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개인주의자
김민희 지음 | 메디치미디어
다정한 개인주의자
김민희 지음
메디치미디어 / 2022년 4월 / 264쪽 / 16,000원
X세대의 기쁨과 슬픔
개인주의 첫 세대, 서태지와 함께 화려하게 등장하다1992년 3월 14일,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일명 토토즐)를 보다가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입을 벌린 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저건 뭐지?’라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분홍 재킷에 금테 안경, 펄럭이는 정장 바지의 서태지, 그리고 그만큼 펄럭거리는 오버사이즈 핏 정장을 입은 양현석과 이주노. 이전까지는 보지 못한 신인류의 등장이었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부분에서는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린다는데 저렇게 신날 일인가 하고 이상해하다가 “난 정말 그대 그대만을 좋아했어” 하는 변주 부분에서는 낯선 설렘을 느꼈다. 느리고 축축 처지는 소위 ‘궁상맞은’ 이별 노래에 익숙했던 나의 귀는 랩 댄스라는 새로운 장르를 금세 받아들였다.
우상을 넘어 신드롬이었고 ‘문화 대통령’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았던 서태지,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You must come back home~”이라는 가사가 담긴 노래 <컴백홈> 덕분에 가출 청소년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왔다는 뉴스까지 보도되었을 정도였다. <환상 속의 그대>, <이 밤이 깊어가지만>, <하여가>, <발해를 꿈꾸며> 등 그가 선보인 노래는 하나같이 신세계였다. 각각의 노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서태지스러웠지만 이전의 서태지를 자가 복제하지 않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X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개성 강하고 자유분방한 예술혼. 아름다우면서 낯설었고 전위적이면서 신선했다. 패션 역시 파격이었는데, 상표를 떼지 않은 모자를 쓰고 무대에 등장한 파격은 파격도 아니었다. 진분홍색으로 염색한 헤어, 벙거지, 헐렁한 바지에 멜빵 바지 등 그의 패션은 곧 유행이 되었다.
한국 가요계는 서태지 전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들국화, 시나위, 봄여름가을겨울, 송골매 등 개성 강한 그룹들이 이전 세대에도 있었지만 서태지만큼은 아니었다. 서태지가 등장한 즈음 KBS <가요톱10> (가요톱텐)에서는 태진아의 <옥경이>가 1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서태지 2집이 나왔을 때는 김수희의 <애모>와 경쟁이 치열했다. 기성세대 문화와 동질감이 크지 않았던 X세대는 새로운 세계의 큰 문을 열어젖혔다. 풍부한 감성과 자기만의 화법이 꿈틀거리는 낭만의 세계였다.
서태지와 아이들부터 강력한 팬덤 문화가 싹트는데, 이는 한국의 정치·경제 등 분야 곳곳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정치가 팬덤화되는 것도 이들 세대의 활약과 무관하지 않다. X세대는 ‘내가 투표한 가수 1위 만들기’의 짜릿한 손맛을 보면서 훗날 더 큰 주도권을 쥐게 된다. 정보화 첫 세대인 이들은 네트워크 세상의 첫 주역이 되면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든 정치인이든 ‘덕질’의 대상화로 만들어갔다.
우리 대신 나를 노래하다: 서태지는 일인칭을 노래했다. 이전 세대는 ‘우리’를 주어로 ‘우리들’을 향해 노래했지만 그는 ‘나’의 이야기를 했다. 시대보다 개인에 방점을 두었고 시대를 다루더라도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수렴되는 노래를 불렀다. ‘나’의 이야기는 힘이 세다. 나만의 깊은 이야기가 타인의 영혼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면 감동은 말할 수 없이 크고 깊다. BTS의 아버지로 불리는 방시혁 의장이 이들에게 “너의 이야기를 하라”라고 주문한 것은 이런 이유일 텐데, 서태지는 이미 30년 전에 이를 실천한 셈이다.
