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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까

크리스텔 프티콜랭 지음 | 부키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까

크리스텔 프티콜랭 지음

부키 / 2023년 10월 / 312쪽 / 18,000원





시작하며




나를 찾는 내담자들은 “생각이 너무 많다”고 하소연한다. 그들은 매우 예민하고 반항적이며 사회성이 부족하다. 또 창의적이고 감정이입을 잘하고 정이 많은 편이며, 남들에게 호의적이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든가, 남의 일에 너무 신경을 쓴다든가, 남들을 선동한다는 비난을 자주 듣는다. 그들은 ‘동화 속에서 사는 사람’ 취급을 당하며 그들의 친절은 어리석음으로, 과민성은 연약함으로 동일시된다.

나는 그들의 성격적 특징을 잘 알게 되면서부터 일반적으로 이런 주제를 다룰 때 으레 들먹이는 ‘영재’ ‘높은 잠재력’ 같은 용어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내담자들도 그러한 용어를 불편해했다. 지능은 그들의 특징에서 일화적인 면에 불과하다. 그보다, 그들의 성격적 특징이 단순히 신경학적 특수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그 특수성이란 ‘감각 과민증’과 가지를 치며 뻗어 나가는 ‘복잡한 사고방식’이다. 현재 캐나다에서 일어난 ‘신경다양성’ 운동 덕분에 ‘신경전형성’과 ‘신경비전형성’ 같은 용어가 등장했는데, 나는 이 신조어들이 일반화되어 ‘영재’와 같은 단어를 대체하기를 바란다. ‘영재’라는 단어가 암묵적으로 끌어들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나 개인적으로 ‘정신적 과잉 활동인(신경비전형인)’이나 ‘일반 사고인(신경전형인)’ 같은 용어를 만들기도 했고 여기서도 계속 쓸 생각이다.

나는 가치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용어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머릿속이 복잡하게 과열되는 사람을 가리킬 뿐이다. ‘일반 사고인’도 사유의 방식이 일반적 규칙 체계에 맞는다는 의미밖에 없다. 반면, 정신적 과잉 활동인들은 이 규칙 체계에 명백히 맞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서나 밖으로 삐져나온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들은 이러한 암묵적인 규칙 체계, 즉 사회의 코드를 이해하고 소화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들은 자주 불편함, 어색함, 다른 사람들과의 괴리감을 느끼지만 그 이유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도 자기가 실수를 하거나, 남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어색하게 한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는 참 피곤하고 사기 꺾이는 일이다.

나 역시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기에 지금은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있는 이 일반적인 코드와 암묵적 합의를 처음에는 잘 몰랐다. 심지어 지금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반 사고인들이 나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관찰하고 이해하고 추론하고 종합한 모든 것을 여러분과 공유하려 한다. 신경 언어 프로그래밍에서 말하는 소통은 ‘타자를 그 사람의 세계 모형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러한 만남을 이제 여러분에게 제안한다.



알맹이 없는 대화의 존재 이유




신경비전형인들을 상대로 신경전형인들의 세상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이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했을 때, 많이 나온 답변이 있었다. 왜 사람들이 평소에 따분하고 지루한 대화를 하는지 모르겠다나!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통’이라는 측면을 출발점 삼아 일반 사고인들의 세상을 여행해 보는 것이 어떨까.

일단 다툼은 피하고 볼 일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친구 하나가 그날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을 취할 정도로 마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느 유명 가수를 헐뜯기 시작했다. 이미 돈도 벌 만큼 벌었으면서 이번에 또 ‘수금을 하려고’ 감상적이기 짝이 없는 노래를 들고 나왔다나. 나는 어리석게도 그 친구가 심하게 취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래 대중가요의 목적이 감정을 자극하는 거 아니겠냐고 맞받아쳤다. 상대는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건 대중예술도 아니고 그냥 상업 활동일 뿐이라나. 내가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상대는 더 흥분했다. 보다 못한 그날 모임 주최자가 슬그머니 나서서 농담 한마디를 툭 던지며 교묘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랬더니 나와 얘기할 때는 점점 더 언성이 높아졌던 친구가 곧바로 차분해졌다. 그 자리에서 내가 배운 바가 있다. 내 말이 맞고 틀렸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소 중요한 주제, 이를테면 교육, 정치, 기후, 부의 재분배에 대해서 토론을 한다고 치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상되는가? 우리는 모두 그 주제에 대해서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자기 의견이 있다. 나는 내 의견이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기 의견이 중요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서로 몇 마디 쏘아붙이다 보면 난투극까지 가고 만다. 여러분은 서로 설득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분위기를 해치고 사람들 간의 관계를 망가뜨릴 뿐이라면 논쟁이 무슨 소용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논란이 커지기 쉬운 주제는 건드리지 않고 변죽만 울리는 것이다. 어쨌든 그 가수가 달콤하고 감상적인 노래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건 사실 아닌가! 게다가 여러분은 아마 온라인상의 도 넘는 댓글에 먼저 분노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담백하고 무해한 글을 게시하면 누구나 ‘좋아요’를 누를 수 있고 아무도 마음 상하지 않는다. 중립적인 대화의 정신이 바로 그런 것이다.

