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선택: 결핍과 불균형, 바꿀 수 있다
마야 괴펠 지음 | 나무생각
더 좋은 선택: 결핍과 불균형, 바꿀 수 있다
마야 괴펠 지음
나무생각 / 2023년 7월 / 340쪽 / 18,000원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타나랜드(Tanaland) 이야기‘타나랜드’는 아프리카 동부의 지역 이름이다. 그 지역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은 굽이쳐 흐르다가 어느 호수와 만난다. 울창한 숲이 보이고, 숲보다 더 큰 초원에서는 얼룩말과 표범과 원숭이가 뛰어 논다. 그 지역에는 두 개의 촌락이 있고, ‘투피’와 ‘모로’라는 이름의 부족이 산다. 투피족은 농업이 생업이다. 호숫가에 있는 투피족의 마을은 텃밭과 각종 과실수가 에워싸고 있다. 반대로 모로족은 목축이 생업이다. 이들은 초원에서 소 떼와 양 떼를 이끌고 물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종종 사냥도 한다. 그런데 타나랜드의 삶은 고되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먹고살 만하다.
1970년대 중반 독일 심리학자 디트리히 되르너는 12명의 대학생들을 데리고 이 땅을 찾았다. 되르너는 학생들에게 개발 지원 활동을 펼칠 기회를 주고, 원하는 대로 타나랜드의 상황을 개선해 보라고 권유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숲을 개간하고 우물을 팠으며, 강물을 막을 댐을 쌓고, 트랙터를 사들였으며, 인공 비료와 살충제를 썼다. 그리고 또 마을에 정주할 의사를 구하고, 전기를 끌어오면서 이런 모든 노력이 부족을 도우리라 굳게 믿었다. 아무튼 학생들의 시도는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개선된 의료 환경 덕분에 병으로 죽는 아이들이 줄었고 인구가 늘었다. 그리고 농업은 비료 덕분에 수확이 좋아져 사람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공급했다. 또 표범을 사냥해 지역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자 양들도 번성했다. 얼마 동안 젊은 활동가들의 눈에 상황은 더없이 만족스러웠으며, 시급한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끔찍한 기근이 찾아왔으며, 인구가 줄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투피족과 모로족은 젊은 활동가들이 개입하기 전보다 형편이 더욱 나빠졌다. 1975년 《슈피겔》은 젊은 활동가들이 식민 통치가 착취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게 타나랜드를 망쳐놓았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이렇듯 젊은 활동가들은 선의로 도왔을 뿐인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여러분은 이 타나랜드 이야기를 처음 들어보는가? 사실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타나랜드는 일종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이다. 되르너는 이 프로그램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아내고자 했다. 특히 문제 해결의 성과가 좋지 않을 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어 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원인이야말로 이 실험이 품은 최대 관심사였다. 왜 위대한 성공처럼 보이던 것이 돌연 더는 통하지 않을까? 어째서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가 어떤 시점부터 열악해지는 쪽으로 작용할까?
되르너는 이를 두고 ‘실패의 논리’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논리에 해당하는 예를 하나쯤 안다. 화석연료를 예로 들어보자. 분명 우리는 지난 200년 동안 석탄과 석유에서 에너지를 얻어내며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에너지 확보로 우리는 갈수록 더 빠르게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처음에는 잘 나가지만 어김없이 위기가 찾아온다. 어째서 그럴까? 참고로 타나랜드를 안정적인 미래로 이끄는 데 성공하지 못한 대학생들은 그 과제를 수행할 만한 특별한 능력이 없어 실패한 게 아니다. 되르너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오히려 “그때그때 상황을 다루는 건강한 상식”이 통하는지 실험하고 싶었을 뿐이다. 즉, 우리가 일상의 문제를 다루는 상식의 실상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생들은 타나랜드의 식량 부족이 수확한 농산물을 갉아 먹는 원숭이와 쥐 탓에 빚어졌다고 파악하고 독극물로 원숭이와 쥐를 퇴치했다. 그때까지 원숭이와 쥐를 잡아먹던 표범은 갑자기 줄어든 먹잇감에 이제 양들을 노렸다. 그러자 대학생들은 표범을 죽이고 그 가죽을 팔아 소를 더 사들였다. 늘어난 소 떼는 초원을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얼마 뒤에는 달라진 환경으로 쥐와 원숭이가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우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우물을 파서 농수를 대자 수확이 늘어나고 인구도 증가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더욱 열심히 우물을 팠다. 그 결과 지하수가 줄어 우물이 바닥을 보이면서 작물들이 말라비틀어졌고, 사람들은 다시 굶주려야만 했다.
