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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선, 펜

린다 콜리 지음 | 에코리브르


총, 선, 펜

린다 콜리 지음

에코리브르 / 2023년 8월 / 616쪽 / 35,000원





머리말




캉유웨이(청나라 말기의 사상가)가 변화의 기운을 감지한 것은 바로 이스탄불에서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 탓에 고국 중국에서 추방당해 끊임없이 떠도는 방랑자 신세가 되었는데, 1908년 여름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와서야 자신이 혼란의 한복판에 놓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러시아와 영국이 술탄 압둘하미드 2세의 영토에 속한 마케도니아를 장악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이를 정부의 무능을 드러내는 징표로 받아들인 오스만 제국 군대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들은 의회를 원했다. 그뿐만 아니라 1876년에 발효했지만 곧바로 철회된 그 제국의 최초 성문 헌법이 복원되길 바랐다.

캉유웨이는 오스만 제국의 반군이 그 헌법의 공식 복원에 성공한 7월 27일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흥분감만큼은 알아차릴 수 있었던 그는 인파 속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반월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북을 두드리며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는 나중에 반군 지도자들이 술탄에게 보낸 최후통첩의 골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저마다 무릎을 꿇고 〔그에게〕 고했다. ‘모든 나라에 헌법이 있습니다. 오직 튀르키예만이 그것을 선언해놓고 폐지하는 바람에 국민이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 책의 핵심 주제를 말해준다. 이 헌법적 위기에는 군인의 중요성이 관련되어 있고, 그것이 외세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과 위협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캉유웨이 자신의 행동이 있다. 중국에서 헌법적 변화를 갈망하던 그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실험과 사상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활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캉유웨이도, 비록 극단적이긴 하지만, 생존 가능한 정치 헌법은 단일 정치 체제의 자기 성찰적 창조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당연시했다. 즉 다른 것들로부터의 학습과 차용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인데, 이는 20세기 초에 이미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은 견해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대목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제압하기 위해 반란군이 제기한 주장에 대해 그가 설명한 내용이다. 캉유웨이가 적은 바에 따르면, 그들은 그 제국의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조차 ‘생각’이 ‘바뀌었다’고 강변했다. 여기에다 그들은 그보다 훨씬 더 외면하기 힘든 주장을 펼쳤다. 지금, 그러니까 1908년에 “모든 나라에 헌법이 있다”고 역설한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장이 대체로 정확했다는 점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새로운 성문 헌법이 여러 국가와 대륙에 걸쳐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는 다양한 정치적·법적 제도를 형성하고 재편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사고, 문화적 관행, 대중의 기대 유형에 혼란을 안겨주고 또한 그것들을 변화시켰다.

참고로 정부의 규정 모음은 물론 새로울 게 없으며 그 역사 또한 길다. 고대 그리스의 일부 도시국가는 기원전 7세기에 정부 규정을 마련했다. 그 밖의 사회들에서는 성문 법전이 그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에 등장했다. 메소포타미아의 통치자 함무라비의 법전을 새긴 석판은 기원전 1750년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 같은 고대 문헌들은 일반적으로 저술가나 강력한 지배자 같은 단일 인물의 작품이었고, 그 대부분은 권력자에게 제약을 가하거나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쪽보다, 신민에 대한 행동 수칙을 제시하고 그것을 거역할 경우 무거운 처벌을 부과하는 편에 한층 더 치중했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초기 규약과 법규집은 대량으로 제작되지도 광범위한 대중을 위해 설계되지도 않았다.

