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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의 역사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 더숲


비잔티움의 역사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더숲 / 2023년 2월 / 410쪽 / 22,000원





들어가며 - ‘비잔티움’이란 무엇인가?



살아남은 로마 제국


비잔티움은 기원전 7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 즉 지금의 이스탄불에 세워졌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나라의 이름인 ‘비잔티움’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6세기의 일이다. 따라서 그 도시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 비잔티움이라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이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더욱 적었을 것이다. 우리가 비잔티움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으로 여겼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고대 로마 제국과 그들의 제국 사이에는 어떤 정치적 단절도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 제국의 통치자들은 스스로 고대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황제로 자처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오랜 시간과 많은 공간 속에 존재했다. 파도의 움직임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영토는 긴 역사 동안 꽤 자주 변동을 겪어야 했다. 로마 제국은 영국에서 오늘날의 알제리까지, 포르투갈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약 4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395년 로마 제국은 행정적으로 동?서로 나뉘었는데, 동쪽은 약 140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차지하고 베오그라드에서 현재의 리비아에 이르는 노선의 대략 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러나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와 스페인 남부, 지금의 튀니지·알제리·리비아를 재정복하여 지중해를 다시금 로마 제국의 내해로 만들었다.

565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뒤 제국은 이탈리아의 많은 부분과 스페인을 상실했고, 620년대에는 이집트와 시리아·팔레스타인을 페르시아인들에게 일시적으로, 630년대에는 아랍인들에게 영구적으로 빼앗겼다. 그동안 발칸반도 남부, 특히 그리스 지역은 실질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통제를 벗어났다. 7세기 말에는 북아프리카마저 상실하여 제국에 남은 영토는 이탈리아 일부와 에게해 양안에 불과했고, 제국은 영토의 거의 절반을 잃었다. 다음 3세기 동안 비잔티움은 점차 아랍의 맹공격을 저지하고 어느 정도 국경 지역을 고정한 다음 발칸반도에서 영토를 회복한 뒤 마침내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동쪽과 남쪽으로 진격했으나, 영토 획득은 그리 극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11세기 후반에는 이탈리아의 노르만인과 셀주크인이라는 두 강력한 적이 나타나 비잔티움 제국의 변경을 갉아먹더니 제국을 핵심 지역인 발칸반도 남부와 소아시아 일부 지역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제1차 십자군(1096~1099년)은 레반트 지역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고 이를 이용해 비잔티움은 소아시아와 시리아로 확장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영토를 수십 개의 작은 주로 분할했을 때 영토 확장은 저지되었다. 이후 1261년 재정복은 꽤 빠르게 이루어졌으나, 비잔티움 제국은 마지막 2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갔다. 그리고 14세기 초 오스만 제국이 소아시아를 집어삼켰다. 발칸반도의 영토도 곧 그 뒤를 따랐고, 비잔티움 제국은 마지막 50년간 도시 국가 몇 개만으로 구성되었으며 그나마 서로 바다로만 이어져 있었다.

3세기의 위기와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 대제. 단독 황제로서 재위 324~337년)의 등장
콘스탄티누스 1세의 통치는 비잔티움 제국의 탐험을 위해 선택된 출발점이며, 그의 통치가 이루어 낸 오랫동안 지속된 발전은 그보다 앞선 시대의 맥락 안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이른바 3세기의 위기(235~284년)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 제국에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성공적인 위기 극복의 시기(284~337년)다. ‘3세기의 위기’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기사 계급 출신 장교 막시미누스가 황제 자리를 찬탈한 235년으로부터 또 다른 장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 284년 사이를 말한다. 이 길지 않은 시기에 무려 51명이 로마 황제로 선포되고 그들 중 상당수가 전사했으며, 가장 많은 수가 전세가 기울 때 휘하의 군대에 죽임을 당했다. 이 시기는 동시에 여러 전선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진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가, 남쪽에서는 북아프리카의 유목민 약탈자들이, 그리고 서쪽과 북쪽에서는 라인강과 다뉴브강의 게르만계 집단들이 로마 제국을 괴롭혔다. 로마 제국은 여러 적을 동시에 상대할 능력이 없었다.

원정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 통치자들은 세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 인해 반발이 격심했고 인기가 떨어졌다. 또 주화의 가치가 하락해 매점매석과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게다가 단명한 황제 대다수가 군인 출신이어서 그들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벅찬 과제에 직면했는데, 그 과제란 바로 강력한 중심인 수도 로마와 원로원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제국의 변경에서 위협하는 적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황제 대부분은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고심한 끝에 많은 황제가 아들과 권력을 나누고, 보다 유연하게 지휘하고 야전군을 영구화하여 군대를 발전시켰으며, 권력과 안전을 증명하기 위해 신들과 결부 지어 황제의 인격을 강조하는 등의 조치를 실시했다.

