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살만의 두 얼굴
브래들리 호프, 저스틴 셱 지음 | 오픈하우스
빈 살만의 두 얼굴
브래들리 호프, 저스틴 셱 지음
오픈하우스 / 2023년 6월 / 484쪽 / 25,000원
국왕이 사망했다 (2014년 12월 ~ 2015년 1월)2014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통치하는 제3 알 사우드 왕국의 제6대 국왕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리야드 외곽의 사막에 있는 병원 침상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압둘라는 언제나 사막을 사랑했다. 늙어가면서 더욱 그랬는데, 그곳에 가면 사색을 할 수 있고, 수도의 교통지옥과 특혜를 청하는 인간들의 기나긴 줄을 피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아무리 노력해도 현대적인 정부로 나아가지 못하는 실패한 정부에 대한 끝없는 실망감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5년 1월 23일, 압둘라 국왕은 오랜 폐암 투병 끝에 리야드의 국가방위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압둘라 국왕이 사망하고 나서 우여곡절 끝에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7대 국왕에 즉위하는데, 모하메드 빈 살만(MBS)은 살만의 아들로 현 왕세자이다. ‘모하메드 빈 살만’에서 ‘빈(bin)’은 ‘~의 아들’을 의미한다.
MBS (2015년 1월 23일 ~ 5월 1일)살만 국왕은 아들 MBS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해 군을 통솔하게 했다. 사우디 국방부의 상황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장군들은 몇십 년 동안 사우디군을 운영해 왔기에 신임 국방장관이 전임자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그동안 역경에 처하면 사우디는 오랜 보호자인 미국의 지휘를 따랐다. 그러나 29세의 나이에 사우디아라비아군을 지휘한 지 8주밖에 안 된 MBS가 V자 테이블의 꼭짓점에 앉아 “F15 전투기들을 출격시키시오!”라는 전례 없는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충격을 받고 침묵을 지켰다. 이러면 사우디는 단순히 전쟁에 나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을 선도하는 것이었다.
당시 후티 반군이 사우디의 이웃인 예멘을 가로지르며 도시들을 계속해서 점령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대담함, 이란의 지원 그리고 리야드와의 인접성 등으로 인해 게릴라군은 남쪽 국경에 대한 하나의 심각한 위협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란보다 더 큰 위협은 없었고, 반군들이 자기들보다 더 크고 더 무장이 잘된 사우디아라비아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바로 이란이 강력한 미사일과 군사 장비를 공급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하루 전, 반군사령관 중 한 명이, 만약 사우디가 개입한다면 후티 반군은 “메카에서 멈추지 않고 리야드까지 전선을 확대하겠다.”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MBS는 그런 위협을 참으려 하지 않았다. 2015년 3월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가장 야심적인 군사작전을 명령했다. 그가 내린 결정 때문에 휘하의 장군들은 물론 미국도 경악했다. 참고로 사우디 측이 사전 예고도 없이 백악관에 연락하여 미국도 이 폭격작전에 합류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우리는 무방비 상태였다”라고 국가안전보장위원회의 한 관리는 회상한다. 아무튼 이 일명 ‘결정적 폭풍’ 작전은 중동지역의 혼란과 불안을 고조시켰다. 한편 사우디 정부는 첫 번째 공격이 시작된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MBS가 지도를 응시하면서 단호한 표정으로 군 지휘관들과 협의하는 사진을 배포했다. 전쟁을 통해 MBS가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라는 점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예멘 폭격이 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 바이든 부통령의 안보 보좌관 토니 블링컨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리야드로 날아왔다. 블링컨은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사우디 측 인사인 모하메드 빈 나예프(MBN)를 만났는데,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전쟁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상황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블링컨은 답보다는 의문을 더 많이 가지고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백악관 참모들이 보기에는 분명 MBS는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요한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왕자였다. 게다가 그는 그런 결정을 매우 빠르게, 어쩌면 무모하게 내리고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한편 아버지가 왕이 된 지 6일 만에 MBS는 새로 설치된 경제개발위원회의 의장으로 지명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앞으로 모든 국가 사무를 관장할 위원회 두 개 중 하나였다. 그는 이제 국가의 모든 재정 및 개발계획을 대대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백지위임장을 받았고, 두 달이 되지 않아 사우디아라비아 개혁을 선도할 기관으로 PIF를 선정했다. 그리고 4월에는 나라의 돈 버는 기계인 사우디 아람코를 접수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윤을 내고 가장 큰 회사에 대한 통제권이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참고로 MBS가 첫 번째로 취했던 조치들 가운데 하나는 국제 여론조사 기업을 고용하여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인식, 특히 어떤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지를 조사하도록 한 것이었다. 결과는 놀라울 것도 없었다. 사우디는 자생적인 테러리스트가 있고, 영화관이나 오락시설이 없고, 여성의 인권이 고도로 제약되어 있는 폐쇄사회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MBS는 대책본부를 만들어 문제점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실행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그는 보좌관들에게 바야흐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 사회에 동등한 지위로 진입하는 시점이 되었고, 또 사우디아라비아는 더 이상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강력한 경제를 바탕으로 세계무대의 강국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한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살만 국왕이 왕위계승서열에서 동생 무크린이 물러난다고 공표한 것이었다. 이제 MBS는 새로운 부왕세자로 지명되어 사촌인 모하메드 빈 나예프(MBN) 다음으로 왕위계승서열 2번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MBS는 이제 실질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권력 이동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살만 중심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의 사촌들은 몸서리를 쳤다.
