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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로 읽는 세계사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 시그마북스


물류로 읽는 세계사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시그마북스 / 2023년 12월 / 230쪽 / 17,000원





페니키아인이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한 이유



카르타고의 번영과 쇠퇴


카르타고는 현재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 부근에 있었던 고대 도시다. 카르타고는 지중해를 동서로 나누었을 때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시칠리아 섬에 가까우므로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까지 직선으로 지중해를 관통하는 경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지리적으로 지중해 무역망의 중앙부에 위치했던 셈이다. 또한 카르타고가 모체인 티루스를 대신해 광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 것은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가 대두함에 따라 티루스의 상업 활동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시돈과 티루스를 함락시켰을 때 수많은 페니키아인이 카르타고로 이주했다. 그때부터 카르타고는 상업 국가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카르타고 상선은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브리튼 섬까지 진출해 주석 등을 수입했다. 페니키아인의 물류가 북해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때 지중해 동쪽에서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가 크게 번성해 ‘아테네 제국’으로 불리고 있었다. 한편 지중해 서쪽에서는 카르타고가 강력한 세력으로 발달했다. 이는 카르타고가 기존의 페니키아 식민지들과는 달리 군사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 코르시카 섬까지 세력을 뻗쳤다.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에도 카르타헤나, 아르메니아 등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한편 서쪽 절반을 지배했던 시칠리아 섬에서는 동쪽의 그리스 식민지 시라쿠사와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이에 시라쿠사가 로마에 원군을 요청하자 로마는 이를 시칠리아에 진출할 기회로 여기고 카르타고와의 직접 대결에 나섰다. 이것이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146년)의 기원이다.

카르타고는 강대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로마와의 대결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어찌 보면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결과 전쟁에 승리한 로마가 서지중해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탈리아 반도 외의 첫 영토인 시칠리아를 획득했다. 또 제1차와 제2차 사이에 카르타고의 영토였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빼앗았다. 제2차에 승리했을 때는 히스파니아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제3차에서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고 불태웠으며 수많은 카르타고인을 노예로 만들었다.

페니키아인이 없었다면 로마인도 없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멸망시켜 지중해를 자국의 내해로 만들었다. 승전국인 로마가 카르타고의 물류 시스템을 이어받은 듯하다.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아프리카 북부 해안은 로마 땅이 되었고 많은 주민이 노예가 되어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했다. 로마의 배가 수없이 지중해를 왕래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이 개척한 경로를 활용했다. 사실 고대 로마는 카르타고의 물류 시스템 덕분에 제대로 기능할 수 있었다. 물류 측면에서 보면 로마가 카르타고의 후계자라고도 할 수 있다.

로마인은 아프리카의 속주에서 곡물을 생산해 수입했고 이탈리아 반도에서 올리브 등 과일을 재배했다. 하지만 로마가 이렇게 곡물을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은 카르타고인의 지중해 물류 네트워크를 이어받은 덕분이다. 카르타고와 페니키아인이 없었다면 로마가 물류 경로를 처음부터 하나하나 만들어야 했을 텐데, 그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원래 유럽에는 ‘항로’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인은 조선 기술이나 항해 기술도 처음부터 하나하나 개발해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중해를 내해로 만들 수 없었을 테니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작은 나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로마가 페니키아, 카르타고의 물류경로를 계승했기 때문에 나라를 확대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 왕조는 어떻게 국력을 키웠을까



인도양 교역의 핵심을 담당한 무슬림 상인


8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 동안 바그다드는 주변 지역에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상징이자 부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무슬림 상인은 열대 및 아열대지역에서 다양한 물자(향신료, 약물, 금, 보석, 목재, 쌀, 콩, 가축, 섬유 원료 등)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그 대가로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부의 도시에서 생산된 의료품, 깔개, 도기, 유리 용기, 무기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온 상품을 수출했다.

유럽은 오랫동안 군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이슬람 세력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또한 무슬림의 대표였던 아바스 왕조는 중국 당나라와도 거의 250년간 활발하게 인적·경제적·문화적 교류를 해왔던 터였다. 9~10세기부터 시라프(페르시아 만 동해안의 중간쯤에 있는 항구) 출신의 무슬림 상인이 홍해, 동아프리카 해안, 인도 서해안에서까지 활약했다고 한다. 그들의 무역 네트워크는 중국 광저우에도 미쳤다. 인도 해역의 주요 항구에서 중국 동전, 송나라 동전이 대량으로 출토된 것을 보면 인도양 경제와 중국 경제 사이에 거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송나라가 일본에서 수입한 동으로 동전을 만들어 그것을 다시 일본에 수출했다는 사실도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요컨대 남아시아의 인도에서부터 동아시아의 일본까지 느슨하게 통합된 하나의 경제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송나라의 경제 성장률은 매우 높았다. 국내에서는 새로운 자원이 속속 개발되었고 기술도 크게 혁신되었다. 또한 각지에서 특산품이 생산되어 그것을 서로 교환하는 거래도 활성화되었다. 중국 국내에서 지역 분업이 이루어져 유통이 발달한 것이다. 이만큼 광대한 네트워크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되는 데에는 무슬림 상인들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부와 물자가 바그다드로 집결한 덕분에 아바스 왕조 역시 번영할 수 있었다.



