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재난의 탄생
홍성욱 외 지음 | 동아시아
대한민국 재난의 탄생
홍성욱 외 지음
동아시아 / 2024년 2월 / 208쪽 / 17,000원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
왜 세월호 참사에서 해경은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았을까 - 구재령(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 과정)해경은 선원 편, 어선은 승객 편: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한 승객 및 선원 476명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좌현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55분부터는 속도를 잃고 표류했다. 목포해경은 당시 사고 해역과 가장 가까이 있던 연안 경비함정 123정에 출동 명령을 내렸고, 서해해경청은 123정을 현장지휘함(OSC)으로 지정했다.
123정은 9시 35분경 도착해, 세월호가 50도 정도 기울었지만 갑판이나 바다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경 상황실에 보고했다. 그러고는 여객선에 다가가는 대신 200~300미터 떨어진 곳에서 고무보트를 내렸고, 고무보트는 세월호 좌현 중앙부에 다가가서 기관부 선원 7명을 태웠다. 이어서 123정 함정도 세월호 조타실 옆의 윙브리지에 배를 대고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조타실 선원들을 태운 뒤 다시 물러났다. 몇 분 후에는 다시 접안해 3층 객실 유리창을 깨고 6명을 구했다. 그런 다음 10시 30분경 세월호가 수면 아래로 침몰할 때까지 멀찍이 떨어져 다른 배들이 태워 오는 사람만 인계받았다. 현장에 도착하고 약 한 시간 동안 123정 함정이 세월호에 접안한 시간은 단 9분밖에 되지 않았다.
민간 어선과 어업지도선은 달랐다. 우선 9시 50분경 근처에 있던 4.5톤의 소형 어선 에이스호가 현장에 도착했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사고 소식을 전달받은 드레곤에이스11호, 피시헌터호, 태선호를 비롯한 민간 어선, 그리고 어업지도선 전남201호와 전남207호의 고속단정들까지 30여 척이 도착했다. 이들 일부는 세월호 외벽에 바짝 배를 대고 여객선에 바닷물이 차오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건져 올렸다. 이렇게 어선과 어업지도선은 마지막까지 여객선 곁에 남아 승객 58명을 구조했고, 세월호가 가라앉기 직전 10분 동안은 해경보다 더 많은 승객을 살렸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사명인 해경은 겨우 선장과 선원을 구조한 뒤 한참을 꾸물댔고, 민간 어선과 어업지도선이 몸을 던져 많은 학생과 일반 승객을 구해냈다는 사실은 국민을 혼란에 빠뜨렸다. 왜 사고 현장에서 해경과 어선 및 어업지도선은 이토록 상반되는 태도로 구조에 임했을까? 당시 출동했던 해경 대원들만 특히 무능하고 나태했다고 추단할 수도 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설명은 되지 않는다. 단순히 사람만 봐서는 왜 해경이 소극적으로 구조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글은 당시의 해경, 어선, 어업지도선 각각을 인간과 사물이 결합한 인간-비인간 집합체의 단위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늘 주변의 도구, 기술, 환경과 연결된 상태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브뤼노 라투르의 인간-비인간 집합체: 지금까지 해경의 미온적인 구조 태도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인간과 기술 중 한쪽의 결함을 부각하는 방식을 취했다. 우선 인간 개개인의 과실이나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에 주목하는 설명이 있었다. 예를 들어, 광주고등법원은 123정 김경일 정장이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건져 올리도록 지시했을 뿐 많은 승객이 [세월호]를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승객들의 퇴선 유도를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이행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법원은 김경일에게 업무상 과실 치사의 책임을 물어 징역 3년 형을 선고했다(광주고등법원, 2015. 7. 14.).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들은 123정 외에도 지휘부의 무능력한 대처를 지목했다. 해경 본청, 서해청, 목포청은 현장의 긴박한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지만 우왕좌왕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위임하느라 적절한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세월호특조위 조사관 모임, 2017). 해경 전체를 향한 비판도 있었다. 