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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기쁨

짐 알칼릴리 지음 | 윌북


과학의 기쁨

짐 알칼릴리 지음

윌북 / 2023년 9월 / 307쪽 / 16,800원





진실이거나 진실이 아니거나




친구, 동료, 가족과 토론을 하게 되었을 때, 당신이 분명한 사실이라 생각했던 것에 대해 이런 반응을 듣는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글쎄, 그건 네 생각이지.” “그건 여러 관점 중 하나에 불과해.” 이런 반응은 부지불식간에 퍼지고 있는 ‘탈진실(post-truth)’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탈진실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감정과 개인적 신념에 호소하는 것이 대중의 의견 형성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 탈진실 현상이 워낙에 보편화되다 보니 2016년에는 ‘올해의 단어’에 선정되기도 했죠. 우리가 객관적 진실로부터 너무 멀어져버린 것일까요? 이제는 세상에 대해 입증된 사실조차 마음에 안 들면 묵살해버릴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일까요?

특정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동기를 둔 노골적인 거짓주장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신뢰할 만한 증거가 뒷받침하는 지식을 압도해버리는 것이 바로 탈진실 정치의 현장입니다. 소셜미디어를 보면, 음모론이나 포퓰리즘적인 지도자나 선동가의 선언에서 이런 경우를 흔히 목격할 수 있죠. 슬프게도 이런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이 과학에 대한 시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태도를 전반적으로 오염시켜 놓았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 우리는 증거보다는 의견을 더 정당화하는 주장을 자주 봅니다.

과학에서는 서로 다른 모형을 이용해서 자연을 기술합니다. 과학적 지식을 구축하는 방식이 각자 다르고, 어떤 현상이나 과정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 측면이 무엇이냐에 따라 서로 다른 서술을 만들어내죠. 하지만 이것이 곧 세상에 대한 대안의 진리가 여러 가지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 같은 물리학자는 세상의 존재 방식에 대한 궁극의 진리를 밝히려 노력합니다. 그런 진리는 사람의 감정이나 편견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죠. 과학적 지식을 얻기가 쉽지는 않지만, 저기 어딘가에 우리가 찾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우리의 사명도 그만큼 명확해집니다.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고, 자신의 이론을 비판하고 검증하고, 관찰과 실험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그 진리에 확실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죠. 하지만 우리의 어지러운 일상세계에서도 과학적 태도를 받아들이면 문제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가 흐릿한 안개를 뚫고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죠. 따라서 우리는 문화상대주의적 진실, 혹은 진실을 가장한 이데올로기를 찾아내고 이성적으로 검토해서 솎아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대안적 사실’이라는 미명의 거짓을 접한 경우에는, 그것을 옹호하는 자들은 원래의 사실을 대체할 신뢰성 있는 서술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유리하게 그럴듯한 의심의 싹을 심으려 할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찾기 위한 단계를 밟아나가는 일이 편의주의, 실용주의, 사리사욕 추구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로 입증되는 상황이 많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런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나의 진리도 당신의 진리도 아니고, 보수의 진리도 진보의 진리도 아니며, 서양의 진리도 동양의 진리도 아닌,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언정 무언가에 대한 참 진리에 말입니다. 이를 위해 누구에게서 도움을 구할 수 있을까요?

과학에서는 과학적 방법론을 통한 정밀조사에서 살아남은 설명은 세상에 대한 기정사실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는 일에 일조하죠. 그 사실은 이제 변하지 않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물리학의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물체를 떨어트렸을 때 얼마나 빨리 낙하하는지 계산하는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공식은 그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죠. 4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 공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론이 진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공을 5미터 높이에서 떨어트리면 바닥에 떨어지는 데 1초가 걸릴 것입니다. 2초도 아니고 0.5초도 아니고 1초입니다. 이것은 절대불변의 기정사실이고 결코 변할 일이 없습니다.

반면에 개별 인간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복잡성(심리학)이나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방식(사회학)의 문제로 오면, 필연적으로 더 미묘하고 모호한 부분들이 발생합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실제로 하나 이상의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되죠. 공이 바닥에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다루는 물리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물리학자가 무언가를 두고 진리다 아니다 얘기할 때는 복잡한 도덕적 진리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과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호하게 얽히고설킨 진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무언가에 대한 특정 진술이 신념, 감정, 행동, 사회적 상호작용, 의사결정, 혹은 우리가 접하고 논란을 벌이는 온갖 주제와 복잡하게 얽히면 단순한 흑백논리로는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지죠. 그렇다고 그 진술이 참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진술이 자체만으로 모든 상황에서 전적으로 타당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한 진술이라도 맥락에 따라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한 상황에서는 참인데, 다른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죠.