바이킹이 한자동맹에 패배한 이유



발트해 무역과 한자동맹


흔히 ‘한자동맹’으로 알려진 북방 유럽 도시 상업 공동체의 독일어 명칭은 단순히 ‘Hansa’다. 이것은 ‘상인 무리’라는 의미일 뿐 ‘동맹’을 뜻하지 않는다. 즉 한자는 ‘동맹’이 아니라 도시의 상업 연합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최대 200개까지 되었다는 설이 있을 뿐, 여기에 속한 도시의 수조차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회가 기본적으로 뤼베크에서 개최된 것을 보면 이 상업 연합의 중심지가 뤼베크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당시 뤼베크는 북유럽 상품 유통의 중심지였다.

발트해 및 북해의 무역은 12세기 이후 주로 뤼베크를 통해 이루어졌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바다 사이의 상품 운송이 뤼베크와 함부르크 간의 육로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일부 구간에는 운하가 이용되기도 했다. 뤼베크에서는 밀랍, 동, 동물 기름, 피혁, 생선 기름 등을 함부르크로 보냈고, 함부르크에서는 모직물, 기름, 약재, 청어, 비누, 명반 등을 뤼베크로 보냈다.

네덜란드의 대두


뤼베크가 유통 거점이었던 시대는 15세기 말로 끝났다. 이 무렵 네덜란드가 항해의 난관이었던 외레순 해협의 해상 경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육상 경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육상 경로보다 해상 경로의 운송이 많아졌고 그 격차가 점점 더 확대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18세기 이후에도 뤼베크-함부르크 경로가 활용되었다. 특히 사치품을 취급할 때는 운송비가 다소 비싸도 문제가 없었으므로 육상 경로가 종종 활용되었던 듯하다.

어쨌든 네덜란드가 항해 기술을 발전시켜 조류가 빠른 외레순 해협을 지나는 경로를 개척함으로써 발트해 무역의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은 확실하다. 항해 기술도 발전했지만 상품 운송량이 증가한 것도 육상 운송을 쇠퇴시킨 요인이었다. 특히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까지 곡물이 발트해 지방에서 꾸준히 수출되었는데, 곡물은 부피가 커서 육상 운송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곡물이 지중해까지 운송되기 시작했다. 발트해 지방의 상품이 네덜란드 배로 지중해까지 보내진 것이다. 결국 발트해가 지중해를 삼켜버린 셈이다.



지중해가 쇠퇴하고 발트해와 북해가 번영한 이유



쇠퇴기에 접어든 이탈리아와 지중해


15세기의 이탈리아와 영국을 비교해보면 이탈리아의 경제적 미래가 훨씬 밝아 보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동남아시아 말루쿠 제도의 향신료를 수입해 유럽 각지에 수출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같은 시기 북해, 발트해와 지중해를 비교해보면 지중해의 무역이 훨씬 발전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탈리아 경제는 정체하고 북해, 발트해 경제는 발전한 결과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북해, 발트해 지방이 근대 유럽 세계의 주역이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중근세 이탈리아에서는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상업, 금융 기술이 발달했다. 은행이 탄생하고 복식 부기가 도입되었으며 보험업이 발달했다. 그런데도 이탈리아와 지중해가 쇠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태계 문제와 밀접한 관계인 해운업, 그리고 물류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

지중해 소금을 수입한 발트해 지역


발트해는 지구의 북쪽에 위치한 바다로 중심 위도가 북위 58도다. 발트해 북단의 도시인 토르니오(현 핀란드)의 위도는 북위 65도다. 그래서 핀란드는 1년 내내 춥다. 일조 시간도 여름에는 길지만 겨울에는 매우 짧다. 또 바닷물이 증발하지 않아 염분 농도가 낮기 때문에 발트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 소금을 수입해야 한다. 한편 지중해는 물 유입량이 적은 데다 덥고 건조한 기후 때문에 바닷물이 끊임없이 증발해 염분 농도가 높다. 따라서 발트해와는 반대로 소금을 수출한다. 이처럼 발트해와 지중해는 기후가 크게 다르다. 그래서 각자 필요한 것을 서로 교환해왔다.

발트해는 사실 남북으로 긴 바다다. 발트해 북부에 위치하며 스웨덴과 핀란드에 둘러싸여 있는 보트니아 만의 길이가 600킬로미터를 넘기 때문이다. 근세 이후 이 지방 사람들은 보트니아 만에서 중요한 해운 자재인 타르를 생산했고 그것을 스톡홀름을 거쳐 서유럽으로 수출했다. 또 발트해 연안에서는 밧줄에 사용되는 아마와 마, 해운 자재인 목재, 선박에 사용되는 닻과 못 등에 쓰이는 철을 생산해 서유럽으로 수출해왔다. 이것들은 서유럽의 해상 발전에 꼭 필요한 자재였다. 이처럼 발트해의 해운 자재와 지중해의 소금이 교환된 것은 자연 생태의 차이에 따른 필연적인 역사였다.

