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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손호영 지음 | 동아시아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손호영 지음

동아시아 / 2024년 2월 / 240쪽 / 16,800원





제1부 시시포스의 돌 _ 진실을 위하여



한계 _ 법이라는 말뚝


“사법부의 역할은 법이 무엇인지 선언하는 것이고, 잘못된 입법은 새로운 입법을 통하여 해결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판사들 사이에서는 시·군 지역 법원으로 발령받은 판사가 관할구역의 인구를 줄여버렸다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내막은 이렇다. 한 판사가 관할구역 내 음주운전을 근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딱한 사정이 있건 말건 음주운전자에게 바로 실형을 선고하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시·군 지역은 사실 한 동네나 다름없다. 벌금이나 내고 돌아오겠거니 했던 이웃 사람들이 갑자기 줄줄이 구속당하고 나니 동네 사람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먼일 같았던 법의 지엄함이 비로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덕분에 관할구역에서는 음주운전 사건이 정말로 줄기는 했다. 다만 관할구역 인구도 덩달아 줄었다고 한다. 음주운전을 한 사람들이 그 판사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란다.

이 이야기를 들은 판사들은 대체로 웃는다.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판사의 선의가 관할구역 인구 감소로 이어지는 아이러니 때문이다. 물론 그 웃음 뒤에는 직업적 영향력에 대한 자부심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을 테다. 하지만 나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사람들은 “판사의 말이 곧 법이다”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하고 있다. 혹시나 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접하게 된 뭇사람들이 “거봐, 맞지? 판사들이 이렇게 힘이 세다니까”라며 수군거릴지 싶어 조마조마하다.

나는 “판사의 말이 곧 법이다”라는 말을 오히려 거꾸로 새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법이 곧 판사의 말이다.” 판사는 사건에 적용될 법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그 법이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풀어 설명하는 것을 그 역할로 할 뿐이다. 판사가 하는 일은 ‘법’에 근거하며, 따라서 ‘법’을 벗어날 수 없다. 법이란 ‘판사의 말뚝’과 같다. 판사가 ‘제아무리 멀리 벗어나려 해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만큼만 가능한 것이다.

반박이 있을 수 있겠다. “판사가 결론을 내면 그것으로 사건은 끝나는 것 아닌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판사의 결론에 불복할 수 있는 수단이 얼마나 많은가. 법원 안에서 구제 수단을 찾는다면 하급심 판결에는 상소를, 확정된 판결에는 재심을 고려할 수 있다. 법원 밖에서라면 형사 판결에는 사면을, 민사 판결에는 사적 면제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압권은 법 자체를 바꾸는 경우다. 판사가 법이 무엇인지 선언했는데 그 선언이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면, 국회의원은 법 자체를 바꿔 판사가 앞으로 선언할 내용을 견제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2020년 6월 2일 이전(시기가 중요하다)’에 음란물 사이트 운영자에게 돈을 내고 텔레그램으로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음란물 동영상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URL 주소를 받았다. 이 사람이 법정에 왔을 때 판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법에서는 ‘아동·청소년을 이용한 음란물임을 알면서 이를 소지한 자’를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음란물 그 자체가 아닌 URL 주소만 받은 행동을 두고 음란물을 ‘소지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판사는 “URL 주소만 받은 경우는 법에서 처벌 대상으로 삼는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뒤 그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음란물 관련 범죄는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신념을 판사가 가졌다 한들 그 신념을 판결에 반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자 국회의원이 나서서 법을 바꾸었다. 법에 아동·청소년을 이용한 음란물을 ‘구입, 저장하는 행위’까지 처벌하는 규정을 새로 추가한 것이다. 이로써 URL 주소만 받은 경우의 처벌 공백이 비로소 채워졌다.

판사의 한계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판사를 무력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판사의 권한과 재량을 작게 볼 생각도 없다. 더 큰 것, 예를 들면 안정과 질서 같은 것을 위해 판사가 스스로를 자제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 절제에서 판사의 권위가 세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처음에 적은 판결 문장을 좋아한다. 판사가 하는 일(사법부의 역할은 법이 무엇인지 선언하는 것)을 명확히 이야기해 주는 동시에 한계(잘못된 입법은 새로운 입법을 통하여 해결해야 한다)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문장은 호소문처럼 읽히기도 한다. “우리네 판사의 역할은 이렇습니다. 현재 법 체계에서 이러저러한 해석과 결론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더 나서면 질서가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 나서주십시오.”

