들이다. 용접 노동자, 도장 노동자, 크레인 운전수, 안전 요원…… 각자 담당했던 일을 물으면 자기가 맡았던 호선(건조하는 배의 순번)들을 읊으며 건조 경험을 생생하게 풀어주곤 한다. 모든 이야기는 그때, 바로 그때에 집중되어 있다. 자신들이 왕성하게 일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 모든 이야기는 과거에 갇혀 있다.

[젊은이가 외면하는 청년 비정규직 도시] 10년 전만 해도 양정동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는 10만 명 넘는 노동자가 출근했고, 전국에서 가장 전투적인 ‘강성 노조’ 혹은 ‘귀족 노조’가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여름마다 임금 협상안이 전국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쟁의 뉴스도 언론에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규직 숫자가 줄었기 때문이다. 사업장의 절대다수는 비정규직 사내 하청 노동자이거나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대학생이나 주부 등이다. 한편 현대자동차그룹은 올해 퇴직 예상 인원이 2,000명에 달하지만 신규 생산직 고용 예정이 없다고 신년 계획 때 밝힌 바 있다. 실제 차체 조립, 의장품 설치, 전기장치(일명 전장) 설치 등 모든 분야의 자동화율이 95퍼센트가 넘고, 작업자가 할 일은 볼트와 너트를 체결하는 일에 그친다. 그마저도 점차 로봇 등 기계로 대체되고 있다.

[연구소가 떠난 도시] 울산의 3대 산업 연구개발 센터는 생산과 바로 연결된 생산기술연구소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울산을 떠났다. 1990년대부터 현대자동차는 울산 북구를 중심으로 용인 마북리, 전주 등지에 있던 연구개발 센터를 100만 평 부지의 경기도 화성 남양연구소로 옮겼다. 그리고 현대중공업은 서울 계동 사옥에 설계 엔지니어들과 소수의 연구개발 엔지니어들을 배치했고, 2020년부터 연구개발 센터가 판교로 이전했다. 한편 석유화학단지의 많은 기업연구소는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지 오래이고, 대덕도 서울에서 멀다고 경기도 판교, 화성, 평택, 용인 등의 입지를 수소문하는 중이다.

[대학이 무너진 도시] 2019년 학생 수 1만 1,000명을 자랑했던 대형 종합대학 울산대학교는 이제 학생 수가 6,0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저출산으로 인한 학령 인구 감소의 결과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울산대학교의 강점이 무너졌다는 데에서 힌트를 찾아야 한다. 울산대학교는 원래 공과 계통의 학생을 키워서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에서 채용해 가는 학교였다. 그리고 울산대학교의 인문사회 계열을 나와도 현대그룹 계열의 대기업이나 석유화학단지에 취업할 수 있었다. 한편 지역 거점 대학은 아니지만 가장 우수한 자연 계열 학생들이 입학하는 UNIST(울산과학기술원)의 설립도 울산대학교의 쇠락에 기여했다. 참고로 울산의 3대 산업이 대졸 엔지니어 채용을 많이 할 때는 UNIST 출신이 울산에 남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대졸 엔지니어들의 일자리가 서울-천안 벨트의 전자 산업이나,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나, 판교-강남 테크노밸리로 향하고 있는 지금, UNIST가 지역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진 않는다. 전국에서 가장 학구열이 높다는 울산의 학부모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녀를 수도권으로 보냈다. 부산으로 보내는 것을 꺼린 지도 한참 됐다. 무거동의 대학로는 거리두기와 영업시간 제한이 있었던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에도 건재했으나 이제 한산하다. 학생들은 학교와 대학가에 머물기보다 집으로 가서 온라인 공무원 강의와 자격증 강의에 집중한다.