시간 보내기용 대화의 필요성


교류분석(TA)기법을 창시한 정신과 의사 에릭 번의 저서 중에 《당신은 인사 후에 무슨 말을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그는 이 책에서 교류분석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스트로크(stroke)’를 설명한다. 스트로크는 ‘접촉’, ‘타격’ 혹은 ‘어루만짐’에 해당하는 단어로 프랑스어로는 ‘인정 신호, 인정 자극’으로 번역되는데, ‘인정 자극’은 인간이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필요로 하는 대인 접촉의 최소 구성 요소로 정의할 수 있다. 인정 자극이 없으면 사람이 허약해지거나 정신이 이상해져서 죽음보다 더 참담한 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연구는 이미 많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날그날의 일과에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인정 자극을 적절히 배치하곤 한다. 그러므로 이제 일상에서 여러분이 마주하는 대화를 더도 덜도 아닌 그 대화의 가치대로 평가하고, 여러분이 느끼기에 알맹이 없는 듯한 대화도 호의적으로 바라보기를 바란다. 그런 대화는 좋은 게 좋은 관계,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가벼운 관계의 존속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건설적 대화를 꾀하려는 여러분의 시도가(혹은 관점이) 왜 그토록 자주 수포로 돌아가는지 감을 잡았기를 바란다. 아마도 여러분의 대화 상대는 가벼운 잡담 이상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모임에서 흔히 오가는 대화의 순기능을 음미하면서 실제로 편하게 얘기 나누는 법만 배우면 된다. 그 순간의 무사태평함에 빠져 보라.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대화에 끼려면 일단 그 대화의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자기가 별 관심도 없는 주제를 미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기술적이거나 전문적 식견이 필요한 질문을 삼가고, 이 얘기 저 얘기 파도 타듯 넘어가야 한다. 모임 내내 실수하지 않고 그 시간을 원만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물론 훈련이 좀 필요하다.



문제는 해결하라고 있는 걸까?




내가 어느 정신적 과잉 활동인에게 “문제를 꼭 해결해야만 해요?”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요! 당연하죠!” 정신적 과잉 활동인의 모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쓰기 전에는 나의 모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수시로 “문제는 없다, 해결책들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 답안을 다시 검토하게 됐다. 그 이유는 일반 사고인들의 세상에서 질문은 타당한 반면, 해답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놀랐는가? 충격 받았는가? 그렇지만 이러한 입장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모든 문제를 뿌리 뽑을 수 없다면


처음에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그냥 안고 사는 것도 지혜려니 생각했다. 사실, 그게 합리적인 태도다.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해 보면 문제는 늘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뿌리 뽑고 싶은가? 차라리 바닷물을 다 퍼내겠다고 하라! 그러니 그날그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이튿날 또 그만큼의 문제를 떠안기보다는, 그저 문제들 한복판에서 평안하게 사는 편이 낫다. 몸을 구부리고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어떤 것도 완벽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된다.

사고방식을 그렇게 바꾸면 문제들이 정말로 심각해질 때 ‘최소한’으로 해결하면서 살 수밖에 없고, 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다. ‘최소한’이란 바람 빠지는 타이어를 대충 땜빵하고 타이어 전체를 갈아야 할 나중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내가 일반 사고인들의 문제 해결법이라고 생각했던 이 사고방식은 부분적으로 들어맞고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들의 90퍼센트는 이 방식을 적용해 객관적으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자기가 느끼는 모든 문제를 뿌리까지 파헤치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 회사에서 얼마나 동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접근의 한계는 상황을 전체적으로 고려하고 예측해야 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철도 네트워크, 교량, 핵 발전소를 관리하는 사람이 문제 해결을 미루고 ‘땜빵’에 만족한다면 끔찍한 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조사 위원회가 하는 일은 주로 참사를 피할 수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태는 유감스럽고, 때로는 비극적이기 그지없다. 사고 아닌 사고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들의 분노를 자극한다. 그들은 사고의 발생 가능성을 보았고 예방책도 제시하려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방책에도 한계는 있다. 결코 축소되지 않는 리스크가 있다. 가령, 핵 발전소 사고의 경우 지역 인구를 신속하게 대피시키거나 방사능 피폭을 예방하는 아이오딘을 인구 전체에 유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문제 해결하지 않기의 논리에는 다른 목적들도 있다. 나는 그러한 목적들을 차츰 발견하게 되었다. 문제에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 짐작도 못했던 나름의 사회적 기능이 있다.

