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50권의 책
대니얼 스미스 지음 | 크레타
세계사를 바꾼 50권의 책
대니얼 스미스 지음
크레타 / 2023년 4월 / 304쪽 / 17,000원
고대
국가론? 저자 : 플라톤 ? 창작 연대 : 기원전 375년경
『국가론(Politeia)』은 스승 소크라테스,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3대 철학자로 불리는 플라톤의 대표적인 저서다. 기원전 4세기 초에 쓰인 이 책은 이상적인 도시 국가의 모델을 제시하며 무엇이 정의로운 정치 체제와 정의로운 개인을 만드는지 질문을 던진다. 플라톤은 여기서 ‘이데아적 형상’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실재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국가론』은 2001년 《철학자 잡지(Philosophers’ Magazine》에서 1천 명이 넘는 철학자와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역대 최고의 철학서로 뽑혔다.
플라톤은 기원전 428년경 아테네의 명망 높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본명은 ‘아리스토클레스’였는데 ‘넓다’는 의미의 “플라톤”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체격이 건장하고 이마가 넓거나 그의 해박한 지식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 문하에서 공부했으나, 기원전 399년 스승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자 아테네를 떠났다. 그 후 몇 년간 세상을 유랑한 뒤 기원전 385년 아테네로 돌아와 그 유명한 ‘아카데미아’를 세워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신세대 철학자들을 양성했다. 『국가론』은 아카데미아 설립 후 10여 년이 지나서 쓰인 책이다.
『국가론』은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몇몇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으로 토론하는 구성이다. 소크라테스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플라톤이 쓴 『대화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사실 이 『대화편』 어디에서 플라톤의 사상이 시작되고 소크라테스의 영향력이 끝나는지에 대해서는 학문적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문답법은 소크라테스가 완성한 소크라테스식 대화법 또는 변증술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주제나 개념, 주장을 탐색해 나가는 귀납법의 한 형태다. 철저한 교차 점검을 통해 탐색 중인 주장이나 개념의 타당성을 철저히 타진한다. 만약 질문을 통해 그 논리가 무너진다면 주장을 철회하거나 수정해 재점검을 받는다. 따라서 대화에 참여하는 이들의 삶은 강도 높은 점검을 받고 거기서 회복하는 과정을 거치며 어떤 개념에 도달할 때까지 확장하게 된다.
플라톤의 『대화』 중 하나를 예로 살펴보자. 소크라테스는 동료 에우티프론에게 경건함이 무엇인지 정의해 달라고 요청한다. 에우티프론이 경건함이란 신들에게 사랑받는 행위라고 주장하자, 소크라테스는 신들 역시 사랑과 증오의 대상을 두고 반목하기도 하는 존재라고 반박한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에 대해 어떤 신들은 좋아하고 어떤 신들은 싫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에우티프론의 정의에 따르면 어떤 행위든 경건한 동시에 불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니, 터무니없는 부조리인 셈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의 찾기가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사상의 탄생을 돕는 산파에 비유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수용했지만, 사람이 지식에 도달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매우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형상론이다. 그는 이상적인 형상의 영역이 물질세계와 별개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플라톤은 영혼은 이성이 지배하고 물질적 육체는 감정이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상적 형상이 현실에 발현되기 이전에 이 세상에 존재했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상적인 꽃이라는 개념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므로, 장미나 난초, 양귀비를 이러한 이상적 형태의 변형으로 인식할 수 있다. 개, 색, 산, 심지어 정의와 덕 같은 개념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우리는 타인의 덕을 우리의 영혼이 인식하는 이상적인 덕의 형태와 비교하여 판단한다.
플라톤은 이상적 형상의 영역은 ‘실재하는’ 세계인 반면, 물질세계는 이러한 형상의 그림자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것이 피타고라스가 자연에는 실재하지 않는 완벽한 삼각형을 상상해 낼 수 있는 이유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동굴 우화’를 통해 이러한 실재성에 대해 탐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굴 우화’에서는 쇠사슬로 결박된 채 동굴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목이 결박되어 고정되어 있기에 앞만 볼 수 있다. 그들 뒤로 불이 깜박이며 인형의 그림자가 벽면에 드리워진다. 이 죄수들은 이 그림자의 세계를 실재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플라톤은 우리도 그들처럼 그림자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죄수가 족쇄를 끊어 내고 자유로이 고개를 돌려 뒤의 횃불을 보듯, 철학자라면 이성을 통해 사물의 진정한 이상적인 형태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 주변의 세상을 관찰할 때 ‘진실’한 이상적 형상은 우리 외부가 아닌 내면에 존재하므로 내면의 추론을 우선시하는 합리주의로 철학적 사고의 방향을 바꿨다.
민주주의 체제의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배경에서 쓰인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철학자들이 세계와 도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가장 높으므로 이들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결론지으며 철학자 왕의 출현을 요구했다.
