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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배우는 경제사

이강희 지음 | 인물과사상사


그림으로 배우는 경제사

이강희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2년 11월 / 303쪽 / 18,500원





1부 유럽 부의 지도를 그려나간 재화



바다의 축복, 소금


소금에서 시작된 로마제국:
신화에 따르면 이탈리아는 서기전 753년에 로물루스에 의해 세워진 로마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지리적, 고고학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한 로마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소금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아펜니노반도(이탈리아반도)는 동쪽으로는 아드리아해, 서쪽에는 코르시카섬이 있는 티레니아해, 남쪽으로는 이오니아해로 둘러싸여 있다. 티레니아해에 면해 있는 토스카나 지역을 중심으로 고대에 에트루리아인들이 나라를 세웠다. 서기전 6세기 말 에트루리아는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지배 세력으로 맹위를 떨쳤으며, 테베레강 하류에 자리 잡고 있던 초기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테베레강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염전이 있었다고 한다. 로마의 경제는 이웃한 에트루리아에서 생산되는 소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갓 태어난 로마는 젊고 활동적이었기에 국가를 운영하는 데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했다. 로마는 소금 산지 확보에 열을 올렸지만 쉽지 않았고 에트루리아로부터 사 올 수 있는 소금의 양도 한정되어 있어 고민이 깊었다. 그때 로마의 눈에 띈 나라가 페니키아였다. 페니키아는 바닷물을 햇빛에 증발시켜 최초의 천일염을 만든 나라였다. 문제는 그 소금이 무척 비싸다는 것이었다. 품질이 좋은 페니키아산 소금은 때로는 금보다 비싸게 거래되었다.

로물루스부터 시작되는 초기 로마의 왕정 시대에는 7명의 왕이 등장하는데 이 중 네 번째 왕인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서기전 640년경 로마 남서쪽에 있는 오스티아 안티카를 점령했다. 바닷가인 이곳을 점령한 이유는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항구를 확보하는 것도 있었지만 소금 생산 시설을 만들기 위한 이유가 컸다. 이후 오스티아 안티카는 로마에서 생산된 소금을 수출하고 지중해 일대에서 수입되는 곡물을 교역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로마가 확보한 소금은 테베레강을 타고 내륙으로 운반되어 여러 지역으로 팔려나갔다. 육상 운반은 위험 부담이 크고 비용도 많이 드는 데 비해 강을 따라 배로 소금을 운반하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로마는 운송비의 감소로 가격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다. 이런 장점을 살린 로마의 소금은 테베레강 유역의 도시와 국가들에 인기가 많았고 그 덕택에 로마는 부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소금길의 탄생:
가격과 품질 면에서 경쟁력을 가졌던 로마의 소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로마는 소금 거래의 중심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소금은 내륙을 넘어 지중해 일대로 퍼져나갔다. 로마는 소금 교역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식량을 확보했다. 그리고 늘어난 인구만큼 식량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소금을 생산하고 교역도 더 활발하게 진행해야 했다.

소금 판매로 짭짤한 이익을 맛본 로마는 아펜니노반도 동쪽 끝 아드리아해와 면해 있던 염전에서 만들어지는 소금까지 확보하기 위해 길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길이 로마 최초의 광역권 길로 알려진 ‘살라리아 길’이다. 이 길이 만들어진 최초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소금 때문이었다. 로마의 지도부는 로마 주변에서 생산되는 소금 외에도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까지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금길로 이어지는 다른 도시나 다른 지역의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모두 사들여 로마를 소금 교역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로마의 위세가 뻗어나갈수록 소금의 수요도 늘어났고 소금으로 벌어들이는 수익 또한 점점 커져만 갔다. 게다가 정복지가 늘어나면서 노예들의 수도 증가했다. 그 결과 소금 생산을 담당했던 로마 시민들의 자리를 노예들이 대체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소금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특히 생선과 육류를 장기간 보관할 수 있도록 염장에도 사용되었다. 소금으로 절인 식재료는 보관성도 뛰어나 정복지가 증가함에 따라 장기간 이동해야 하는 군인들의 식량으로 알맞았다. 또한 소금은 화폐의 기능까지 겸하게 되었다. 소금은 통화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던 제정 로마 전까지 급료로 쓰였다. 소금 도시를 의미하는 ‘잘츠부르크(Saltzburg)’부터 소금의 값어치를 표현했던 ‘살라리움(salarium)’은 시대와 언어권을 넘어 오늘날 사용하는 ‘샐러리(급여)’와 ‘샐러리맨(봉급생활자)’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다. 당시의 군인들이 급료로 소금을 받다 보니 당시에는 ‘살 다레(sal dare)’로 불렸지만 지금은 ‘솔져(soldier)’로 불리고 있다.

