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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이종호 지음 | 인물과사상사


파블로 피카소

이종호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3년 1월 / 223쪽 / 14,000원





세기적 천재



10세에 미술을 마스터한 초유의 미술 천재


피카소의 어릴 적 그림 실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는 그가 10세경에 그렸다는 소묘다. 초등학생 나이에 표현한 그림자에 대한 묘사가 그야말로 놀랄 정도로 완벽하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지만 피카소는 초등학생 나이에 이미 미술을 마스터한 초유의 미술 천재였다.

피카소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통해 자연주의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등 어린 시절에 비범한 예술적 재능을 보여 주었다. 이후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그의 그림은 다양한 이론, 기술 및 아이디어를 실험하면서 바뀌었다. 학자들은 1906년 이후, 앙리 마티스의 야수파 영향을 받아 서로 경쟁 관계를 형성하면서 결국 현대 미술의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피카소는 1881년 10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돈 호세 루이스 이 브라소이며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 피카소 로페스다. 아버지는 중산층 출신으로, 조상은 특권 귀족으로 알려진다. 그는 주로 새 등 자연주의적 묘사를 전문으로 하는 화가였으며, 장인 학교의 미술 교수이자 지역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봉사했다.

피카소는 ADHD를 앓았나?:
피카소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 가운데 하나는 그가 어렸을 때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ADHD)를 앓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는 피카소에게 학교가 시련의 장소였다는 것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피카소는 어렸을 때부터 규칙을 지키기 싫어했으며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자리에 제대로 앉지 못하고 창가로 가거나 창문을 두드리는 행동을 했고, 수업 시간에는 시계만 쳐다보거나 낙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국어와 산수는 학습 능력이 부족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창조성의 연료로 삼은 피카소:
아버지인 루이스는 자신의 아들이 그림에 남다른 천재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미술가의 꿈을 아들에게로 옮겼다. 아버지는 아들이 다소 지적 장애를 갖고 있지만, 미술과 관련한 천부적 재능을 소유했다는 것을 알고 아들의 길을 적극적으로 열어 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피카소의 아버지는 작가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시골의 미술 선생이었다. 그러므로 피카소를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그는 걸작을 복사하고 살아 있는 인물 모델과 석고 모형에서 인간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피카소를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켰다.

피카소의 어릴 적 시절을 면밀히 분석한 학자들은 피카소가 심한 우울증과 공격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릴 적 남다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참고로 피카소의 작품에는 절단된 신체가 등장하거나 무겁고 어두운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특히 피카소의 걸작품인 <게르니카>에는 사람과 동물의 몸이 우악스럽게 절단되어 있는데, 피카소는 어린 시절 이와 비슷한 악몽을 자주 꿨다고 한다. 화가였던 아버지가 비둘기를 그리기 위해 아들에게 비둘기 시체에서 내장을 꺼내 박제를 만드는 일을 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울대학교 조두영 교수는 비둘기 시체를 붙들고 있던 충격과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뇌에 함께 자리 잡아 공격성이 자극받았다고 설명하면서 피카소가 남다른 것은 이런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오히려 <게르니카> 같은 창조적인 그림을 이끌어 낸 점이라고 말한다. 그가 어렸을 때의 병력을 이겨 내고 그림을 비롯한 각종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피카소가 자신의 어릴 적 단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창조성의 길로 들어섰는데, 바로 그 점이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구인 중 한 명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피카소의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준 어머니:
그런데 여기에도 절묘한 중개인이 등장한다. 바로 어머니다. 피카소가 아버지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어머니가 피카소의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피카소가 자신의 예명(藝名)을 아버지의 이름인 루이스가 아니라 어머니의 이름인 피카소로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 1895년 피카소의 가족은 바르셀로나로 이사했고 아버지는 바르셀로나의 라론하 미술학교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그는 학장에게 찾아가 자신의 아들이 특별한 실력을 갖고 있으므로 초급반이 아닌 상급반에 입학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학장은 상급반은 대학교급이라며 중학생 나이의 피카소를 입학시킬 수는 없다고 핀잔을 주었다. 이에 아버지는 피카소가 12세에 그린 그림을 보여 주었으며, 그 그림을 본 학장은 그 자리에서 피카소의 입학을 허락했다.

19세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다:
피카소는 13세에 미술학교 상급반에 입학했지만 학교의 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는 피카소의 ADHD 때문으로 추정하지만, 그는 그림을 중단하지 않았다. 피카소는 14세에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초상화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페파 이모의 초상화를 그렸다. 한편 아들이 학교생활을 어려워하자 아버지와 삼촌은 피카소가 16세 때 스페인 최고의 미술학교인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추천했고,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피카소는 여기에서도 틀에 박힌 정식 교육을 싫어했고 등록 직후 수업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마드리드에는 다른 많은 명소가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디에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파나 레인,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 등이 있었다. 피카소는 프라도의 명화를 감상하면서 벨라스케스가 최고이며 엘 그레코는 위대한 몇몇 대가들 가운데 속한다고 말했다. 한편 학자들은 피카소가 특히 그레코와 카라바조의 작품, 즉 길쭉한 팔다리, 시선을 사로잡는 색상, 신비로운 얼굴과 같은 요소에 매료되어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다고 설명한다.



