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가지 동물로 읽는 세계사
사이먼 반즈 지음 | 현대지성
100가지 동물로 읽는 세계사
사이먼 반즈 지음
현대지성 / 2023년 3월 / 728쪽 / 33,000원
사자 - 용맹한 제왕의 상징이 되다사자는 확실히 인류의 가장 오랜 적이다. 인간은 아프리카 대초원에서 최초로 직립보행을 시작했고 사자와 함께 걸어 다녔다. 사자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인간이 내는 소리를 듣고, 인간의 냄새를 맡고, 인간을 만지고, 인간의 맛을 보았다. 옛날에는 인간이 생태계를 지배하지 못했다. 그저 한낱 먹잇감에 불과했다.
나는 예전에 사자와 맞닥뜨린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잠비아의 루앙과계곡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자고 있는 수사자를 깨우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당장 해야 할 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냈다. 바로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 만일 돌아서서 달렸다면 사자의 반사적인 추적 본능을 깨운 꼴이 되어 아마 대여섯 걸음도 가지 못하고 잡혔을 것이다. 다행히 배가 고프지 않았던 사자는 그저 잠시 놀랐을 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나의 적확한 반응이다. 이 반응은 인간이라는 종이 출현한 먼 옛날부터 나에게까지 대대로 내려온 ‘본능’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될 위험이 사라진 지금도 먹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위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사자가 인간을 잡아먹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식인은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며, 불량하고 타락한 사자만이 인간에게 맛을 들인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편견에 불과하다. 덤불숲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행동은 사자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항상 사자를 어떤 동물보다 추앙했다. 인간이 사자를 추앙한 주된 이유는 사자의 암수가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다 자란 수사자의 외양은 암사자와 확연히 달라 전혀 다른 종처럼 보인다. 수사자는 남성성은 물론이고 왕의 위엄을 연상시킨다. 왕관 같은 갈기 털로 뒤덮인 정글의 왕, 영역 내 모든 존재의 군주. 사자의 이름을 딴 중세 군주로는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작센 공국의 하인리히 사자공,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 플랑드르의 사자 로베르 3세가 있다. 사자는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에 주로 등장한다. 잉글랜드 왕실 문장은 오른쪽 앞다리를 들고 왼쪽을 향해 걷는 자세를 취한 세 마리 사자로,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은 뒷발로 일어선 사자로 표현된다.
사자는 용맹과 남성성, 왕권뿐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의 힘을 대표하는 양날의 상징이 되었다. 인간의 승리는 결국 사자의 완패로 종결되었다. 이는 서커스에서 희화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용맹의 상징이었던 사자는 인간이라는 훨씬 더 용맹한 존재를 만났고, 가장 무시무시했던 자연의 무기는 훨씬 더 강력한 무기를 만났다. 바로 인간의 심보 말이다.
20세기 초 맹수 사냥은 부와 권력을 과시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물론 사자가 궁극의 사냥감이었다. 사자를 죽인 사람들은 매우 용감할뿐더러 인류를 위해 선행을 실천했다는 정서가 팽배해 있었다. 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사자는 기존 서식지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판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1960년대 환경 운동이 추진력을 얻으면서 지구상의 천연자원과 야생 세계가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서서히 인식한 것이다. 이 새로운 물결을 타고 엘사(Elsa)가 등장했다.
