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장재형 지음 | 미디어숲
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장재형 지음
미디어숲 / 2023년 4월 / 256쪽 / 17,800원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
자아: 나만의 정원을 만들고 가꾸어라 - 헤르만 헤세 『데미안』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헤르만 헤세는 그의 대표작 『데미안』 서문에서 우리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노력 그 자체라는 것이다. 즉, 『데미안』은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자기의 온전한 모습, 다시 말해 본모습을 찾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돈, 건강, 가족, 사랑, 자유 그리고 삶 자체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살면서 가장 힘겨운 상황에 부딪힐 때, 자신의 내면으로 뛰어들어야 강력한 내면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내 곁에서 내 삶을 안정적으로 받쳐주던 것들이 흔들릴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성장한다.
한 해가 지나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돌아오면, 갖가지 화려한 꽃과 식물들이 피어나는 나만의 정원을 가꾸어 보자. 그곳에서 슬픔을 위안 받을 수 있고, 힘든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은신처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안에 함께 살고 있으며, 그들은 나를 지탱해 주는 믿을 만한 존재이다.
거짓된 자기 자신을 극복하라: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철학자 니체의 유명한 아포리즘이다. 하지만 영원성을 상징하는 신이 죽었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렇게 충격적이지만은 않다. 영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신’이 아니라 ‘물질’이기 때문이다.
사실 목표도 없이 방황하던 시절에는 막연히 돈 좀 벌고 성공 좀 하면 삶이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이뤘고 돈도 벌었지만, 누군가 왜 사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하기 힘들다. 또한 젊은 시절 내게 주어진 행운과 성공의 기회를 놓쳐버린 후 끊임없이 추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돈으로 다 되는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우리의 삶은 왠지 공허하다. 빠르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 속에서 자신의 삶과 야망, 그리고 영혼조차도 송두리째 타들어 가고, 남은 것은 타다 남은 슬픔과 고뇌의 재뿐이다. 가끔은 자신의 꿈을 잃어버려서, 꿈 자체가 없어서 삶이 허무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무언가 이루려고 꿈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이 시대의 허무주의를 예견했던 니체는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Ubermensch)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다. 너희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뜻이 되어야 한다고!”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하면서 ‘위버멘쉬’, 즉,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신이 죽은 세상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인간상이다. 니체는 극복하려는 의지에 따라 인간을 초인과 ‘인간말종’ 두 부류로 나눈다. 즉, 초인은 ‘힘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자기 극복을 위해 기존의 모든 관습과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을 갖게 된 존재이다. 반면에 인간말종은 벼룩과 같아서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는 경멸스러운 존재인 최후의 인간을 말한다. 따라서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진정한 의미의 자기 자신이 되려면 거짓된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약점이나 자신이 겪은 고통과 시련까지도 자기발전의 계기로 승화시킬 줄 아는 초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인이 되는 것이 바로 헤세가 말한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의 온전한 모습에 이르는 길을 초인을 닮아가는 과정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데미안은 니체가 말한 자기 자신을 극복한 본연의 모습을 한 자기를 의미하는 ‘초인’이 아닐까?
내면의 성장을 위한 여정: 『데미안』은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열 살 때부터 스무 살 정도가 될 때까지 대략 10여 년간 겪었던 내적인 변화와 성장을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싱클레어는 작은 도시에서 라틴어 학교에 다닌다. 그는 이 세상이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밝은 세계에는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고해, 용서와 선한 원칙들, 사랑과 존경, 성경 말씀과 지혜가 있다. 반면에 어두운 세계에는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을 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다.
싱클레어는 공립학교 학생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어느 날 프란츠 크로머와도 어울리게 된다. 싱클레어는 그들에게 자랑삼아 자신이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다는 거짓말을 하고 맹세까지 한다. 크로머는 과수원 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며 돈을 가져오라고 한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저금통을 깨 그에게 가져다준다. 이제 싱클레어는 새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죽음과 같은 쓴맛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싱클레어는 전학생 막스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로머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데미안은 크로머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악하고 나쁜 세계로 이끄는 또 하나의 유혹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싱클레어에게 우리가 진실이고 옳다고 배우는 대부분에 대해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구약 성경에 나오는 카인 이야기에서 아벨보다 아벨을 죽인 카인이 용기와 나름의 개성이 있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또한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 도둑 중에서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 더 개성이 있고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곤 우리는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 예배도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싱클레어는 악당 크로머와 데미안을 통해 처음으로 밝은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 바깥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이제 싱클레어는 어린애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와의 사이에서 삶의 모든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즉, 싱클레어는 내면의 성장을 위한 여정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낙타, 사자, 아이의 비유를 들어 자기 자신을 찾아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극복한 초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변화의 과정은 ‘낙타’의 단계이다. 무거운 짐을 버티는 삶의 태도가 바로 낙타 정신이다. 낙타가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기다리듯이 우리는 우리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그 무거운 짐은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이 요구하는 진리, 도덕, 관습과 규율 등을 말한다. 즉,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짐만 지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지 않는 낙타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인간말종에 대한 메타포인 것이다.
두 번째 변화의 과정은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자’의 단계이다. 하지만 니체는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할 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즉, 기존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더욱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것이다.