이후 사건이 발생한 지 34일 만에 박근혜 대통령은 해경이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라며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출범한 이래 “구조·구난 업무는 사실상 등한시하고, 수사와 외형적인 성장에 집중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지속되어 왔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반면 구조에 사용된 장치의 결함을 강조하는 접근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성원 연구원은 세월호 재난을 다루는 기존 문헌이 인간 행위자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지적하며, 당시 동원된 재난 통신 기술에 주목한다. 그는 1999년 국내에 ‘전 세계 해상조난 및 안전제도(GMDSS)’가 도입되면서 통신 체계가 복잡해지고 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GMDSS에 규정된 기준에 따라 통신 장치를 장착한 선박과 그렇지 않은 선박이 공존하게 되면서 지상파 통신, 위성 통신, 재난 경보 통신 등 여러 비동질적인 기술이 뒤섞이고 선박 간 소통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또 선박들은 새로운 통신 장치에서도 운용이 까다로운 기능보다는 익숙한 기존 기능만 사용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재난 당일 세월호는 ‘디지털 선택 호출(DSC)’ 버튼으로 조난 통보를 발신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과 기술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왜 해경, 어선, 어업지도선이 그리 대비되는 태도를 보였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정말 해경은 무책임해 구조 의지가 없었고, 어민과 어업지도원은 특별히 용감해서 사고 현장에 뛰어들었을까? 그러나 한쪽은 악마화하고 다른 쪽은 영웅화하는 이원론적 구도는 너무 단순할뿐더러 장기적인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통신 기술의 결함을 꼭 집어 원인으로 삼는 설명도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다. 만약 세월호와 해경 간의 교신이 더 신속하게, 더 높은 음질로 이루어져 123정이 현장에 5분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많은 승객을 탈출시켰을까? 세월호 재난에서 장애가 된 것은 통신 기술이 아니었다. 이미 123정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해경 지휘부는 헬기로부터 승객 대부분이 배에 있다고 보고받았지만, 선내에 진입하거나 방송을 해서 승객 탈출을 유도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아무튼 특정 인물이나 장치에 파고들면 얼마든지 결함을 드러낼 수 있겠지만, 사람과 장치가 함께 만들어 내는 총체적인 효과는 간과하게 된다.
이 글은 인간이나 기술 하나에 집중하는 대신 인간-비인간 집합체를 분석 단위로 삼아 해경과 민간 어선을 비교한다. 이를 위해 브뤼노 라투르의 ‘인간-기술 대칭성’ 개념, 그리고 심리학의 ‘체화된 인지’ 개념을 차용한다. 라투르의 대칭성 개념은 인간이 기술을 지배한다는 관념과, 역으로 기술이 인간 사회의 발전을 결정짓는다는 관념, 즉 인간 중심주의와 기술 결정론 모두를 탈피하려는 시도다.
그 대신 라투르는 인간과 비인간이 대칭적으로 능력과 성질을 주고받으며 집합체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라투르는 미국 내 총기 합법화 논쟁을 예시로 든다. 총기 소지 반대자들은 ‘총이 사람을 죽인다’라고 외치고, 총기 협회 지지자들은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라고 반발한다. 전자는 총의 성질이 멀쩡한 시민을 살인마로 만든다는 입장이고, 후자는 총이 이미 존재하던 인간의 의지를 매개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라투르는 시민과 총기가 만나 ‘시민-총’ 내지 ‘총-시민’이라는 집합체이자 새로운 행위자가 된다는 대안적인 입장을 제시한다. 총을 쥔 시민은 인간 또는 총 그 자체로 환원될 수 없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행위자”라는 것이다.
라투르는 사람과 기술의 집합체에서 사람과 기술을 각각 따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주요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결합은 제삼의 행위자를 낳고, 제삼의 행위자는 기존 행위자와는 다른 목적을 가지게 된다. 예로 누군가를 그저 다치게 하고 싶던 시민은 총을 손에 쥠으로써 누군가를 살해하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행위의 책임 또한 이 제삼의 행위자에서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행위자 1이 행위자 2와 행위자 3을 동원해 특정한 목적을 달성시킨다면, 이는 행위자 1만의 성취가 아니라 그 과정에 참여한 행위자 1, 2, 3 모두가 발생시킨 결과다. 왜냐하면 행위자 1의 활동은 다른 행위자들에 의해 “허가되고, 정당화되고, 가능해지고, 제공되기” 때문이다.