한편 소금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더 비쌌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도시의 상인들이 로마에서 소금을 사들인 뒤 먼 곳까지 나아가 비싸게 파는 등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먼 거리 이동은 주로 육지를 이용했지만 알프스처럼 지형이 험준한 곳은 피하고 바닷길을 통해 운반했다. 해상을 통한 원거리 교역이 계속되면서 항해술의 발달과 항로 개척이라는 효과를 불러왔다.

소금길을 통한 교역이 계속되면서 소금 외에 다양한 문물과 인적 교류도 이어졌는데 이는 로마가 다른 나라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소금길을 통해 식량으로 사용할 밀과 포도주, 올리브와 생선, 해산물 같은 물자가 오고가기도 했다. 건국 초기 미약한 도시국가였던 로마에게 소금은 부를 창출하는 원천이었으며 소금길은 젖줄과도 같았다. 로마는 훗날 이 길을 통해 주변 국가로 진출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했다.

유럽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대구


대구 귀족의 탄생:
‘스톡 피시(stock fish; 저장 생산, 염장 생선, 돈 생선)’라고 불리던 물고기는 대구와 청어였다. ‘스톡(stock)’은 오늘날 주식을 지칭하는 경제적 의미로 더 많이 쓰이지만 저장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염장을 통해 저장했던 물고기는 실제로 돈을 불러왔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염장 대구와 염장 청어를 상징하던 스톡은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 돈을 벌어다주는 스톡의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부터 염장 생선이 어떻게 돈을 불러왔는지 살펴보자.

‘대구(大口)’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식가인 대구는 먹이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먹어댄다. 플랑크톤은 물론 작은 새우부터 꽁치나 청어, 오징어 같은 큰 어류를 삼키는 경우도 있다. 대구는 한류성 어종이다 보니 따뜻한 지중해보다는 북해나 대서양 북쪽 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유럽에서는 피레네산맥을 중심으로 에스파냐의 동북부와 프랑스의 서남부에 걸쳐 사는 바스크 지역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대구를 소금에 절여 만든 염장 대구와 햇볕에 말린 대구를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식량으로 사용했다. 염장 대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바스크족은 천일염을 만들어 썼다. 소금에 절인 대구는 저장성이 뛰어나다 보니 바스크 지역과 인접한 포르투갈부터 북해 인근의 나라와 내륙 깊숙한 곳까지 널리 알려졌고 내륙 사람들의 구입도 꾸준히 이어졌다. 그 덕분에 염장 대구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게다가 청어와 마찬가지로 염장 대구는 금식 기간에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의 지배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당시 유럽에서는 큰 인기를 끌었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고 동인도회사가 설립되면서 아시아 무역이 활발해지자 염장 대구는 장거리에 적합한 식재료로 더욱 각광을 받았다. 청어와 대구는 식감에서 느껴지는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크기에서 차이가 난다. 청어는 50~300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반면, 대구는 일반적으로 5~15킬로그램까지 자라고, 20킬로그램까지 나간다. 청어와 대구 모두 염장을 하지만 대구의 저장 기간이 좀 더 길었다. 청어가 최대 2년 정도라면 대구는 환경에 따라 5년까지 가능하다고 알려졌다.

