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었다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었다
박홍규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2년 5월 / 348쪽 / 18,000원
제1부 사상과 행동의 이단아들
나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었다 _ 소피야 코발렙스카야
불꽃처럼 살다 간 여성 수학자: 『불꽃의 여자』는 시몬 페트르망이 쓴 시몬 베유의 평전 제목이고, 『불꽃 같은 생애』나 『불꽃처럼 살다 간 러시아 여성 수학자』는 소피야 코발렙스카야의 평전 제목이다. 세 책의 원제는 물론 내용에도 ‘불꽃’이라는 말은 없다. 페미니즘은 불꽃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래퍼인 슬릭은 ‘나는 불꽃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같은 제목의 노래를 부른다.
불꽃에 비유된 소피야 코발렙스카야의 전기가 2권이나 우리 말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여성을 다룬 평전이 많다고 볼 수 없는 현실에서 놀라운 일이다. 앤 히브너 코블리츠와 코둘라 톨민이 쓴 이 두 평전은 각각 1997년과 2003년에 번역본이 나왔다. 사실 소피야에게는 피었다가 금방 사라지는 불꽃보다는 평생 가부장 세계에 저항해 치열하게 살다가 불꽃처럼 산화한 이단이라고 봄이 적절할지 모른다. 특히 지금까지도 남성 과학자들이 주류인 과학계에서는 그가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이단이었다.
소피아는 185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장군의 딸로 태어나 언니와 함께 자란다. 진보적인 그의 어머니는 두 딸에게 조기 교육을 시킨다. 그 시절을 소피야는 이렇게 회상한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너무 열광했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가 꿈꾸던 자유와 보편적 계몽의 시기를 스스로 상상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굳게 믿었다.” 자매는 특히 러시아의 초기 사회주의 작가들인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와 표트르 라브로프 등 니힐리스트들의 영향을 받는다. 흔히 ‘허무주의자’로 번역되는 니힐리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를 지배한 종교와 미신을 파괴하는 혁명인 과학이었다. 따라서 과학자는 곧 ‘급진주의자’였다.
혁명가는 운명의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수학에 흥미를 느낀 소피야가 아버지에게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대학 공부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허락하지 않는다. 언니인 안나도 의학을 공부하고자 했지만 역시 아버지에게 거부당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여성이 아버지나 남편의 서면 허가 없이 가족과 떨어져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학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육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남편을 찾는 것이었다.
안나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블라디미르 코발렙스키에게 자신이 독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결혼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나 그는 안나 대신 소피야를 선택한다. 소피야는 당시 17세여서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지만, 코발렙스키와 동거한 뒤 결혼한다. 같은 해 안나도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의대생과 결혼한다. 이후 안나 부부는 미하일 바쿠닌과 세르게이 네차예프가 쓴 『혁명가의 교리문답』에 심취한다.
1869년부터 소피야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공부한 뒤, 예나대학에서 고생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남편과 함께 영국 런던에서 당대 과학계의 이단아들인 토머스 헉슬리, 찰스 다윈, 허버트 스펜서 등과 교류한다. 이어 1871년 소피야 부부는 안나 부부가 참여한 파리코민을 돕는다. 코뮌이 실패하자 안나는 런던으로 도망치고 남편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소피야와 아버지가 파리에서 구명운동을 벌여 그를 구출한다.