관할구역의 인구를 줄여버렸다는 판사의 결기는 말뚝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듣는 어떤 사람은 판사라면 응당 그래야 하지 않느냐며 속 시원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관사마다 다른 결론이 마뜩잖을 수도 있다. 누구는 판사 잘 만나 벌금을 선고받고 누구는 판사 잘못 만나 실형을 선고받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길 수 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하기 어렵다. 다만 판사로서 내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은 있다. 가진 권한의 한계를 거듭 살펴보고 내 판단이 잘못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그러니까 말뚝을 항상 돌아보는 것, 혹시나 새끼줄이 풀린 것은 아닐까 살펴보는 것. 그 자세를 유지하고자 애쓰는 것이 우리 판사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실 _ 어렵고도 마땅한 다짐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사실심 법관으로서는.. 상반되고 모순되는 진술들 가운데 허위, 과장, 왜곡, 착오를 배제한 진실을 찾아내고 그 진실들을 조합하여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나에게 사실을 달라. 그러면 네게 법을 주겠다”라는 법언(法諺)이 있다. 누군가는 이를 사실만 알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법률가의 자신감으로 읽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법언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제발 진실을 알려주세요”라는 간곡한 부탁, “제3자인 우리는 진실을 알기 어렵거든요”라는 솔직한 현실 인식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법정 영화에서는 이러한 진실 찾기를 주된 테마로 다룬다. 진실은 미리 관객에게 주어지므로, 진실이 무엇이냐보다는 그 진실에 다가서는 스킬이 관객의 흥미를 끈다. 내겐 오래된 법정 영화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1992)이 바로 그런 영화였다.

관타나모 베이 미국 해군기지에 근무 중인 산티아고는 도무지 군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관상동맥에 문제가 있었던 탓에 훈련 중 걸핏하면 낙오하기 일쑤였다. 한계에 다다른 산티아고는 전출을 요청하지만 묵살되었다. 곧 산티아고가 다시 실수하자 사령관은 소대장에게 산티아고에 대한 코드 레드(Code Red)를 명령했다. 손발을 테이프로 묶고 천으로 재갈을 물린 뒤 머리카락을 깎는 등의 방법으로 괴롭히는 것을 의미하는 코드 레드는 기지 내에서 불문율이었다. 문제는 산티아고가 소대장의 명령을 받은 도슨과 다우니의 코드 레드 가해로 사망하게 된 것이다. 사망 원인은 산독증이었다.

도슨과 다우니는 기소되었고, 사령관과 소대장은 코드 레드를 명령한 것을 부인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산티아고를 보호해 왔다고 했다. 산티아고를 전출시키기로 했는데 도슨과 다우니가 마음대로 천에 독을 묻히는 바람에 산티아고가 산독증으로 사망했다며 산티아고의 사인을 독살이라고 주장했다.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도슨과 다우니는 자신들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되자 억울했다. 하지만 그들을 변호할 군법무관 캐피는 첫 만남에서부터, 무죄를 주장하기가 쉽지 않다며 억울할지언정 죄를 인정하고 형량을 적게 받자는 말을 대뜸 했다. 현실적인 선택을 하자는 제안이었지만 도슨과 다우니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캐피는 당황했다. 하지만 긴 고민 끝에 이들 편에 서기로 하고 그날의 진실을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인상 깊은 장면은 역시 캐피의 신들린 듯한 증인신문이다. 군검사의 증인신문에 물 흐르는 듯 대응하는 캐피의 증인신문은 법정 공방의 진수를 보여준다. 군검사는 산티아고가 독살되었다며 그의 사망을 진단한 군의관을 증인으로 불렀다. 사령관 측이었던 군의관은 독이 검출되지는 않았으나 검출되지 않는 독도 많다며, 평소 건강했던 산티아고에게 산독증이 발생한 것은 독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산티아고의 사인을 독살이라고 추정했다.

이제 캐피의 반대신문 차례. 신중히 묻는 캐피. “산독증이 빨리 진행될 수 있는 몸 상태가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혹시 관상동맥에 문제가 있으면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관상동맥에 문제가 있으면 몸에는 어떤 증상이 나타납니까?”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슴통증? 숨가쁨? 피로?” “그렇습니다.” 그러자 캐피가 군의관이 평소 산티아고를 진단한 차트를 제시했다. “증인께서 산티아고에게 진단하신 부분을 읽어주시죠.” 군의관은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이 작성한 차트를 읽으며 말했다. “건강하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통증이 발견된다. 가슴 통증, 숨가쁨, 피로…."

캐피는 독살이 아닐 수 있음을 자신의 입이 아닌 증인의 입을 빌려 진술하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군의관이 평소 산티아고에게서 가슴 통증, 숨가쁨, 피로를 발견했음을 밝혔다. 그것으로 산티아고의 관상동맥에 평소에 문제가 있음을 추정하게 한 뒤, 배심원들로 하여금 독이 아닌 관상동맥 문제로 인해 산티아고에게 산독증이 발생할 수 있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세련되고 정교한 질문 순서가 아닐 수 없다. 아마 처음부터 대뜸 “산티아고에게 관상동맥 문제가 있었으니 산독증이 발생한 것 아니냐?”라고 물었다면 군의관은 그렇지 않다는 100가지 변명을 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 캐피는 동료 부대원을 증인으로 불러 코드 레드가 실제로 있었음을 확인한다. 그러자 군검사는 코드 레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자 증인에게 부대 안내와 정보 책자를 건네며 물었다. “여기 어디에 코드 레드가 쓰여 있습니까?”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캐피가 군검사의 책자를 빼앗아 들고 부대원에게 물었다. “여기에 식당이 어디 있는지 쓰여 있습니까?”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죠?”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식당의 위치가 책자에 쓰여 있지 않다고 존재를 부인할 수 없듯 코드 레드 또한 마찬가지이다. 캐피는 군검사의 논리의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캐피는 사령관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캐피는 자신의 권위가 무시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령관의 속을 긁어냈다. “증인은 산티아고를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히 소대장에게 명령했습니까?” “그래.” “소대장이 증인의 명령을 어길 가능성은 없습니까? 늙은이는 틀렸어. 이러면서?” “내 명령을 소대장이 어긴다고? 이봐, 전방에서 근무한 적이 있나? 우리는 명령을 반드시 따라.” “그러면 증인의 명령으로 산티아고는 안전한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증인은 왜 산티아고를 전출시키려고 했던 것입니까? 혹시 증인의 명령은 무가치한 것 아니었습니까?” “뭐라고?” “묻겠습니다! 당신이 코드 레드를 지시했지요?” “그래! 젠장, 내가 그랬다!”