이후 큰 변화는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즉위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가 제국 운영의 모든 부분에서 대담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과거의 악순환을 끊어 내자 변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단독 황제로 있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285년 막시미아누스를 부제 즉 카이사르로, 이듬해에는 정제 즉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우스를, 막시미아누스는 헤라클레스를 수호신으로 두었다. 293년 두 공동 황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갈레리우스를 부제로 뽑음으로써 사두정(사분 체제)이 시작되었다. 네 황제는 영토를 분할하여 각각 로마 제국의 거대한 영역을 통치함으로써 적의 침입에는 신속하게 대응하고 행정상의 문제에는 즉각 대처할 수 있었다.

성공적이었던 사두정은 305년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구상한 대로 두 정제가 사임하고 두 부제가 그 자리에 올랐는데, 이는 로마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두 부제 자리는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아닌 새로운 인물 즉 갈레리우스의 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세베루스가 차지했다. 사두정의 첫 20년이 네 통치자의 화합으로 제국의 적들을 물리치고 기적적으로 안정기에 돌입한 시기였다면, 그 후 20년은 격변의 시기였다.

사실 305~324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단 한 사람이 통치하는 제국으로 돌려놓기 위해 분투한 시기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인데, 그 단 한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1세 자신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우스와 헬레나라는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헬레나는 한낱 비천한 신분의 첩실이었다. 이후 콘스탄티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306년 요크에 있던 그의 병사들은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일련의 행정 개혁을 실시했는데, 재정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오래 지속된 것은 통화 개혁이었다. 309년 또는 310년 순도 높은 금화 솔리두스가 만들어졌는데, 무게가 약 4.5그램인 솔리두스는 중요성이 저하해 가는 은화 그리고 매일 거래에서 사용되는 공통 통화인 동화와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었다. 솔리두스를 주조하는 데 필요한 금속은 이제는 사라진 사두정 황제들이 다스리던 일부 지역에서 공급했으며, 때로는 이교도 사원의 재산과 실각한 관리나 통치자의 몰수 재산에서도 나왔다. 솔리두스는 도입 초기부터 퍽 안정적이었고 11세기까지 그러했다. 아무튼 솔리두스의 성공과 안정성은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무역을 발전시키겠다는 그의 계획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개혁의 또 다른 대상은 군대였다. 그는 황제 자신이 이끄는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하여 필요한 곳에 투입할 수 있는 변화를 가했다. 나아가 퇴역 군인에게 버려진 토지를 주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군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콘스탄티누스는 농업 생산이 붕괴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며 군 계급 간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재위에서 가장 주목받는 측면은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일 것이다. 늦어도 312년부터 콘스탄티누스는 대단히 직설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지지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의 화답 또한 뜨거웠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왕국과 그리스도교도 로마 황제의 나라는 서서히 융합되어 갔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탄생하다 (330~491년)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의 상황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리키니우스에 대한 최종 승리를 선언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가장 큰 유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도시와 그리스도교 개종이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단독 황제가 되는 고된 과업을 성취했음에도 단 한 사람의 후계자에게 모든 권력을 넘기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 1세·콘스탄티우스 2세를 정제로, 두 조카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 친족 관계로 강화된 사두정 체제의 부활을 시도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들을 야전에 보내고 자신은 차츰 원정에서 빠졌다. 그러다가 그는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원정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337년 5월 니코메디아에서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유혈 참사가 벌어졌고, 황제의 세 아들과 조카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모든 남성이 살해당했다. 338년 세 아들은 제국을 나누기로 합의했으나, 353년까지 내전과 찬탈이 이어지다가 결국 콘스탄티우스 2세만이 살아남아 단독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사촌 율리아누스를 갈리아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율리아누스의 잇따른 군사적 성공은 콘스탄티우스 2세와 멀어지게 했는데, 그는 콘스탄티우스가 가족을 살해했다는 데 원한을 품었을 것이다. 둘 사이의 전쟁이 목전에 다가온 듯 보였다. 그런데 율리아누스는 360년 휘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고 동방으로 진군하기 시작했으나, 콘스탄티우스가 361년 죽는 바람에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율리아누스는 궁전과 군대에서 대숙청을 하고,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여 362년 군대를 안티오키아 인근에 집결시켰다. 그런데 율리아누스가 1년가량 안티오키아에서 머무르는 바람에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났고, 안티오키아의 시민들은 율리아누스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이후 율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를 떠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전투 중에 치명상을 입었다.