현재 - 흔들리는 낙관주의:
울산의 낙관주의는 1960년대 이후, 특히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생긴 가치 지향이라고 볼 수 있다. 외부의 시선과 울산 시민의 경험 모두가 낙관주의를 누적시키고 강화시켜 왔다. 그런데 이러한 낙관주의의 기본에는 ‘먹고사는 문제’ 즉 일과 결혼, 가족 구성에 대한 이야기가 깔려 있다. 그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울산에서 남성의 취업 걱정은 드문 일이었다. 울산 출신 사회학자 엄기호는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취업을 할 수 있기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구태여 대학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울산의 ‘건강함’이라는 설명도 했다. 대학에 가야만 출세한다고 가르치는 한국 사회에서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낙관주의는 분명 가치 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다.

울산은 생산직 노동자의 도시다. 2020년 12월 기준 제조업 종사자가 29.4퍼센트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편이며, 직군으로 봤을 때도 생산직 인구가 44.7퍼센트로 역시 전국에서 가장 많다. 울산에 사는 사람 중 절반 가까이가 3대 산업인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중 한 군데와 연관을 맺고 있는 셈이다. “공부 못 하면 공장 가면 되지”라는 믿음은 그런 생산직의 수에서 기인한다. 게다가 울산은 생산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높다. 특히 중화학 공업화를 이룬 3대 산업의 생산직 임금이 높다.

울산의 20대 남성의 경우 대학을 다니다가 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4년제 대학을 가지 않고 전문계(실업계)나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후 바로 취업하거나 아니면 전문대까지 마치고 생산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취업을 하려 할 때, 울산의 20대 남성은 힘든 일자리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대체로 특근과 초과근무를 다 수행했을 때 300만 원 정도의 소득을 얻을 수 있다.

한편 울산에는 여성 노동자의 역사가 거의 없다. 현재도 그렇고 과거를 뒤져 봐도 여느 지역에서 발견되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여공’의 사연조차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산업도시로서의 시작이 중화학 공업화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학을 졸업할 때쯤 지인을 통해서 혹은 취업 포털 등을 활용하여 일자리를 구하고, 3~5년 이내로 근무하고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취업을 못 하더라도 빨리 ‘취집(시집에 취업한다의 준말)’을 하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커리어우먼’이 되기 위한 쟁투가 벌어지는 수도권의 20대 여성의 생각이나 행태와는 사뭇 다르다. 그러면 “공부 못 하면 공장 가면 되지”와 “취업 못 하면 취집 하면 되지” 하는 믿음은 여전히 유효할까?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 박동이 꺼져 간다



한국 경제의 특수성과 제조업


산업도시 울산이 안고 있는 난제들:
산업도시 울산은 현재 어떤 딜레마에 처해 있을까? 첫째는 대한민국 제조업의 고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기획 및 연구개발 기능이 줄면서, 제조업의 모든 기능을 갖고 있던 산업도시에서 ‘생산기지’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많은 기업이 고숙련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대신에 하청 노동자를 광범위하게 활용함에 따라, 원가 절감 압박과 위험에 대한 책임을 떠안으며 산업도시로서 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직은 연명할 수 있으니 이런 점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창원, 거제, 군산 등 모든 산업도시의 제조업이 공통으로 겪는 일이다. 사실 불황기에는 세계 많은 산업도시가 쇠락을 경험했다. 영국 북잉글랜드의 맨체스터와 리버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미국 북부의 러스트 벨트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산업도시 대부분이 위기 상황에서 쇠락하며 왕년의 영화를 쉽게 되찾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일본의 이마바리나 기타큐슈 같은 산업도시에서 왜 이주 노동자와 노인만 생산직으로 고용하면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을까? 울산의 제조업 내 위상이 바뀌고 다수의 정규 생산직이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더는 정규직을 뽑지 않는 상황이라면, 울산의 3대 산업 현장과 도시는 어떠한 운명을 맞게 될까? 더불어 산업도시가 하청 생산기지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수출 제조업에 의존하는 제조업 국가 대한민국은 문제가 없을까? 자동화와 하청 생산 체제를 통한 원가 절감으로 계속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산업도시와 그 지역 노동자는 어떻게 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좀 더 이론적 차원에서 문제를 짚어 보려 한다. 공간 분업과 숙련은 산업도시 울산과 한국 제조업 노동자의 위상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다. 공간 분업이라는 관점을 통해 산업도시 울산의 위상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숙련이 여기에 어떻게 결부돼 있는지 살피려 한다. 지역 간 공간 분업, 엔지니어와 생산직 노동자와의 직종별 분업, 원청과 하청의 분업 구조를 경제지리학과 이중 노동 시장 이론의 틀을 통해 살펴보자.

