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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홍성화 지음 | 시여비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홍성화 지음

시여비 / 2023년 4월 / 435쪽 / 23,000원





들어가며 - 일본은 왜 한국 역사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을까?




대학 시절 근대사 관련 수업을 듣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교수님은 칠판에 한일수호조약, 한미수호통상조약 등으로 써내려가면서 강의를 하셨다. 그때 나는 19세기 당시 우리나라의 정식 국호는 조선(朝鮮)이었고 우리가 한(韓)이라는 명칭을 쓴 것은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 때부터였으니, 한일수호조약 등으로 쓴 명칭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근대 일본의 역사를 배우는 와중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기에 ‘정한론(征韓論)’이라는 용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정한론’이라는 표현이 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일본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문은 점차 시간이 지나 고대사를 공부하면서 풀리게 되었다. 정한론의 ‘한’은 일본이 고대사의 인식 속에 갖고 있었던 삼한(三韓)정벌의 ‘한’이었던 것이다. 일본인의 인식 속에는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를 정벌하여 세력을 펼쳤다는 생각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일본이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조선을 정벌할 수 있다는 허상을 키워왔다.

결국 이러한 생각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를 노골화하는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이처럼 일본은 수많은 역사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그들의 인식 속에 항상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여 개입시키려 하였고 그들의 허상을 우리의 역사에 투영시켰다. 이 시점에도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 논쟁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러한 논쟁의 시작점은 고대부터 시작된 양국의 인식의 차이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일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을 잘못 인식, 또는 오해하고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파악해야만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거나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인의 흔적과 한일 관계



칠지도(七支刀)의 진실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
일본 고대의 중심지는 지금 나라현을 중심으로 한 기나이 지방이었다. 한반도와 잦은 교류를 통해 일본이 고대문화를 발전시켰던 곳도 바로 나라현 일대였다. 나라현의 중심도시인 나라시에서 국도 169번 야마노베노미치를 따라 남으로 가다 보면 덴리라는 곳이 나온다. 덴리시 시청으로 발길을 옮기면 멀지 않은 곳에 오래된 옛날 지명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후루정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후루신사라고 부르는 오래된 신사 하나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한일 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칠지도를 보관하고 있다는 이소노카미 신궁이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이 칼에 새겨져 있다는 상감 글자이다. 금으로 상감된 글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대 한일 관계의 흐름이 바뀔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873년에 신궁의 대궁사가 되었던 간 마사토모가 칼의 녹을 없애던 중 칼에 금으로 새겨 있는 글자를 처음 발견했다. 이후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글자에 대한 해독이 이루어졌지만, 녹을 없애면서 일부 상감이 지워졌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글자가 있어 그 해석은 분분했다. 대략 지금까지 한국학계에서 해석되었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태□4년 [5]월 16일 병오(丙午)날 중에 백련강철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 이는 백병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마땅히 후왕(侯王)에게 보내줄 만하다. □□□□가 제작한 것이다. (뒷면) 선세 이래로 이와 같은 칼은 없었다. 백제왕세자 기생성음이 왜왕(倭王)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여야 할 것이다.’

해석에 따라 한국과 일본 간에 각기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데, 우선 서로의 국가주의가 개입되어서인지 칠지도에 대한 하사설과 헌상설이 맞서고 있다. 먼저 제일 앞부분에 나오는 연호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대해 논란이 있다. 글자 해석의 초기에 첫대목을 태시(泰始)로 보느냐, 또는 태화(泰和)로 보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맨 앞 글자가 태(泰)와 비슷한 글자로 보이지만, 그 다음의 글자는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런데 고대 중국에 있어서 태화(泰和)라는 연호는 없고 태화(太和)라는 연호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학자들은 태화를 동진의 태화(太和)라는 연호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난징에서 태원(泰元)과 태원(太元)이라는 두 가지 기년명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하여 동진 시기에 ‘태(泰)’와 ‘태(太)’가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고 태화(泰和) 4년이 동진의 연호를 가리키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칠지도에 새겨진 글자는 상감으로 이루어져 있어 많은 글자들이 약자로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정황상 제작자가 굳이 ‘태(太)’를 번잡한 ‘태(泰)’로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을 가져다주고 있다.