소피야는 1874년 박사 학위 논문으로 괴팅겐대학에 ‘편미분 방정식’, ‘토성의 고리 역학’, ‘타원 적분’에 관한 논문 3편을 발표하고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아 유럽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여성이 된다. ‘편미분 방정식’은 오늘날 ‘코시-코발렙스카야 정리’로 불린다. 소피아는 대학에서 수학 강사가 되고 싶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허락되지 않았고, 그녀의 무료 강의 제안도 거부된다. 이후 그녀는 남편의 여러 사업을 도왔으나 사업이 실패로 끝나면서 어린 딸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간다. 소피야는 러시아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지만, 여성이라는 점과 정치적 견해 때문에 거부당한다. 남편의 사업도 계속 실패해 파산에 이르고, 결국 남편은 1883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세계로 모험을 떠난 니힐리스트 걸: 소피야는 188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대학에서 개인 강사로 지내며, 여배우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안네 샬로테 레플레르를 만나 죽을 때까지 ‘친밀한 낭만적 우정’을 나눈다. 1884년에는 5년제 계약 교수가 되고 1888년에 당시 과학계의 최고상인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보르댕 상을 받는다. 1889년 그는 북유럽 대학에서는 여성 최초로 스톡홀름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되고 남편의 먼 친척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착을 거부해 결혼은 하지 않는다. 1890년에는 자전적 소설 『니힐리스트 걸』을 발표하지만, 1891년 독감으로 사망한다. 41세의 나이였다.
로저 쿡은 2003년에 쓴 소피아의 새로운 평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그녀가 극복해야 했던 어려움의 무게에 맞서 그녀가 성취한 것의 크기를 생각하면 할수록 그녀를 더욱 존경하게 된다. 그녀는 역사상 극소수의 사람들이 달성한 영웅적 위상을 보여 준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아직 여성이 거의 탐험하지 않은 세계로 모험을 떠나…… 사회가 그녀의 실패를 반쯤 예상하고 바라보는 동안 엄청난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했다. 그녀가 학문에 지속적인 가치가 있는 두 가지 주요 결과를 달성한 것은 철의 훈련을 통해 개발된 엄청난 재능의 증거다.”
소피아의 생애는 1956년 이오시프 샤피로 감독의 영화 외에도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소설로도 여러 편이 쓰였다. “나는 불꽃이다. 붉게 타올라 그 빛으로 앞을 밝힌다.”로 끝나는 슬릭의 노래도 소피야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한순간의 불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국가의 길들이기를 거부하라 _ 제임스 C. 스콧
인류에게 농경화는 완전한 재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내가 깊이 공감하는 견해는 제임스 C. 스콧이 말하는 ‘농경의 배신’이다. 농경 자체는 완전히 인공 생태계로, 채집 경제에 견주어 봤을 때 밀집해서 살았던 초기 농부들의 생활 양식이 끌어들인 진드기와 곤충부터 쥐와 고양이, 참새와 비둘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이 전염병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몸에서 살기 적합한 미생물 때문에 생긴 모든 전염병 중 많은 수가 지난 5,000년 동안에만 발생했다. 따라서 수천 년 전에 전염병을 일으킨 조건과 21세기에 발생하는 현상 사이에는 명백한 유사성이 있다. 현저하게 다른 점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 인구에 영향을 미친 범위, 규모, 속도다. 이는 인간 중심의 산업 자본주의 문명, 특히 최근의 ‘세계화’ 때문이다.
제임스 스콧은 『농경의 배신』에서 인류가 수렵 채집민의 유목 생활에서 농경에 의존하는 영구적 정착 생활로 이행한 것이 진보, 문명과 공공질서, 건강 증진과 여가라는 혜택을 주었다고 본 종래의 문명사를 완전히 뒤집어 도리어 농경화가 인류에게 완전한 재난이었다고 주장한다. 최근 유발 하라리가 농업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 사건이라고 본 것과 통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스콧은 역사를 ‘길들이기’ 과정이라고 보는 점에서 하라리와 다르다. 처음에는 불, 이어 식물과 가축, 국가의 국민과 포로, 마지막으로 가부장제 가정 안에서 여성 등을 길들이는 과정이 역사라는 것이다. 특히 국가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들은 소수의 지배층을 제외한 다수의 국민에게 자유의 제한, 실질적 삶의 질 악화, 생존 자체의 위협이었다고 본다.