그의 노래는 시대의 고민에서 살짝 비켜나 있었다. 시대를 다루더라도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서 다른 방식으로 노래했다. 당시에는 엄혹한 정치적 상황도 없었고 경제적 빈곤에서도 탈출한 상태였다. 비교적 풍요롭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1970년대생들이 20대였던 1990년대 초중반에는 희망과 낭만이 가득했다. 꿈꾸는 무엇이라도 다 될 수 있는 것처럼 부풀어 있던 청춘이었다. 시대적 고뇌의 산물이거나 고통에서 건져 올린 이전 세대의 묵직한 노래와는 달리 서태지의 노래는 기본적으로 맑고 해사했다. <교실 이데아>나 <시대유감>처럼 사회 비판적인 곡조차 밝고 경쾌한 톤으로 노래했다. 님프의 요정도 울고 갈 미소년 같은 외모에 가느다란 금테 안경, 수정같이 투명한 미성 자체가 이전에는 없던 캐릭터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96년 1월, 서태지와 아이들은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도 그들은 한 번도 잊힌 적이 없었다. 희망으로 벅찼던 20대의 X세대에게 서태지는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팬 같은 모습으로 박제되었다.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영상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댓글이 한결같았다. “잊힌 적 없어서 <슈가맨>에 나올 수 없다.” “서태지는 문화다.” “지금 보아도 촌스럽지 않다.” “서태지는 천재다.” “지금도 저 때가 그립다….” 등등.
서태지가 또 하나 특별한 것은 ‘개인의 힘’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이전 세대를 흉내 내려 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작사·작곡하고 프로듀싱하고 노래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안무하고 춤을 추었다. 노래든 춤이든 그들만의 펄떡거리는 언어가 살아 숨 쉬었다. 최근 들어 MZ세대의 화두가 된 ‘나다움’을 그는 그때부터 이미 뼛속 깊이 장착하고 표출했다.
기획사 사장과 방송사 PD의 권력이 상당했던 시절, 서태지와 아이들은 실력만으로 음반 시장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기성세대가 구축한 낡고 닳은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해 견고한 기존 음반 제작 시스템을 깨부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런가 하면 음악 소비자의 권리를 위해 저작권과 초상권 지키기, 사전심의제도 철폐운동 등을 펼쳤다. 서태지의 문제 해결 방식은 집단으로 똘똘 뭉쳐 움직이던 기성세대와는 확실히 달랐다. 실력 있는 한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앞서서 증명했다.
서태지는 일인칭을 노래했다. 이전 세대는 ‘우리’를 주어로 ‘우리들’을 노래했지만 그는 ‘나’의 이야기를 했다. 시대보다 개인에 방점을 두었고 시대를 다루더라도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수렴되는 노래를 불렀다.
미지수 X에 대하여: X세대는 이름이 많다. 널리 통용되는 X세대 외에도 문화 세대, 정보화 세대, 탈정치 세대 등으로도 불린다. 그만큼 이전의 세대와는 차별화되는 특질이 많다는 이야기다. 최샛별 교수는 《문화사회학으로 바라본 한국의 세대 연대기》에서 “이들 세대가 중요한 이유는 지금의 당연한 것들의 시작 지점에 X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들은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고 삶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며 우리 사회에 신선한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라고 했다.
우리나라에 ‘세대’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X세대부터다. 이전에는 한 집단에 세대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나이 듦에 의한 사고방식 차이일 뿐 세상에 없던 파격적인 가치관을 가진 그룹이 없었기 때문에 구분 지을 필요가 없었다. X세대는 달랐다. 가치관, 패션, 라이프 스타일에서도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차별화되었다. 이들의 등장은 어마어마하게 파격이었다. 최근 MZ세대를 신인류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X세대와 이전 세대의 단절은 컸다. MZ세대를 보면, 바로 윗세대인 X세대는 이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당시 X세대는 바로 앞세대조차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이들을 신기해하면서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시선이 많았고, 여기저기에서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라며 눈총을 주었다. 오죽하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세대라는 의미에서 미지수를 뜻하는 알파벳 X를 가져와 ‘X세대’라고 불렀을까. 완전히 새롭다는 의미에서 ‘신세대’로 부르기도 했다.
X세대의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보자.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X세대라는 용어는 1991년, 캐나다 작가 더글러스 코플랜드(Douglas coupland)가 쓴 소설 《X세대(Generation X)》에서 유래했다. 소설에서 X세대는 중산층 가정에서 안정적으로 자랐지만 미래에 대한 꿈이나 목표의식 없이 염세주의적 태도를 지닌 젊은이들이다. 코플랜드의 소설에 등장한 X세대가 현세대를 통칭하는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미국 기업들에 의해서였다.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중반에 태어난 이들이 소비 시장에 등장하자, 미국 기업들은 독특하고 개성 강한 이들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코플랜드의 소설에서 X세대라는 용어를 발견했다.
