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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지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르셀루 글레이제르 지음 | 흐름출판


위대한 지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르셀루 글레이제르 지음

흐름출판 / 2023년 4월 / 404쪽 / 24,000원





의식의 신비



신경과학자와 철학자의 대화 _ 데이비드 차머스와 안토니오 다마지오


이 대화에는 지금껏 한자리에 앉은 적 없는 저명한 현대 사상가 두 분이 참석합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신경과학 데이비드 돈사이프좌 교수이자 심리학, 철학, 신경학 교수입니다. 뇌 창의성 연구소 소장도 역임하고 계시죠. 다마지오는 뇌의 정보 처리 과정을 이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느낌의 진화(Strange Order of Things)』 등 네 권의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데이비드 차머스는 뉴욕 대학교 마음·뇌·의식 센터 부소장이자 철학과 신경과학 교수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에서 의식 센터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차머스의 연구 분야는 마음, 언어철학, 인공지능과 인지과학입니다. 그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공식화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차머스는 『의식하는 마음(The Conscious Mind)』을 펴냈습니다. 다음은 오늘의 주제와 관련 있는 한 과학자의 말입니다.

뇌의 물리적 구조를 이에 상응하는 의식과 대응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뇌에서 특정한 생각과 특정한 분자 작용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정할 때, 이 현상이 저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추론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지적 기관이나 그런 기관의 흔적이 우리에게는 없다. 둘은 함께 나타나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른다. 우리의 마음과 감각이 확장, 강화, 조명되어 우리가 뇌의 그 분자들을 보고 느낄 수 있고, 그 분자들의 움직임, 이합집산, 전하를(만일 그런 게 있다면) 모두 추적할 수 있으며, 그에 상응하는 생각과 느낌의 상태를 잘 알고 있다 해도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물리적 과정은 의식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 두 현상의 간극은 지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을 알아차리는 일이 뇌 분자들의 오른손 나선운동과 관련 있고, 증오를 알아차리는 일이 왼손 나선운동과 관련 있다고 하자.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그 운동이 한 방향으로 일어나고 증오가 일어나면 그 운동이 다른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알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는 1868년 빅토리아 시대의 물리학자 존 틴들(John Tyndall)이 영국과학진흥협회에서 연설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이 탁월하며 놀라운 선견지명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뭔가를 알아낼 것이고, 저는 그 순간이 무척 기다려집니다.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철학과 신경과학이 어떻게 상호작용해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질문들 중 하나를 해명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의식은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남을까요?

다마지오:
사실 사람들은 의식에 대해 자주 대화하면서도 어느 순간 서로 이야기가 엇갈리고 있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의식이라는 단어가 매우 많은 걸 의미할 수 있으니까요. 먼저 의식이 아닌 몇 가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식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여러분 중 로망어를 사용하는 분들은 의식을 가리키는 단어가 양심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와 철자가 정확히 같다는 사실을 곧바로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의식은 양심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물론 양심은 의식과 상당히 관련이 있습니다. 의식이 없으면 올바른 의미의 양심을 가질 수 없을 테니까요. 프랑스어 conscience와 이탈리아어 coscienza에서도 정확히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영어와 로망어에서는 양심을 뜻하는 단어가 먼저 생겼습니다. 영어에서 의식을 뜻하는 특정 단어는 그보다 훨씬 뒤인 17세기에 만들어졌죠. 로망어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단어가 결국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의학계에서 신경과 의사는 사고를 당한 환자의 상태를 말할 때 흔히 “의식을 잃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신경과 의사가 말하는 것은 정신 경험, 즉 의식만 상실된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있든 없든 감각과 반응(감응)이 상실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감응은 의식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감응은 자극을 감지하고 그 자극에 반응하는 유기체의 능력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차이가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박테리아처럼 단순한 단세포 유기체들은 신경계는 물론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핵조차 없지만 자극을 감지하고 그에 반응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을 감응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 경험, 즉 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깨어 있고 감응한다는 점을 전제로 합니다. 즉, 각성과 감응 능력은 의식의 디딤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밤 우리가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현상은 의식 중에서도 특히 느낌과 관점을 동반하는 정신적 경험입니다. 이 순간 저의 정신적 경험을 말하자면 저는 왼쪽에 있는 데이비드와 마르셀루를 특정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저만의 독특한 관점, 즉 현장에 대한 저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관점이 저와 다르고, 저와 그들이 같은 장면을 서로 다른 각도로 보고 있다는 점을 자동적으로 압니다.

