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 자본주의 세대
고재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세습 자본주의 세대
고재석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3년 4월 / 348쪽 / 19,000원
결혼과 부동산 시장의 패자
나의 영끌 분투기
결혼하면 어디에 살까: “지금 어디니? 시간 되면 약수역 9번 출구 앞으로 오너라. 같이 가서 볼 집이 있다.” 땡볕이 강하게 내리쬐던 2020년 7월 11일 오후에 어머니에게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당시 나는 지금의 아내와 함께 3개월 후 있을 결혼식 때 입을 예복을 맞추던 참이었다. 아직은 여자 친구이던 아내가 말했다. “일단, 빨리 가보자.”
지하철 3·6호선이 통과하는 약수역은 나와 아내가 모두 선호하던 동네였다. 대학 졸업반 때 약수역 근처에서 월세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서울 사대문 근처에서 걷기, 책 읽기, 서점 가기, 종로·을지로에서 사람 만나기 등 극히 평면적인 내 취미 생활에는 최적화된 동네였다. 월세는 대학가보다 훨씬 비쌌지만 내 선택에 만족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까지는 도어 투 도어 30분 정도다. 살 수만 있다면 ‘럭키’였다. 아내에게도 추억이 있었는데, 첫 직장이 인근에 있는 신라호텔이었다. 아내가 현재 재직 중인 직장도 양재역에 있어 출퇴근할 때 지하철로 약 20분이면 충분했다.
어머니는 건설업계에서 수십 년간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집을 보는 눈이 나와 아내 같은 범부와는 달랐다. 그런 어머니가 약수역에 ‘같이 가서 볼 집’을 찾았다고 하니, 나와 아내는 이미 마음이 들떠 있었다. 카페에서 기다리던 어머니는 우리를 앉힌 뒤 사전 답사 결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파트를 보러 왔다가 너무 비싸서 다른 데를 찾는데, 부동산 중개인이 신축 빌라 모델하우스가 열었다고 소개해주더구나. 너희도 알다시피 이 동네에 신축이 흔치가 않아. 분양가는 조금 비싼데, 일반 빌라보다는 고급스럽게 지었더라고. 동네도 조용하고, 마감재도 괜찮은 걸 썼더라. 가서 보면 맘에 들 거야.” 주거 형태에 귀천이 있겠느냐만, 내 딴에는 아파트에 살고 싶었다. 신축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당시 내 나이보다 어린 아파트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파트도 아니고 빌라?’, ‘그 돈으로 굳이 빌라를 갈 필요가 있나?’ 순간 그런 뾰족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집값의 풍선 효과: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와 아내에게는 근로소득을 저축한 돈 말고는 마땅한 현금자산이 없었다. 당시 서울 시내 아파트 매매가가 평균 10억 원을 웃돌았다. 쓸 수 있는 현금과 지불해야 할 가격의 거리가 아스라이 멀었다. 경기도나 인천은 생각 안 해보았냐고? 물론 고려해보았다. 다만 나와 아내는 장거리 출퇴근이 세상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라는 생각을 일찍부터 공유했다. 아침마다 몸이 끼여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가방은 금세 찌그러지는 ‘지옥철’ 생활을 경험한 결과다. 아내의 직장은 양재동, 나의 직장은 충정로였다. 서울 밖으로 나가는 순간 누구 한 명은 다시 지옥으로 가야 했다. 우리는 경기도 자가보다 서울 전세가 낫다는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현실은 우리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문재인 정부가 2019년 12-16 부동산 대책을 통해 9억 원 초과 아파트에 주택담보대출비율(LTV) 20퍼센트를 적용해 대출한도를 제한해놓은 뒤였다. 9억 원 초과 아파트에 대한 대출을 잠근 탓에 외려 9억 원 이하 아파트로 수요가 집중되어 가격이 오르는 풍선 효과까지 나타났다. 전세 사정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부동산 시장은 연일 경고음을 발산했다. 12.16 부동산 대책으로 대출이 막히자 매매에서 전세로 선회한 사람이 쏟아졌다. 수요가 오르니 가격이 급등했다. 나와 아내가 원하던 약수역 인근 구축 아파트 전셋값은 빌라 매매가를 벌써 웃돈 상황이었다.