법전과 헌장을 양피지와 종이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고 세계 일부 지역에서 인쇄 및 문맹 퇴치 수준이 향상되었을 때조차, 그것을 보급하는 데에는 극심한 제약이 집요하게 뒤따랐다. 1759년 영국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은 존 왕의 마그나 카르타가 유명한 헌장일 뿐 아니라 5세기 전에 출현했음에도 그것의 “완전하고 정확한 사본”이 시종 부족한 현상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블랙스톤이 드러낸 이 같은 조바심이 암시하듯, 이 시점부터 상황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1750년대부터, 심지어 그 이전에도 유달리 전쟁에 시달려온 스웨덴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정부에 제약을 부과하고 다양한 권리를 약속하는 데 중점을 둔, 널리 배포된 상징적인 텍스트와 단일 문서 헌법이 점차 수효가 늘어나고 중요해졌다. 그 후 이러한 문서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많은 국경을 넘어서까지 확산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헌법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그 정도가 한층 더했다. 그렇기는 해도 1914년경 이런 유의 장치는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의 여러 지역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스탄불에서 발생한 ‘청년 튀르크 혁명’에 대한 캉유웨이의 설명이 말해주다시피, 성문 헌법은 근대 국가와 근대화한 상태를 말해주는 트레이드마크로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 같은 전 세계 차원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고, 그것을 달라지는 전쟁 및 폭력의 양상과 연관 짓기 위한 시도다.

이것은 성문 헌법의 발전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와는 다른 접근법이다. 참고로 성문 헌법은 특정한 법적 제도라는 렌즈를 통해, 그리고 애국심에 비추어 바라보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보통 개별 국가와 관련해서만 분석된다. 그래서 성문 헌법은 대개 전쟁이 아니라, 혁명(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 등)에 따른 결과로 여겨졌다. 즉 성문 헌법의 출범과 그에 대한 인기가 증가한 것은 공화주의의 부상 및 군주제의 쇠퇴와 궤를 나란히 하는 현상으로 간주되며, 세계 전역에 걸친 기세등등한 민족 국가의 성장 및 거침없는 민주주의의 진보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이렇게 혁명, 공화주의, 국가 형성 및 민주주의와 연관된 현상으로 접근하면 논의가 지나치게 협소해지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참고로 1914년 이미 성문 헌법은 전 대륙 차원에서 규범으로 자리 잡았지만, 남북 아메리카 바깥에서는 당시 대다수 국가가 여전히 군주제를 실시했고, 1914년에 남북 아메리카를 비롯한 그 어느 대륙에서도 완전한 형태의 민주주의 국가는 없다시피 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혁명이 전쟁보다 더 매력적이고 건설적인 현상이라고 느끼고 싶어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대대적인 인간 폭력의 두 가지 표현 양식―즉 한편의 혁명과 다른 한편의 전쟁―간 이분법은 본디 불안정한 것인데, 1750년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도, 그에 뒤이은 아이티와 남아메리카에서의 혁명도 하나같이 대륙 간 전쟁이 전개되면서 촉발하고 부채질한 결과였다. 또한 그것들은 훨씬 더 많은 전쟁의 발발에 힘입어 아이디어, 규모, 결과와 관련해 더욱더 큰 변혁을 이루었다. 전쟁은 그 자체로 혁명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서 이전에조차 전쟁과 헌법의 창조는 더욱 생생하고도 가시적으로 얽히게 되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일차적이며 지속적인 원인은 국경을 넘나드는 폭력과 전쟁의 수요 및 강도, 지리적 범위, 빈도가 증가한 데 있었다.

이른바 ‘우산 전쟁(umbrella war)’이라고 불리는 전쟁이 점차 빈번해졌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인명과 비용 측면에서도 대가가 클뿐더러 해상과 육상을 넘나들며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확대됨으로써 그 과정에서 다양한 지역 투쟁을 아우르고 악화시키며, 그 결과 훨씬 더 위험하고 파괴적으로 거듭나는 분쟁이다. 한편으로 이 같은 전쟁 패턴의 변화가 헌법 제정에 미친 영향은 구조적인 것이었다. 이제 종전보다 더 규모가 방대하고, 흔히 육군뿐 아니라 상당 규모의 해군까지 포괄하며, 주로 여러 대륙에 걸쳐 확산하는 경향이 있는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거나 그런 전쟁에 휘말리면, 비주류이자 내켜 하지 않는 참가자조차 인명과 비용 면에서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국가가 심각한 부담을 떠안게 될 공산이 있는데, 이런 일은 흔히 되풀이되곤 한다.