대화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알고 보면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조사하는 일, 즉 자기 마음의 관찰자가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반면 다른 사람은 더 객관적인 것들, 가령 뉴런의 활동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거죠. 둘은 양립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분석 수준 모두에서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어떤 현상은 마음속에서 일어나 한 사람이 주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고 묘사해야 하는 1인칭 현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유럽 철학,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는 현상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묘사하는 위대한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상황에 있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현상학적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다면 그 데이터가 뉴런 활동에 대한 데이터에 필적하지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 현상들을 도구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그런 데이터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데이비드가 1인칭 관점과 3인칭 관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같은 걸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또한 생물학을 진지하게 취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물학을 진지하게 취급하는 것은 우리 조상에 해당하는 다른 생명체들이 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박테리아는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신경계가 없지만 생명 관리와 다른 유기체와의 복잡한 관계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질을 지닌 단세포생물에서 생명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의식의 문제를 이 기나긴 궤적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궤적은 적어도 39억 년을 거쳐 왔습니다.

의식의 본질에 대해 논의할 때 사람들은 흔히 의식은 오로지 뇌의 산물이며, 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은 고립된 뇌가 혼자서 생성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제게 “마음과 의식이 뇌만으로 생긴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바로 몸과 온전히 상호작용하는 신경계입니다. 마음은 뇌만의 산물도, 신경계의 산물도 아닙니다. 마음은 생명을 효율적으로 조절하기 위해 신경계와 몸을 적절히 결합하는 기능적 통합의 결과물입니다. 온몸에 분포되어 이중 관계를 유지하는 이 복잡한 시스템은 온몸 구석구석으로 가는 뉴런, 온몸 구석구석에서 오는 뉴런 또는 분자 신호로 구성됩니다. 복잡한 이 배열은 엄청난 상호작용을 하며, 몸 안에서 순환하는 화학 분자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나아가 우리의 신경계는 두 가지 구조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는 유기체 내부이고, 다른 하나는 유기체 주변에 있는 것, 즉 외부 세계입니다. 따라서 신경계는 내부 세계를 보는 동시에 바깥 세계를 봅니다.

정신 경험과 주관적 관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더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느낌입니다. 철학에서는 퀄리아(qualia)라고 하죠. 저는 느낌을 중첩된 현상으로 봅니다. 느낌은 크게 나누어 적어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동적 또는 항상적(homeostatic) 느낌입니다. 이는 유기체 내에서 전개되는 생명 상태가 마음에 표현된 것으로, 고통 같은 경고 신호나 모든 것이 문제없다는 웰빙 신호로 작용합니다. 다른 하나는 불러일으켜진 느낌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마음에 표현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미지에 정서적으로 반응하고, 이에 따라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 마음속에 떠오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변화된 생리적 상태는 느낌을 일으킨 이미지의 내용에 따라 즐거움, 두려움 또는 경탄 등의 느낌으로 표현됩니다.