‘그래도 아파트’라며 억지로 전셋집에 들어가도 문제는 남았다. 닷새 전, 주택 임대차 시장이 대변혁을 앞두었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이날 민주당에서 임대차 3법 개정안(전월세신고제, 계약갱신청구권제, 전월세상한제)을 모두 발의했기 때문이다. 기사에 등장하는 전문가들마다 “전셋값이 한꺼번에 많이 오르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거나 “전세의 월세화가 가속화하고 ‘전세 종말’이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미칠 파장은 매우 클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굴려 하나씩 따져보았다.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한다 해도 전세로 한집에 살 수 있는 기간은 최대 4년이다. 집주인이 직접 입주하겠다면 청구권을 아예 행사할 수도 없다. 2년이건 4년이건 그 뒤엔 어쩔 건가? 전세 월세화가 가속화하고 대출 규제의 강도 역시 그대로 유지된다면 길은 뻔했다. 다시 월세로 뒷걸음질 쳐야 하는 것이다. 음울한 시나리오였다.
나는 영끌족이 되었다: “가서 보자”는 어머니의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수고스럽기 그지없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회사에만 입사하면 그 뒤는 꼬인 매듭이 한 번에 풀리듯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는데…….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오르다 말고 어머니가 말했다. “여기다.” 잉! 이건 뭐지? 어머니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상상하던 빌라가 아니었다. 귓가에는 모델하우스 관리인의 화려한 언변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법적으로 빌라이긴 하지만, 사실 타운하우스 느낌에 가깝죠. 테라스만 해도 족히 10평이 넘잖아요. 텃밭으로 쏠 수도 있고, 또 아이 놀이터로 활용할 수도 있고요. 저기 보세요. 어린이집 보이죠? 그리고 이게 정말 중요한 정보인데, 이곳은 원래 대기업 창업주인 회장님 자택이었어요. ‘재벌 터’인 셈이죠. 이 빌라를 짓기 전까지는 미술관으로 썼고요.” 나는 이곳이 그 창업주의 이름을 본떠 미술관으로 운영되었다는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그리고 미술관 다음으로는 텃밭에 꽂혔다. “텃밭에는 상추와 고추를 심으면 되겠네.” 어머니가 맞장구치듯 말했다. 나와 아내의 가슴은 이미 부풀어 올랐다. 아내는 장모님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장모님은 금세 송파구에서 날아오셨다. 그 뒤에는 아내와 장모님이 몇 수 앞을 준비하겠다는 듯 새집에 들여놓을 혼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관리인이 이즈음 말을 꺼냈다. “조금 서두르셔야 할 게, 103동에서 테라스가 있는 세대는 딱 3세대예요.” 우리는 당장 가계약을 하고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이체했다. 입주 날짜, 그러니까 잔금을 치르는 시점은 결혼식 일주일 전까지 최대한 미루어두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발품을 팔아야 했다. 건설사 측이 연결해준 은행은 물론, 다른 은행에도 가능한 주택담보대출 금액을 확인했다. S은행에서 35년 상환 기준으로 5,000만 원을 더 빌려주겠다고 했다. 생애 최초 주택 구매에 해당해 예상했던 금액보다는 조금 더 높은 대출금이 산정되었다. 그래도 돈은 아직 모자랐다. 나와 아내 모두 ‘마이너스 통장(신용대출)’을 개설해 돈을 추가로 확보했다. 여기에 그간 근로소득으로 모은 돈을 더해 겨우겨우 차액을 메꾸었다. 우리는 그렇게 ‘영끌족’이 되었다.
영끌의 후폭풍: 그때까지 지난 15년간 서울에 살면서 나의 처지는 늘 월세 세입자였다. 나는 2년마다 옮겨 다니며 서울 곳곳을 헤매는 유목민이었다. 그 시절 나는 이런 목표를 품고 살았다. ‘신혼 생활은 전세로 시작해도 5년 안에 아파트를 장만할 거야.’ 그 목표 달성이 어렵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인센티브 펑펑 받는 대기업은 아니지만, 남들이 모두 알 만한 회사에 다녔다. 완만하긴 해도 연봉은 해마다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기간 내가 얻은 소득은 통계상 또래 중에서 중상위에 해당했다. 그런 나에게도 부동산 시장의 열린 길은 오므린 듯 좁았다. 아니, 좁디좁았다.