경우에 따라서는 과학에서도 이런 일이 생깁니다. 제가 앞서 5미터 높이에서 떨어트린 공이 1초 후에 바닥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진술했을 때, 그것이 참이 되는 데 필요한 맥락을 깜박하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지구에만 적용되는 얘기라는 것이죠. 달에서 공을 5미터 높이에서 떨어트리면 바닥에 떨어지는 데 2.5초 정도가 걸릴 겁니다. 달은 지구보다 작아서 중력도 약하기 때문이죠. 여기서 사용하는 과학 공식은 똑같습니다. 그 공식은 절대적 진리죠. 하지만 답을 얻기 위해 그 공식에 집어넣는 수치가 다릅니다. 때로는 과학적 진리(scientific truth)도 맥락을 정확하게 짚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진리도 확장하기에 따라서는 더 많은 정보를 담고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진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죠. 예를 들어, 지구 위에서든 달 위에서든 공이 바닥에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에 관한 과학적 사실은 뉴턴의 중력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덕분에 중력의 본질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공이 바닥에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지만(맥락이 주어졌을 경우), 지금은 그와 관련된 원리를 더욱 잘 이해하고 있죠. 뉴턴은 중력을 공을 땅으로 잡아당기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그렸지만, 이제 이 그림은 질량이 주변의 시공간을 휘게 만든다는 아인슈타인의 그림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심지어 이 심오한 그림도 언젠가는 더 근본적인 중력이론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공이 바닥에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에 관한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진실 여부가 맥락에 좌우되는 사례를 과학에서 생각해내는 것도 좋지만, 이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어떻게 발현되는지도 알아보아야겠죠. 예를 하나 들어보죠. ‘운동을 더 많이 하면 건강에 좋다’는 진술은 반박이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운동을 지나치게 많이 하고 있는 경우나, 운동으로 오히려 건강이 위험해질 수 있는 병에 걸린 상태라면 이 진술은 참이 아닙니다.

무엇인가가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때는 개인적·문화적 편견, 사회 규범, 역사적 맥락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적 구성주의’라는 이론에서는 진리가 사회적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모든 지식은 ‘구성된’ 것이라는 말이죠.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우리의 지각 또한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인종, 성적 취향, 성별의 정의 같은 현실의 과학적 표상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지적이 타당하고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너무 깊이 끌고 들어가면, 결국에는 사회 전체가 동의하기로 결정하면 무엇이든 진리가 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죠.

분명 대부분 과학자는 세상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이라는 것 덕분에 과학은 계속 진보해왔고, 물리적 우주에 대한 지식은 확대되었습니다.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이 우리에게 점점 더 정확한 현실의 지도를 제공해주며, 이 현실은 우리의 주관적 경험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기로 결정하는가와 상관없이, 참인 우주에 관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얘기입니다. 실재에 대한 해석이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인 경우에, 그것은 우리가 해결할 문제지 우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는 실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결코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좋은 과학이론의 기준을 정하고, 그것을 모두 충족하는 설명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죠. 이를테면, 기존에 나와 있는 모든 증거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측정하고 확인해볼 수 있는 새로운 검증 가능한 예측을 내놓는 이론 말입니다. 아니면, 미래 세대가 더 나은 이론이나 해석을 제시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이 뉴턴의 이론을 대체한 것처럼 말이죠. 제 말의 요점은 물리적 실재의 일부 측면에 대해 현재 모호하게 이해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실제 세상의 존재 여부 자체가 논쟁거리가 될 수는 없음을 과학자들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해결해야 하는 많은 주제는 복잡하게 뒤얽혀 있습니다. 어떤 주제를 두고 완전히 상반된 두 관점이 각자 근본적인 진리에 기반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관점 모두 자신의 적용 범위 안에서는 정당하기 때문이죠. 장담하건대,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의견 중에는 딱 잘라 참이나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을 겁니다. 그보다 그것들은 수많은 가정, 잘못된 개념, 편견, 추측, 희망적 사고, 과장과 함께 일말의 진실에 기반을 두고 있겠죠. 하지만 당신이 노력을 기울일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이런 것들을 모두 걸러내고 명확한 사실만을 추려낼 수 있습니다.