“철학자들이 왕으로서 통치하거나, 현재 왕이나 최고 권력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 정치권력과 철학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 그 나라는 나쁜 것들이 끝나지 않으며 … 어떤 나라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번영할 수 없다.”플라톤은 50세까지 지속적인 교육을 받으며 일련의 시험을 통과한 철학자 왕이 나라를 통치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공동 소유의 개념을 도입해 사적 재화를 획득하려는 유혹을 차단하고, 통치자가 부패의 잠재적인 근원을 제거하며 사회적 화합과 정의 유지를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상을 제시했다.
『국가론』 이전에 철학은 사물이나 윤리, 정치의 본질을 탐구하는 현실과 분리된 학문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 걸작은 이러한 주제에 대해 심리학과 인식론(지식론) 같은 다른 학문과 연계하여 탐색하는 새로운 포괄적인 접근법을 제시했다. 『국가론』의 결론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론이 제기되지만, 그 영향력은 시들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는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중세
구텐베르크판 성경? 저자 : 다수 ? 인쇄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창작 연대 : 1455년경
성경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총 66권의 책으로 구성된 기독교에서 가장 신성한 책이다. 구약성경은 히브리 성경과 같으며 기원전 2세기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 동안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 반면에 신약성경의 책들은 대략 1세기 후반에 쓰였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한 이래, 기독교는 수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수십억 인구의 영적 삶뿐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적 영향의 측면에서도 성경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여러 판본 중 구텐베르크판 성경은 유럽에 활자 인쇄술이 도입된 이래 가장 중요한 판본이다. 아시아에서는 이보다 수십 년 앞서 금속활자 인쇄술이 도입되었지만, 세계의 미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구텐베르크의 기술이었다.
구텐베르크는 1400년경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나 세공사, 발명가, 인쇄업자로 일했다. 그의 인쇄기의 원형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440년대에 수 차례의 사업적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서의 문화 교류가 거의 없었던 시대였으므로, 그는 앞선 아시아의 인쇄술 지식을 접하지 못한 상황에서 처음부터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스템을 발명했다.
당시 널리 쓰이던 수성 잉크는 인쇄기에 잘 발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다른 유성 잉크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사실 그가 만들려는 것은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흡수성 잉크가 아니라 종이에 흔적을 남길 광택제와 비슷한 것이었다. 또한 농업용 압착기에서 힌트를 얻어 누르는 방식의 인쇄기를 발명하여, 일일이 손으로 인쇄하여 많은 시간이 드는 방식에서 탈피했다.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 기술을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인쇄술을 발전시킬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노력 덕분에 정보가 대량 유통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1450년에 인쇄소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지만, 1455년에야 그의 대표작인 성경이 출판되었다. 비록 두 권이 똑같지는 않았지만 관례상 2권, 총 1,288 페이지, 각 페이지는 42행으로 구성되었다. 일부는 종이, 일부는 양피지에 인쇄했다(한판에 약 170마리의 송아지 가죽이 소요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는 다른 색 잉크로 제목과 여백 메모를 인쇄했지만, 이후 발행본에서는 시간과 생산비 절감을 위해 이 부분을 손으로 작업했다. 각 발행본은 30플로린에 판매되었다. 당시 점원의 3년 치 연봉에 달하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기에, 이 성경은 수도원과 대학, 일부 부유층에게만 돌아갈 수 있었다. 이렇듯 획기적인 작품이었던 구텐베르크 성경은 초기 몇 년에 걸쳐 총 2백 부가 넘지 않을 정도로 소량만 인쇄되었다.
성경 출판은 큰 돈벌이가 되지 못했다. 인쇄기 개발에 몇 년이 걸린 데다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어야 했으므로 그는 여러 명의 사업 파트너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 요한 푸스트이다. 그는 성경 출판과 관련한 대출금 반환 소송을 해 왔고, 구텐베르크는 패소하여 인쇄 장비뿐 아니라 남아 있던 성경도 모두 넘겨야 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로 제작자인 그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 채 재정적으로 파산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구텐베르크가 제작한 출판물의 품질은 처음부터 널리 인정받았다. 그가 투자자로부터 소송당할 무렵, 훗날 교황 피우스 2세로 선출되는 에네아 실비오 바르톨로메오라는 가톨릭 사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견본용 몇 페이지를 보고 로마의 스페인 추기경 카르바할에게 보고했다. “인쇄 상태가 매우 깨끗하고 오류 없이 정확하여, 대주교님께서 안경 없이도 편히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구텐베르크 성경은 50권이 채 되지 않으며, 대부분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당시에도 적지 않은 가격이었지만, 지금 그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다. 1978년, 마지막 완전판의 경매 낙찰가는 330만 달러였고, 9년 후에는 한 권이 540만 달러, 1장은 15만 달러에 팔렸다. 가난해진 구텐베르크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구텐베르크가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지금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가 유럽과 나아가 신대륙에서 서적의 대량 생산이 가능한 길을 열었기에, 교육받고 계몽된 대중이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과연 종교개혁,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가 올 수 있었을까? 구텐베르크 성경은 현대로 향하는 관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20세기 말, 잡지 《타임 라이프》는 구텐베르크의 기술적 혁신은 지난 1천 년간 인류가 이루어 낸 성취의 정점이라고 평했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그야말로 ‘좋은 책’이다.