피카소의 예술 시대



1900년 이전


피카소는 1881년에 태어나서 1973년까지 살았으므로 그의 기다란 예술 활동에서 수많은 변곡점을 만들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직업도 다양해 피카소는 스페인 화가, 조각가, 판화 제작자, 도예가 및 연극 디자이너 등으로도 불렸다. 그림 실력도 만만치 않아 원래 실사, 즉 구상에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지만, 입체파 운동을 주도하고, 구성 조각과 콜라주의 발명 등 그야말로 회화계에서 남다른 독창성으로 선풍을 일으켰다. 학자들은 피카소의 수많은 작품을 다음처럼 특정 시대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모더니스트 시대(1899~1900):
모더니스트라고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비록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엘 그레코와 같은 거장들의 그림을 자신 것으로 만드는 모더니즘을 익혔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1900년 당시 유럽의 예술 수도였던 파리를 동료인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와 함께 방문한다. 이곳에서 파리의 언론인이자 시인인 막스 자코브를 만나는데, 자코브는 피카소와 아파트에 함께 살면서 피카소가 언어와 문학을 배우도록 도왔고, 피카소는 루브르 박물관의 카탈루냐 딜러인 페레 마나흐의 모델로도 활약했다. 그런데 아파트의 환경이 열악하여 자코브는 밤에 자고, 피카소는 낮에 자고 밤에 일을 했는데, 이때의 습성이 몸에 익었는지 피카소는 대가가 된 후에도 주로 밤에 작품을 그렸다.

한편 피카소가 파리 여행 중(10~11월)에 얻은 귀중한 미술적 성과는 색채의 발견이었다. 전통적인 스페인 회화의 충충한 색채, 스페인 여인들이 즐겨 걸치는 숄의 검정색조, 스페인 풍경에서 흔히 보게 되는 황갈색조나 갈색조가 아닌,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 등 전혀 새로운 색채를 경험했다. 그리고 피카소는 목탄ㆍ파스텔ㆍ수채ㆍ유채 등 다양한 매체로 파리의 생활을 묘사했는데, 실연으로 의기소침해진 친구 카사헤마스 때문에 단지 2개월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청색 시대(1901~1904):
카사헤마스와 함께 스페인에 돌아온 피카소는 1901년 초 잠시 마드리드에서 무정부주의자 친구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솔레르와 함께 잡지 《젊은 예술》의 미술 편집장으로 근무하면서 5권을 발행했는데, 솔레르는 기사를 썼고 피카소는 삽화를 그렸다. 이 시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피카소로 하여금 20세 때 청색 시대를 열게 한 친구 카사헤마스가 자살한 것이다.

친구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1901년부터 1904년까지 청색만을 고집했다. 청색은 하늘의 색인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색이 아니다. 그것은 침울한 절망의 색으로 우울한 주제를 엄격하게 사용하며 그의 그림에는 매춘부와 거지가 자주 등장했다. 학자들은 청색은 단순히 그의 캔버스에 칠해지는 색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었다고 설명하고, 피카소는 청색이야말로 모든 색을 다 담고 있는 색깔이라고 말하곤 했다. 피카소는 오로지 청색만 사용하여 늙은 뚜쟁이, 알코올 중독자, 누더기를 걸친 걸인, 장님 등 하층민을 주로 그렸고, 자살한 친구 카사헤마스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런데 피카소는 수많은 작품을 그렸지만 유독 청색 시대 그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당시 피카소의 삶은 극심한 가난과 추위, 절망으로 점철되었는데, 학자들은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이 작은 방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한 땔감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또 당시 무명이었던 피카소는 궁핍함을 해결하기 위해 그림 한 장을 한 끼 식사와 자주 바꾸었다고 한다. 한편 청색 시대의 그림은 당시에는 파리에서 인기가 없어 거의 팔리지 않았지만, 현재는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다.

장미 시대(1904~1906):
장미 시대는 주황색과 분홍색을 사용하는 밝은 톤이 특징이며 서커스 하는 사람, 곡예사, 할리퀸 등을 등장시켰다. 특히 이때 제작한 체크무늬 옷을 입은 할리퀸은 계속적으로 피카소의 개인적인 상징이 되었다. 참고로 피카소는 1904년 파리에서 그의 애인이 된 보헤미안 예술가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났다. 올리비에는 피카소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녀의 등장으로 비로소 침울한 청색 시대에서 장미 시대로 옮겨 갔다고 생각한다.