진실의 알맹이와 벌거벗은 거짓만 남기는 것이죠. 그러고 나면 어떤 주제에 대해 더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주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는 의미입니다. 각각의 주제를 구성 요소로 분해해서 각도를 달리하면서 보기도 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나 더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는 것이죠. 물론 사건을 해결하려 애쓰는 형사부터 정치 스캔들을 취재하는 탐사기자, 질병을 진단하는 의사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서 많은 사람이 이미 이런 방법을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직종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숨겨진 진리를 찾아내는 데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고 있죠. 이들은 모두 자신의 직업에서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어쩌면 우리도 어느 정도는 그와 동일한 기본 철학을 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들을 무작정 받아들이지 마세요. 그 내용을 분석하고 분해하고, 신뢰할 만할 증거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모든 가능한 선택지를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결점, 약점, 편견, 혼란투성이의 존재이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객관적 사실이 존재합니다. 누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객관적 진리가 있죠.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의견이 아닌 증거에 집중하라




몇 주 전, 보일러가 가끔씩 저절로 꺼지는 바람에 수리기사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기사에게 보일러의 디스플레이에 뜨는 ‘F61’이라는 에러 메시지를 보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의미인지 안다며 회로판을 교체해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똑같은 문제로 신고가 들어온 수백 개의 보일러를 고쳐보았고, 자신의 해법이 항상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니, 이번에도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의 판단을 신뢰했고 제 결정은 옳았습니다. 지금 보일러가 잘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보일러를 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모르지만, 그 보일러 기사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를 신뢰합니다. 저는 제 담당 치과의사, 의사, 제가 타는 비행기의 파일럿도 신뢰하죠.

하지만 누구, 혹은 무엇을 신뢰할 수 있는지는 어떻게 판단할까요? 이것은 분석해볼 필요가 있는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일상적으로 정보를 접하다 보면, 어떤 정보가 정당하고 타당한 것이고(예를 들면, 사실과 믿을 만한 증거가 뒷받침하는 정보를 말합니다), 어떤 정보가 개인적 의견에 불과한 것인지 판단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개인적 결정이든 전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내리는 집단적 결정이든, 우리가 매일 내리고 있는 수많은 결정은 비판적 분석과 신뢰할 만한 증거를 기반으로 해야 하기에 그런 판단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수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온갖 주제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전문가라 여깁니다. 스스로 자신의 현명함을 부풀려 평가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죠. 제 눈에는 이런 현상의 이유가 분명해 보입니다. 인터넷 접근이 쉬워져 정보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다 보니, 일부 사람은 엉터리 정보를 기반으로 한 비도덕적인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때는 목사와 정치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확신과 자신감으로 타인에게 그런 관점을 주입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꼭 틀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들은 얘기, 읽은 얘기 중 무엇이 믿을 만한 것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엉터리 정보를 기반으로 삼은 개인적 의견과 증거를 기반으로 확립된 사실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코로나 팬데믹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 비극을 안겨주었고 지금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신뢰할 만한 증거를 기반으로 하는 과학적 조언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현대에 있었던 그 어떤 사건보다 명확하게 보여주기도 했죠. 우리는 먼저 신뢰할 만한 증거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알아보기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죠.

어떤 사람은 좋은 증거는 보는 즉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인지라 때로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보리라 예상했던 것만 보게 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확증편향이 자리를 잡아, 이미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뒷받침해주는 한 아무리 조잡한 증거라도 신뢰하게 되죠.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건강한 증거는 객관적이고, 편향이 없고,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토대를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 증거는 믿을 수 있는 출처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하고, 모순과 대안적 해석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배심원으로 재판정에 앉아 법정 소송 사건에 대해 판단을 내리라는 요구를 받은 경우에는 편견 없이 최대한 비판적이고 객관적으로 최선을 다해 생각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과학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과학’의 여러 가지 정의 중 하나는 ‘객관적 증거를 통해서만 그 진실성을 입증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진술을 공식화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정의는 뒷받침하는 증거나 검증을 요구하지 않는 종교, 정치 이데올로기, 미신, 심지어 주관적 도덕률 같은 다른 신념체계로부터 과학적 지식을 구분하는 방법으로서 아주 강력한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약점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증거가 필요한지, 그 정보의 질이 어때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귀납법의 문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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