그 결과 일부 정권은 심각하게 약화하고 불안정해졌다. 또 일부 정권은 분열하면서 내전과 혁명으로 치달았다. 전쟁이 촉발한 위기로부터 나타난 이 같은 새로운 정권들은 점진적으로 성문 헌법을 가지고 실험해보기로 결정했다. 성문 헌법을 정부 질서를 재정비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경계를 표시하고 주장하며,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그들의 위상을 선전하고 피력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한편 1750년 이후에는 전쟁과 제국주의의 폭력으로 인한 압박이 고조되는 가운데 성문 헌법의 발명과 채택이 중대한 진전을 보였는데, 이 시기에 우리가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문해력 수준의 급격한 확산, 인쇄술의 발명과 그의 급속한 전파, 신문의 수와 발행 장소의 대대적 증가, 수많은 새로운 문자 언어의 출현, 번역물의 수 증가, 소설의 인기 상승을 목격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결국 헌법은 소설처럼, 어느 장소 및 거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창조하고 들려준다. 이 문서들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언제나 그 자체의 의미 이상을 지닐 뿐 아니라 법과 정치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따라서 헌법은 재발견 및 재평가되어야 하며, 각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읽힐 필요가 있다.



유럽의 안과 밖



전쟁의 다중적 궤적


코르시카섬:
우리는 작은 장소에서 역사적으로 더없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1755년 4월 16일 배에서 내려 이 지중해 섬에 상륙한 남성 파스칼레 파올리는 곧바로 유명 인사가 된다. 그는 여러 책자, 편지, 신문, 시, 예술 작품, 팸플릿 그리고 노래에 ‘병사이자 입법가’로서, 즉 창과 펜을 한데 아우른 모범 사례로서 등장한다. 1768년 스코틀랜드인 제임스 보스웰이 쓴 책 《코르시카 이야기》는 활발하게 번역되는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으며, 파올리가 평범한 인류를 “훌쩍 뛰어넘는 존재”라는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1728년에 그의 부친 기아생토 파올리는 코르시카에서 오랫동안 군림해왔으나 점차 쇠퇴하고 있는 패권 제국 제노바공화국에 맞서 일어난 무장 반란에 가담하고, 결국 반군 지도자의 일원이 되었다. 그 결과 1739년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는데, 그때 자신의 열네 살 난 아들 파스칼레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은신처를 구하던 많은 젊은 코르시카인과 마찬가지로 이 소년도 나폴리 군대에 취직했다. 하지만 가망 없는 요새 도시에서 근무하고 포병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파스칼레는 프리메이슨 단원이 되는 쪽보다, 본 궤도에서 이탈해 나폴리의 초기(pristine) 대학에서 좀 더 많은 교육을 받기 위한 도전과 열정적 독서 쪽에 관심을 보인 듯하다.

코르시카로 귀환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여러 가지 동기에서 비롯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분명 야망의 좌절이었을 것이다. 1755년에 파올리는 삼십 줄에 접어들었지만, 향후 몇 년 동안 나폴리 군대에서 진급할 가망이 없었다. 반면 그의 고향 섬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가문은 그곳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더군다나 코르시카 자체를 훌쩍 뛰어넘는 몇 가지 이유로 그곳에서 제노바의 통치에 항거하는 분위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에 대한 의혹을 떨쳐버리고 귀향할 엄두를 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내가 수립하고 싶은 정부에 대한 계획”을 고안한 터였다.

