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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의 자기 신뢰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 메이트북스


에머슨의 자기 신뢰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메이트북스 / 2023년 8월 / 168쪽 / 12,000원





1장 내 생각을 믿고 용감하게 나아가자



내 마음에 품은 신념을 믿어라


나는 얼마 전에 어느 저명한 화가가 쓴 시를 읽었다. 시는 상투적이지 않고 독창적이었다. 시의 주제가 무엇이든 우리의 영혼은 항상 이런 시에서 질책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가 우리에게 불어넣는 감정은 시에 담긴 그 어떤 생각보다도 가치 있다. 자기 생각을 믿는 것, 자기가 마음속에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다른 모두에게도 진실이라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천재성이다. 마음에 품은 신념을 소리 내어 말해라. 그러면 그것이 보편적인 의미를 얻을 것이다. 때가 되면 가장 내밀한 감정이 겉으로 가장 많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놀라운 힘


누구나 교육을 받다 보면 ‘질투는 무지(無知)의 산물이며, 모방은 자살’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될 때가 있다. 그리고 좋든 나쁘든 자신을 자기 운명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 광활한 우주가 아무리 좋은 것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경작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땅에 땀을 쏟지 않고서는 영양가 있는 옥수수 한 알조차 얻지 못한다. 우리 안에 있는 힘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며, 그것도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내 생각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어떤 얼굴, 성격, 일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기억’이라는 조각품에는 미리 정해진 모든 일의 조화에 바탕을 둔 것만 새겨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빛 한 줄기가 비치는 곳으로 향하며, 그 덕택에 그 빛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절반밖에 표현하지 못하고 각자 품은 신성한 생각을 부끄럽게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균형 잡힌 생각이며,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전달할 만하다.

결과나 이해관계에 신경 쓰지 마라


저녁에 굶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는 소년들은 태연하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건강한 태도다. 그들은 자신을 달래려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군주만큼이나 무시한다. 소년은 극장의 객석에 앉은 관객처럼 거실에서 밖을 내다본다. 구석에 앉아서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독립적이고 무책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소년다운 재빠르고 간결한 방식으로 그것들의 가치를 평가한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재미있는지, 바보 같은지, 감명 깊은지, 골칫거리인지 판단하려고 한다. 소년은 절대로 결과나 이해관계에 신경 쓰지 않는다. 독립적이고 진실한 판결을 내릴 뿐이다.

우리가 소년의 환심을 사려고 애써야 하며, 소년은 우리의 환심에는 관심도 없다. 하지만 성인은 자신의 의식 때문에 감옥에 갇혀버린다. 성인은 눈에 띄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순간 꼼짝도 못 하게 된다. 수백 명의 동정심이나 미움을 사게 되어 그들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에는 망각의 강도 소용없다. 아, 그가 중립적인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왜 용감한 성인으로 자라지 못하는가


우리가 혼자 있을 때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는 우리가 세상에 들어서면 희미해지다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어느 사회든 각각의 구성원이 용감한 성인으로 자라지 못하도록 음모를 꾸민다. 사회는 주식회사나 마찬가지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주주에게 줄 빵을 더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빵을 먹는 사람의 자유와 교양을 희생하기로 합의한다. 여기에서 가장 요구되는 미덕은 ‘순응’이며, 자기 신뢰는 천대받는다. 사회는 현실이나 창조자를 좋아하지 않으며, 명목과 관습을 좋아한다.

진실은 꾸며낸 애정보다 아름답다


악의와 허영심이 자선이라는 외투를 걸친다고 해서 그게 사람들에게 통할 것인가? 화가 많고 고집도 센 사람이 ‘노예 제도 폐지’라는 고상한 대의명분을 지지한다고 생각해보자. 그가 최근에 바베이도스(Barbados,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나라로, 1834년에 노예제도를 없애 미국의 노예폐지운동을 자극했다_옮긴이)에서 그런 명분을 위해서 힘썼다는 소식을 들고 오면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가서 당신의 갓난아이를 사랑해주시오. 당신을 위해서 장작을 패는 사람을 아껴주시오. 온화하고 겸손하게 지내시오. 품위를 지키시오. 1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사는 흑인들을 놀라울 만큼 따뜻하게 대하면서 당신의 냉혹하고 무자비한 야심을 포장하지 마시오. 멀리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집에 있는 사람들은 앙심을 품게 될 것이오.” 사람을 이렇게 맞이하는 것은 거칠고 품위 없는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꾸며낸 애정보다 아름답다.

