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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지음 |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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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지음
부키 / 2022년 12월 / 728쪽 / 33,000원
머리말 - 진화의 청사진은 어떤 인간을 만드는가
그리스의 추억 - 광장, 군중, 그리고 어머니1974년 7월, 아이였던 나는 그리스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그리스 군사 독재 정권은 예기치 않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어느 날 망명 중이던 전 총리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아테네 신타그마광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퍼졌고, 광장으로 이어지는 모든 길은 수없이 많은 인파로 꽉꽉 메워졌다. 그날 밤 어머니 엘리니 여사도 나와 동생을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몇 시간 전부터 군사 정권은 확성기를 장착한 트럭 수십 대로 병력을 실어 날라 거리 곳곳에 배치했다. 확성기에서 군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별일 아닙니다.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어머니는 경고를 무시했다. 우리는 신타그마광장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까지 갔다. 어머니는 우리를 돌담 위로 들어 올렸다. 동생과 나는 좁은 담벼락 위에 올라 쇠 울타리에 등을 기댄 채 섰고, 어머니는 우리 밑에서 꽉꽉 들어찬 군중 사이에 서 있었다. 한밤중에 카라만리스가 도착하자 군중 사이에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독재 정권과 외국(사회주의 정권 수립을 막기 위해 군사 정권을 지원한 미국)의 간섭에 억눌려 있던 울분에 찬 좌절감을 표출하면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고문자들을 타도하자!” “미국인들을 몰아내자!” 참고로 성인이 된 뒤로 줄곧 사회 현상을 연구한 사람치고는 좀 별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지금껏 나는 결코 군중을 좋아한 적이 없다. 울타리에 찰싹 달라붙은 채 흥분을 느꼈지만, 주로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군중의 함성은 갈수록 커져갔고 분노는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면서 사람들이 왜 이토록 광분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자부심과 경계심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품고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늘 온화했던 어머니도 분위기에 점점 휩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리스인임을 자랑스러워했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환영하고 있었다. 또 우리 교육에 힘쓰고 있던 어머니가 이 역사적 사건에 우리가 함께하면서 뭔가 배우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점점 흥분하는 모습을 나는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우리를 담벼락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잊어버리지 않을지, 아니면 이동하는 군중에 휩쓸려 서로 떨어지지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반미 구호가 점점 커져갈 때, 갑자기 어머니가 나와 동생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여기 미국인들이 있어요!”
군중의 선한 힘과 무리 지을 권리대체 어머니는 무엇에 사로잡혔기에 그랬던 걸까? 그리스 신화에 푹 빠진 채 자란 나는 그 순간 자기 아이들을 죽이는 마녀 메데이아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던 듯하다. 지금도 나는 그때 어머니가 왜 그렇게 소리쳤는지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당신이 낳은 아이들뿐 아니라 인종 배경이 서로 다른 아이들까지 입양해 키운 무척 사려 깊고 애정 넘치는 분이었다. 그런데 폭발 직전의 군중 한가운데서 그토록 무모하게 사랑하는 아들들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이목을 끈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런 제스처가 경솔한 우중의 열기를 식힐 수 있다고 믿었던 걸까? 이제 나는 어머니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없다. 대의에 헌신하는 삶을 살던 어머니는 오랜 지병 끝에 내가 25세일 때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뒤로 여러 해가 지나면서 나는 어머니를 부추겼을 법한 원초적인 힘들 중 일부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내가 펼칠 논증의 핵심이 이 힘들인데, 보통 이 힘들은 우리 사회의 선(good)을 위해 일한다.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은 우리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집단에 합류하는 능력과 욕망을 갖추어주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의 개체성을 포기하고 집단에 맞추어야 한다는 느낌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서 자신의 개인 이익에 반하거나 자신에게 해로운 일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의 구성원에게 관대할 수 있는 우리 능력은 아주 심오한 뭔가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즉 우리는 이 능력 덕분에 우리 모두가 같은 집단의 일원임을 알아볼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 모두가 인간임을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작은 집단의 부족주의(tribalism)를 떨쳐내고, 큰 집단을 위해 친절을 베풀며 이바지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공통된 인류에게 헌신한 어머니가 어떤 가치를 추구했는지 이제 나는 안다. 그렇기에 나는 어머니의 외침을 이런 식으로 보는 쪽을 택한다. 바로 어머니는 관용을 호소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모든 미국인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들처럼 그냥 어린아이도 있다고 말이다.
스코틀랜드 언론인 찰스 맥케이는 1841년 출간한 고전 『대중의 미망과 광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미쳐 돌아가다가 한 사람씩 천천히 제정신으로 돌아올 뿐이다.” 군중 속에서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행동하곤 한다. 욕설을 내뱉고, 재물을 파괴하고, 벽돌을 던지고, 다른 사람을 위협한다. 이는 어느 정도는 심리학자들이 “몰개성화(deindividuation)”라고 부르는 과정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 자신을 집단과 더 강하게 동일시함에 따라 사람들은 자의식과 개별 행위자라는 감각을 잃기 시작하며, 그 결과 홀로 행동한다면 감히 생각조차 못 할 반사회 행동을 한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도덕 기준을 내버리고, 상호 이해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자세의 전형인 “우리 대 그들(us-versus-them)”이란 태도를 취하는 우중을 형성할 수 있다.