이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계속 빅 스텝 행보를 이어갔다. 내가 매달 내야 할 이자도 꾸준히 늘었다. 언론에서는 ‘영끌족’에 비상이 걸렸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전세보증금을 대출받아 입주한 30대도 이자 급등에 신음했다. 임대차 3법 탓에 월세가 2배로 뛴 곳도 부지기수였다. 어떤 쪽이건 불리한 선택지뿐이었다. 설레야 할 시기에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고민한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다 1980년대에 태어나
문화적 선진국의 첫 시민
열등감의 K: 한창 문화계를 취재하고 다닐 때, 습관적으로 ‘K-팝’, ‘K-웹툰’ 등의 단어를 남발했다. 언젠가 「‘대중음악의 메카’ 영국·미국에 상륙한 K팝」이라는 기사를 썼다. 첫 문장은 “K팝이 록 음악의 심장부인 영국과 음악 산업의 심장부인 미국에 차례로 상륙했다”였다. 발로 뛰어 취재하지 않고 그냥 베껴 쓰다시피 한 글이다. 당시 출입하던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내놓은 보도자료를 살짝만 고쳐 썼다.
어쨌든 내 딴에는 누가 보리라고 생각해 쓴 기사가 아니었다. 매일매일 내게 할당된 기사량을 채우기 위해 습관처럼 노트북을 두드렸을 뿐이다. 며칠 뒤, 알고 지내던 문화계 인사 J가 해당 기사를 링크하면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 기자, 나는 K팝이라는 단어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편의상 쓸 수 있다고 보네. 나 역시 딱히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도 않고, 그런데 기사를 보면 후진국 음악이 선진국 시장에 겨우겨우 숨 쉴 공간을 마련했다는 의미처럼 읽히더구만. 그런 열등감을 언론인들이 나서서 굳이 표출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열등감을 표출했다니. 관행을 따르다가 의도치 않은 담론을 설파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도저히 대체할 만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아 K-팝이라는 단어는 몇 차례 더 썼다. 그래도 이 일을 계기로 나름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모든 종류의 ‘K’ 브랜딩을 싫어한다. 아니, 반대한다. K-방역, K-백신, K-에듀, K-드라마, K-푸드, K-뷰티, K-방산 등 온갖 K 타령에 신물이 난다. ‘K’는 문재인 정부 시기 관제 유행어였다. 물론 윤석열 정부의 행보도 K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장된 긍지는 콤플렉스의 발로다. 결핍이자 아웃사이더 의식이다. 거기에는 선진국이라는 유토피아를 설정해 영원히 따라잡아야 할 것만 같은 뉘앙스가 담겨 있다. 내가 ‘대중음악의 메카 영국·미국에 K팝이 상륙했다’고 쓴 건 좀 심하게 말하면 식민지적 정서다. 여기에는 피라미드의 하부에서 한 단계씩 올라가야 한다는 무의식이 담겨 있다. 이를 위해 국가의 역량을 총력 투입해야 한다는 사고도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국가 주도 산업화 프로젝트다. K의 유니버스에서 한국은 영원히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다. 수십 년간 추격자로 살아서 이제 겨우 따라잡았는데, 앞으로도 추격만 하자고 하면 구성원들이 동의하겠는가? 내가 온갖 형태의 K를 접할 때마다 뾰족한 반발감이 생기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온전한 ‘한국적 대중문화’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세계화 시대에 문화와 문화는 서로 침투한다. 한국 대중음악에는 미국 대중음악의 흔적이 적잖게 묻어 있다. 1950년 6·25전쟁 이후 미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미국 대중음악이 한국 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삐딱하게 보면 문화 제국주의라고 일갈해버릴 수도 있겠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타국의 문화를 수십 년간 가다듬어 제 나름으로 재해석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느 쪽이건 한국만의 특수한 사정이 아니다.
86세대는 전복, X세대는 반란: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는 보릿고개를 함께 넘었다는 동류의식을 가졌다. 경제성장의 열차를 밀고 끌며 산업화를 일구었다는 자부심이 이들의 사고방식에 배어 있었다. 근면, 성실, 새마을운동 등의 단어가 전 세대의 사고방식을 주름잡았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막내들은 그 유명한 86세대(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출생)의 일원이기도 했다. 86세대는 불의한 세상을 고발하고 뜨겁게 싸운 세대였다. 가치, 헌신, 희생, 투쟁, 민중, 민족 따위의 단어들이 86세대의 망탈리테(mentalites, 집합적 무의식의 총체)를 구성했다.