실험에 참여한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대다수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자신이 익히 안다고 믿는, 바로 써먹어도 될 것처럼 보이는 해결책을 찾는다. 그리고 오늘의 해결책이 내일의 문제를 낳는 것을 보며 거듭 놀란다.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하지만 악순환이라고만 한다면, 우리는 이를 깨고 나갈 수 없다. 바꿀 수 없는 악순환 따위는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복잡한 문제, 때로 매우 복잡한 문제일 따름이다. 우리는 문제를 그 자체로 바라보고 해결할 다른 방법을 배울 때까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어야만 한다. 정확히 이것을 하지 않아서 악순환을 겪는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면, 똑같은 전략을 더 효율적으로 구사하는 선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략 자체를 시험대 위에 세우고 살펴야 한다. 그래야 문제를 훨씬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 이것이 진짜 중요하다. 타나랜드 실험은 바로 이런 사실을 확인해 준다.
처음에 대학생들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상황을 살핀 끝에 결정을 내렸다.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지 방향을 잡기 위해 먼저 질문을 하고, 맥락을 이해해 가며 내린 결정은 원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에 참여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질문은 줄어들었으며, 그에 비례해 결정은 더 가볍게, 더욱 빠르게 내려졌다. 그리고 일정 시점에 이르자 대학생들은 타나랜드의 상황을 알려주는 뉴스가 무엇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원래의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예를 들어 어떤 대학생은 농작물을 키울 목적으로 초원에 물을 대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강물을 끌어올 긴 관개수로를 파기로 했다. 그러나 수로를 파는 일은 무수한 장애에 부딪혔으며,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고, 협력은 잘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농사가 제대로 지어지지 않아 식량이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이 대학생은 수로에만 매달린 나머지 식량 문제는 깨끗이 무시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수로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학생뿐만 아니라 대다수 대학생은 자신의 결정 탓에 촉발된 식량 문제를 무시했으며, 냉소적으로 반응하기까지 했다. 몇몇은 투피족과 모로족이 굶는 것은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탓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대학생은 아예 교수가 시뮬레이션을 의도적으로 조작해 과제를 해결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어떤 경우든 더는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느낀 것만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일을 벌였다가 이내 혼란에 빠져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이들은 짜증을 냈다. 남은 것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말씨름에 매달리거나, 그저 규정만 지키려는 무사안일주의 또는 음모론으로의 도피였다. 어째 우리 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길은 없는 걸까? 복잡계 문제를 다룰 때마다 우리는 습관처럼 분석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 문제를 부분들로 나누고, 그 각각을 살피면서 어디가 약점인지 찾아내려고 한다. 분석이 끝나면 더는 기능하지 않는 부분을 들어내고, 새것으로 교체하여 다시 짜 맞추고 나서 오류가 바로잡아졌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우리는 세계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걸 좋아한다. 세계를 조각내서 살피고, 문제가 된 부분을 ‘치유’하면, 부분의 총합인 전체는 계산대로 깔끔하게 작동한다는 것이 이런 믿음이다. 그런데 이런 계산은 유감스럽게도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정당은 계속 이름을 바꾸고 대표도 차례로 교체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선거에서 이기지 못한다. 정체가 일어나는 도로의 부담을 덜고자 새 도로를 만들지만, 새 도로 역시 막히고, 원래 도로의 정체도 줄어들지 않았다. 번아웃을 호소하던 경영자는 요양을 마치고 돌아온 첫날 빼곡한 일정표를 보자마자 다시 뒷목을 잡는다.