몰디브 파티 (2015년 7월)2015년 중반에 이르러 MBS는 그 어느 때보다도 광범위한 권력을 갖게 되었지만, 만약 자신의 개혁계획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그 권력이란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최근에 그 일원으로 참여한 안보정무위원회 위원들과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을 때면, MBS는 개혁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것 같았다. 참고로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MBN은, 비록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떤 계획에도 반대하는 것으로 보였다. 모든 제안(여자들의 운전, 관광 개방 등)에 대해서도 그와 그의 보좌관들은 그것이 초래할 잠재적 결과를 일일이 열거하곤 했다.
그래서 MBS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했고, 국가를 급진적으로 개조하기 위해서는 사우디 청년들의 동조가 필요했다. 인구의 60% 이상이 30세 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권력이 없는 국민이었고, 수많은 청년들이 직장을 구하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으며, 왕국의 반기업적 분위기 속에서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국민이었고, 그들의 숫자는 제복을 입은 종교이론가들이나 삐쳐 있는 왕자들보다 몇 배나 많았다. 아랍의 봄 저항운동에서 보듯이 불만에 찬 청년층은 알 사우드의 통치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반대로 그들을 개혁 성향의 통치자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권력을 강화하는 기반이 될 수도 있었다. 청년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들이 시간을 보내는 공간, 즉 인터넷에서 그들과 접속할 필요가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남녀의 상호접촉, 음주, 춤, 음악회 참석, 영화 관람, 물담배 등이 금지된 사회에서 온라인 생활은 하나의 결정적 출구이며 소통 방식이었다. MBS의 작전은 잘 먹히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사우디 국민이 그의 속도 있는 개혁 조치들에 진정으로 감동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역사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책을 앞장서서 비판해오던 사람들의 상당수도 그랬다. 노련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도 처음에는 그런 이유로 생각을 바꾼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대중적인 평판을 높이는 것도 MBS의 이미지 메이킹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가 젊고, 경험이 없고, 왕위계승서열이 2번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지도자들에게 MBS야말로 새로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방장관에 취임한 후 예멘 폭격을 개시하고, MBS는 국가수반처럼 행동할 작정을 했다.
수십억 달러 (2016년 9월)사우디경제를 개혁하는 다른 프로젝트와 달리 네옴은 외국 컨설턴트나 경제전문가들이 개념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영감의 순간에 MBS에게 다가온 비전이었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뒤, MBS는 한발 물러서서, 재창조된 사우디아라비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그 비전을 실현하는 데에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것은 주눅 들 만큼 중대하고 힘든 일이었다.
전임 압둘라 국왕은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 개혁을 제도화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가 10년 이상 통치하고 사망한 뒤에도 여성들은 여전히 운전을 금지당하고 있었다. 또 기업가적 문화는 아직도 시작 단계에 있었고, 젊은 남성은 가족이나 배우자가 아니면 여전히 젊은 여성과 카페에 함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사우디 경제에는 자랑거리가 거의 없었고, 화제가 될 만한 혁신이나 국가적 영웅도 없었다. 경제는 석유에 의존하고 바깥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있어 왕국에 투자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MBS의 컨설턴트가 파악한 바로는 2009년과 2016년 사이에 외국인의 연간 직접투자는 85%가 격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웃의 작은 나라들과 달리 사우디아라비아는 국내에서 성장한 산업으로 내수 경제를 충분히 키워낼 수 있는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돈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돈을 쓰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유흥을 위해서 두바이로, 관광을 위해서 파리로, 치료를 받으러 런던이나 스위스, 미국으로 가는 식이었다. MBS는 이것을 ‘경제 유출’로 보았고, 사우디의 달러가 다른 나라에서 소비되면, 그것은 왕국의 경제가 흘러나가는 것이라는 거의 강박에 가까운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MBS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난 50년 동안 변함없는 낡은 습관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나라는 원유를 뽑아내고 팔아서 그 돈을 다른 곳의 물건을 사오는 데 썼고, 왕국의 인구는 급증하고 있는 반면 석유는 (아니면 적어도 석유에 대한 국제적 수요는)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가 MBS는 컴퓨터 화면에 구글어스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도를 띄웠다. 우주에서 본 왕국의 이미지에서 시작하여 그는 아라비아반도를 서쪽의 제다와 메카에서 공백지역을 가로질러 동부 다흐란의 유전지대까지 훑어보면서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지역이 떠올랐다. 제다 북쪽 지역은 요르단 국경을 따라 이어지는 산맥이 홍해를 향해 서서히 낮아지다가 텅 빈 점판암처럼 평평한 땅이다. 