엘사는 사자의 인간적인 측면을 보여주었다. 엘사는 케냐에서 조지 애덤슨과 조이 애덤슨 부부가 입양한 새끼 사자다. 각국의 촬영 팀이 인간과 어우러져 살고 있는 사자를 보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케냐로 몰려갔다. 사자가 조이와 함께 누워 있는 낙원의 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엘사는 지구 환경뿐 아니라 동물들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태도 변화에도 제 몫을 해냈다. 이제 엘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의 상징이 되었다. 친절, 관용, 품위, 온화, 존중, 사랑, 평화, 기쁨, 조화, 이해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이들의 사연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엘사가 애덤슨 부부에게 입양된 것은 조지 애덤슨이 엘사의 어미를 총으로 쏘아 죽였기 때문이다. 조지는 훗날 엘사의 새끼 중 한 마리도 쏘아 죽였다. 새끼 사자가 조지의 조수를 죽이고 아이까지 공격했기 때문이다. 조이와 조지 부부는 각자 다른 사건으로 사자에게 살해당했다. 시작은 목가적이었지만 결말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사자 이야기에는 언제나 폭력이 난무하다. 그러나 기록된 전설 속에는 사자와 인간의 행복한 공존이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조지 샬러가 시작한 오랜 동물 행동 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자를 더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샬러는 사자들이 하이에나가 잡은 죽은 고기의 찌꺼기를 먹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사자에 대한 신화가 산산조각 나버린 대표적인 사례다. 사자 무리의 생활을 보면 긍지 같은 것이 있지만 이 역시 수사자의 몫은 아니다. 긍지는 암사자들이 지킨다. 어머니와 딸, 자매 등이 혈연, 훈육, 공유된 경험으로 연결되어 있다. 약간 의인화하자면 이러한 집단의 결속을 ‘애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자는 멸종 위기 등급에서 취약 종(VU)에 속한다. 사자의 개체 수는 1993년부터 2014년까지 약 43퍼센트나 급락했다. 전 세계적으로 사자 수가 감소하는 원인으로는 가축과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무차별 살상, 야생의 먹이 고갈, 야생 서식지 파괴 등이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여러 국립공원에는 사자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다. 이 사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이유도 역시 인간 때문이다. 사자들은 매년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큰 보상이 되고 아프리카 주민에게도 큰 의미가 된다. 짐바브웨의 황게(Hwange) 국립공원 외곽에서 떠돌던 사자가 활과 화살로 무장한 미국인 치과의사에게 죽임을 당하자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항의가 일어났다. 죽은 사자는 세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로써 ‘동물 살해’에 대해 광범위한 관심과 공감을 이끌려면 동물에게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사자는 중요하다. 사자는 국가를 상징하는 표식에서도 포효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자는 남성의 미덕을 상징한다. 사자는 인류의 여명기부터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상상 속에 자주 출몰한다.
고양이 - 인류 문명에 안겨진 최초의 선물최초의 반려동물은 고양이였을까? 일설에 따르면, 인간은 고양이를 일부러 자신의 삶 속에 들여놓았다. 쥐를 잡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인간 문명이 가져온 최초의 기적은 고양이 키우기인 셈이다.
인간이 문명이라는 극적 변화를 일궈내면서 두 가지 결과가 동시에 나타났다. 첫 번째 결과는 저장고를 지어 곡물이 나지 않는 계절을 버티고 이듬해 시기가 좋을 때 심을 종자까지 마련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결과는 설치류의 번식이다. 곡물 저장고를 짓자 쥐가 들끓게 되었고, 결국 곡물 저장고는 쥐를 잡아먹는 포식자들의 온상이 되었다. 포식자 중에는 들고양이도 있었다.
처음에는 고양이를 일부러 들여놓았다기보다 그냥 방치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감하고 호기심이 많은 데다 날듯이 달아나는 자기 능력을 맹신하는 녀석들은 비바람을 피하고 먹이를 쉽게 구하기 위해 인간의 거주지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인간 거주지에서 이들은 환대와 냉대를 모두 받았을 것이다. 고양이가 특별한 비장의 무기를 풀어놓은 것은 바로 이 시점이 아니었을까. 바로 가르랑거리기.
고양이가 기분 좋게 가르랑거리는 이유는 수만 가지다. 그중 하나는 만족감의 표현이다. 대체로 이러한 기능은 어미와 새끼 사이에 결속의 일환으로 생겨난다. 인간이 고양이의 두 귀 사이를 긁으며 어미 고양이가 거친 혀로 쓸어주는 듯한 느낌을 살리면 고양이는 가르랑거린다. 이 소리는 인간에게도 평온한 느낌을 안겨준다. 인간의 거주지에 침입한 고양이가 공짜로 오지는 않은 셈이다.
이집트인은 고양이를 좋아하고 추앙하기까지 했다. 이집트의 여신 바스테트는 원래 암사자 형상으로 묘사되었지만 문명이 발전하면서 고양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바스테트는 가정, 여성, 출산을 상징하는 여신이었고 고양이의 여신이기도 했다. 고양이는 방부 처리된 미라로 만든 다음 인간과 함께 매장했다.