석연치 않은 해석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주장대로 글자에 나타나 있는 시기를 동진의 연호인 태화 4년으로 본다면, 그때는 서기 369년에 해당된다. 이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구(神功) 49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백제와 왜가 한반도의 남부를 점유했다는 연도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특히, 『일본서기』 진구 52년조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의 사신인 구저를 통해 칠지도(七支刀) 1구와 칠자경 1면 및 각 종의 중보(重寶)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백제에서 일본에 헌상한 바로 그 칠지도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있다가 562년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킴으로써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이 사라졌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고대 한일 관계에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는 칠지도의 내용은 『일본서기』 삼한 정벌의 기사와 함께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칠지도는 근초고왕 때 만들어졌는가:
우리 학계에서도 ‘泰□四年’을 동진의 연호인 태화(太和)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여 제작연도를 369년으로 보고 있는 것이 현재까지의 통설이다. 이때는 백제로 치면 근초고왕 때이다.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졌다는 해석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369년에 백제에서 제작된 후, 372년에 백제가 일본에 헌상했다고 하는 일본학계 통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일본 측이 백제가 헌상했다는 칠지도를 백제가 하사했다는 것으로 문구를 바꾸어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칠지도가 왜 일본에 전해졌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칠지도의 제작연도를 여전히 근초고왕 때인 369년으로 보고 있다는 모순된 논리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칠지도의 새로운 판독:
칠지도의 판독에 있어서 큰 전환을 이루게 된 것은 기존에 ‘오월(五月)’로 보던 제작월을 ‘십일월(十一月)’로 보게 되면서부터이다. 실제 칠지도의 글자를 보면 제작월은 전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를 과거부터 ‘오(五)’로 보고 5월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중요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1996년 무라야마 마사오에 의해 간행된 『이소노카미 신궁칠지도명문도록』에는 1977년에 찍은 칠지도 상감 글자의 확대 근접 사진과 아울러 NHK가 촬영한 X-레이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이 X-레이 사진으로 인해 칠지도에 새겨진 글자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자와 획이 일부 남아 있음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칠지도의 진실에 다가가는 데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 들어서는 스즈키 쓰토무 등에 의해 앞서 무라야마의 칠지도 사진과 더불어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된 확대 사진, 가시하라고고학연구소에 보관된 칼라, 흑백 사진과 나라문화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던 X선 사진 등이 확인되어 칠지도의 제작월이 ‘11월’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개진되었다.