유대인과 대구:
1492년 3월 31일,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유대인 추방을 압박하는 칙령을 발표하자 유대인들은 개종과 추방을 두고 선택을 해야 했다. 이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칙령으로 로마에서 추방된 경험이 있던 유대인들은 또다시 네덜란드와 북아프리카, 남아메리카로 이주해야 했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난 유대인 23명은 1654년 9월 신교(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령인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에 도착했다.

뉴암스테르담에서 멀지 않은 뉴잉글랜드에는 앞서 1620년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온 청교도들이 어느 정도 터전을 잡고 있었다. 두 세력은 교리상의 비슷한 부분도 있었지만 종교의 자유를 위해 정든 곳을 떠나왔다는 유대감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도왔다.

가톨릭교도와 유대인들은 금식일이나 각 절기에는 육류와 누룩으로 발효해서 만든 빵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말리거나 염장을 한 대구와 청어를 먹었다. 이는 청교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청교도들과 유대인들 모두 생계와 먹거리를 위해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지금의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뉴포트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다 보니 좋은 어장이 형성되었고 신선한 바닷물고기를 거래하기에도 알맞은 곳이었다. 유대인들은 뉴포트로 모여들었고 유럽에서와 같이 소금으로 대구를 비롯한 여러 생선을 염장하고 유통해서 막대한 부를 쌓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쌓은 부로 대학을 설립하고 장학제도 등 학교 운영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배타적 경제수역의 탄생:
1918년 12월 1일에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아이슬란드는 빈약한 자원과 혹독한 날씨 때문에 제조업이 성장하기에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이슬란드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업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대구였다. 하지만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증기기관을 갖춘 트롤선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트롤로 무장한 영국의 동력선이 바다를 누비며 대구를 싹쓸이해 간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아이슬란드였다. 대구 어업은 강대국 영국에 있어서는 여러 산업 중에 하나였지만 약소국 아이슬란드에는 생존의 문제였다.

영국의 대규모 남획으로 대구의 수가 급감하자 아이슬란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가 영국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은 6척의 경비정이 전부였다. 게다가 가장 큰 경비정이 1,000톤 정도였고 나머지는 그 이하였다. 영국 어선이 아이슬란드 경비정보다 더 큰 경우가 있을 정도로 아이슬란드의 해상 전력은 열악했다. 영국은 자국의 어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40여 척에 이르는 군함이 아이슬란드의 해역을 수차례 침범했다.

1958년 10월 아이슬란드의 경비정이 해역에 침범한 영국 어선에 위협사격을 가하면서 골리앗 영국과 다윗 아이슬란드의 세 차례에 걸친 대결이 시작되었다. 아이슬란드는 교전 중에 경비정이 침몰되는 등 열세에 몰렸지만 몇 차례에 걸친 외교적 담판과 해상 충돌을 강행하면서 단호하게 대항했다. 국교단절까지 하는 등의 외교적인 행동은 아이슬란드의 결연한 의지를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냉전 중이던 당시 국제 환경에서 소련이 아이슬란드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했던 나토(NATO)는 영국과 아이슬란드의 갈등이 심각한 안보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영국도 완강한 입장이었지만 또 다른 당근을 제안한 미국의 설득과 국제사회의 중재로 양국의 국교는 정상화되었다.

‘대구’라는 어종이 유럽을 뒤흔든 이 역사적인 사건처럼 또 다른 갈등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국제사회는 국제협약을 맺기로 했고, 그 결과 1982년에 「해양법에 관한 유엔 협약」이 체결된다.

1973년에 협상을 시작한 지 10여 년의 난고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1994년 11월 16일부터 효력이 발생된 이 협약은 전 세계의 바다에 적용되는 국제협약으로, 배타적 경제수역을 의미하는 EEZ(Exclusive Economic Zone)의 범위를 최대 200해리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바다의 형태나 이웃 나라와 인접해 있을 때 등 환경에 따른 경우에는 예외를 인정했다.