문제는 수다 떨 거리를 던져 준다


일단 문제는 대화나 잡담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잡담은 사회적 연결고리다. 익히 알려졌듯이, 행복한 사람들은 사연이 없다. 문제가 있어야 얘기를 나누고 의견을 들을 건더기가 있다. 어느 보험 회사는 아예 이런 슬로건을 내걸었다. “잘 보장된 문제는 얘깃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이 사람 저 사람, 우리 측근들의 문제는 결코 마르지 않는 수다의 원천이다. 우리가 그 문제의 표면에 머물러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문제는 당신을 중요한 인물로 부각하면서도 시기 질투를 막아 준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단순한 사람, 더 나쁘게는 팔자 좋고 재수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너무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짜증난다. 기업 내에서 이러한 양상은 뚜렷하게 관찰된다. 문제없는 부서는 뺀질이 집합소 취급을 받는다. 문제를 한 보따리 안고 해결을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부서는 진지하고 일을 많이 한다는 말을 듣는다. 부서마다 해결해야 할 문제와 일 더미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기를 쓰고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문제를 만들게 되니까. 여러분이 문제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고 생산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문제는 좋아해도 문제를 만드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문제는 속에만 담아 두고 주위만 휘젓곤 한다.

그리고 문제는 심리 게임의 마중물이 되어 준다. 심리 게임은 부정적이지만 강렬한 인정 자극의 원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어떤 문제가 빨리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면, 교류분석에서 ‘그래, 하지만……’으로 분류되는 심리 게임이 출현하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여러분이 오만 가지 해결책을 제시해도 저쪽에서 “그래, 하지만……”이라고 토를 달면서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문제 해결이 능사가 아니라는 증거 아닐까? 변화의 시도들이 그토록 자주 맥 빠지는 수구주의에 부딪히는 이유도 이로써 설명이 될 것이다. 심지어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심사숙고한 변화인데도 말이다.



불안을 마주하거나 회피하거나




사피엔스는 추상적 사유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미래를 예측하고 인과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피엔스의 삶은 어떤 면에서 단순해졌고 또 어떤 면에서 복잡해졌다. 무엇보다 사피엔스는 자신이 벌거벗은 연약한 존재이며 사방은 위험천만한 아수라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인간은 실존적 불안이라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었다. 이미 불안을 막연히 느끼고 있었는데, 그 불안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아버린 것이다. 실존적 불안은 크게 네 가지 주제, 즉 죽음, 고독, 자유, 생의 의미로 분류된다.

실존적 불안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다. 우리는 그 아래로 떨어질까 봐 두려워한다. 우리 모두 광기 너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죽음보다 더 끔찍한 정신의 붕괴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공포가 너무 크다 보니 인간은 자기를 그 정신적 심연에서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방어 기제를 마련해야 했다. 사실 우리 모두 그 협곡의 좁고 험한 길을 바들바들 떨면서 걸어 본 경험이 있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나 한 사람만이 내 행동과 내 인생의 선택에 책임이 있다.’ ‘(내)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이러한 명백한 진실들은 생의 여러 단계에서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런데 희한하지만 불안이 공포보다 무섭다. 불안 발작이 일어날 때 우리는 정말로 불안해 죽을 것 같고 미칠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은 늘 불안을 공포로 위장하려 든다. 적어도 공포는 합리적인 척이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빈 얄롬은 《실존주의 심리 치료》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실존적 불안을 부정하면서 살아가는지 지적한다. 심지어 심리 치료사들도 (마땅히 느낄 수 있는) 죽음 불안을 대하면서 ‘더욱 근원적인’ 공포를 찾으려 든다. 게다가 불안은 혼자 느끼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여러분의 비탄을 안됐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이해하거나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 같은 맥락에서, 공포는 감염된다는 장점이 있다. 아마 여러분도 이미 관찰했을 것이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그 공포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든다. 우리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기보다는 공포의 정당성을 납득시키는 데 최선을 다한다. 같은 공포를 여럿이 나눠 가지면 희한하게 안심이 된다.

불안은 무력감과 관련이 있다. 공포는 적어도 대처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거대한 뇌로 공포를 만들어 내는 데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불안을 그럴싸하게 변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지만 삶의 궁극적 목적들에 의문을 품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나는 진정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내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내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생각을 안고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데 인간은 이 근본적 질문들이 불러일으키는 불안 발작을 다스리기 위해 그런 질문들을 품지 않은 척하는 방어 기제를 마련했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대개 양자택일밖에 모른다. 진실 아니면 현실 부정, 그런데 둘 다 불안을 부풀리기는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낭떠러지 바로 옆 좁은 도로에서 차를 몬다고 치자. 낭떠러지를 부정하는 것도, 그곳이 해발 몇 미터인지 확인하는 것도 공포를 자아낸다. 그리고 빌어먹을 불안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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