한국에서는 1993년 동방기획에서 만든 광고에 처음 등장했다. 화장품 브랜드 아모레(현 아모레퍼시픽)는 신세대를 위한 화장품을 선보이면서 ‘아모레 트윈 X’로 상표명을 달았다. 당시 제품만큼, 아니 그 이상 화제몰이를 하던 것이 광고였다. 해당 광고는 지금 보아도 전위적이고 세련미가 넘친다. 광고 모델은 배우 이병헌과 가수 김원준, 당대를 주름잡던 20대 중반의 두 남성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강렬하면서도 반항기 강한 눈빛, 끝내 자신을 다 보여주지 않는 신비감. 흑백화면은 이들의 눈빛에 시선을 집중하게 하고, ‘삐익~’ 하는 고음역대의 배경음악은 신비스러움을 배가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이성 < 느낌” 단 두 개의 짧은 자막이 메시지를 대신한다.
아모레 트윈 X 광고는 시리즈마다 화제였다. 광고 모델은 대부분 남자였지만 여배우도 한 명 있었다. 기존의 여성스러움을 배반하는 캐릭터 하면 어떤 얼굴이 떠오르는가? 맞다. 드라마 <종합병원>에서 짧은 커트머리 스타일로 등장한 배우 신은경이다.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신은경은 이 광고에서도 짧은 커트 머리로 등장해 눈빛으로 강렬한 레이저를 쏘았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X세대의 당당함 그 자체였다.
오렌지족과 배꼽티, “기분이 조크든요”: 광고 이야기가 나온 김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X세대의 장면을 하나 더 언급하려 한다. 일명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인터뷰다. 1994년 9월 17일에 방영된
는 20년 만의 평행이론이라는 재미있는 시각과 함께 다시 회자되었다. 업로드 1년 만에 조회수가 무려 350만 회에 이를 정도다. 1990년대 패션은 파격이었다. 배꼽티가 처음으로 길거리에서 유행하기 시작했고 군화와 힙합바지, 레이어드룩이 캠퍼스를 뒤덮었다. 눈 화장이 진해 ‘키메라 화장’으로 불렸고, 과장된 입술 라인 안에는 검붉은 립스틱이나 일명 심은하 립스틱으로 불리는 은갈치색 립스틱으로 채웠다. 당시 20대였던 이들의 인터뷰를 보자.
“자유롭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때로는 사람이 유행을 탈 줄도 알고 넘치는 힘을 밖으로 폭발할 줄도 알아야 해요.” “굳이 영화를 누리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 대로 잘 이루어서 살아가면 그게 좋은 것 같아요.” “(군화를 왜 신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군화를 신으면 섹시한 느낌도 나고요, 남자들이 신는 거라서 남자들과 좀 대등한 느낌도 나고요.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좋거든요).” “(긴 목걸이를 한 20대 남성) 아, 이거요? 제 자동차 키인데요, 개성 있기도 하고 또 실용적이기도 하고요.”
압구정동에는 오렌지족이 들끓었다. 무스로 머리를 고슴도치처럼 뻣뻣이 세우고 알록달록 튀는 패션에 외제 차나 오픈카를 타고 다니면서 “야~ 타!”라고 외쳐서 ‘야타족’으로도 불렸다. 이들의 패션은 지금의 기준으로도 대단한 파격이었다. 1990년대 패션을 재현하는 일명 패피들조차 따라 하기 힘들 정도다. 오렌지족은 신흥 부자의 상징이었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부를 일군 산업화 1세대는 서울 강남의 신화를 만들어갔는데 이들의 자녀들은 그 혜택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주로 해외 유학파 1세대인 이들은 방학이면 한국에 돌아와 부모 돈으로 펑펑 쓰고 다녔다.
오렌지족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오렌지가 대표적인 수입 과일이어서 유학파인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는 설, 오렌지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에서 온 유학생이 많아서 오렌지족이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오렌지족을 어설프게 따라 해 짝퉁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는 이들은 ‘낑깡족’으로 불렸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도 오렌지족이 언급된다. 해태(손준호 분)가 “아따 내가 이리 봬도 순천서 최초로 오렌지족 소리 들어본 놈이여!”라며 스타일리시한 패션을 뽐낸다.