라투르의 대칭성 개념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심리적 차원은 체화된 인지 이론을 통해 보완될 수 있다. 전통적인 인지과학이 인간의 인지를 오로지 뇌에서 일어나는 추상적인 정보 처리 과정으로 파악한다면, 체화된 인지 이론은 인간의 신체와 감각기관, 몸이 놓인 물질적인 환경을 함께 고려한다. 예를 들면 사람은 가만히 서서 머리만 굴리는 대신, 고개와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제한된 감각 정보를 수집하며 저마다 독특하게 주변 상황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때그때 접근 가능한 도구와 자원은 인지를 특정하게 방향 짓거나 확장시킨다. 예로 종이와 연필은 세 자리 수 곱셈을 훨씬 간단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점에서 세계는 인간의 의지와 독립적으로 선재하는 게 아니라, 인지하는 주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매번 특수하게 ‘상연(enact)’된다고 말할 수 있다. 체화된 인지 이론은 인간과 비인간을 분리 불가능한 집합체로 본다는 점에서 라투르의 대칭성 개념과 공명한다.
해경 123정의 강 건너 불구경: 해양경찰청 조직이나 123정 대원들이 무능하거나 사명감이 없어서 구조에 소홀했다는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해경은 세월호 재난 직전까지 침몰, 좌초, 충돌, 화재 등으로 인한 다양한 해양 사고에서 인명 구조에 앞장섰다. 2006년과 2013년 사이 매년 800~2,000건의 해양 사고가 발생했는데, 해경은 모든 해에 98% 이상의 인명 구조율을 달성했다(해양경찰청, 2014). 물론 세월호 재난에서 해경이 최선을 다했다고 옹호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단순히 개개인의 역량이나 인격에 매몰되어 비판하면 당시 이들이 처해 있던 물리적인 조건을 보지 못하게 된다.
세월호 구조에서 해경의 대처에 관해 많은 사람이 답답함을 호소하는 부분은 왜 승객의 탈출을 유도하지 않았느냐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① 임무는 익수자 구조 - 세월호 재난에서 해경의 소극적인 대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123정이 ‘익수자 구조’라는 목적으로 함정을 특수하게 무장시킨 양상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평소 123정의 주된 업무는 불법 어업 단속이었고, 대원들은 서해청 단위로 매년 인명 구조 훈련을 받았지만 승객 퇴선을 배운 적은 없었다. 이들의 훈련은 바다에 사람이 빠진 것을 전제로 했다. 주로 바다에 구명환을 던져 사람을 끌어 올리고, 표류하는 익수자를 수색하고, 익수자를 건져서 심폐소생술을 행하는 것을 훈련했다.
이런 형편에서 “350명이 탄 여객선이 침몰 중”이라며 출동 명령을 받은 123정은 거의 자동으로 승객이 갑판이나 바다에 나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따라서 현장을 향하면서 익수자를 구조한다는 목적으로 구체적으로 채비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세월호 주위를 촬영한 해경 항공기 B703의 영상 기록에서 대부분 확인할 수 있다. 추후 한 검사는 123정의 대원들이 “구체적 지시” 없이 “각자 우왕좌왕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구조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광주지방검찰청, 2014. 6. 4. A). 그러나 익수자 구조라는 목적에 비추어 본다면 오히려 이들의 작업은 꼼꼼하고 체계적인 편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할 준비를 완료하고 세월호 현장에 다다른 123정은 예상과 완전히 다른 광경을 마주했다. 전기팀장 박상욱은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물 위에 떠다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당황했다”라고 회고했다. 해경 대원들은 구조 전략을 재빨리 수정하는 대신 매우 당황하며 원래 계획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이처럼 123정이 눈앞의 장면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전략을 수정하지 못한 데는 손에 쥔 도구들이 한몫했다. 익수자 구조를 위해 마련해 놓은 도구들이 실제 상황과 일치하지 않자 다음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 좀처럼 종잡지 못한 것이다. 이는 123정에서 휴대전화로 직접 촬영한 동영상에서 잘 드러난다. 다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있다. 왜 123정은 대부분의 시간을 세월호에서 멀찍이 떨어져 허비했을까?