차머스:
저는 학문의 경계를 넘는 일, 구체적으로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식’은 이 일을 시작하기에 매우 적절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의 문제는 예로부터 철학의 한복판을 차지해왔습니다. 마음은 몸과 어떤 관계일까요? 이건 철학의 전통적 주제인 몸-마음 문제이고, 서서히 의식-뇌 문제로 변하고 있습니다. 의식은 뇌와 어떤 관계일까요? 우리는 뇌의 관점에서, 그리고 몸의 관점에서 의식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서서히 철학적 문제에서 과학적 문제로 옮겨가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옮겨간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이행 단계에 있죠. 이 문제에는 근본적인 철학적 요소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의식이 마음의 경험 혹은 주관성이라는 안토니오의 정의에 저도 만족합니다. 저는 이 둘을 하나로 모아 의식을 주관적 경험으로 정의합니다. 의식이란 주체가 마음과 세계에 대해 1인칭 시점으로 겪는 주관적 경험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단순한 경험부터 매우 복잡한 경험까지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이런 경험들은 우리가 1인칭 시점에서 경험하는, 의식이라는 웅장한 영화를 이루는 요소입니다. 이 요소들의 공통점은 어떤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다는 느낌, 아픈 느낌, 감정이 솟아오르는 느낌, 생각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내면에서 느껴지는 그 뭔가가 의식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은 경험입니다. 경험으로서의 의식을 철학자들은 현상적 의식(phenomenal consciousness) 또는 경험적 의식(experiential consciousness)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를 다른 두 가지 것과 구별합니다. 하나는 자의식, 즉 자기에 대한 의식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저 자신을 의식할 때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시간 동안 자신에게 의식을 집중하지 않은 채 세계를 의식하고 주변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자의식이 진화적으로 더 발전된 것이고, 세계에 대한 의식보다 나중에 등장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처럼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고통을 주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동물들이 존재합니다. 이 동물들은 이런 경험적 의미의 의식을 가지고 있겠지만 물고기는 자의식 없이 단순한 경험적 의식만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의식은 훨씬 더 정교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저는 주관적 경험이라는 의미의 의식과 반응이라는 의미의 의식을 구별합니다. 반응은 특정 종류의 행동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기 비상구 표시등이 있어.” 이는 의식의 좋은 증표이지만 의식 자체는 아닙니다. 반응하는 능력, 행동하는 능력은 의식이 아닙니다. 의식은 경험입니다. 경험을 행동이나 기능과 구별할 때 우리는 과학에서 의식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어려운 문제는 주관적 경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과정이 내면에서 뭔가로 느껴질까요? 뇌의 이 모든 처리 과정이 어떤 느낌을 주는 것은 왜일까요? 왜 우리는 이 모든 처리 과정에 주관적 경험이 전혀 동반되지 않는 로봇 같지 않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특정 종류의 환원주의를 뛰어넘어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환원주의는 모든 것을 물리적 세계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접근 방식으로,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 새롭고 근본적인 요소를 도입합니다.

의식과학은 지난 20~25년 동안 여러 방향으로 꽃피운 지극히 중요한 현상으로 보입니다. 신경과학과 심리학 그리고 철학 분야의 많은 사람이 여기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의식은 점점 존중받는 과학적 주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의식과학은 다른 과학 분야에서 얻은 것을 의식과 통합한 결과입니다. 의식과학은 특히 우리가 ‘3인칭 데이터’라 부르는 것을 통합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3인칭 데이터란 외부의 측정 시스템에서 얻은 객관적 데이터를 말합니다. 이 데이터는 뇌를 측정해서 얻습니다. 뇌를 측정할 때는 다양한 측정 방법과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질적 방법 같은 측정 행위를 사용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한 생물에 대한 3인칭 데이터, 즉 객관적 데이터입니다.

하지만 데이터에 이런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1인칭 데이터도 있습니다. 주관적 경험에 관한 데이터죠. 지금 저는 무대 위에 앉아 이 발표를 하는 일에 대한 1인칭 데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며, 약간 출출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주관적 경험에 대한 데이터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의식의 문제는 이런 1인칭 데이터를 세계에 대한 과학적 그림에 어떻게 끼워 맞출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1인칭 데이터를 3인칭 데이터의 관점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의식과학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둘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뇌를 조사하고 행동을 조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의식적 경험을 조사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적 경험을 반성적으로 조사하거나, 타인의 의식적 경험을 조사합니다. 물론 누군가의 의식적 경험을 직접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구두 보고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식적 경험에 대해 질문합니다. 다르게 생각할 특정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믿을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우리는 그들의 보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만일 안토니오가 제게 아프다고 말한다면 그는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보고를 이용해 의식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의식과학은 한마디로 3인칭 데이터를 1인칭 데이터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신경과학에는 의식의 신경 상관물을 연구하는 놀라운 분야가 있습니다. 그 분야는 여러분이 특정 정보를 의식할 때 활성화되는 뇌 과정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색깔을 볼 때 그 색깔을 의식하는 일과 가장 직접적으로 상관된 뇌 과정은 무엇일까요? 제가 그 색깔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제가 그 색깔에 단순히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으면 그 과정은 활성화되지 않습니다.

현재 의식과학은 주로 상관성 연구입니다. 뇌의 이 부위가 활성화되면 우리는 이 종류의 의식을 얻는다는 것을 밝히는 연구죠. 하지만 이 연구는 점점 더 체계적이고 더 보편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상관성 연구에서 특정 종류의 설명으로 옮겨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뇌 과정에서 의식이 생기는지에 대해 통일된 이론을 찾고자 합니다.

이 통일된 이론은 완전한 환원주의 이론은 결코 아닐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의식이 단순히 뇌 과정이라고 말하거나, 의식을 전적으로 물리적 과정으로 설명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할 일은 물리적 과정과 의식을 연결하는 근본 법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르는 한 가지 길은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사하는 동시에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경험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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