오류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아무리 꼼꼼하게 분석해도 오류는 바로잡히지 않는다. 문제의 뿌리는 부분에 있는 게 아니라 부분들이 서로 이루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먼저 관계를 살펴야만 한다. 개인만 주목해서는 사회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개별 요소가 아니라 전체의 어우러짐을 살펴야 한다. 이 어울림에서 비로소 부분은 나름의 역할을 감당해 특정 방향으로 움직임이 일어나게 만든다. 물론 개인과 부분은 중요하다. 하지만 흐름과 발달은 관계로 생겨난다. 서로 간섭하는 관계의 전체, 이를 우리는 ‘시스템’이라 부른다.
환경학자이면서 복잡계 연구의 선구자인 도넬라 메도즈는 시스템을 이렇게 설명한다. “시스템은 요소 또는 개별 부분들이 서로 맥락을 가지도록 조직한 조합이며, 일종의 표본 또는 구조로 서로 맞물린다. 이처럼 시스템은 일련의 ‘행동 방식’이 조합된 특징을 가진다. 이 조합은 흔히 시스템의 ‘기능’ 또는 ‘목적’이라 불린다.”? 원제가 《시스템 사고》인 메도즈의 책을 나는 이 책에서 계속 참조할 생각이다.
복잡계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지만 흔히 뭔가 이상이 생겨야만 우리의 눈에 띈다. 먼저 오작동이 있어야만, 이를테면 경기침체, 주가 급락, 꿀벌의 떼죽음, 중환자 병상 부족, 심장마비가 일어나야 우리는 복잡계를 주목한다. 당연한 것처럼 작동하던 복잡계가 이상을 일으켜야 비로소 일상이 그처럼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자동차는 응급 수리가, 연인 사이에서는 다툼이, 민주주의에서는 과격한 극단주의가 이런 이치를 보여준다. 특히 세계가 이대로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순간부터 우리를 사로잡는 절망 역시 복잡계가 삐거덕거리며 보내는 신호다.
세계를 시스템의 모음, 곧 복잡계라는 전체로 바라보는 관점은 분석적이고 환원적인 시각에 길든 사회나 학자에게 물론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관점을 전환하면 세계를 보는 시야가 그만큼 확장되며,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차원을 달리한다. 관점 전환은 그동안 품어온 생각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시험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이 시험은 모든 근본적 변화나 패러다임 전환과 마찬가지로 하룻밤 새 이뤄지는 게 아니다. 아무튼 앞서 본 대학생들의 경우처럼 단기적인 안목으로 찾아내는 해결책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되다. 그 대신 보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전체론적 접근이야말로 악순환에서 빠져나갈 길을 우리에게 열어줄 것이다.
전체론적 접근 방식은 복잡한 문제와 그 뿌리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과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짚어보는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준다. 새로운 관점과 더불어 어떻게 해야 변화를 일구어낼지 가늠하는 우리의 생각도 바뀐다. 해결책과 이를 실행에 옮길 전략의 폭도 확장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시스템에 주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협업의 필요성을 자각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자각으로 대화가 시작되며, 대화는 개인 또는 시스템을 이루는 개별 요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해야 문제의 원인을 개별 부분에서 찾지 않고 ‘시스템 트랩(System trap)’, 곧 ‘구조적 결함’에 주목할 수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함정을 찾게 된 것이다. 우리 인생 전반에 나타나는 ‘시스템 트랩’은 이 책의 2부가 다루는 주제다. 3부는 다시 변화가 시작하는 곳, 곧 우리 자신을 살필 예정이다. 인공지능과 기술혁명은 우리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꾸려줄 수 없다. 기술이든 인공지능이든 우리 인간이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생각의 표현일 따름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프로그래밍한 것을 수행한다. 그리고 사안에 따라 우리는 인공지능을 끌 줄 알아야만 한다. 인간이 알고리즘의 노예가 될 수야 없지 않은가.
