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연결된 사회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 베가북스
지나치게 연결된 사회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베가북스 / 2022년 8월 / 252쪽 / 14,800원
사람과 바이러스의 연결
동기화(同期化)한 세계
의식적으로 행동을 통일시킨 세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행동이 동기화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인류 사상 최초로 벌어진 일일 것입니다. 전 인류가 감염의 확산을 막으려고 동시에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선언되기 전부터 저는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했는데, 주위에서는 그런 저를 외국인처럼 (특히 중국인처럼)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사회적인 약속이 돼버린 결과, 예전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꼭 써야 하는 상황 속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누군가와 만나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된 거죠. 이는 어떻게든 바이러스에 이기기 위해 사회가 명확하게 의식적으로 행동을 통일시킨 것입니다.
사상 처음으로 중국이 전 세계 사람의 행동을 통합했다: 깜짝 놀랄 일은 하나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놀란 것은 전 세계 사람의 행동을 최초로 하나 되게 만들고, 록다운(봉쇄 조치)의 방법이나 속도 등을 설정한 것이 다름 아닌 중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간의 행동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죠. 이러한 동기화는 흥미롭습니다. 좀 더 분석하자면 이 동기화는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강제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같은 종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동기화라는 것에서 우린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든 독일인이든 호모 사피엔스는 바이러스에 직면했을 때 특정한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이러스에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바이러스의 ‘표상(表象, Representation)’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의 표상에 반응하고 있다: 애당초 팬데믹이 선언되었을 때, 바이러스의 위험도는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어 전해졌습니다. 바이러스의 치사율은 10퍼센트쯤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사스의 그것과 같다고 취급된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죠. 물론 일반적인 인플루엔자나 감기와는 다르기 때문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는 것은 다소 위험하지만, 굳이 록다운을 실시할 만큼 사망률이 높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그러한 성질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것은 ‘바이러스의 성질’이 아니라, ‘바이러스의 표상이 지닌 성질’입니다.
우리는 바이러스에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바이러스를 방치하면 일정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그 결과가 마음에 들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행동을 강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인간성 그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행동의 동기화에는 사회경제적, 정치적, 심리적인 설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학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개인과 사회 전체가 떠안아야 하는 리스크를 과대평가하는 나라도 많고, 그런 사람도 엄청 많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2019년 이전의 질서는 끝났다
이전 세계의 질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저는 멕시코시티의 회의에서 발표할 예정이 있었는데, 대면 회의가 취소되어 온라인으로 참가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포스트 코로나 연구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습니다. 이 온라인 회의에서 멕시코 정부의 관료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코로나 이후의 미래를 의미하는 포스트 코로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세간에서 말하는 “뉴 노멀(New Normal)”, 그러니까 새로운 표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계기로 저는 지금 사회 전체를 다시 파악하는 데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이뤄지는 거래는 물론이고, 이 바이러스가 홍역이나 소아마비와 달리 소멸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습니다.
백신의 감염 예방효율이 100퍼센트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학적으로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바이러스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설사 이 바이러스가 사라진다 해도, 앞으로 인간이 자연계와 접촉하면서 다른 바이러스가 만연할 가능성이 대단히 큽니다. 인간의 생활권 확대는 신종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이어질 거라는 얘기죠. 그렇기에 과거 20년간 신종 인플루엔자, 사스, 메르스, 에볼라 등 새로운 바이러스가 차례로 출현했습니다. 이 시기에 출현한 바이러스의 수는 놀랄 정도로 많죠. 그것을 깨달은 지금, 세상이 이전의 ‘보통’ 상태로 돌아갈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2019년까지의 세계는 종언을 맞이했습니다. 이전 세계의 질서는 자취도 없어졌고요.