X세대(1970년대생)는 달랐다. 이들은 ‘신세대’와 ‘신인류’로 불리며 1990년대에 화려하게 출현했다. X세대는 집단 vs 개인 구도에서 처음으로 후자에 무게 중심을 둔 세대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들 세대에는 커다란 역사적 공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는 대중 소비문화가 본격 개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86세대가 운동의 영역에서 전복을 꾀했다면, X세대는 문화의 영역에서 반란을 꿈꾸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X세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그런 ‘서태지와 아이들’조차 출발선에 불과했다. X세대에서 방시혁, 양현석, 박진영 등 한류의 핵심 브레인이 대거 등장한 건 우연이 아니다. 유재석, 신동엽 등 당대를 주름잡은 스타 MC도 모두 X세대였다. 이정재, 이병헌은 지금도 영화계에서 롱런하고 싸이, 김동률은 공연계에서 여태 티켓 파워를 자랑한다. 이것은 아주 독특한 현상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윗세대에 가로막혀 거의 질식당해버린 X세대가 문화계에서만은 강력한 패권을 행사한다. 이들은 5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현역이다.
문화의 생산자는 유행을 이끌고 새로운 문화 코드를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기획자이자 연출자다. 그런데 문화력을 퍼뜨리는 건 수용자다. 생산자를 떠난 문화는 수용자에 의해 운명이 정해진다. 이전 세대와는 다른 감성과 품질의 콘텐츠를 만든 건 1970년대생이지만, 그것이 시장에 자리 잡게 만든 당사자는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였다.
1980년대생은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아이돌 그룹을 통해 한국 음악도 세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세대다. 우리는 KBS <가요톱10>을 보면서 저마다의 우상을 응원했고 PC통신을 통해 H.O.T., 젝스키스, 신화, god, 핑클에 대해 대화했다. 각자의 팬덤에 속해 취향의 공동체를 영위했다. 우리는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등의 영화를 통해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홍콩 영화보다 낫다고 생각한 세대였다. 그뿐이랴. 1973년생 박찬호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1977년생 박세리가 US오픈에서 우승했을 때 가장 환호했던 세대이기도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컬러텔레비전과 프로야구를 즐긴 세대였다.
그것은 애국심이나 긍지와는 오롯이 다른 정서였다. 1980년대생은 한국 문화도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일 수 있음을 어릴 적부터 깨달은 세대다. 그들에겐 선진국 콤플렉스가 없다. 1983년생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은 1970년대생과 1980년대생을 이렇게 비교했다.
“1980년대생에게 1990년대 대한민국은 후진국 티를 벗기 시작한 나라죠. 1970년대생에게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대한민국은 북한과 별 차이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이들에게 한국 문화는 굉장히 촌스럽고 폭력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반면 1980년대생은 인터넷을 통해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했어요. 이들의 성장기에 스타크래프트와 스타 리그가 출현했잖아요. 스타크래프는 블리자드가 만들었지만 스타 리그는 한국이 만들었거든요. 따라서 1980년대생은 외국의 무언가를 힐끔거리지 않고 우리가 종주국으로 즐길 수 있는 게 나왔다고 느낀 세대예요. 이런 경험을 일찌감치 한 세대와 억눌렸다고 생각한 세대는 다를 수밖에 없죠.”
1980년대생은 문화적 열등감이 없는 첫 번째 세대다. 우리는 우리를 약소국의 시민으로 규정짓지 않는다. 애국과 사대주의 틀로 문화의 위계를 설정하는 행태도 거부한다. BTS가 ‘우리 시대의 비틀스’로 불리고, 봉준호 · 박찬욱이 거장의 반열에 오른 시대에 사는 199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에게 그 자부심의 크기는 훨씬 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30대 이하 청년들에게 한국은 문화의 영역에서 자긍심을 가질 만한 성취를 거둔 국가다. 그 앞에서 ‘드디어 우리나라도’ 같은 K 타령만 하다가는 꼰대라는 소리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