1994년에 문화체육부에서 발간한 <94년도 청소년 육성정책 결산 및 95년도 청소년 정책 방향> 보고서는 아예 오렌지족의 특성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여기에서 언급한 오렌지족의 특성은 이렇다.
일반 청소년들은 대학 입학이라는 지상 과제를 향해 하루 24시간을 쪼개가며 당장의 고통을 참는 반면 오렌지족은 ‘여자 등과 함께 즐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2-3만 원의 용돈을 사용하는 일반 청소년과는 달리 오렌지족은 카드나 수표를 사용하며 버스나 지하철보다는 스포츠카와 외제 차 등을 몰고 다닌다. 서로의 사랑을 조금씩 확인해가는 애뜻한 연애보다는 부킹과 함께 당일로 호텔로 직행하는 벼락치기 쾌락에 탐닉한다.
국민의 70퍼센트가 중산층이던 지상낙원: 이렇듯 오렌지족에 대한 인식은 다소 부정적이다. 오렌지족과 X세대는 충분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오렌지족이 X세대이기는 하지만 X세대 모두 오렌지족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X세대가 가진 공통 특성은 새로움과 창의성, 자유와 개성, 탈규격화와 탈권위주의, 그리고 자신감 등이다. 이런 긍정적인 특성들이 일부 탈선을 일삼는 오렌지족으로 인해 오염되고 잘못 해석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서 X세대가 가지고 있는 자신감의 원천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당시 X세대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말투가 자신만만하다. 어떤 말에는 ‘그래, 나 이런 사람이야. 어쩔래.’ ‘나는 나!’ 하는 태도가 마치 대본의 지문에 녹아 있는 듯 하나같이 당당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 세대를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만들었을까. 앞에서 언급한 일명 ‘기분이 조크든요’ 영상에서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을 보면 그 단초가 보인다.
당시는 지상낙원이었다. 경제성장이 10퍼센트대였고, 은행에 돈을 넣어두기만 하면 연이자 20퍼센트씩 주었고, 일자리가 넘쳐나서 면접 온 분들에게는 돈까지 쥐어주면서 우리 회사에 와달라고 했으며, 국민의 70퍼센트가 중산층이라고 믿었다. IMF가 터지기도 했지만 모두가 희망을 품었다.
세대의 특질은 시대의 공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렇듯 3저(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와 3고(고금리, 고일자리, 고성장률)의 호황이 20대의 X세대에게 주어졌다. 한중 국교 수립(1992),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1993),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1996) 등 경제성장의 기폭제가 되는 역사적 사건이 이 시기에 체결되었다. 수출산업이 날개를 달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특수까지 누렸으며 건설 경기 호조도 이어졌다.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고도성장이 지속된 시기였다. 1인당 국민총소득의 상승세 역시 이 시기에 매우 가파르다. 1970년에 225달러였던 1인당 국민총소득은 세대가 20대 전후였던 1990년에 6303달러가 된다. 20년 사이에 무려 27배 오른 셈이다. 2020년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만 5168달러로, 최근 30년간 4.5배 오른 것과 비교할 때 당시의 상승률은 역대급이었다. 성장 과정에서 전무후무한 고도성장을 경험한 이들은 사회 전반에 공기처럼 퍼져 있는 긍정 에너지를 듬뿍 흡수하며 자라게 된다.
<동아일보> 1989년 1월 23일 자를 보면 국민의 60퍼센트 이상이 나는 중산층이라고 답했다는 기사가 있다. 갤럽 조사에서는 무려 75퍼센트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식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부의 불평등이 비교적 적었으며, 사는 수준이 고만고만한 이 중산층의 비율은 IMF 외환 위기가 터지기 전까지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이후로는 중산층 비율이 점점 낮아져 2019년에는 겨우 48.7퍼센트만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여겼다(SM C&C ‘틸리언 프로’ 설문 조사 《조선일보》 2019년 1월 26일 자 <중산층이 사라진다. 30년 전 국민의 75퍼센트가 나는 중산층…올해에는 48퍼센트로 뚝>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