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의 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 메이트북스
세네카의 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메이트북스 / 2022년 7월 / 360쪽 / 16,000원
세네카의 인생론
사용법만 잘 익히면 인생은 충분히 길다
문제는 수명의 짧음이 아니라 시간 낭비다: 사실 수명이 짧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이 문제다. 인생은 충분히 길고 제대로 잘 활용한다면 위대한 과업을 이루고 남을 정도로 충분하다. 하지만 방탕을 일삼고 무관심하게 살며 옳지 못한 목적을 위해 시간을 소비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인생이 바람처럼 지나가버린다. 결국 죽음이라는 마지막 관문 앞에 도달했음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만다.
방향이 없다면 가짜 인생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가진 부를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거나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는다. 또한 언제나 불만에 쌓여 있으며 한 가지 목표를 정하지 않고 매번 새로운 목표를 세우면서 변덕스럽게 행동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정한 인생의 방향을 정하지 않고 반쯤 잠든 상태로 무기력하게 살아가다가 한순간 죽음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어느 위대한 시인이 한 말에서 인생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것들은 진짜 인생이 아니라 그저 시간일 뿐이다.
오늘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어리석은 것에 몰두하며 헛된 꿈에 사로잡힌 사람들: 먼저 술과 욕정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들보다 더 어리석은 것에 몰두한 자들이 있을까? 야망이라는 헛된 꿈에 사로잡힌 자들만 해도 겉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인다. 이렇듯 탐욕이나 화, 혹은 부당한 증오심과 전쟁에 집착하는 자들의 이름을 열거해보면 호전적이라는 변명의 여지라도 있을 텐데, 자기 발로 욕정에 완전히 굴복해버린 자들의 불치병은 그저 불명예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배움에는 평생이 걸린다: 일이 너무 많아서 분주한 사람들은 웅변이나 학문의 영역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들 한다. 온갖 것들 때문에 산만해지면 어떤 것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억지로 음식을 쑤셔 넣은 것처럼 곧바로 토해내기 마련이다.
분주하게 사는 사람들은 사는 데 별 관심이 없으며, 제대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그 외의 기술을 습득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고, 어디를 가나 좋은 스승들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미숙한 아이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술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대로 배우려면 평생이 걸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배우는 데도 평생이 걸린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찮게 여기지 마라: 누군가 시간을 좀 내달라고 요청하고, 이에 순순히 응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굳이 시간을 할애해서 만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시간 자체에 대해서는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들 남의 시간을 구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도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 자체에 형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간을 별 가치 없고 아무 곳에나 써도 되는 것처럼 하찮게 여긴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시간을 아껴라: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하루하루 세어볼 수 있듯이 앞으로 남은 세월을 세어볼 수 있다면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 없는 사람은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남은 인생을 알뜰히 보내려고 할 것이다. 제아무리 소소한 것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면 알뜰히 사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언제 끝이 보일지 모르는 인생을 사는 우리들은 더더욱 시간을 신중하게 사용해야만 한다.
내 인생에서 오롯이 내 것인 것을 살펴보자
자신의 인생과 오롯이 내 것만을 보라: 다른 일 때문에 분주한 사람들은 모두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련한 자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 남의 수면 시간에 맞추어 잠을 자고, 다른 사람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걷고, 가장 자유로워야 할 사랑과 증오에서도 남의 말에 따라야 하는 자들이다. 만약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 알고 싶다면, 내 인생에서 오롯이 내 것인 부분이 얼마나 적은지 살펴보면 될 일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노력이 평온함을 만든다: 반대로 불운한 운명 때문에 애매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최대한 오만을 억누르고 본래 자신이 가진 운에 따라 평균을 지키려고 해야 더 안전해질 것이다. 물론 추락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없어서 억지로 높은 자리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자들은 어쩔 수 없이 남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높은 자리에 못 박혀 있다는 점을 고백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을 느낀다. 우리는 정의와 온화함, 그리고 친절함, 부드러움과 자애로운 선의의 손을 빌려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불안함을 누르고 더 평온한 마음으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운명과 말다툼하지 말고 내려놓자
제대로 죽는 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뭐 그리 힘든가? 제대로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살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 사는 문제에 큰 가치를 두기보다는 생사를 덧없는 것이라 여겨야 한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전투에 나선 검투사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적의를 느낀다. 반대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무한한 호의를 보인다. 우리도 그와 똑같은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때로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불운에 내맡기지 마라: 한 나라의 왕으로 군림했다고? 생전에 자신의 몸을 불태울 화장용 장작더미가 활활 타올랐다가 꺼지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왕국과 본인의 죽음보다 더욱 오랜 세월을 살았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를 찾아가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자신의 왕국을 두려움에 떨게 한 지 일 년 만에 주검으로 전시되었던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를 찾아가보라고도 하지 않겠다.