근세
사회계약론? 저자 : 장 자크 루소 ? 창작 연대 : 1742년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은 프랑스 혁명을 상상하고 불꽃을 피우게 한,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적인 책이었다. 저자 루소는 혁명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에 사망했으므로 자신이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이 역사적 사건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이 책의 영향력으로 인해 “프랑스 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루소의 열혈 추종자 중 하나인 로베스피에르는 일기에 이렇게 표현했다. “지고한 존재여!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도록 가르쳐 준 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어릴 적 당신은 내 본성의 진정한 존엄성을 인식하고 사회 질서를 지배하는 큰 원칙을 고찰하도록 이끌었습니다.”
1712년 제네바에서 태어난 루소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재능 있는 음악가이고 작곡가였다. 젊은 시절에는 수학적 음악 표기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 대륙의 여러 도시를 여행한 뒤 서른 살 무렵 파리에 정착해 곧 문화·철학계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파리는 그의 정신적 고향이었고, 그의 철학에 가장 열렬하게 반응한 곳이기도 했다.
루소는 저명한 계몽주의 사상가인 드니 디드로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사상가로서 그의 커리어는 1750년 예술과 과학의 윤리적 도움에 대한 논문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 논문의 주제를 발전시켜 1754년 첫 번째 주요 저작인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원시 상태’의 인간을 가정하고 불평등이 형성되는 과정을 고찰하며, 원시 상태의 인간은 아직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았고 “자연에 의해 짐승의 어리석음과 문명인의 치명적인 지식으로부터 자연적으로 똑같이 떨어진 중간에 위치할 때” 유순함을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루소의 주장에 따르면, 원시인은 시민 사회에서 야수 같은 생명체와 퇴폐적인 현대인 사이의 행복한 중간 지대를 차지한다. 그는 시민 사회가 진보의 동력이 아니라 인간 부패의 동력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시민 사회가 원인이 아니라면 사유 재산이 깊은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밝혔다.
어느 땅에 울타리를 치고 “여기가 내 땅이다.”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최초의 사람이 문명사회의 진정한 창시자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말뚝을 뽑거나 도랑을 메우며 “여러분, 저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이 땅에서 나는 과일은 모두의 것이고, 이 땅도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여러분은 파멸할 것이오.”라고 외쳤다면, 얼마나 많은 범죄와 전쟁, 살상, 공포와 불행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었을까.
누가 봐도 혁명적인 이 주장에 당시 권력자들은 루소를 위험한 변절자로 여겼다. 1762년, 더 대립적인 주장을 펼친 『에밀 또는 교육론(Emile ou De l'education)』을 발표하자 더 많은 논란이 뒤따랐다. “만물이 그 창조자의 손을 떠날 때는 선하나, 인간의 손에서는 타락한다.” 기독교 기본 교리를 반박하며 완전한 종교적 관용을 촉구한 이 책은 파리와 제네바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작은 같은 해 발표된 『사회계약론』이었다.
루소는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용문으로 시민 사회가 인류를 타락시킨다는 주장을 펼쳤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웠지만, 어디서나 속박의 상태에 놓여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실은 더 노예가 되어 있다.” 또한 그는 왕권신수설에 반대하며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에 복종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코 힘이 권리를 만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정당한 권력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자.”)
주권은 여성을 포함한 국민(당시로서는 급진적 주장)에게 있으며, 모든 시민이 정부에 참여해야 한다. 루소는 순수한 민주주의 모델을 상기시키며, 모든 것이 평등하고 공동의 의지에 따라 법이 만들어지는 사회를 촉구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의와 평등이 구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정부는 국민의 입법부와 별개의 조직이어야 하고, 집행권이 있으나 국민의 의지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면 교체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유럽의 강대국들은 루소를 위험한 인물로 취급했고, 그는 그 후 몇 년 동안 망명지를 찾아 유럽 대륙을 떠돌아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꿈꾸던 시대를 보지 못한 채 1778년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닦은 영웅으로서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를 어떻게 평가할까. 어쨌거나 사후 16년이 지난 1794년, 그는 국가의 영웅으로 파리의 판테온에 묻혔다. 20세기에 미국인 철학자 윌 듀런트는 루소에 대해 이렇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