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김유항, 황진명 지음 | 사과나무
과학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김유항 · 황진명 지음
사과나무 / 2023년 10월 / 336쪽 / 18,500원
과학계의 라이벌
미생물학의 창시자 코흐 대 파스퇴르의 전쟁숙명적인 라이벌 관계는 정치계나 스포츠계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천재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통제되지 않은 지나친 경쟁심은 서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지만 적절한 라이벌 의식은 성공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미생물학 분야에서도 유명한 전쟁이 있는데, 의학·생물학 여명기의 두 거장,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와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독일과 프랑스의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격돌했던 사건이다.
코흐와 파스퇴르의 전쟁: 대체로 1856년 이전까지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패러다임이 아직 완전히 정착하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은 과학과 공상의 이상한 결합이 난무해서 많은 사람들은 날벌레, 구더기, 미생물들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또는 무기물에서 생긴다는 자연발생설을 믿고 있었다. 이런 몽매한(?) 시절에 미생물학 발전의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가 코흐와 파스퇴르의 라이벌 경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민족주의가 점차 목소리를 높여가던 시기에 프랑스와 독일 간의 격렬하고 편집광적인 경쟁이 두 사람에 의해 촉발되었다. 코흐와 파스퇴르는 미생물의 전쟁터에서 각자의 국가를 대표하여 싸웠다. 비록 경쟁심 때문에 코흐의 배양 기법이 프랑스에, 그리고 파스퇴르의 광견병 백신이 독일에 늦게 도입되었지만, 과학적 업적의 최고 영예를 얻으려는 강렬한 욕망을 불태우며 두 사람 모두 백신과 세균학의 여러 기법들을 도입하는 등 미생물학의 공동 창시자가 되어, 인류를 위해 큰 업적을 이루었다.
파스퇴르는 당대에 가장 유명한 프랑스인으로 미생물학에 폭넓은 관심을 가진 화학자이다. 반면 코흐는 질병의 확산 이론을 정립한 헨레(Jacob Henle)의 학생으로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에 관심을 가진 독일 의사였다. 파스퇴르가 면역법을 통해 각 개인들을 보호하는 방법을 연구했다면, 코흐는 좀 더 나은 위생과 공중보건을 통해 지역사회를 보호하려고 연구했다.
코흐보다 스무 살쯤 위인 파스퇴르는 분자의 비대칭성을 발견했고, 발효에 대한 연구, 소독법을 도입한 리스터(Joseph Lister)로부터 영감을 받아 자연발생설을 논박하는 등 이미 유명한 미생물학자였다. 그는 프랑스의 포도주 산업에 저온살균법을 도입하고, 프랑스의 누에산업에 대재앙을 가져온 누에병을 해결했다. 또한 세균학을 약독화된 파스튜렐라균들에 적용하였으며, 닭 콜레라 백신과 탄저병 백신을 만드는 등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한편 코흐는 순수 배양을 도입하고, 최초로 탄저균, 콜레라균, 결핵균을 발견하여 ‘세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세균학에 고체 배양과 염색법을 도입했으며, 스승 헨레의 영향을 받아 ‘코흐의 4가지 원칙’을 세운다. 그는 미생물 종의 생물학적 화학적 특징은 독특하며 영구적이라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미생물의 독성은 일정한 것이 아니라 가변적 물성이라는 파스퇴르의 개념과 상충된다.
코흐와 파스퇴르 사이에 강한 경쟁의식이 시작된 것은 탄저병에 대한 관심이 겹치게 되면서부터였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1870~1871년 사이에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자 알자스로렌 지방 대부분을 할양받은 프로이센이 독일제국의 성립을 선포하던 때였다.