더욱이 연호로 보이는 첫 글자를 살펴보면 ‘태(泰)’인지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다음의 글자는 아예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동안 통설의 입장에서 ‘태(泰)’로 보아왔으며 이를 통해 다음의 글자를 ‘화(和)’로 추정하여 중국 동진의 태화(太和) 4년과 일치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찍이 ‘태(泰)’가 아닌 ‘봉(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실제 칠지도의 확대 사진을 검토하면 하부에 2개의 횡획이 평행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이고 그 위로 또 하나의 횡획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기존 통설과 같이 첫 글자를 ‘태(泰)’로 볼 수 없음은 분명하며 ‘봉(奉)’의 이체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칠지도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4~6세기 중국에는 ‘봉(奉)’으로 시작되는 연호가 없다. 따라서 백제의 연호가 사료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칠지도의 연호는 백제의 연호인 것이 확실시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칠지도에 쓰인 월(月)에 대해서는 주조하기 좋은 때라고 여겨지던 5월의 ‘오(五)’자로 추정하였던 것이 대세였다. 하지만, X-레이 사진에서 ‘십(十)’자가 보임으로 인해 이젠 그 해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고 사진을 보면, ‘십(十)’자와 월자의 사이에도 한 글자 정도 들어갈 공간이 보인다. 실제 눈으로 보면 하단부에 ‘일(一)’자는 흐릿하게 보인다. 따라서 바로 이어지는 글자를 통해 ‘십일월(十一月)’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판독하면, 그동안 61자로 알려졌던 칠지도의 상감 글자는 총 62자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그동안 통설과 같이 칠지도의 제작연대를 369년으로 볼 경우 난제가 있었다. 그것은 상감 글자에 나오는 날짜와 일간지(日干支)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칠지도의 제작일에 대해서는 새겨진 글자를 ‘오월십육일병오(五月十六日丙午)’로 판독하여 왔다. 그런데, 문제는 옛 달력을 통해 대조해보면 태화(太和) 4년 369년의 경우 5월 16일이 병오(丙午)의 간지가 아니라 을미(乙未)에 해당된다. 이렇듯 369년 5월 16일이 병오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칠지도 제작연도가 369년이라는 설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369년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칠지도에 등장하는 병오를 날짜와는 상관없는 길상구(吉祥句)로 보면서 기존의 통설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까지 발견된 백제의 금석문 중에 간지가 월일과 불일치하는 사례는 없다. 그렇다면 칠지도에 나오는 월일의 경우 역법상의 일간지와 일치하지 않는 단순한 길상구로 파악하는 것보다는 옛 달력에 근거하여 일간지가 일치하는 연도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5월로 추정되었던 글자가 X-레이 분석에 따라 11월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들 연도를 기준으로 칠지도의 제작연도를 맞춰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11월 16일이 병오의 간지에 해당되는 연도를 찾아보아야 한다. 대략 칠지도의 제작연도로 추정할 수 있는 범위를 4세기 중엽에서 6세기까지로 한정하여 옛 달력인 『이십사삭윤표』를 통해 백제의 왕력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연도가 도출된다. ‘408년 ? 전지왕4년, 439년 ? 비유왕13년, 501년 ? 무령왕1년, 532년 ? 성왕10년’ 그런데, 이들 연대 중에서 단연 부각되는 연도가 있다. 칠지도의 ‘奉□四年’이라는 글자와 비교해보면 11월 16일이 병오일인 ‘전지왕(?支王) 4년(408년)’이 두드러진다. 칠지도에 새겨진 연호와 연대가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칠지도 제작 당시의 한일 관계:
중요한 것은 칠지도가 전지왕 4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면, 408년경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를 통해 칠지도가 만들어진 정황을 여타의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08년이면 광개토왕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 침탈당했던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대항하던 시기이다. 비문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게 58성 700촌을 빼앗긴 백제는 이후 왜와 화통을 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즉, 396년 고구려의 백제 공격 이후에 백제는 태자였던 전지를 일본에 보내 일본과 우호를 맺고 있다. 이후 405년 아신왕이 죽자 백제로 돌아와 왕으로 등극한 인물이 바로 전지왕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408년은 어느 때보다도 백제와 왜가 긴밀하게 교류하던 시기였다. 『삼국사기』 전지왕 5년조(409년)에는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를 보내니 왕이 후한 예로 대접하였다.’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전지왕 4년 408년 11월 16일에 만들어진 칠지도가 이듬해 백제에 온 왜국의 사신을 통해 왜왕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칠지도의 글자를 재해석한 결과 칠지도는 369년이 아니라 408년 백제의 전지왕 4년 11월 16일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칠지도의 글자를 통해 백제가 ‘봉(奉)□’라는 연호를 썼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칠지도에 새겨진 후왕(侯王)은 백제왕에 신속하고 있던 후왕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왜왕에게 후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왜국에 대한 백제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아 ‘마땅히 후왕에게 보내줄 만하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백제 왕세자인 구이신이 진귀하게 태어난 것을 계기로 하여 왜왕에게 하사된 칼로서 ‘후세에 전하여 보인다’에 대응하는 하행문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는 칠지도가 백제왕이 주체가 되어 왜왕에게 하사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칠지도의 경우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함으로써 왜왕은 일본 열도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독자적 지위를 승인받았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투를 통한 국제관계 속에서 왜국을 끌어들여 자국의 권력 범위를 확대하려 했다. 이렇듯 칠지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인해 소위 임나일본부설도 부정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의 고대사 부분을 보면 어김없이 칠지도와 광개토왕비문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사료보다는 우리의 사료가 더 합리적이라는 증거일 터이다. 하지만 그동안 일본에서는 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 해석하면서 일본의 역사를 구성해왔다. 아무튼 칠지도는 408년 백제의 전지왕 4년 11월 16일에 만들어져 백제왕세자 구이신이 진귀하게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왜왕에게 하사된 칼로서 그동안 칠지도를 『일본서기』 진구기를 근거로 하여 369년 백제에서 제작되어 372년에 백제가 일본에 헌상했다는 일본학계의 통설은 타당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인의 인식과 그 궤적



여몽연합군의 일본침공


이키의 가쓰모토:
쓰시마로부터 이키섬으로 건너가는 중이다. 면적 133제곱킬로미터에 인구가 3만인 이키섬은 차로 외곽을 일주하여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크기라고 한다. 쓰시마를 통해 가장 먼저 도착한 고노우라라는 곳은 이키의 서남쪽에 위치한 섬 내에서 가장 번화한 마을이다. 지금은 쓰시마의 이즈하라에서 떠난 선박이 통상 서남쪽의 고노우라에 정박하거나 또는 동남쪽에 있는 아시베라는 도시에 머물고 있다. 아시베라는 곳은 조그마한 항구 도시인데, 부근에서 기원전 2세기~기원후 3세기경에 형성된 대규모의 취락이 발굴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다. 하루노쓰지라고 부르는 유적에서 중국 전한 때의 화폐나 한반도의 토기류 등 대륙과 교류했던 흔적이 발견되어 과거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문화가 쓰시마를 거쳐 규슈의 본토까지 가는 데 이키섬이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아시베를 따라 북상을 하면 이키의 최북단 마을인 가쓰모토라는 곳이 나온다. 조선시대 통신사의 경우도 쓰시마를 출발해서 이키에 가장 먼저 도달했던 곳이 북쪽 해안가에 있는 가쓰모토였다. 원래 가쓰모토항은 포경 항구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멸종해가는 고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포경을 하기 어려워서인지 여기저기서 특산물로 오징어를 홍보하고 있는 모습이 목격된다. 포구의 서쪽에 인가가 밀집한 곳으로 서붓 걸음을 옮기니 뒷골목 한편에 주황색 기와를 얹힌 퇴락한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과거 통신사들이 머무르던 아미타당이라는 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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