날카로운 면도 있어야 진정한 선이다


당신의 선(善)에는 날카로운 면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선이 아니다. 사랑의 교리가 가냘프게 울고 징징거리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증오의 교리를 설파해야 한다. 나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아버지, 어머니, 아내, 형제도 멀리한다. 나는 문기둥을 가로지르는 가로대에 ‘생각 중’이라고 써놓을 것이다. 그 아이디어가 종잡을 수 없는 생각보다는 낫기를 바라지만, 그것을 설명하느라 하루를 다 쓸 수는 없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진실한 인생


내 인생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구경거리가 아니다. 나는 부담이 적은 삶을 훨씬 선호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화려하고 불안정한 인생보다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진실한 인생이다. 나는 삶이 건강하고 달콤하길 바라며, 식이요법을 하거나 피를 흘리는 일은 없길 바란다.



2장 결코 순응하지 말고 내 참모습을 찾자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신경 쓸 뿐이다


내가 신경 쓰는 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 없다. 이런 규칙은 실생활에서든 정신적으로든 똑같이 지키기 어려우며, 위대함과 하찮음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기준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규칙을 지키기 어려운 것은 무엇이 당신의 의무인지 당신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꼭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뜻대로 세상을 살기는 쉽다. 혼자라면 자기 뜻대로 살기도 쉽다. 하지만 위대한 사람은 군중에 섞여 있을 때도 사람들을 아주 상냥하게 대하면서 고독이 선사하는 독립성을 유지한다.

장막 아래 가려진 내 참모습을 찾자


당신에게 의미가 이미 퇴색해버린 관습에 순응하지 마라. 힘이 쓸데없이 분산되고, 시간도 낭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관습은 당신의 성품에 관한 인상을 흐릿하게 만들기도 한다.

당신이 영향력을 잃은 교회에 계속 다니고, 별 볼 일 없어진 성서공회(성경을 출판?배포하고자 만든 기관_옮긴이)에 기부하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거대 정당에 투표하고, 비열한 가정부처럼 식탁을 차린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 모든 장막 아래 가려진 당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차리기 어려워진다. 물론 당신이 참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힘도 너무 많이 빼앗겨버린다. 하지만 당신이 자기 일을 한다면 나는 당신을 알게 되고, 당신은 더 강해질 것이다. 우리는 순응이라는 이 게임이 눈먼 사람이 좋아하는 것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대중의 분노를 사소한 일로 여기자


순응하지 않으면 세상은 우리에게 불만을 표하며 채찍을 휘두른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떨떠름한 표정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 구경꾼들은 길에서든, 친구가 사는 집의 응접실에서든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수상쩍다는 듯이 곁눈질한다. 이런 혐오감이 그 사람에 대한 경멸과 저항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그 사람은 슬픈 얼굴로 집에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떨떠름한 표정은 상냥한 표정과 마찬가지로 뿌리가 깊지 않다. 대중은 바람이 부는 대로, 그리고 신문이 보도하는 대로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런데도 대중의 불만이 의회나 대학의 불만보다 더 위력적으로 느껴진다.

세상을 잘 알고 의지가 굳은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들의 분노를 쉽게 견딘다. 교양 있는 사람들의 분노는 점잖고 신중하다. 그런 사람들은 상처를 잘 받는 소심한 성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유약한 분노에 일반 대중의 분노가 더해지고, 무식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흥분하고,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어리석고 야수 같은 세력이 으르렁거리고 얼굴을 찡그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 때는 이런 상황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소한 일’로 여길 줄 아는 관대한 태도와 종교적 습관이 필요해진다.

과거의 내 말과 행동에 집착하지 마라


우리가 ‘자기 신뢰’를 이룩하지 못하도록 겁을 내는 또 한 가지 요소는 우리의 일관성이다. 우리가 과거에 했던 말이나 행동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다. 다른 사람들은 과거의 행동 말고는 우리를 판단할 만한 자료가 없고, 우리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왜 자꾸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는가? 왜 예전에 공공장소 이곳저곳에서 했던 말과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며 ‘기억’이라는 송장을 끌고 다니는가? 당신이 과거에 했던 말과 모순되는 발언을 한다고 치자.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릴 때조차 자기 기억에만 의존하지 마라. 천 개의 눈이 지켜보는 현재로 과거를 불러내서 재판을 받게 해라. 그렇게 항상 새로운 날을 사는 것이 바로 지혜롭게 사는 길이다.

이 순간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라


지금 이 순간에 품고 있는 생각을 분명하게 말해라. 그리고 내일이 오면 내일 품은 생각을 또 분명하게 말하면 된다. 당신이 내일 하는 말이 오늘 하는 말과 완전히 모순되더라도 상관없다.

“아, 그러면 사람들이 당신을 오해하게 될 텐데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해받는 게 그렇게 안 좋은 일인가? 피타고라스(Pythagoras,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_옮긴이)도 오해를 받았고, 소크라테스(Socrates,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_옮긴이)도 오해를 받았다. 예수, 루터(Martin Luther, 독일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_옮긴이),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이자 가톨릭사제로 지동설을 주장함_옮긴이), 갈릴레이(Galileo Galilei,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로 지동설을 발전시킴_옮긴이), 뉴턴(Isaac Newton,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함_옮긴이)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존재한 순수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전부 그랬다. 위대한 사람은 오해받기 마련이다.