코흐는 전쟁에 군의관으로 자원입대할 정도로 열렬한 애국자였는데 두 사람 사이의 경쟁심은 개인적·과학적 적대감뿐만 아니라 민족주의까지 더해져 더욱 격렬해졌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라고 말하던 파스퇴르는 1871년 독일의 본 대학에서 준 명예박사 학위까지 돌려보낼 정도였다. 이때 그는 분노와 경멸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양국 국민의 대학살을 고집하는 자들이 불러일으킨 야만과 위선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 양심의 명령에 따라 내 이름을 귀 대학의 교수 명단에서 삭제하고 이 학위증을 취소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본 대학의 의과대학 학장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본 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인 본인은 감히 독일 국민에게 가한 모욕에 대하여 고귀하고 신성한 프러시아의 빌헬름 황제께서 당신에게 모든 경멸을 보낸다고 답변할 책임이 있습니다.”
한편 1876년 33세의 코흐가 탄저병에 대한 병인학(病因學)과 생애주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을 때, 54세의 파스퇴르는 이미 자연발생설과 발효에 대한 배종설로 유명 과학자 반열에 올라 있었다. 파스퇴르는 독일의 미생물학에 선두를 뺏기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1878~1880년 사이에 탄저병에 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한다.
한편 독일이 점차 과학적·기술적 그리고 산업적 우월성을 키워갈수록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독일 문제’에 대한 긴장감도 커져갔다.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는 식민지 의료의 새로운 변종인 열대의학의 지원으로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식민지화하려는 시도를 강화해나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는 ‘세균이론 응용’이란 의도가 감춰져 있었는데, 각국의 과학자들은 열대의학의 발전을 선도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1883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콜레라가 창궐하자 코흐와 파스퇴르 양측은 원인 규명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러나 코흐가 콜레라균임을 규명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자 이후 파스퇴르는 광견병 백신 개발로 연구 방향을 바꿨다. 당시 광견병은 드물게 발생하지만 거의 치명적이어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 그리고 1885년, 파스퇴르는 마침내 광견병 백신을 만들어 국가적 영웅이 되었고 세계 최초의 생물의학 연구소인 파스퇴르 연구소 설립을 위한 기부금들이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1889년 파리에 파스퇴르 연구소가 세워졌다. 독일의 공중보건이 코흐의 세균학에 근거를 두게 되자 파스퇴르는 프랑스에 저온살균법을 도입한다.
한편 코흐는 결핵을 일으키는 원인균으로 결핵균을 발견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코흐는 결핵 치료제를 개발하여 이익금으로 파스퇴르 연구소처럼 독립적인 자신의 연구소를 차리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연구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렸다. 완벽주의자이던 코흐는 1890년 경쟁으로 인한 압박감에 성급하게 결핵 치료제 튜베르클린을 개발했다고 발표하여 대중의 폭발적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곧 튜베르클린이 그다지 효과가 없고 부작용으로 죽는 사람까지 발생해 코흐의 명성에 큰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4년 후인 1896년 새로 만든 튜베르클린이 치료제로는 별 효과가 없지만 ‘튜베르클린 반응’이라고 하여 결핵의 감염 여부를 테스트하는 진단제로서는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되면서 손상된 명예를 회복했다.
1901년 7월 코흐는 런던에서 열린 영국 결핵대회에서 사람과 소에 결핵을 일으키는 세균은 동일하지 않으며, 소의 결핵균이 사람을 거의 감염시키지 않기 때문에 어떤 조치도 필요하지 않다고 발표한다. 그러자 병에 걸린 소의 고기나 우유를 사람이 먹지 못하도록 하여 병의 전파를 막기를 원하던 사람들은 격렬하게 반발하며 의무적으로 소의 검사와 우유의 저온살균, 병든 가축의 살처분을 주장했다. 그러나 코흐는 여전히 이러한 공중보건 조치를 거부하여 그의 명성은 다시 한번 상처를 받았다.