고양이는 문명에 추진력을 부여한 존재까지는 아니어도 문명의 선물 정도는 되었다. 인간은 집을 지어 정착하면서 함께 살 고양이를 들여왔다. 수렵과 채집 생활을 버리고 유목 생활에서 벗어나 농업에 종사하면서 평생 고되게 노동하는 삶에 스스로를 속박했다. 집고양이는 쥐들이 다음 해에 파종할 종자를 먹어 치우는 최악의 사태를 막아주었다. 적당한 때가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노래라도 부르듯 가르랑댔다.
고양이는 인류의 가장 오랜 적인 사자를 연상시킨다. 고양이와 사자는 둘 다 고양잇과에 속한다. 신체 언어도 대부분 동일하다. 둘 다 유연하고 강하고 오래 잔다. 그런데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사자는 가르랑거리지 못한다. 이들은 가르랑거리는 게 아니라 으르렁거린다. 으르렁거림은 목구멍에 위치한 설골(舌骨)에서 나는 소리다. 덕분에 맹수들은 사회를 구성하고 세력권을 만들어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고양이가 일찍부터 인간에게 길들여진 이유 중 하나는 길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사회적 본능이 있으면서도 매우 독립적인 동물이다. 온갖 고양이 이야기에서 최고로 꼽히는, 러디어드 키플링의 『아빠가 읽어주는 신기한 이야기』에 나오는 ‘혼자 걷는 고양이’에서 칭송하는 특징이 이것이다. “나는 혼자 걷는 고양이다. 내게는 어디든 거기서 거기다.” 이 이야기는 고양이의 이중성, 즉 절반은 야생동물이고 절반은 길들여진 동물이라는 상반된 성질 사이의 긴장을 다루고 있다. 고양이는 아기를 즐겁게 하고 집 주변에서 편안함을 주는 존재지만 동시에 언제든 어디론가 빠져나가 자기 욕구에 집중한다.
야생성과 길들여짐의 기묘한 결합은 집고양이가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반려묘를 키울 때 비교적 손을 덜 타는 것도 고양이의 이중성 덕분이다. 먹이와 집만 제공하면 끝이다. 녀석은 야생동물처럼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한다. 그래서 집고양이는 집에서 키우는 개와 아주 다르다. 대부분의 개와 달리 집고양이는 생존 가능한 환경만 갖춰지면 인간의 도움 없이도 완전한 야생동물로 살아갈 수 있다. 집고양이는 기막히게 다양한 형태와 외양과 행동을 보이는 쪽으로 분화하지도 않았다. 대체로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의 집고양이가 길고양이로 살아간다. 길고양이는 매혹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조상종인 들고양이 대부분은 혼자 산다. 먹이 자원이 극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이가 풍부할 경우 길고양이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서식한다. 길고양이 사회는 모계 중심으로 돌아간다. 가모장 고양이들, 즉 ‘여왕’들은 서로의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심지어 출산까지 돕는다.
영국 고양이는 모두 한 해에 6,480만 마리의 새를 잡는다고 추산된다. 야생동물 보전에서 고양이가 논란이 되는 이유다. 불가피하게 고기를 먹어야 하는 육식동물로 세상을 채우는 것은 조류, 작은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 같은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최상의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새를 잡아먹는 고양이를 막자는 캠페인은 동물 보전 단체에 기부금을 내는 사람들을 적으로 돌릴 수 있다. 영국왕립조류보호협회의 주장에 따르면, 고양이는 조류 개체 수에 전혀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만, 고양이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만 87개의 조류종과 20개의 작은 포유류종의 멸종에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있다.
나는 집에 고양이를 들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곳 주변의 야생 습지대 야생동물에게 녀석이 해코지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씩 과거에 키웠던 고양이들이 그리워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특히 뷰티가 그립다. 뷰티는 잠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양이는 보통 하루 24시간 중 12~16시간을 잔다). 그것도 내 서류함에 들어가 잤다. 녀석은 적갈색 둥근 몸을 맞지도 않는 사각 서류함에 구겨 넣는 바람에 많은 일을 못 하게 만들었다. 꼭 봐야 하는 서류를 찾느라 용기를 내 잠을 방해라도 할라치면 뷰티는 늘 사랑스럽게 가르랑거렸다.