이렇듯 운명의 여신이 언제 울고 웃을지 모르는 인생을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운에 내맡기는 꼴이다. 그 강력한 불운의 힘을 꺾으려면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세네카의 행복론
무작정 남이 하는 대로 따라 살지 말라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정작 무엇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빛을 찾아 더듬거리며 나아갈 뿐이다. 행복한 삶을 성취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행복을 찾기 위한 의지가 강할수록 오히려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쉽다. 일단 반대쪽 길로 들어서면 목표에서 점점 멀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먼저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다음에는 목표를 향해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일단 올바른 길에 들어선다면 하루하루 어느 정도 왔는지 가늠할 수 있으며, 자연스러운 욕구를 따라서 그 목표까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스토아학파에서 강조하듯, 나 역시 자연이라는 안내자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는 쪽이다. 지혜란 자연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연의 법칙과 자연이 보여주는 예를 따라서 자신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자연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다.
행복한 삶을 이루려면 첫 번째,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꾸준히 분별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두 번째로는 용감하고 활기가 넘치며 거기에 고귀한 인내와 어떤 상황이 와도 적응하려는 태도, 신체와 여타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되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삶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것들에 집중하되 과도한 평가를 자제하고, 행운의 여신이 주는 선물을 감사히 받되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쾌락은 나약하고 쉽게 쓰러진다
미래에 다가올 쾌락에 혹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영혼도 나름대로 쾌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영혼도 나름대로 쾌락을 누리고 사치와 쾌락을 자기 기준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갖가지 감각을 기쁘게 해주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쾌락을 반추하고 과거의 경험을 뿌듯하게 돌이켜볼 수도 있다. 혹은 앞으로 다가올 짜릿한 쾌락을 기대하면서 현재를 사는 동안 여러 가지 희망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럴수록 영혼은 더욱 비참해지기 마련이다. 좋은 것을 두고 굳이 나쁜 것을 선택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다가올 쾌락에 정신이 팔려 현재의 삶에서 최상의 선택을 하지 못하는 자는 정상이 아니며,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자는 절대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쉽게 소멸하는 쾌락에는 본질이 존재할 수 없다: 최고의 선은 사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고, 끝이 없어 과도함과 후회를 견뎌낼 필요가 없다. 올바르게 서 있는 영혼은 정해진 경로를 이탈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역겨움을 느끼거나 쉽사리 뒤바뀌지 않고 그 자체로서 완벽하다. 하지만 쾌락은 극도의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 소멸되어버리고 만다. 쾌락은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아 재빠르게 공간을 가득 채웠다가도 금세 지치고 힘을 잃기 마련이다. 쉽게 움직이는 것들은 신뢰하기 힘든 법이다. 재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극도의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 소멸하는 것에는 본질이 존재할 수 없다. 멈추어 서야 할 곳에서 어딘가로 나아가고, 시작하는 순간 끝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쾌락이 아닌 미덕을 맨 앞자리에 두자
미덕이 모두를 이끌 수 있도록 하라: 이제부터 미덕이 모두를 이끌 수 있도록 하라. 그러면 내딛는 모든 발걸음이 안전해질 것이다. 과도한 쾌락은 해로울 수 있지만 미덕 자체에 절제가 깃들어 있으니 조금 과하더라도 해로움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혹여 자기 몸이 커질까 두려워하는 것은 진정한 선이 아니다. 이성적인 본성을 타고난 존재에게 이성보다 더욱 값진 안내자가 있을까?
만약 이러한 결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고 이성과 더불어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싶지 않다면, 미덕이 길을 이끌고 쾌락으로 하여금 그림자처럼 주위를 맴돌며 함께 걸어가는 방법을 선택하라. 가장 숭고한 미덕에게 쾌락의 하녀 노릇이나 하도록 만드는 것은 숭고함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미천한 인간이나 할 법한 짓이다.