코흐는 세균학의 아버지라고 할 만한 큰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 베링(Emil von Behring)이 먼저 혈청요법, 특히 디프테리아에 대한 응용으로 1901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코흐가 4년이나 늦게 수상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튜베르클린 실패와 젊은 여배우와의 스캔들 등이 겹친 것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볼 뿐이다. 여하튼 결핵과 열대성 전염병에 관한 공로로 코흐는 19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본인이 희망하던 파스퇴르 연구소 같은 민간 연구소는 아니지만 그의 사후, 정부는 국영 베를린 전염병 연구소를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파스퇴르와 코흐의 경쟁에는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정치적 적대감도 일부 반영되었지만, 좀 더 사적 수준으로 내려가면 파스퇴르와 코흐의 ‘미생물학파’라는 당대 양대 산맥의 학계가 서로 다른 방법과 철학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스퇴르는 면역학의 문제와 특정 전염병으로부터 사람이나 동물들을 보호하는 특정 방법을 개발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진 반면 코흐는 전염병을 제어하는 공중보건 조치를 지지했다. 즉 파스퇴르의 접근 방법은 개인들에게 예방주사를 맞히는 것이었지만, 코흐의 접근 방법은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위생 개선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코흐와 파스퇴르 두 사람 다 불같은 성격에 너그럽지 못했지만 그들의 개인적, 국가적 악감정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진리를 위해 자신들의 지적 능력과 마음을 바쳐 인류를 위해 헌신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과학계의 유명 가족 과학자들
퀴리 가의 모전여전 _ 마리와 이렌, 대를 이은 노벨상마리 퀴리(Marie Curie)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폴란드인, 그리고 여성이어서 남성 주도의 과학계에서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 사고, 끈기, 도전으로 사회적 인습과 장벽을 뛰어넘어 세계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그것도 서로 다른 분야인 물리와 화학에서 수상했다. 그뿐 아니라 파리 대학의 최초의 여성 교수이며, 파리의 국가 영묘(廟) 판테온에 묻힌 최초의 여성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그리고 퀴리 부인의 딸 이렌(Irene) 역시 어머니의 발자취를 따라 남편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와 함께 부부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퀴리가(家)는 2대에 걸쳐 부부가 모두 노벨상을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첫째 딸 이렌 퀴리의 출생: 마리 퀴리는 1867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녀의 이름은 마냐 스클로도프스카였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어 폴란드 말도 쓰지 못하는 등 박해를 받았다. 마냐는 김나지움을 1등으로 졸업했지만 여자를 받아주는 대학이 없어 파리로 떠날 결심을 하고 언니 브로냐를 설득한다. 브로냐가 먼저 파리로 가서 자리를 잡아 초청한다는 계획이었다. 의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결혼까지 한 브로냐는 마냐를 초청해 5년 만에 약속을 지켰다.
1891년 마냐는 파리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았는데 이때 이름을 프랑스식 마리(Marie)로 바꾸었다. 1895년 마리는 이미 유명 과학자였던 8살 연상의 피에르 퀴리(Pierre Curie)와 결혼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남편과 공동으로 연구 생활을 시작한다. 2년 후인 1897년 9월 첫째 딸 이렌 퀴리가 태어났다. 마리와 피에르는 피치블렌드(우라니나이트) 안에 있는 여러 광물들을 화학적으로 반복해 분리해서, 1898년 7월과 12월 새로운 원소인 폴로늄(polonium)과 라듐(Radium)을 발견한다. 폴로늄은 마리 퀴리가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었다. 1903년 그 업적으로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이렌과 7살 터울로 둘째 딸 이브가 태어난다.
마리가 실험실에서 1톤의 광물로부터 0.1그램의 라듐염을 분리하기 위해 엄청나게 고된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시아버지 외젠 퀴리가 집안 살림을 관리하고 이렌과 이브를 돌봐주었다. 의사였던 쾌활하고 박식한 할아버지가 이렌에게는 사실상의 부모였다. 이렌은 “나의 정신적 기반은 할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정치 및 종교 문제에 대한 생각도 할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많다”고 말했다.
피에르 퀴리의 죽음: 1906년 4월, 피에르 퀴리가 빗속에서 길을 건너다 마차 사고로 47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불행이 닥쳐왔다. 마리 퀴리는 아홉 살 이렌과 두 살의 이브를 데리고 39세의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크나큰 충격과 비탄에 빠져 “나는 삶을 참고 견딜 뿐이지 결코 즐길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절망한다. 마리는 자신의 비통함을 잊으려는 듯 광물에서 라듐을 분리하는 실험에 더욱 몰두했다. 막노동에 가까운 실험으로 그녀는 육체적으로 고된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가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이렌은 황량한 시기를 혼자서 견뎌내야만 했을 것이다.