록다운과 《리바이어던》: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유럽에서는 록다운 조치가 취해졌는데 이것은 확실히 예외적인 상태를 강제로 부여한 사례입니다. 예외적인 상태라는 전통은 근대 초기의 정치철학, 그러니까 토머스 홉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홉스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록다운 이론입니다. 국가에 의한 폭력과 경찰을 정당화하는 《리바이어던》의 표지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최근 어느 미술사가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의 표지에는 많은 작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지배자가 그려져 있고, 바로 그 아래에는 어떤 마을 풍경이 그려졌는데, 이걸 확대하여 보면 록다운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페스트가 유행했던 상황을 그린 것으로, 의사들이 페스트 감염 예방용 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외적인 상태입니다. 예외적인 상태에서는 정부, 즉 행정기관이 고대 로마인이 말했던 독재 체제로 통치합니다. 이 상황에서의 독재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말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살하는 독재란 나치의 독재 혹은 중국의 독재 모델입니다. 로마인이 독재 정치라 불렀던 것은 예외적인 상태에서 국가를 위협하는 문제가 국가의 결단을 좌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지금 놓여 있는 상황이 이러합니다. 그러나 독일의 언론계는 이러한 내용을 언급하기를 꺼립니다. 왜냐고요? 음모론자와 우익의 대다수가 독일을 독재국가라고 부르며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이하게도 그들은 어떤 의미로는 옳지만, 사실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제가 독일을 독재라 부르는 것은 우익혁명을 지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신경을 써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요. “유럽 국가들은 위생 독재의 모델을 도입했다.” 비판하는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럽 국가들이 민주국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로마인이 말했던 독재를 합법적으로 실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겁니다. 독일이 하고 있는 일은 합법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독일이 예외적인 상태에 있는 건 아닙니다. 스페인이나 프랑스라면 예외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이탈리아는 법적인 의미에서 예외적인 상태인지 아닌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예외적인 상태는 보통 시민이 받아들일 리가 없는 행동의 변화를 강제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미국은 2020년 EU 시민들의 입국을 거부했지만, 다른 상황이었다면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수용할 리가 없겠지요. 그런 것은 완전한 파시즘이고, 그래서 트럼프는 파시스트라고 비난받았을 겁니다. 틀림없습니다.
코로나 후의 비전
모든 인간이 선주민처럼 사는 사회: 이 위기가 지나간 뒤의 비전으로 저는 환경을 배려하는 세계, 기술적으로 진보한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더욱 느긋한 속도로 세계화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경의와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고마워”라는 말이 빈번하게 오가며 누구나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음식에 감사하며, 지적인 생명이 깃든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것에 감사할 것입니다. 인류는 지구 외에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을 법한 장소가 달리 없다고 판단해서 지구에 의식을 집중합니다. 지구가 우주에서 최고이자 유일한 주거지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건합니다. 제가 그리는 세계에서는 모든 인간이 원주민 혹은 선주민(先住民)처럼 살아갑니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원주민이고요. 한국 사람들도 원주민이고, 저도 원주민입니다. 우리 가족은 독일의 이 지역에 수백 년이나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뿌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우리 가족은 이곳에 정착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인, 일명 게르만족은 원주민이라는 거죠. 독일은 2000년쯤 전에 식민지화되어 로마인의 문화를 강요받았으나, 그 이전에 이미 수천 년이나 원주민으로서 역사를 이뤄왔습니다. 따라서 독일인을 독일 원주민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러면 한국인도 한국의 원주민이라는 말이 될 겁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을 원주민 혹은 선주민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원주민 중에는 다른 땅으로 이동한 사람도 있겠죠. 그게 이민입니다. 인간의 이동도 역시 자연현상입니다. 원주민인 우리가 근대 이전의 자연관으로 회귀해 거기에다 근대 지식을 결합해보겠습니다. 그러면 매우 발전된 철학과 경제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현대철학에 기인한 전근대적 자연관을 상상해보십시오. 예로 일식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본 음식은 지속 가능한 요리입니다. 어업은 지속 가능한 산업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식은 옛날부터 매우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 동안 원주민이 키워온 자연에 관한 지식, 무엇을 어디에 심을까, 어떻게 키울까, 하는 지식에 뿌리를 내린 문화이지요.
다만 현재 일본은 다른 많은 장소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미국화가 되어서 문제입니다. 일본의 미국화는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미국 원주민도, 새로운 미국인도 모두 원주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도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미국화를 막더라도 그들과 대립하지 말고 서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그리는 세계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는 ‘네이처 포지티브’한(자연 긍정의) 경제 체제가 사람들에게 윤리적, 철학적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입니다.
윤리적 행동을 이끌어내는 사회: 인간이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회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비윤리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공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로 비즈니스계에서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경쟁 상대에게 지거나 수입을 잃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싶은 법이니까요. 그것은 정당한 바람이므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애초에 가족의 생명을 잃으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에 대한 권리는 기본 인권이니까요.