제조업 발전의 중심에서 말단 생산기지로 추락하는 울산


제조업 없는 울산은 생각하기 어렵다. 수많은 사람이 공장과 조선 업체에서 일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울산을 찾았다. 그렇다면 울산 없는 제조업은 어떨까? 예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가능해지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지금까지 울산의 자신감 중 하나는 울산 없이 한국 제조업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의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다. 울산이 담당하는 3대 산업의 ‘두뇌’, 즉 구상 기능을 담당하는 연구소와 엔지니어링 센터가 대부분 수도권으로 이전했고 나머지 부분도 상경을 기다리고 있다. 더 우수한 두뇌를 얻기 위해서다. 이제 울산은 산업도시에서 생산기지로 추락하는 중이다. 심지어 ‘몸통’ 즉 실행 기능을 하는 공장마저 새로 지을 경우 수도권을 고려한다. 제조업체는 업의 본질을 ‘지식 기반 산업’이라고 말한다. 생산기지로서 울산의 위상이 점차 떨어진다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울산이 대한민국 제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살핀다. 이를 위해 울산의 3대 산업이 놓인 위치와 제조업 생태계를 진단해 보려 한다. 한쪽에서는 산업도시 울산이 지금까지 하던 대로 ‘열심히’ 하거나 혹은 정부의 ‘큰 지원’만 있다면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도시가 될 거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그런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지역의 혁신을 연구해 온 학자들이나 글로벌 경제의 분업 체계를 연구한 이들은 그저 ‘노력’만 해서는 쉽지 않다고 한다.

우선 울산 제조업의 국내 위상이 변화하는 것을 파악해야 새로운 대응이 가능하다. 그냥 공장이 잘 돌아가거나 설비투자만으로 위상 변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울산은 지금 생산기지로 고착화되는 상황이다. 둘째로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 경제 내의 위상을 바꿔야 한다. 예를 들면 ‘동아시아의 실리콘밸리’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나 지역과 교차하는 연결망 창출이 필요하다. 즉 국경을 넘어선 협력과 생태계 창출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국내외의 기반이 조성될 때 뜻밖의 소득으로 유니콘 기업이 탄생하거나 ‘핫플레이스’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처럼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산업도시 울산이 혁신과 전환을 하지 못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이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 ‘구상과 실행의 분리’와 ‘공간 분업론’이다.

엔지니어 김 씨는 자전거로 현장에 갈 수 있을까 - 구상과 실행의 분리:
연구개발과 설계가 생산 현장과 분리되면 현장은 의미를 잃고, 적대적 노사관계에서 자동화가 끝없이 전개되면 노동자의 숙련과 역할은 점차 사라진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가 뜻하는 것을 요약하면 그렇다. 제조업에서 연구개발, 제품 개발, 설계 등 구상 기능은 이전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그에 비해 실행을 담당하는 공장과 조선소, 그리고 공장과 조선소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의 역할은 줄었다. 더불어 도시라는 관점에서 구상 기능을 담당하는 연구소가 생산 현장을 보유한 울산에서 점차 멀어져 수도권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제조업 내부에서 울산의 역할이 줄어들고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됐다는 말이다.