그 지역에는 작은 도시 하나만 있고 그나마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싸여 적은 수의 사람들이 뜨문뜨문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MBS는 친구 몇 명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현장으로 갔고, 하늘에서 현장을 바라본 그에게 영감이 떠올랐다. 그는 전에 그곳에 와본 적이 있었지만, 왕국에 처음 온 사람처럼 새로운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 지역에는 담수가 거의 없다는 것을 포함해 분명히 많은 난관이 예상되지만 큰 장점도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적 또는 경제적 기득권층에게 별 의미가 없는 지역이므로, MBS가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데 거의 저항이 없을 것이었다. 지역주민들은 반유목 상태의 베두인족으로 오랜 세대 동안 사막지대를 유랑하며 살아왔는데, 그들은 재정적 미끼를 주고 최소한의 위력만 가해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지역에는 기존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들과 달리 노후화된 인프라, 경직된 관료조직, 부패한 정부관리, 사회 변화를 저해하는 (그리고 외국인 투자자를 방해하는) 완고한 종교법원 등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선언한 뉴프론티어에 원점부터 새로 건설된 도시에서는 반발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한다면, 만약 네옴이 혁신적이고 살기 좋으며 자신이 꿈꾸는 것처럼 번영한다면, 왕국의 나머지 지역 또한 더 낙관적인 미래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MBS는 단순히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왕국을 건설하기로 작정했다. 거기에는 첨단기술과 의료서비스가 들어갈 것이고 이들 모두를 위한 전력은 석유가 아니라 태양광 에너지가 공급할 것이다. 도시 인근에는 해변을 찾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장소들이 제공되고, 요트, 산악 행글라이딩, 암벽 등반, 스키장 등 레저를 위한 시설이 들어설 것이다. 겨울에 불어오는 모래먼지는 기술자들이 만들어내는 눈으로 보완될 것이다. 이슬람법원을 설치하겠지만 와하브주의는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은 머리와 몸을 가리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술도 허용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재판관, 관료, 금융 당국 등) MBS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장관, 전직 리야드시장, 왕궁보좌관, 한때 증권감독관을 지내다가 이제는 그가 신뢰하는 협력자가 된 모하메드 알 셰이크를 포함하여 이사회를 구성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부펀드를 담당하고 있는 은행가 야시르 알-루마이얀도 이사회에 있었다. MBS가 이사회 의장이 되고 외국인 컨설턴트들이 기획을 보좌했다. 초기에 정한 네옴이라는 명칭은 그리스어의 ‘새로운(Neo)’과 아랍어의 ‘미래(Mustaqbal)’를 혼성한 것으로 “이 프로젝트가 인간을 위한 문명의 도약을 대표하기 때문이며, 이 명칭은 특정의 문명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라고 MBS는 후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 때 말했는데, 또 다른 사람에게는 네옴이 실제로는 ‘신경세포 도시(neuron city)’를 의미하며 그 목표 중 하나가 인간의 뇌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의 한 수 (2017년 5월)2017년 5월 20일, 리야드의 리츠칼튼호텔에 도착한 도널드 트럼프는 궁전 같은 호텔의 정면 외관에 엄격한 표정의 자기 얼굴이 15미터 높이로 투사된 영상을 발견하고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의 거대한 얼굴 옆에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부드럽게 미소 짓는 살만 국왕의 얼굴이 있었다. 시내에는 온통 가는 곳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나란히 내걸려 있었고 “우리 함께 승리하리라!”라는 간판이 도배하다시피 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가 온 천지에 게양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것은 대통령 트럼프의 첫 해외 순방이었으며 사우디 측은 그를 왕처럼 환대하고 있었다. MBS는 리츠칼튼 도착 장면은 물론 나머지 모든 방문 일정을 세심하게 지휘했다. 그는 트럼프를 상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트럼프를 리야드로 오게 한 것이야말로 MBS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좌로 가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해온 그 어느 것보다도 가장 뚜렷한 도약의 발걸음이었다.
그때까지 왕자(MBS)는 아버지 살만이 국왕이 되는 데 필요한 재력을 쌓아왔다. 그는 잠재적 찬탈자들을 측면에서 우회 공격함으로써 아버지가 압둘라의 왕관을 확실하게 승계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군부와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사촌이자 경쟁자인 모하메드 빈 나예프를 열 밖으로 밀어냈다. 그런 작업을 모두 끝낸 뒤, 그는 왕국은 더 이상 오일달러를 취약한 현상을 유지하는 데 낭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지금의 그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유해졌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제 그는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첫 해외순방국을 사우디아라비아로 선택하도록 했다. 이로써 MBS가 세계 최강국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메시지를 국내외에 보낼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토니 파프가 말한 “왕다운 일”을 그가 해낸다는 사실을 가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MBS는 겨우 서른한 살이었다. 왕좌로 가는 길이 더 나이 많은 모하메드 빈 나예프(MBN)에게 가로막힌 상태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좌를 향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지도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파프는 말하고 있다. 예멘 폭격과 경제개혁 공약도 도움이 되겠지만, 긴장 상태의 미국-사우디 관계를 재활성화시킬 수 있는 인물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