요컨대 사회 발달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이다.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기계에서 은혜를 구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흥미진진하며 보람 있는 일이다. 인간이 인간과 소통하며 서로 이해하는 일은 넘치는 생명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배운다. 도넬라 메도즈가 쓴 문장을 보자. “우리는 복잡계에 우리의 의지를 강제할 수 없다. 하지만 자연이라는 이름의 복잡계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 그 시스템의 특성을 알아내며, 우리의 의지만 고집하고 강제하는 것보다 어우러져 조화를 이룰 때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을 이뤄낼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이라는 시스템을 지배할 수도, 그 신비를 다 밝혀낼 수도 없다. 하지만 얼마든지 함께 춤출 수 있다!”?
춤판이라니 멋지고 좋기는 한데, 춤도 안무와 리듬을 지킬 때 아름답다. 그럼 안무를 짜고 리듬을 지키도록 지휘하는 역할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때 지휘자가 지켜야 할 원칙은 뭘까? 원칙은 분명 존재한다. 복잡계를 다루는 사람은, 도넬라 메도즈의 정의에 따르면, 무엇보다 세 가지를 주목해야만 한다. 첫째, 복잡계의 네트워크 성격을 잊지 않아야 한다. 둘째, 복잡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역동성에 주목해야 한다. 셋째, 복잡계가 추구하는 목표 또는 목적을 들여다봐야 한다.
원칙을 세 가지로 정리한 것은 복잡계 연구의 관점에서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다. 하지만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 시대의 변혁, 두 번째 르네상스 혹은 거대한 전환의 본질을 이해할 좋은 출발점을 이 세 가지 원칙이 마련해 준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발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노력이다. 기술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것인지, 국가의 관료주의 폐단을 막고 진정으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정부는 어떻게 디자인해야 하는지 우리는 새롭게 배우고 전체를 가늠할 수 있는 시각을 키워야 한다. 협력 국가들의 ‘국제공동체’라는 비전은 20세기에 생겨났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목표가 위기 탓에 계속 밀려나고 있음을 안다. 바로 그래서 21세기의 변혁에 대처할 협력 모델은 20세기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 21세기의 변혁은 20세기의 시스템이 초래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원칙을 뒤에서 살펴볼 예정인데, 이를 유념한다면 우리는 전체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리듬을 따르는지,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무엇을 바꾸고 성장시켜야 하는지도 명확히 가려볼 수 있을 것이다.
네트워크 -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우리의 현실은 복잡계라는 구조, 각 부분이 떼려야 뗄 수 없이 맞물린 체계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변화를 이뤄내고자 한다면 이 복잡계에서 개별 부분만 바꿀 수 없다. 아울러 우리는 맥락을 이해해야만 한다. 문제의 뿌리가 대체 무엇인지, 문제의 전모는 어떤 것인지 가늠해 보려는 노력이 그 출발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과 맞닥뜨릴 각오도 해야 한다. 특히 유념해야 할 것은, 어떤 것이 악순환처럼 보일 때 악마는 디테일한 개별 영역에 숨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악마를 부분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전체 그림에서 찾아야만 한다.
역동성 - 작은 변화가 전체를 바꾼다티핑포인트는 어떤 시스템이 근본부터 바뀌는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다. 복잡계가 티핑포인트를 가진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페스티벌의 나른한 군중이든, 겉보기로 오랫동안 꾸준한 모습을 보여 온 기후든, 변화가 어떤 일정 수준에 이르면 비약적으로, 그리고 되돌릴 수 없게 다른 상태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티핑포인트는 말해줄 뿐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앞에서 말한 복잡계의 세 가지 원칙 가운데 두 번째 특징인 ‘시간에 따른 역동성’을 확인해 준다. 결국 티핑포인트는 변화를 예측하거나 균형을 잡거나 그 속도를 끌어올리려 할 때 도움을 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시간에 따른 역동성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어떤 시스템을 현재의 네트워크를 가진 구조로만 바라볼 수 없다. 현재 상태를 관찰하며, 이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변화를 보일지도 유념해야 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시스템은 과연 어떻게 작동할까? 이 작동은 어떤 에너지원이나 자원에 의존할까? 현재의 상태와 인간의 시스템 이용으로 그 품질이 어떻게 달라질까? 이런 대비는 당연하다. 특정 시점에서 시스템의 상태를 확인할 체크리스트를 만들어보고 꼼꼼히 챙기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