소 -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준 음식인류는 ‘소’라는 동물을 선택해 스스로를 인간으로 규정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를 규정한다. 인간은 소고기를 섭취함으로써 황소의 강한 힘을 얻고자 했다. 소는 인류 역사 내내 인간의 삶을 형성해왔고, 인간이 오늘날 살아가는 지구를 관리하는 방식까지 좌지우지한다. 소는 문명 건설의 추진력이었지만 이제 그 문명을 파괴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소를 가리키는 단어는 풍부하다. 이것은 인간이 오랫동안 소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지냈다는 증거다. 인류는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야생 오록스(aurochs)를 소라는 가축으로 바꿨다. 이를 순화 또는 품종 개량이라 한다. 품종 개량이 어찌나 성공했던지 오록스는 주변부로 밀려나 인간 거주지에서 멀어졌고 결국 17세기에 멸종했다.
그러나 인간과 소 사이에는 가축화 이전에도 이미 강력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오록스를 사냥한 후 영양가 높은 음식의 향연이 펼쳐졌다. 소고기는 오래 보관할 수 없어 소를 한번 잡으면 축제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일상과 특별한 날을 분리하고 싶어 전통적으로 특별한 날(기독교 달력의 주일)을 고기로 기념했다. 축제는 인간 문화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며 소는 축제의 탄생 시기부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인간은 어떻게 소를 가축으로 변모시켰을까? 오록스는 무시무시한 짐승이었다. 가설이 분분하지만 가축화가 수렵·채집 생활양식의 자연스러운 연장이라는 주장이 가장 그럴듯하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쉽게 길들일 수 있는 소의 번식이 가능해진다. 인간은 오록스를 길들여 가축화시켰는데, 암소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소가 가축이 된 것은 1만 500년 전 서아시아에 살고 있던 개체 80마리의 무리에서 시작되었다. 소의 다른 종들도 가축이 되었다. 인도아대륙의 들소와 동아시아 늪지 및 강에 서식하는 물소, 티베트의 야크가 가축이 되었다. 하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종은 오록스에서 유래했다.
일단 가축이 된 소는 인간에게 고기와 가죽 이상의 것을 선사했다. 우유뿐 아니라 운송 수단까지 제공한 것이다. 농사도 소 덕분에 발전했다. 1에이커(약 1,200평)의 땅은 소 두 마리가 하루 동안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이다. 하다못해 소똥까지 유용한 비료로 쓰이는데, 말리면 연료로도 쓸 수 있다.
가축인 소의 주된 기능은 인간을 위해 풀을 맛있는 물질로 바꾸는 능력이다. 소의 위는 네 부위로 되어 있어 말과 코끼리처럼 단순한 소화계를 가진 동물보다 훨씬 더 많은 영양분을 풀에서 뽑아낸다. 다른 반추동물처럼 소도 절반 정도 소화시킨 음식을 역류시켜 되풀이해 씹는다. 되새김질 덕분에 먹은 풀의 영양가는 두 배가 된다.
소고기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소에 대한 선망은 전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소고기 생산량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소고기 수요가 늘어났다는 것은 엄청난 면적의 땅이 목축에 할애되고 있다는 뜻이다. 경작 농업에 할애된다면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땅이 목축에 쓰이고 있다. 광대한 숲이 파괴되어 목초지가 되고 있다.
일부 지역, 특히 미국에서는 소고기용 소에게 풀이 아니라 곡물을 먹인다. 소에게 곡물을 먹이는 방법은 상업적 측면에서는 효율적이지만 식량 생산을 위해 토지 사용을 최적화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집약적 농사 방식은 더 집약적인 관리를 요구한다. 이제 소는 들판을 돌아다니는 대신 밀집도가 높은 외양간에서 먹고 마시기만 하다가 일정 시간이 되면 도축된다. 이러한 사육 방식은 끊임없이 윤리 논쟁을 낳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