참고로 ‘구상과 실행의 분리’는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해리 브래버먼이 만든 말이다. 브래버먼은 어릴 때 뉴욕의 금속 주물 공장에서 현장 노동자로 일을 했는데, 당시는 수공업이 공장제 공업으로 변하던 무렵이었다. 참고로 금속 세공의 공정은 구리나 은 등의 금속 원료를 열로 가공하여 모양을 만들고 사상(finishing)을 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장인은 혼자서 이 모든 작업을 계획하고 자신의 도구와 장비로 스스로 만들어 냈다. 심지어 당시는 세공 장인이 반지와 목걸이를 만들어 시장에 파는 일까지 혼자 담당하던 수공업 공방이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브래버먼이 경험한 금속 주물 공장은 달랐다. 노동자들은 각자 맡은 작업을 자기 자리에서만 수행했기 때문에 한 가지 공정만 알 뿐 전체 작업을 알지는 못했다. 여기까지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1편이나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 3~4편에서 했던 자본주의 생산의 분업과 노동 과정에 대한 설명과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런데 브래버먼은 공장을 관찰하다가 수공업 공방과는 다른 공장의 운영 원리를 포착해 냈다. 첫 번째는 도구를 표준화한 것이다. 그전까지는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공구와 도구를 가지고 다니면서 맡은 일을 했는데, 이제는 회사에서 만든 표준 도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노동자가 만드는 오차가 최소화됐다. 또 도구를 고치기도 쉬워졌다. 두 번째는 노동자가 하루에 해야 할 일을 세밀하게 적은 작업지시서가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 공장에 온 노동자의 교육은 표준 절차대로 하는 게 원칙이었다. 예컨대 “금속을 세척하거나 화로에서 가열할 때의 온도는 몇 도, 시간은 몇 초 또는 몇 분” 등이다. 이처럼 작업의 준비 과정까지 상세히 기록하여 노동자가 숙지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노동자가 형틀을 만들 때의 동작까지 몇 단계로 분절해서 정리했다. 그래서 교육을 받고 작업지시서에 숙달된 노동자는 자기 작업에 대해 작업지시서대로 진행하는 기계가 돼야 했다. 교육을 받은 노동자는 모든 작업을 ‘자의적으로’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준화된 도구, 세밀한 지시사항에 기초한 작업 절차의 편성은 19세기 말부터 제조업 공장에 불어닥친 프레더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에 기초했다.

노동자가 작업 동작을 표준화된 절차대로 주어진 시간 안에 수행하면서 생긴 문제는 먼저 일이 지루하고 괴로워지며 숙련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노련하게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자가 맡은 동작에서 자기 손에 익숙한 방식으로 숙달돼야 하는데, 이런 숙련 형성이 작업 절차에 의해 무력화됐다. 노동자는 그저 시키는 대로 분절된 동작을 따라서 할 따름이고 일할 때 경쾌한 리듬이 사라졌다.

두 번째는 노동자가 전체 공정을 이해하지 못해 맡은 부분의 일은 잘 하지만 혼자서는 제품을 만들 수 없는 사람이 돼 버렸다. 온종일 볼트와 너트를 체결하지만 자동차를 만들 수 없는 노동자가 된 것이다.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매뉴얼, 자동차의 원리를 아는 사람은 소수의 엔지니어뿐이었다. 브래버먼은 제품 개발과 설계(기본, 상세, 생산)를 하는 소수 엔지니어의 기능을 ‘구상’이라 하고, 설계에 따라 각자 맡은 영역만 작업하는 노동자의 기능을 ‘실행’이라 했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는 엔지니어가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작업을 지시하고, 노동자의 공정에 대한 품질이나 자주 관리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또 노동자와 엔지니어가 생산 과정에서 함께 의논하는 과정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많은 산업사회학자가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는 관점, 그리고 동작 연구라는 관점에서 제조업을 이해하기 위해 공장에 들어가 탐구를 시작했다. 기업 내부에서는 산업공학자가 이런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설계하고 그 성과를 평가했는데, 그들의 작업을 ‘인간공학’이라 불렀다. 한편에서는 회사나 정부 출연 연구기관 혹은 생산 컨설팅 기업에 소속된 산업공학자가 컨베이어 벨트에서 속도를 높이기 위해 생산 라인을 설계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과학자가 그러한 생산 라인의 설계가 장기적으로 노동자에게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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