2부 유럽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은 사건



세계 최초의 자유무역지대, 한자동맹의 탄생


한자동맹은 어떻게 유럽의 상권을 차지했을까?:
남유럽이 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지중해를 끼고 있다면 북유럽은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동유럽과 영국을 연결하는 발트해, 북해를 끼고 있다. 모두 주변 지역을 연결해주는 바다가 교역로 역할을 해왔지만 발전 과정은 저마다 전혀 달랐다.

지중해는 로마제국이 중흥하면서 성장을 같이했지만 서로마가 멸망한 뒤 발생한 힘의 공백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게르만족이 건립한 국가들과 이슬람제국의 대립 속에서 지중해는 더 이상 문명과 패권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바다가 아닌 서로가 상대를 이교도라 칭하며 갈등이 부딪히는 곳이었다.

반면에 발트해와 북해는 통합의 바다로 거듭났다. 이 바다에 여러 나라가 인접해 있었는데 이 나라들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역내 자유무역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을 합쳤고 마침내 세계 최초의 자유무역지대로 알려진 한자동맹을 만들어냈다.

한자동맹이 언제 결성되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문헌에는 1267년경에 처음 등장한다. 귀족이나 왕들의 정치적 연합체가 아닌 상공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주도적으로 만든 공동체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많은 조약이나 동맹과는 성격이 달랐다.

한자동맹의 시발점이라고 알려진 독일의 항구도시 뤼베크를 중심으로 한자동맹은 서쪽으로는 영국의 런던, 동쪽으로는 폴란드의 그단스크, 러시아의 노브고로드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사이에 에스토니아의 탈린, 라트비아의 리가, 스웨덴의 스톡홀름, 벨기에의 브루게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크게는 뤼베크를 중심으로 벤트, 베스트팔렌, 작센, 프로이센의 4개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한자동맹은 초기에는 50여 개의 도시가 참여했고, 전성기 때에는 최대 10여 개국 약 200개의 크고 작은 도시가 참여하며 400여 년간 해상과 육상을 통한 무역으로 북유럽과 동유럽이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이때 한자동맹에 가입한 도시들은 성장을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한자동맹은 순식간에 발트해와 북해 일대를 장악했다. 한자동맹은 유럽에서 끊임없이 발생한 수많은 전쟁과 약탈 속에서도 회원 국가와 도시의 상공인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무역로를 확보해 상거래를 통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거래를 통한 이익, 그것이 최우선이었다.

한자동맹은 계급과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구축된 네트워크를 통해 자유로우면서도 상호 신뢰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중요한 안건 등은 각 도시의 대표로 참석한 상공인들이 모여 결정했다. 한자동맹에 가입한 도시 간에는 관세를 매기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 규정은 철저하게 지켜졌고 어길 시에는 동맹에서 배제되는 불이익을 당했다. 성장기에는 동맹도시 간에 구축된 신뢰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 덕분에 정세가 혼란해질수록 안전을 보장받는 것 이외에도 재화의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동맹에 가입하려는 국가와 도시의 수도 증가하면서 한자동맹의 활동 반경이 점차 확대되었다.

한자동맹의 기본 틀은 자유무역이다. 오늘날 유럽연합(EU)이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처럼 가입국끼리는 관세나 기타 제도적인 규제를 받지 않는 자유무역을 하자는 것이다. 동맹에 참여한 도시들 간에는 상공인들이 만든 물품이나 영국의 양모와 모직, 플랑드르의 모직이나 천, 베스트팔렌의 금속 제품, 라인강 유역과 프랑스의 포도주, 노르웨이의 생선을 비롯해 라트비아와 루스족의 목재, 석회, 꿀, 모피, 밀랍, 소금 등 다양한 품목이 거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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