미덕이 맨 앞자리에서 기준점을 잡도록 하라: 미덕이 맨 앞자리에서 기준점을 잡을 수 있도록 하라. 그렇다고 쾌락을 포기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미덕이 주인이 되어 쾌락을 조절하도록 만드는 것일 뿐이다. 쾌락은 우리에게 간청할 수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반대로 쾌락에게 맨 앞자리를 내어준 자는 두 가지 모두를 잃게 될 것이다. 먼저 미덕을 잃게 될 것이고, 쾌락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쾌락에 종속되고 말 것이다. 그러다 쾌락이 지나치면 숨이 막힐 것이고, 쾌락이 부족하면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쾌락에게 버림받으면 비참한 꼴이 되고, 쾌락이 넘쳐나면 더더욱 비참한 꼴로 전락하고 만다. 파도에 휩쓸리거나 해안에 휩쓸리기도 하고, 성난 파도에 휘말려가는 선원의 처지로 몰락하고 마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나의 악덕을 곱씹다
현인들을 비난하는 사악한 자들의 악행: 현인들의 삶이나 누군가의 죽음은 악의에 찬 무리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마련이다. 그뿐인가. 탁월한 업적을 세워 위대한 명성을 얻은 자들을 두고 이방인을 마주한 개처럼 짖어대기 바쁘다. 타인의 미덕은 악의에 가득 찬 자들이 저지르는 온갖 사악한 행동에 대한 비난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나쁘게 끌어내려야만 직성이 풀린다. 질투에 눈이 멀어서 고귀한 것들과 자신의 오명을 비교해보지만, 스스로에게 얼마나 큰 해악이 될지는 미처 알지 못한다.
만약 미덕을 찬양하는 자들이 그토록 탐욕스럽고 욕심이 많으며 야망에 눈이 멀었다면 미덕이라는 이름 자체도 싫어하는 자들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들은 말만 번드르르할 뿐, 그 말을 제대로 지키며 사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한다. 수없이 많은 풍랑을 견디고 살아남은 위대한 자들을 용감하고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현인들은 십자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사악한 자들은 자기 손에 못을 박고 있는 꼴이다. 현인들은 처형장으로 끌려가서 십자가 하나에 못 박히고 말지만, 스스로를 벌주는 사람들은 그들이 쫓는 쾌락만큼 많은 십자가에 박혀 산산이 찢겨나간다. 게다가 남들을 헐뜯는 걸 좋아해서 타인에게 모욕을 주려고 할 때는 재치가 넘친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주변에 몰려든 자들에게 침만 뱉지 않아도 언젠가 그 악행을 멈출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심정이다.
세상의 이목이 아닌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 그들이 세운 이상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내가 가진 재산이 어느 정도이건, 지나치게 인색하게 지키려고 들지도 않을 것이고, 정신없이 탕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저 현명함의 선물을 받은 거라 생각할 것이다. 또한 숫자나 무게가 아니라 선행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느냐에 따라 베풀 것이며, 가치 있는 사람이 받은 것을 두고 지나치다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남들의 이목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오직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비록 내 행동을 보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해도 로마의 국민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는 마음으로 행동할 것이다.”
부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자
굳이 부를 거부하지 않고도 미덕을 실행할 수 있다: 마르쿠스 카토의 경우에는 쿠리우스와 코룽카니우스*, 그리고 몇 푼 안 되는 은화까지 감시관이 직접 처벌해야 하는 범죄로 여기던 시대를 찬양했지만, 본인은 400만 세스테르티우스나 되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크라수스보다는 적은 금액이지만 감시관 카토보다는 훨씬 많은 양이었다. 굳이 비교한다면, 재산 부분에서는 크라수스보다 적지만 증조부보다는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었고,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 쿠리우스와 코룽카니우스는 로마의 집정관이자 로마적 소박함과 엄격함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현인들도 스스로 행운의 여신이 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지 않는다. 물론 재산에 연연하지 않지만 이를 소유하는 데 거부감이 없다. 그저 마음으로 소유하기보다는 집안에 두고 굳이 재산을 거부하지 않고 잘 간직해두었다가, 스스로 미덕을 실행함에 있어서 이를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