《마르쿠스 가브리엘 욕망의 시대를 철학하다Ⅱ》에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헤겔이 지틀리히카이트(Sittlichkeit), 즉 인륜(人倫)이라고 불렀던 윤리적인 사회가 필요합니다. 지틀리히카이트는 시민사회에는 없습니다. 지틀리히카이트는 인생의 의미를 더욱 많이 도출해내는 의사결정 과정을 중시하는 윤리적인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이 빈곤의 선을 뛰어넘어 기본적인 최저한의 소득을 얻을 필요’가 있으며, ‘완전한 지속 가능성’이 요구된다고도 말했습니다. 누구든 소득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상상해보십시오. 최저한의 소득이 보장되면 유복하지 않더라도 가성비가 좋은 와인을 사거나, 아이들과 외식할 정도는 되겠지요. 그리고 설령 일하지 않더라도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습니다. 즉 제가 주장하는 모델에서는 최저 소득 보장 정책에 의해 최소한 중산층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 경제를 구축하는 겁니다. 설령 최저 소득이 보장되더라도 저는 물론 창조적인 일을 하고, 커뮤니티에 계속 참여하고 싶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생각하겠지요. 이러한 사회에서는 윤리관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지금 제가 꿈꾸고 있는 것은 철학 트레이닝을 할 수 있는 세미나실이 갖춰진 호텔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혹시 최저 소득이 보장되면 빈곤에 빠질 걱정이 없으므로 이 호텔을 세우려 하겠죠. 그러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사회에 필요한 일들은 어떻게 진행될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은 가능한 자동화로 진행하고, 추가로 시민들의 봉사활동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이 봉사활동을 한다면 그달에는 급여가 지급됩니다. 저는 기쁘게 하겠지요. 그러면 사람들에게 부당한 저임금을 주며 일을 시킬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군가는 이런 ‘봉사활동 기간’을 싫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대로 봉사활동을 하면 모두 친절해지므로 즐거운 한 달이 될 수도 있겠죠. 지나가는 사람이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을 걸 수도 있고요. 그러면 서로 감사하는 문화가 생길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 시스템은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왜 이러한 시스템이 필요한지 설명하면 분명 다들 납득할 겁니다. 이런 시스템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 사람이 비윤리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구상하는 것은 확실히 올바른 해결책입니다. 그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천만에요, 아닙니다. 이것은 환경을 생각하고, 지속 가능한 완전한 자본주의입니다.
타인과의 연결
자기를 강요하는 소셜 미디어
자유민주주의를 약체화시키는 위험한 약물: 저는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인간은 소셜 미디어 같은 미국 제품을 소비하면서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질식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소셜 미디어에 대해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소비자의 행동을 조작하는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기본적으로 우리를 타인과 대항시키는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등의 플랫폼에는 각각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규정하는 어떤 틀이 있는데, 바로 이 틀이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죠. 구글의 검색 엔진은 덕덕고(DuckDuckGo)와는 달리 사람이 검색하고 싶지 않은 것을 무리하게 검색하게 하는 기능을 지녔습니다. 반면에 덕덕고는 완전히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검색 엔진입니다. 덕덕고로는 찾고 싶은 것을 검색할 뿐이지만, 구글이 덕덕고와 다른 점은 AI입니다. 구글은 개인의 검색 행동을 이용해 그 사람의 행동을 조작하고, 더욱 긴 시간을 온라인에 머물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모든 소셜 미디어에 공통된 것입니다.
토크쇼와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에서는 토론이 필요합니다. 토크쇼도 사람과 사람을 대항시킨다는 의미로는 비슷한 로직을 이용하지만, 다른 의견을 시청자에게 제시하면서 합의점을 찾아 논쟁을 해결하려고 하는 윤리적 측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토크쇼에서 저를 모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고소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미국의 소셜 미디어에는 이와 같은 조직적인 제어의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상에서 누군가에게 공격받아도 자신을 방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특히 소셜 미디어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젊은이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미국의 소셜 미디어는 자유민주주의를 허약하게 만드는 위험한 마약입니다.
SNS는 본인이 바라지 않는 자기를 강요한다: 소셜 미디어의 문제는 사람을 바꿔버린다는 것입니다. 소셜 미디어로 사람의 행동이 바뀐다는 것은 소셜 미디어가 우리에게 ‘자아’를 부여한다는 의미죠.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할 권한이 페이스북에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 것에 시간을 쏟기보다 차라리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거나, 친구와 수다를 떠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