지난날의 미덕이 쌓여 명예가 되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고대 그리스의 원로원과 전장에서 활약하는 영웅들의 위풍당당함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바로 줄줄이 이어진 과거의 위대한 날들과 승리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된다. 지난날의 위대함과 승리는 무대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배우에게 하나로 모은 빛을 비춰준다. 배우는 눈에 보이는 천사들의 호위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바로 채텀(Chatham, 대영제국의 기초를 세운 영국의 정치가이자 뛰어난 웅변가인 제1대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_옮긴이)의 목소리에 천둥을 불어넣고,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미국 독립을 일구어낸 미국의 첫 대통령_옮긴이)의 태도에 위엄을 안겨주고, 존 애덤스(John Adams, 미국의 독립전쟁 지도자이자 제2대 대통령_옮긴이)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명예는 이미 끝나버린 것이 아니므로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명예는 언제나 오랜 세월을 기반으로 하는 미덕이다. 우리가 오늘날 명예를 중시하는 것은 명예가 이 시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명예를 사랑하고, 명예에 경의를 표한다. 명예가 우리에게 사랑과 존경심을 강요해서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생적이기 때문이다. 그 덕택에 젊은 사람에게서 명예가 드러나더라도 그 명예는 오래되고 순수한 혈통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날 위해 존재하는 세상임을 자각하자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알고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지배해야 한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엿보거나 훔치거나 고아, 사생아, 침입자처럼 몰래 숨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탑을 세우거나 대리석으로 신을 조각하는 데 필요한 힘에 상응하는 가치를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탑이나 조각을 보면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낀다. 그에게는 궁전, 조각상, 비싼 책이 화려한 마차만큼이나 이질적이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댁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전부 그의 것이다. 그의 관심을 얻으려고 애쓰고, 그에게 능력을 드러내서 자신들을 소유하라고 탄원하는 것들이다. 그림도 내 판결을 기다린다. 그림이 나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림이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 결정하는 것이다.



3장 나를 신뢰해야 삶의 혁명이 일어난다



내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존재의 감각


자신을 신뢰해야 하는 이유를 파악할 때 모든 독창적인 행동의 매력도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보편적인 신뢰의 토대가 되는 본래의 자아는 무엇인가? 과학계를 당황하게 만드는 그 별의 본질과 힘은 무엇인가? 그 별은 시차(視差)도 없고, 계산할 수 있는 요소도 없다. 하지만 독립성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사소하고 부도덕한 행동에도 아름다운 빛 한 줄기를 쏜다.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자발성’이나 ‘본능’이라고 부르는 것의 원천으로 우리를 단번에 이끈다. 그것이 바로 천재성, 미덕, 인생의 정수다. 우리는 이런 근원적인 지혜를 ‘직감’이라고 표현한다. 그 후에 얻는 가르침은 전부 ‘지식’이다.

분석할 수 없는 최후의 사실에 담긴 그 심오한 힘 속에서 모든 것이 공통의 원천을 발견한다.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는 모르지만 조용한 시간에 영혼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존재의 감각은 사물, 공간, 빛, 시간, 인간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들과 하나다. 전부 같은 원천에서 생명과 존재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는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생명을 사물과 공유한다. 하지만 그 후에 사물이 자연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나면, 우리가 사물과 같은 근원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여기에 행동과 생각의 원천이 있다. 여기에 인간에게 지혜를 불어넣는 영감의 허파도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불경한 태도로 무신론을 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단순하고 순수하게 신을 받아들이자


인간의 영혼과 신령의 관계는 너무나 순수해서 그 관계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끼워 넣으려는 시도가 불경스럽게 느껴진다. 신은 말씀하실 때 한 가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전달하시는 것 같다. 신은 세상을 당신의 목소리로 채우시고 빛, 자연, 시간, 영혼이 현 생각의 중심에서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신다. 그렇게 새로운 날과 새로운 것들로 세상 전체를 창조하신다. 우리가 단순한 마음으로 신의 지혜를 받아들일 때마다 낡은 것들이 사라진다.

수단, 스승, 경전, 신전이 무너져 내린다. 우리의 마음은 현재에 머물면서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흡수한다. 모든 것은 이런 마음과의 관계 덕택에 신성해진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그 원인에 의해서 중심으로 녹아들고, 사소하고 특수한 기적들은 보편적인 기적 속에서 사라진다. 따라서 누군가가 신에 관해서 안다고 주장하고 신을 논하며 다른 세상, 다른 나라에서 사라져가는 어떤 오래된 민족의 표현으로 당신을 이끈다면 그 사람을 믿지 마라.

왜 온전히 현재를 살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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