한편 지중해는 평균 수심이 1,500미터로 55미터인 발트해보다 훨씬 깊을 뿐만 아니라 면적 역시 약 250만 평방킬로미터로 약 42만 평방킬로미터인 발트해보다 훨씬 넓다. 즉 지중해는 대규모 무역을 전개하기에 적합한 바다였다. 그래서 고대 페니키아인이 이 바다에서 매우 광범위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것이다.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광대한 지중해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제국을 유지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 나라가 지중해를 오랫동안 지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 지중해가 발트해보다 풍요롭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생태학적으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중해에서는 페니키아인의 뒤를 이어 고대 그리스인과 고대 로마인, 이탈리아 상인과 무슬림 상인 등 다양한 인종이 왕성하게 상업 활동을 펼쳤다. 그들은 배를 만들기 위해 삼림을 개간했고 수많은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었다. 지중해에서는 삼림이 한 번 파괴되고 나면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이에 비해 발트해 연안에는 지금도 삼림이 풍부하다. 거기에는 물론 상업 규모와 인구 밀도의 차이가 영향을 미쳤겠지만 두 지역의 생태학적 차이도 중요하다. 단순히 말해 발트해 지방에서 삼림이란 재생 가능한 자원이다. 지금도 핀란드 사람들이 자국의 주요 산업으로 임업을 꼽는 것이 그 증거다.

근세 이탈리아 경제 성장의 한계


16세기 내내 이탈리아에서는 대규모 벌채가 이어졌다. 그런데 지중해 연안에서는 한 번 벌채한 삼림이 두 번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그 결과 조선업과 해운업이 쇠퇴해 북유럽 같은 대규모 상선단을 보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목재뿐만 아니라 선체까지도 외국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성된 배를 외국에서 구입하는 것을 정부가 법률로 금했지만 결국은 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에너지 공급에 있어서도 한계에 다다랐다. 영국은 북해 연안의 덴마크(노르웨이), 독일, 네덜란드에 석탄을 수출했다. 영국이 북해 경제권의 에너지 공급원으로 기능한 것이다. 또 삼림 자원이 풍부한 발트해 지방에서도 대량의 목탄이 생산되었다. 반면 삼림 자원이 고갈된 지중해 경제권에서는 목탄을 조달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이탈리아의 경제 성장은 천연 자원의 고갈이라는 점에서 큰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중해에서는 오랫동안 노예가 노를 젓는 갤리선을 활용했다. 노잡이로는 죄수나 포로, 노예, 간혹 자유민까지도 동원되었다. 지중해의 상인이 이처럼 노동 집약적인 선박을 활용한 것은 그들이 향신료 같은 고가의 상품을 거래했고 임금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해운업은 기본적으로 값싼 노동력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의 번영은 저렴한 노동력이 사라지면 끝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렇게 지중해 내 물류의 주도권이 북유럽으로 넘어가자 이탈리아의 해운업은 급격히 쇠퇴한다. 이후 이탈리아가 유럽의 대외 진출에 그다지 참여하지 못했던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새로운 희망봉 경로는 아시아와 유럽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었나



아시아와 신세계를 연결한 포르투갈 상인


1488년에는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현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의 곶)에 도달했고, 1498년에는 바스쿠 다가마 일행이 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현 코지코드)에 도달했다. 그 후에도 포르투갈인이 아시아에 차례차례 진출했다. 1509년에는 포르투칼 군인 알메이다가 디우 해전으로 이슬람 맘루크 왕조의 함대를 격파한 후 포르투갈은 아라비아해를 본격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이어 1511년에는 알부케르크가 말라카 왕국을 멸망시켜 포르투갈이 말루쿠 제도에서 쉽게 향신료를 수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후 향신료 운송에는 희망봉 경로가 주로 활용되었고 홍해와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가는 경로는 서서히 쇠퇴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력 역전


희망봉 경로가 개발된 후 이탈리아는 인도 및 동남아시아 무역에서 배제되었다. 이것은 이탈리아가 아시아와 유럽이 이어진 광대한 무역 네트워크 속에서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이때까지는 유럽보다 오히려 오스만제국과 아시아의 경제력이 강했다. 그러나 유럽이 아시아로 가는 해상 경로를 개척한 후 판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덴마크 등이 동인도회사 등을 설립해 아시아 무역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주로 아시아의 생산품이 수입되었으나 나중에는 인도의 차와 면 제품이 수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던 상품의 방향이 서서히 유럽에서 아시아 쪽으로 역전되었다. 이 현상이야말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력이 역전되었음을 시사하는 결정적 증거다.



동인도회사의 역할



혁신적이었던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600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1602년에 설립되었다. 동인도는 유럽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 본국의 의사를 묻다 보면 때를 놓치기 쉽다. 그래서 회사를 일종의 국가처럼 만들어 군대를 보내 상업 활동을 보호하고 교역을 촉진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그런 배경에서 설립되었다. 두 회사는 군대를 보유했으며, 본국의 지령을 받는 한편 본국에 보고하지 않고 독자적 행동을 취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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