군중을 접한 나의 개인 경험은 이처럼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러나 군중이 선한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비폭력 군중이 독재자와 권위주의 정부를 위협하거나 무너뜨릴 수도 있다. 1974년 그리스에서, 1989년 중국에서(톈안먼 사건), 2010년 튀니지에서(아랍의 봄), 2016년 짐바브웨에서(무가베 반대 시위) 그랬다. 특히 군중은 뚜렷한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출현할 때 권력자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이 탓에 최근 들어 여러 정부는 사람들이 더 쉽게 조직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터넷 접근을 엄격하게 통제하려고 시도해왔다. 좋든 나쁘든 간에 군중 형성은 우리 종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기에 정치적 기본권으로 비칠 정도다. 이 권리는 미국의 1차 수정 헌법에 포함되었는데,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불만 사항의 구제를 정부에 청원할 권리”를 법이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집회의 권리는 방글라데시에서부터 캐나다, 헝가리, 인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여러 국가의 헌법에서 비슷하게 보장된다. 공감 능력과 더불어 집단 형성, 의도적인 친구와 동료 선택 성향은 우리 종이 물려받은 보편적 유산의 일부다.
죽음과 전쟁 앞에서 깨닫는 공통된 인간성이 글을 쓰는 현재 미국은 둘로 쪼개진 듯하다. 좌와 우, 도시와 시골, 종교와 무종교, 내부자와 외부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다. 정치 양극화와 경제 불평등이 한 세기를 이어지다가 오늘날 정점에 달해 있음을 여러 분석 결과가 보여준다. 나는 이 책에서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하나로 묶는 것이 더 많으면, 사회는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나는 우리 사이에 무엇이 다른가보다는 무엇이 같은가에 더 관심이 있다. 사람들은 인생 경험, 사는 곳, 겉모습까지 다르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상당히 많다.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공감의 희망을 버리고 최악의 소외에 굴복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공통된 인간성을 지닌다는 이 근본 주장은 경험적 토대만이 아니라 심오한 철학적 근거까지 지닌다.
페루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자유의 문화>라는 글에서 같은 지역에 살면서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종교를 믿는 이들은 분명히 공통점이 많다면서도, 각 개인이 오로지 이런 집단 형질(trait)들만으로 규정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람을 집단의 일원으로만 보는 것은 “본질적으로 환원론이자 비인간화이며, 유전이나 지리나 사회적 압력이 부과하지 않은 모든 것, 인간에게 있는 고유하면서 창의적인 모든 것의 집단주의적이면서 이념적인 추상화”라고 했다. 그는 진정한 개인 정체성은 “이런 영향들에 저항하고 창작이라는 자유 행위를 통해 반격하는 인간 능력에서 나온다”라고 주장한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행사하고 개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부족주의를 없애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우리는 보편적 유산이라는 차원으로 시야를 넓혀 부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연선택으로 빚어진 공통된 유전 형질을 지닌다. 함께 살아가는 법과 관련된 형질이다. 이 유전 형질은 차이를 특권시하는 비인간적인 관점을 버릴 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외국 문화를 접하는 경험을 할 때 한편으로는 긴장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처음에는 의상, 냄새, 외모, 풍습, 규정, 규범, 법의 차이에 몹시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이윽고 우리가 여러 가지 근본적인 면에서 동료 인간들과 비슷하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뀐다. 모든 인간은 세상에서 의미를 찾고,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리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을 서로에게 가르치고, 집단을 이루어 협력한다. 이런 공통된 인간성을 지녔음을 인정한다면 우리 모두 더 바람직하고 더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역설적이게도 집단 간 적개심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는 전쟁 때 많은 이들이 이 깨달음을 얻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101공수사단 소속 이지 중대가 겪은 실화를 토대로 한 2001년 TV 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이 점을 가슴 찡하게 그려낸다. 드라마에 딸린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실제 모델 군인 중 한 사람인 대럴 ‘시프티’ 파워스(Darrell “Shifty” Powers)는 자신이 지켜본 한 독일 군인에 관한 견해를 이렇게 피력했다.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을지 모릅니다. 그는 낚시를 좋아하거나 사냥을 좋아했을 수 있죠. 물론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했고, 나도 내가 맡은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상황이었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친구가 아니라 “좋은 친구”였다.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좋은 사회를 위한 청사진이 범문화적 유사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전쟁까지 할 정도로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이토록 비슷할 수 있는 걸까? 근본 이유는 우리 각자 안에 좋은 사회를 만드는 진화의 “청사진(blueprint)”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우리 몸속에서 놀라운 일을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유전자가 우리 몸 바깥에서 하는 일이다. 