사령관은 부하가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상황, 나아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인식하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산티아고를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했다면 산티아고는 안전했어야 했고 전출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사령관은 산티아고를 괴롭힘 때문에 전출하려 했다는 거짓말을 덧붙였다. 그러다 보니 산티아고의 전출은 결과적으로 사령관의 명령이 무시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자가당착에 빠진 사령관은 그 상황을 참을 수 없어서, 자신의 명령으로 산티아고를 괴롭힌 것이라 밝혔다. 그것이 가져올 폭풍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그날의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증명의 영역이 아니라 실제의 영역이다. 증명되지 않는다고 하여 진실이 부정될 리 없다. 그러나 이 진실을 당사자는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제3자가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재판은 진실의 그림자인 ‘사실’을 드러내 인정하고 이를 통해 진실을 재구성하는 고된 과정이 된다. 어쩌면 이 글 첫머리에 적힌 판결은 판사 스스로 하는 다짐일지도 모른다. ‘허위, 과장, 왜곡, 착오를 배제하고 진실을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그런 다짐 말이다.



제2부 우리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 _ 설득을 위하여



평균 _ 판단의 기준


“(동물보호법)에서 금지하는 잔인한 방법인지 여부는 특정인이나 집단의 주관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사회 평균인의 입장에서 … 판단하여야 한다.”


평균은 집단의 데이터가 가지는 ‘인상’을 가장 쉽고 빠르게 제공한다. 그래서 나는 많고 다양한 숫자를 접할 때 평균을 먼저 찾는다. 예컨대 어떤 나라의 기후를 알고 싶을 때 ‘평균 기온’을 확인하는 식이다. 하지만 판결에서 쓰이는 ‘평균’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평균’과 달리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개 농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농장 도축시설에서 개를 도살했다. 전기가 흐르는 쇠꼬챙이를 개의 주둥이에 대어 감전시키는 방식으로. 이러한 ‘전살법(電殺法)’은 개 식용을 위해 도축업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전살법에 대해 개를 잔인하게 죽이는 방식이라는 지적이 있었고,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마침 동물보호법에서는 “누구든지 목을 매다는 등의 잔인한 방법으로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제 전살법이 동물보호법에서 금지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동물을 죽이는 것’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되었다.

‘잔인하다’는 것은 뭘까? 국어사전에 의하면 ‘인정이 없고 아주 모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전살법이 ‘인정이 없고 아주 모진 방식’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지 않겠는가? 그래서 대법원에서는 이 글 첫머리에 적은 문장처럼 판단의 기준으로 ‘사회 평균인’을 데려왔다. “잔인한 방법인지 여부는 … 사회 평균인의 입장에서 … 판단하여야 한다.”

언뜻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개 도축업자의 입장에 치우쳐서도 안 되고, 동물보호단체의 입장만 편들어서도 안 되며, 판사 개인의 판단에만 맡겨서도 안 된다. 그런데 사회 평균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사회 평균인이란 ‘사회 구성원의 산술 평균값에 해당하는 사람(실증적 평균인)’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겠다. 사회 평균인은 ‘잘잘못을 판단하는 도구’이다. 어떤 사람의 행위를 두고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판단할 때, 사회 평균인이라는 가상의 주체를 불러와서 “사회 평균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회 평균인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결론이 나오면 그의 행위를 잘못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 평균인을 ‘사회 구성원의 산술 평균값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보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한밤중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살펴봤더니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무단횡단을 하더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해보자. 그럼 어떤 사람이 한밤중에 무단횡단을 했을 때 “사회 평균인도 무단횡단을 하므로 그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이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한밤중에 횡단보도를 건너더라도 신호에 맞춰 건너는 것이 마땅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회의 규칙에 맞춰 마땅한 행동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을 사회 평균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그래야 “사회 평균인이라면 한밤중에 횡단보도를 건너더라도 신호에 맞춰 건널 것이므로 무단횡단을 한 사람의 행동은 잘못이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에서 말하는 ‘사회 평균인’은 “사회 구성원이 마땅히 따라야 할 속성을 지닌 사람, 즉 규범적 평균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요컨대 사회 평균인이란 실재하는 ‘보통 사람(average person)’이 아닌, 잘잘못을 판단하는 도구로서의 ‘합리적인 사람(reasonable person)’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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