4년 후인 1910년, 이렌의 정신적 지주였던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리는 하는 수 없이 가정교사의 도움으로 딸들을 키웠다. 그러나 마리는 딸에 대한 교육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렌은 어릴 적부터 수학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이렌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마리는 어린 자녀를 둔 소르본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과 ‘협동 홈스쿨링’을 만들었다. 그녀의 두 딸을 포함해 여섯 명의 교수 가정에서 모두 9명의 어린이들이 홈스쿨링에 참여했으며, 교수들이 일주일씩 교대로 담당 과목들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교수의 전공에 따라 문학, 미술, 조각, 수학, 과학, 영어, 독일어를 배웠다. 마리 퀴리는 목요일 오후 소르본 대학의 빈 강의실에서 물리학의 기초 과정을 가르쳤다. 마리는 두 딸이 체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수영, 스케이트, 등산, 승마, 자전거를 비롯한 다양한 체육 활동에도 신경을 썼다. 교수들과 시작한 협동 홈스쿨링은 많은 업무에 시달린 교수들이 포기하면서 2년 만에 끝이 났다. 이후 이렌은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 있는 세비네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이 없는 애어른 같은 이렌: 피에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마리 퀴리는 남편을 닮아 진지하고 침착한 이렌이 그의 빈자리를 채워주기를 기대했다. 마리의 기대대로 이렌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 어머니의 말 상대 겸 공동 연구자가 되어갔다. 13살의 이렌은 어머니가 일과 여행, 강연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우울증에 빠져 있는 동안 혼자 여행을 다니거나 어머니의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마리는 딸의 교육에 대해서는 유독 엄격해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때는 이렌에게 수학문제를 우편으로 보낼 정도였다.
피에르가 사망한 지 4년 후인 1910년 봄, 마리 퀴리는 평소의 검은색 대신 흰 옷을 입고 친구들의 집에 나타났다. 마리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동료 과학자인 폴 랑제방과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랑제방이 유부남이란 것이었다. 그들은 소르본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임대해 함께 지냈으며, 떨어져 있을 때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14살의 이렌에게 이 불륜 드라마는 큰 상처를 주었다. 마리가 여름 동안 두 딸을 폴란드로 보낸 어느 날 저녁, 거리에서 마리 퀴리와 딱 마주친 랑제방 부인은 남편과의 관계를 끝내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경고했다.
1911년 가을, 마리 퀴리와 랑제방 그리고 다른 22명의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솔베이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그날은 마리 퀴리에게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학술회의 도중 마리 퀴리의 영광스런 두 번째 노벨 화학상 수상 소식과 함께 프랑스 신문에 랑제방과의 불륜 기사가 대서특필 된 것이다. 랑제방은 죽은 피에르 퀴리의 조수였다. 영예로운 두 번째 노벨상 수상 소식은 “폴란드 여자가 전도유망한 프랑스 과학자를 유혹했다”는 자극적인 불륜기사에 묻혀버렸다. 급히 프랑스로 귀국해 집으로 돌아온 마리는 자신의 집 앞에 모인 성난 군중들과 공포에 떨고 있는 14살 이렌과 7살 이브를 발견한다. 결국 마리와 딸들은 파리에 있는 친구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스캔들의 절정에서 스웨덴 왕립학회는 마리 퀴리에게 노벨상 수상식에 참석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아인슈타인, 에르빈 슈뢰딩거, 리처드 파인만 같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카사노바처럼 무수한 섹스 스캔들을 뿌리고 다녀도 오히려 섹스가 창조적 아이디어의 근원이라며 부러워하는 듯한 과학계의 태도와는 달리 너무나 이중적이고 가혹한 처사였다. 그러나 마리는 혹독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노벨상은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업적에 따른 것이며, 개인의 사적인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라며 딸 이렌을 데리고 12월 10일 노벨상 수상식에 당당히 참석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이렌은 어머니가 영욕의 시간을 치르는 동안 엇나가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여론의 압박에 마리와 랑제방의 관계는 끝이 나고 둘은 좋은 친구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