율리아누스의 후계자 요비아누스는 페르시아와 굴욕적인 협상을 맺고 재빨리 퇴각했으며, 36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길에 죽었다. 이후 군대는 새로이 발렌티니아누스 1세를 황제로 선출했다. 새 황제는 동생 발렌스를 동방의 공동 황제로 임명한 뒤 자신은 밀라노를 중심으로 제국의 서방을 다스렸다. 이후 몇 년 동안 찬탈 시도가 잇따랐음에도 발렌티니아누스는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침공을 시도하는 다뉴브 전선을 안정시키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375년 발렌티니아누스가 죽자 아직 미성년인 그의 두 아들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상당한 규모의 고트 집단이 훈 제국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하고는 다뉴브강을 건너 로마 제국 영토에 정착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제국은 대이주를 감당하지 못했고, 양 세력의 갈등은 커져갔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삼촌인 발렌스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고트 집단을 막으려 했으나,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대패하여 황제는 로마군 3분의 2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몇 달 뒤 스페인 지방의 군사령관이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제위에 올랐고, 곧 서방 제국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인정도 받았다.

이후 380년 테오도시우스는 고트 집단에 패배했으나, 382년 평화 협상을 맺는 데에 성공했다. 고트 집단은 자체 통치자들의 통제 아래에 제국으로 받아들여져 다뉴브 전선 인근에 정착했다. 그리고 383년 그라티아누스가 진중 반란으로 살해당하자, 테오도시우스는 이 반란을 388년 진압했는데, 383년에 이미 자신의 아들 아르카디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동 황제로 선언해 놓은 상태였고, 서방 문제를 일단락 지은 뒤인 393년 둘째 아들 호노리우스를 서방의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동서로 나뉜 제국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5년 밀라노에서 죽음을 맞이한 뒤 권력은 남은 두 아들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형 아르카디우스가 다스리는 동방이 선임의 지위로 정해졌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는 제국이 분열되었다기보다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권력 공유의 관행이 계속되어 5세기 대부분 동안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한편 이 시기 군대에서는 게르만 출신 장교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종족과 아리우스 신조로 인해 황제 자리를 요구할 수는 없었지만, 5세기 내내 로마인 꼭두각시 황제를 내세워 실질적인 제국 통치자로 행세했다. 따라서 권력 구조, 특히 군대가 게르만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반달 출신 스틸리코로인데, 그는 테오도시우스 시대에 황제의 조카 세레나와 결혼하여 황실 일가에 편입되는 등 비로마 출신 인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경력을 쌓았다.

한편 테오도시우스와 달리 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는 뛰어난 황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오래 황제 자리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다른 사람들이 했다. 아르카디우스의 경우에는 환관 출신 에우트로피우스나 고트 출신 군사령관 가이나스가, 호노리우스의 경우에는 스틸리코가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제국의 동방과 서방 사이는 꽤 적대적이어서 5세기 말에는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이르렀는데, 이런 갈등의 배경에는 다뉴브강과 라인강 너머에서 일어나는 대이주가 있었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훈 제국의 서진으로 돈강과 볼가강 인근의 종족들은 고트인과 마찬가지로 서쪽으로 밀려났고, 제국 영토로 밀려들었다. 이 집단들은 이 시기까지 단일한 종족 집단이 아니었지만, 적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로마 제국 국경에 가해지는 압력도 커졌다. 로마 제국은 일부 집단에 대해서는 유화 전략을 취하여 제국 내에 정착시키고 군대로 활용했다. 이민족 입장에서도 로마 제국 군대에 복무하는 대가로 경제적·사회적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한편 동쪽에서는 아르카디우스가 408년에 죽으며 갓 태어난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가 즉위했다. 아르카디우스가 생전에 테오도시우스를 공동 황제로 만들어 놓은 덕분에 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나, 테오도시우스의 재위 기간은 섭정 시대였다. 그의 누나 풀케리아가 실세 가운데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진짜 권력은 행정부와 군부의 관리들에게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 재위 초기는 동방의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인 안테미우스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안보가 중요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에 강력한 육상 성채가 세워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규모가 계속 커짐에 따라 식량에 대한 압박도 커졌기 때문에 안테미우스는 식량 부족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로마가 약탈을 당했을 때 동방 제국은 서방 제국의 새로운 수도 라벤나에 군대를 보냈다. 이 관행은 다음 10년 동안 이어졌다. 414년 풀케리아는 아우구스타의 지위에 올라 정식으로 동생의 섭정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450년에 죽었다. 다시 한 번 군대가, 정확하게 말하면 권신 아스파르가 군인 출신 노인 마르키아누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고, 풀케리아가 마르키아누스와의 결혼에 동의하여 테오도시우스 왕조는 이어지게 되었다. 451년 동방 제국은 협상을 통해 아틸라와 화해했고 훈 제국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서방 제국은 훈 제국을 이용해 게르만계 침입자들을 통제하던 이전과 반대로 그들을 통해 훈 제국을 막는 정책을 채택했지만, 이 방법으로는 아틸라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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