유전자는 우리 몸의 구조와 기능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구조와 기능, 따라서 우리 행동의 구조와 기능에도 영향을 미칠뿐더러,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구조와 기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알아차리는 점이 바로 이 유전자의 힘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공통으로 지닌 인간성의 원천이다. 자연선택은 내가 “사회성 모둠(social suite)”이라 부르는 특성들의 진화를 이끌면서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 삶을 빚어내 왔다. 사랑, 우정, 협력, 학습 능력, 더 나아가 다른 개인들의 정체성(개성)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이 “사회성 모둠”에서 나온다. 온갖 현대식 장치와 인공물(도구, 농업, 도시, 국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사회적 본능을 드러내는 타고난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 본능은 실질적이며, 더 나아가 도덕적으로 주로 좋은 쪽이다. 개미가 어느 날 갑자기 벌집을 만들 수 없듯이, 인간은 이런 긍정적인 충동과 일치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나는 우리가 더 잔혹한 성향을 나타내게 되는 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이런 선한 성향을 나타내게 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남을 도울 때 우리는 보람을 느낀다. 우리의 선한 행위는 18세기 계몽주의가 꽃피운 가치의 산물이 아니다. 더 깊은 심연에서, 선사시대에서 기원한다. 한편 “사회성 모둠”을 이루는 오래된 성향들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께 작동한다. 그럼으로써 공동체를 결속하고, 공동체의 경계를 정하고, 공동체 구성원을 식별하고, 증오와 폭력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개인과 집단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한다. 내가 볼 때 너무 오랫동안 과학계는 우리 생물학 유산의 어두운 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왔다. 부족주의, 폭력성, 이기심, 잔인함의 능력에 말이다. 반면에 밝은 면은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이제 나는 이 밝은 면이 왜, 어떻게 우리의 본성으로 진화해왔는지 밝히고자 한다.
인간, 사회, 공동체
우리 안에 새겨진 8가지 사회성 형질
언덕이 아니라 산을 보자: 우리는 인간 사회가 어떤 공통점을 지녔는지 놓치기 쉽다. 지구 전체를 살펴볼 때 기술, 예술, 신앙, 생활방식에서 놀랍고 압도적으로 다양한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간 차이점에 초점을 맞추면 더 깊은 현실이 흐릿해진다. 유사점이 차이점보다 더 광대하고 더 심오하다는 사실 말이다. 3000미터 위에 서서 그곳에 솟아 있는 두 언덕을 조사한다고 해보자. 당신이 서 있는 곳에서 한쪽 언덕은 높이가 100미터, 다른 쪽 언덕은 300미터로 보인다. 이 차이는 커 보일 수 있으며, 당신은 침식 등 이 높이 차이를 설명할 만한 국지적 힘을 찾는 일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취하면 다른 측면을 연구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실제로는 높이가 3100미터와 3300미터인 비슷한 이 두 산을 만든 더 중요한 지질학적 힘을 못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 사회를 논할 때 사람들은 줄곧 해발 3000미터 고원 위에 서 있음으로써 사회들 간 차이점이 압도적으로 더 큰 유사점을 가리도록 방치해 왔다. 이 비유를 더 확장해 농업과 광업 같은 특정한 인간 활동으로 이 경관이 어떻게 바뀌는지 생각해보자. 이런 인간 활동은 언덕의 모습을 세부 차원에서 바꿀지 모르지만, 산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산 자체는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더 심오한 힘에서 기원한다. 인류 문화 역시 이와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인간의 사회 경험 중 특정한 측면들은 바뀌지만 암반처럼 단단한 다른 많은 특징들은 온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더 원대한 관점을 취하면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주비행사는 인간의 차이점들이 실제로 얼마나 하찮은지 자주 깨닫는다. 우주비행사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는 이렇게 표현했다. “아메리카대륙 상공을 지나고 있는데 문득 눈이 보였다. 궤도에서 본 첫눈이었다. 나는 아메리카대륙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다른 곳들과 똑같이 그곳 역시 가을과 겨울이 찾아오고 그 계절을 준비하는 과정도 똑같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자 우리 모두가 지구의 아이들이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왔다.” 그 경험을 하면 가장 확실하게 관점이 바뀐다. 우리를 나누는 것들보다 세상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것들에 훨씬 더 가치를 두게 된다. 이런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을 하면 우리는 대개 자신이 통상의 준거 틀을 초월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심리학자 대커 켈트너와 조너선 하이트는 경외감의 한 가지 핵심 특징이 이기심을 잠재우고 개인을 더 큰 전체의 일부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장류학자 제인 구달에 따르면 침팬지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폭포나 일몰 광경을 꿈꾸듯이 바라보고 외부 사물에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이런 느낌이 진화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우주로 간 몇몇이 이런 관점을 제시하긴 했지만 오랫동안 사람들은 두 진영으로 나뉜 채 격렬한 논쟁을 벌여왔다. 한쪽 진영은 인류를 하나로 묶는 문화적 보편성이 있다고 보는 반면에, 다른 쪽 진영은 사람들의 경험은 너무나 다양하므로 항구적인 형질 같은 것은 실제로는 절대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