이 중에서도 쌀, 밀, 보리 등 소수의 곡물은 인류 대부분의 주식이 될 만큼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광대한 경작지에서 주요 작물로 재배되었다. 이는 안정적인 조세 수입과 인력 동원이 전제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국가가 이를 강제했기 때문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도 그런 통치술을 감추기 위한 꾸밈말이었을까? 토머스 홉스와 존 로크 같은 사회 계약 이론가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한 국가의 비전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였을까? 그렇다면 동서양의 학문이라는 것은 모두 국가주의의 변주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스콧은 더 나아가 국가가 유발한 빈곤, 세금, 속박,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방으로 도주한 정치적·경제적 난민, 즉 비국가적 민족을 야만인 따위로 부정적으로 보기는커녕 ‘길들이기’에서 벗어나 수렵 채집민의 전통을 잇는 건강한 인류로 긍정한다.
예일대학 교수가 아닌 양봉인: 『농경의 배신』은 예일대학 정치학부 교수인 제임스 스콧이 2017년 81세에 쓴 60여 년 연구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한 대작이다. 그는 정치학자이자 인류학자이고, 예일대학 농학부의 공식 창시자이자 저항 연구의 비공식 창시자다. 스콧은 6만 평 정도 되는 농장에서 소와 닭과 벌을 반세기 이상 키우며 살고 있다. 그는 이러한 농장 경험이 학문의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평생 농사를 지었기에 학문도 조금은 나은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양털 깎기 실력을 자랑하며 자신의 저서에도 ‘예일대학 교수’가 아니라 ‘봉인(蜂人)’이라고 쓴다.
그는 의사의 아들로 필라델피아 외곽에 있는 퀘이커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970년대 초 위스콘신대학 박사 과정에 다니면서 반전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학자에게 ‘경력을 죽이는’ 짓에 불과한 2년간의 현장 조사를 위해 가족과 함께 말레이시아의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베트남에 관심을 가지고 농민들이 권위에 저항하는 방식을 다룬 최초의 저서인 『농민의 도덕경제』를 1976년에 발표했다. 이 책은 농민들의 ‘도덕경제’라는 전통적 형태의 연대가 식민 치하 이후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도입되면서 무너지고 국가 정치로 점점 통합되는 과정을 비판했다. 지난 2004년에 스콧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우리말로 번역되었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이어 스콧은 자신의 이론을 세계 다른 지역의 농민들에게까지 확장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농민을 비롯해 무력한 사람들이 중앙 집중식 국가 통제를 위협하기 위해 후속 저서인 『지배와 저항의 기술』과 함께 직접적인 대결보다는 회피와 계략을 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한 『약자의 무기』를 저술했다. 하지만, ‘저항 연구의 성경’이라고 불리는 이 책 2권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못했다.
1998년에 출판된 『국가처럼 보기』는 소련의 집단 농장이나 미국의 산업 영농을 비롯해 아프리카의 강제 촌락화나 남미나 인도의 신도시 건설처럼, 국가가 주도하는 하향식 사회 계획을 근본적으로 비판한 책이다. 한국에서는 2010년에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 사회학자에 의해 번역되어 스콧을 같은 계열로 오해하게 만든 점도 있다. 그러나 스콧은 그 이전에 낸 책들과 마찬가지로 화전민이나 이동 경작을 하는 농민이 넓게 퍼져 생활하는 비국가적 공간이 국가적 공간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비판한다. 또 농업을 산업으로 대체해야 한다거나 농민을 노동자로 대체해야 한다는 경제 발전론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국가 개발이 내세우는 사회복지 담론을 근본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언제나 비국가적 자원이었던 과거의 공동체를 거의 항상 파괴하거나 분열시켰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지역 고유의 다양한 삶을 표준화하고 단순화하는 국가의 파괴에 맞섰다. 또 국가가 아닌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중앙 집중화되고 상품화된 삶에서 벗어나 자치와 자급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스콧이 2009년에 출판한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 동남아시아 고지대의 아나키스트 역사』는 우리말로 2015년에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로 번역되었다. 이 책에서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타이, 버마(미얀마), 중국에 걸친 조미아라는 고지대 주민들이 지난 2,000년 동안 국민국가의 지배를 피한 기술을 산악 지대에 흩어져 사는 것과 화전 경작, 구전 문화의 유지 등에서 찾는다.