즉 그녀를 만나 그림이 밝아졌다는 것으로 이 당시 그린 그림은 일반적으로 낙관적인 분위기를 보여 준다. 이 말은 피카소가 여자를 만나 화풍을 바꾸었다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이 수많은 염문에도 불구하고 피카소가 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이유다. 여자를 통해 피카소의 예술이 업그레이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1905년은 피카소에게 매우 중요한 해다. 땡전 한 푼 없이 파리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던 피카소의 진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미국의 미술품 수집가인 레오와 거트루드 스타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당대 세계 미술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거물 중 한 명인 스타인은 피카소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구입해 주었고, 많은 사람이 피카소의 작품을 사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이렇게 스타인 그룹이 피카소의 그림을 구입하면서 피카소는 이른바 성공의 고속도로를 타기 시작했다. 더불어 스타인이 주최한 모임에서 피카소는 평생 친구이자 라이벌이 되는 앙리 마티스를 만났는데, 마티스와의 만남은 피카소로 하여금 자신의 예술 경력을 다시금 재정립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프리카 예술과 원시주의(1907~1909):
피카소는 1907년부터 2년간 아프리카에 심취한다. 폴 세잔이 사망한 다음 해에 세잔의 회고전인 살롱도톰이 열렸는데, 피카소는 세잔의 작품에서 자연의 본질적인 것을 증류시켜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전통적인 아프리카 조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참고로 1907년,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바토-라부아르’라는 아파트가 있었는데, 이 건물 안에 30여 개의 아틀리에가 있었다. 가스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이곳이 미술사에서 유명한 것은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레크 등이 살았고, 세잔의 영향을 받아 피카소가 큐비즘을 선보인 곳이기 때문이다.

세잔의 영향 가운데 가장 큰 성과물이 피카소가 1907년에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243.9센티미터 X 233.7 센티미터의 거대한 화폭 안에 여자 5명이 그려져 있다. 4명은 서 있고, 1명은 앉아 있다. 그때까지 화가들의 화폭 속 여인들은 항상 아름다웠다. 그런데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익히 보아 왔던 그림들 속 여자와는 달리 아름답지 않았고 심지어는 보기 흉하기까지 하다.

이 그림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은 하나의 화폭 안에 얼굴 정면과 배면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코를 보면 코의 특징을 전부 담아내어 어떻게 보면 앞 얼굴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카소의 큐비즘 그림에서 눈의 모양이 짝짝이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측면의 눈과 정면의 눈을 동시에 그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여자의 모습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큰 눈, 정면의 모습에 담긴 옆모습의 코, 오른쪽 여자들의 모가 난 얼굴, 엄청나게 큰 발, 도무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오른쪽 여자는 난폭하게 쭈그리고 앉아 몸의 등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여자의 얼굴은 정면이다. 다섯 여자의 육체를 갈라 한 화면에 둘 이상의 시점이 동시에 들어간 것이다. 피카소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뚤어진 코, 나는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코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학자들은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20세기 미술의 시작을 알려 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한 마디로 1907년에 큐비즘이 시작되었고, 현대미술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입체파의 그림에서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분해되고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나뉜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하나의 화면 속에서 여러 시점들을 보여 주기 위해 재구성된다. 하나의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불완전하다며 여러 각도의 시각을 하나의 화면 안에 담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여하튼 피카소가 선보인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그야말로 대단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르네상스 이래 500년가량 지속되어 온 단일 시점에 따른 원근법을 일거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분석적 입체파(1909~1912):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미술사가들이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은 이 그림을 계기로 피카소의 입체파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입체파는 여러 시기로 나누어지는데 1912년까지를 분석적 입체파라고 부르는데, 분석적 입체파는 자연 형태를 분석하고 형태를 2차원 그림의 기본 기하학적 부분으로 축소했다. 회색, 파란색 및 황토색을 자주 포함하는 단색 구성표의 사용을 제외하고 색상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색을 강조하는 대신 자연계를 표현하기 위해 원기둥, 구, 원뿔과 같은 형태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 기법은 큐비즘의 공동 창시자로 불리는 조르주 브라크도 차용했다. 한마디로 2명 모두 물체를 분해하고 모양에 따라 분석했다. 이 시기에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에서 많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 이유다. 이 당시 피카소는 정말 잘나갔다. 몽파르나스에서 궁핍하게 그림을 그리던 피카소의 위상이 높아지자, 그는 파리의 사교계 명사인 앙드레 브르통,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작가 앨프리드 자리, 거트루드 슈타인 등을 초청하여 접대했다.

합성 입체파(1912~1919):
합성 큐비즘은 피카소의 독창성을 잘 보여 주는 단계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큐비즘 장르의 추가 발전으로, 벽지나 신문 페이지의 일부를 잘라 붙여 넣는 콜라주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15년부터 1917년까지 피카소는 파이프, 기타 또는 유리로 구성된 매우 기하학적인 입체형 오브제를 콜라주 요소와 함께 표현하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다. 피카소의 이런 작품은 ‘가장자리가 단단한 스퀘어 컷 다이아몬드’라고도 불리는데, 피카소는 자신의 후원자인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당시의 피카소 작품은 ‘크리스털 큐비즘’으로 불리며, 훗날에는 ‘작은 보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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