마지막 변화의 과정은 ‘아이’의 단계이다. 여기서 아이의 정신이란 어린아이가 춤을 추듯, 놀이에 흠뻑 빠지듯, 자신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즉, 아이의 정신은 우리의 삶이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아이처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창조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신의 세 가지 변화의 과정이 바로 본래 자신의 모습에 이르는 길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깨트리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다: 이제 싱클레어는 니체가 말한 낙타, 사자, 아이의 변신 과정을 통해 마치 새가 알에서 깨어나듯이 내면이 성장하는 과정을 밟아야만 한다. 싱클레어는 어두운 세계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기도 하고,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를 알게 된 후 다시 고귀한 삶을 살기도 한다. 또한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라는 삶의 인도자를 만나기도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어느 날 싱클레어는 커다란 알에서 나오려고 애쓰는 새를 그려서 데미안에게 보냈다. 데미안은 답장으로 싱클레어에게 위와 같은 내용이 적힌 쪽지를 보냈다. 여기서 새는 싱클레어를 의미하고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라는 껍질을 깨뜨려야 한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신을 속박하는 기존의 모든 것을 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알에서 깨어 진정한 자신의길, 꿈으로 가는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다. 자기실현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인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다.
지친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곳, 그곳에서 편안하게, 내 마음대로 그리고 아름답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무한 우리의 인생은 기쁜 일보다는 여러 가지 힘든 일, 슬픈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도 가끔 간절히 원했던 꿈이 실현되어 잠시 행복감에 젖기도 한다. 비록 인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이룬 그 행복이 결코, 오래가지 않을지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 행복은 작은 기쁨이 되어 아름답고 은은한 향기를 지금도 품어 내기 때문이다.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은 지친 영혼이 쉴 수 있는 꿈속에서도 그토록 그리워하던 여성이었다. 에바 부인을 만났을 때 싱클레어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슬픔과 고뇌로 가득해 죽고 싶었던 지난 10여 년간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울음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에게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애쓰는 만큼 그 길은 무척 어렵지만, 아름답고 더 쉬운 길도 있다.”고 말한다. 즉, 자신의 꿈을 찾아내면 그 길은 쉬워진다는 것이다. 또한 운명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운명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내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니체가 스스로 자신의 험난한 운명을 사랑했듯이, 우리도 아무리 삶이 힘들지라도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때, 운명도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전쟁이 터지고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각자 전장으로 떠난다. 전장에서 다친 싱클레어는 후송된 병원에서 데미안을 만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이제 자기를 불러도 예전처럼 달려오지 못한다며, 그럴 때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데미안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다음 날 아침 싱클레어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데미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데미안은 싱클레어와 이별했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내면 속으로 내려가는 열쇠를 찾은 것이다. 이따금 그 열쇠로 내면의 문을 열고 완전히 자신 속으로 들어가, 어두운 거울 속으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싱클레어는 친구이자 인도자인 데미안과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리하여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모두 이해하고 온전한 자신의 모습인 초인이 되는 길목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이같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내 안에 또 다른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죽는 날까지 성장을 멈춰서는 안 된다. 니체는 우리에게 “네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을 다시 한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반복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변에 따라 온전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느냐 못하느냐가 달려 있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 사상이란 현재의 삶이 다시 한번, 아니 영원히 무한 반복된다 해도 지금처럼 살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당신이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어떠한 대답을 할 것인가?
우리는 사랑으로 산다
타자: 사랑은 꽃과 흙의 관계?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사랑을 법칙으로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 있을까? 우연히 만나 시작한 사랑이 필연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의 완성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 왜 우리는 힘든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하게 되는 것일까? 사랑이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일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장미꽃 이야기는 사랑의 과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소행성 B612에 혼자 살고 있는 어린 왕자는 어느 날,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와 싹을 틔운 장미꽃을 만난다. 장미꽃은 어린 왕자에게 자기 생각 좀 해 달라며 아침 식사를 챙겨 달라, 바람막이를 씌워 달라는 등 요구를 한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까다롭고 허영심이 많으며 자존심이 강한 장미꽃에 실망하여 그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왜 어린 왕자는 장미꽃의 대수롭지 않은 말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상처를 받아 불행에 빠지고 만 것일까? 둘의 관계에서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했기 때문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 매몰차게 극복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한순간의 황홀한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랑은 어떠한가. 우리가 만든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서 사랑을 중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결혼 이후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안전과 안락함 속에 갇혀 처음 만났을 때의 떨림은 사라지고 권태로움에 빠진다.
지속해서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 결국 어린 왕자는 떠나기로 한다. 어린 왕자가 꽃에게 “잘 있어.”라고 말하자, 꽃은 자신이 어리석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말한다. 장미꽃은 어린 왕자에게 처음으로 “너를 사랑해.”라고 고백한다.
“그래, 난 너를 사랑해.” 꽃이 그에게 말했다. “넌 그걸 전혀 몰랐지. 내 잘못이었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너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었어. 부디 행복해……. 유리 덮개는 내버려 둬. 그런 건 이제 필요 없어.”알랭 바디우는 단순한 하나의 우연한 만남이 바로 ‘선언’을 통해서 사랑의 진리로 구축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누군가와의 우연한 만남이 결국 하나의 운명이라는 외양을 띠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선언’, 예를 들면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랑의 선언은 우연에서 운명으로 이르는 이행의 과정이고, 그 이후 그 사랑은 어마어마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게 된다고 바디우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