스콧이 2012년에 발표한 『아나키즘을 위한 두 번의 응원: 자율성, 존엄성, 의미 있는 일과 놀이에 관한 여섯 편의 쉬운 에세이』는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라는 제목으로 2014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스콧의 아나키즘은 그가 ‘공상적 과학주의’라고 부르는 전통적 아나키즘과 달리 국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장한 ‘길들이기’에 대한 거부임을 주의해야 한다.
그런 ‘길들이기’는 신원 확인을 위해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한 것을 비롯해 조세, 법원, 토지, 징병, 경찰, 학교, 공장, 표준어, 가족, 심지어 신호등 등 모든 방면에서 이루어졌고, 최근에는 DNA 검사니 CCTV니 하는 감시와 통제 장치로 더욱더 ‘발전’하고 있다. 스콧은 그런 타율성에서 벗어나 자율성과 존엄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제대로 바꾼다면 ‘아나키즘은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상식이다’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제2부 문학과 예술의 이단아들
그 누구도 모범으로 삼지 마라 _ 헤르만 헤세
누구보다 사회적이면서도 반사회적인 반항아: 헤르만 헤세는 1877년 독일에서 태어나 1962년에 사망했다. 그를 보통 ‘독일’ 작가라고 하지만, 46세였던 1923년부터 스위스 국적을 가지고 스위스에서 40년간 살다가 죽었으니, 헤세는 ‘스위스’ 작가다. 아니, 아무 이유 없이 ‘향수’라고 번역된 첫 소설인 『페터 카멘친트』를 출판한 1904년부터 그는 스위스에서 살았다. 게다가 4세부터 9세까지도 스위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따라서 독일에서 산 기간은 10~20대의 10여 년에 불과하다.
헤세가 12세 때 시인이 되려 하자, 부모와 교사는 그를 신부나 학자로 키우고자 수도원 학교에 강제로 넣었다. 그곳에서 도망친 그는 보호 시설과 정신병원을 거쳐 다시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지만 그곳에서도 도망친다. 이어 서점이나 공장에서 훈련을 받는 것 역시 중단한다. 그래서 ‘구제불능’, ‘실패자’, ‘부모의 치욕’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 그를 학교나 교사, 심지어 부모까지도 좋아할 리 없다. 그는 학교를 다닌 8년간 고마운 교사가 단 한 사람뿐이고, 학교란 언제나 맞서 싸워야 하는 절대 권력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독재를 휘두르는 절대 권력이 요구하는 굴종에 대한 반항은 학창 시절부터 싹터서 그의 평생을 지배했다.
그는 우리 식으로 중학교 2학년 중퇴 수준까지만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 후에는 철저히 독학을 한다. 아니, 그 8년간에도 배운 게 별로 없고 독학을 했으니 평생 혼자 공부한 셈이다. 그는 대학 교육도 경멸했다. 그의 삶이나 문학의 원리는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다. 진실한 것과 고귀한 것을 찾아 스스로 읽고 생각하며 쓰는 것이다. 그게 그의 고독이다.
그것은 ‘천재’의 까닭 모를 외로움이나 알프스를 향한 향수가 아니라, 모든 권력이나 권위나 전통으로부터의 고독이다. 특히 역사나 국가, 민족이나 대중으로부터의 고독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반사회적이다. 즉, 현 사회를 부정하고 비판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헤세만큼 유토피아적 공동체나 아름다운 자연 속의 삶을 강렬하게 표현한 작가도 다시없다는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사회적이다.
도시를 거부하다: 헤세의 삶은 1916년, 즉 39세를 경계로 나누어진다. 그전까지 세상의 요구에 맞추어 어떻게 하든 모범 학생과 모범 시민이 되려고 노력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한 탓으로,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해 자신을 되돌아본다. 정신병원에서 스스로 내린 결론은 자신이 옳았다는 것이어서, 그 뒤로는 이 결론이 모든 도덕적 굴레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 최초의 결단이 ‘반전론’이다. 그의 반전론은 그전부터 시작되었으나 이제 이 결단은 더욱 확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