아무튼 1755년 7월, 파올리는 코르시카에서 사실상 ‘반군 총사령관이자 행정부 수반’으로 선출되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그 섬 중앙의 요새 도시 코르테(Corte)에서 그는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10쪽에 달하는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면서 명시적으로 ‘헌법(costituzion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파올리는 헌법 전문(前文)에 이렇게 적었다. ‘1755년 11월 16, 17, 18일에 코르테시에서 파올리 장군이 정한 형식에 따라 코르시카의 적법한 주인으로서 국민의 의회가 소집되었다. 의회는 코르시카의 자유를 ‘재정복하고(reconquer)’ 국가의 복지를 보장하기에 적합한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정부에 항구적이고 지속 가능한 형태를 부과하려는 바람에서 법령을 정해왔다…….’

이 조각난 말 속에는 몇 가지 급진적인 정치적 변혁 및 열망이 담겨 있었다. 이제 코르시카는 과거의 관례이던 산발적인 회합(consulte) 대신, 일종의 의회(General Diet)를 두게 된 것이다. 파올리의 텍스트는 이 조직을 연례적으로 소집해야 한다고 명시했으며, 1769년까지는 실제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그렇게 했다. 이 섬은 수 세기에 걸친 제노바에 대한 종속을 떨쳐내고 독립을 쟁취해야 했다. 파올리가 적은 대로, 코르시카인은 그들의 자유를 재정복해야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코르시카인은 그들의 천부적 권리를 그저 주장하는 게 아니라 되찾아야 했고, 다시금 국가의 ‘적법한 주인’이 되어야 했다. 더군다나 이 새로운 질서는 쓰여진 텍스트, 즉 헌법에 단단히 기반을 두고 공포되어야 했다.

이는 파스칼레 파올리에게 엄청난 권력을 부여했다. 코르시카의 종신 장군으로서 지위를 확정한 그는 또한 각각 정치·군사·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3개 기구로 구성된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에 올랐다. 오직 파올리만이 코르시카 의회를 매년 언제 어디에서 개최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의회와 국가평의회로 제출되는 모든 청원서는 일단 그의 손을 거쳐야 했다.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뿐 아니라 외교의 향방에 대한 최종 책임도 그에게 있었다. 하지만 헌법은 파올리에게 의회 의석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이런 정도로까지, 코르시카 행정부는 입법부와 분리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매년 파올리는 (코르시카의 다른 모든 주요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행동에 대해 의회 의원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할 의무가 있었다. 헌법에 따르면, 그는 그런 다음 “순순히 국민의 판결을 기다려야” 했다.

코르시카 의회는 조세 및 법률 제정에 관한 책임을 지녔을 뿐 아니라 폭넓게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파올리의 헌법은 선거 제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법에 따라 1766년부터 그 섬의 모든 25세 이상 남성 거주민은 의원 선거에 출마하거나 의원을 뽑는 투표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받은 듯하다. 잠재적으로 이것은 18세기 중엽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곳에서보다 더욱 폭넓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코르시카에 제공해주었다. 이 무렵 값싼 땅이 풍부해서 정착민이 쉽게 참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조차, 성인 백인 남성의 약 70퍼센트만이 투표권을 가졌으며, 굳이 번거롭게 그러길 자처한 나라는 한층 적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새로운 시도와 정치 기술의 변혁이 서부 지중해의 이 작은 섬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좀 더 폭넓은 이유:
1755년에 파스칼레 파올리가 “오래가고 항구적인 형태로” 코르시카 정부를 재건하고자 결심한 것은 상당 정도 그 섬이 이중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코르시카는 내부적으로 무질서한 데다 제노바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강대국의 해군이 침략해올지도 모를 잠재적 위험과 마주하고 있었다. 파올리가 코르시카 헌법의 초안을 마련하고자 시도한 것(그는 1793년에 헌법 제정을 재시도한다)이 나중에 7년 전쟁이라고 알려진 전쟁〔미국인들은 이를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0. 프랑스와 아메리칸 인디언 연합군이 영국에 대항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싸운 전쟁)이라고 부른다〕의 초기 단계에서였음은 우연이 아니다. 이 대대적이고 무질서한 18세기 중엽의 분쟁, 서로 다른 대륙에서 펼쳐지는 다중적 투쟁은 파올리의 정신을 집중시키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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