② 충돌과 와류 현상 - 123정 외에도 구조 요청을 받고 달려온 어선, 어업지도선, 행정선 30여 척이 세월호 주위로 몰렸으나 모두가 세월호에 붙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들 중 선체로부터 승객을 직접 건진 배는 소수에 불과했다. 대표적으로 123정 고무보트와 전남201호와 전남207호의 고속단정, 그리고 민간 어선 피시헌터호와 태선호가 선미와 우현에서 승객들을 구조했다. 반면 123정은 대부분의 시간을 멀리 떨어져 승객을 인계받으며 9시 45분과 10시 6분에 단 두 번 짧게 접안하는 데 그쳤다.
인간-선박 집합체로서 움직이던 123정은 두 가지 이유로 세월호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는데, 첫째는 물리적 충돌에 대한 염려였다. 123정 이형래는 “세월호가 기울어져 있는 상태라서 배를 가까이 대면 서로 부딪히기 때문에 선체 중간으로는 배를 붙일 수가 없었다”라고 해명했다(광주지방검찰청, 2014. 6. 4. A). 123정 부장 김종인은 어선과 123정 함정은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해경의 말을 곧이곧대로 신뢰할 수는 없다. 다만, 같은 시각 둘라에이스호도 충돌을 걱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둘라에이스호 문예식 선장은 VHF를 통해 세월호에 “어롱사이드(alongside)”할 수 없다고 진도VTS에 교신했는데, 이는 세월호에 뱃전을 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후 문예식의 증언에 따르면 “어롱사이드하려면 세월호에서 줄도 잡아줘야 하고, 서로 접촉·분리·보강하는 사전 작업이 필요”한데, “아무런 보강 시설도 없이 경사지고 움직이는 배”에 무턱대고 계류를 시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123정은 세월호 주변의 와류 현상에 대한 위험을 과대평가했다. 와류 현상은 큰 배가 침몰할 때 소용돌이를 발생시켜 주변의 물을 빨아들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선박 사고 대피 요령에 따르면, 가라앉는 배에서 바다에 성급히 뛰어들면 안 되고 만약 뛰어내렸다면 배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 당시 123정도 세월호가 빠른 속도로 기울고 있었던 만큼 같이 물속에 잠길까 봐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가 침몰한 병풍도 북방은 맹골수도와 함께 군산항, 팔미도, 백령도 같은 다른 주변 해역보다 조류가 빠른 해역이기 때문에 와류 현상의 위험이 더 컸다. 다만, 사고가 난 시점에는 세월호 주변의 조류가 그리 빠르지 않았고 소용돌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사후에 밝혀진 사실만을 가지고 당시 행위자들의 상황 판단을 소급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어선과 어업지도선 - 쌔내기 배의 활약: 123정과 달리 어선과 어업지도선은 위험을 무릅쓰고 세월호로 과감히 뛰어들어 구조에 맹활약을 펼쳤다. 다만 이들의 경우에도 인간-선박 집합체를 행동의 단위로 파악한다면 현장의 상황을 더욱 생생하게 담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하고 넘어갈 점은 어업 종사자들이 오랜 역사 동안 조난 등의 위기에 처한 다른 선박을 구조하는 일에 힘썼다는 것이다. 일단 1995년에 수상구조법이 개정되면서, 조난이 발생했을 때 그 부근을 항해하는 선박은 조난 선박이나 구조 본부에서 구조 요청을 받으면 “가능한 한 조난된 사람을 신속히 구조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을 제공하여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서해훼리호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법이나 포상금 없이도 민간 어선들이 위기에 처할 때 서로를 돕는 암묵적인 문화가 일찍이 형성되어 있었다. 빠르게 가라앉는 세월호에 배를 들이대고 승객들을 빼낸 것은 비단 어선만이 아니었다. 사고 이후 언론은 주로 해경과 민간 어선을 비교했는데, 그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어업지도선은 적어도 어선만큼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