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실직 도시

방준호 지음 | 부키


실직 도시

방준호 지음

부키 / 2021년 12월 / 303쪽 / 15,000원





운명들 ? 정규직과 비정규직




‘공간의 운명과 사람의 운명이 얽혀 있다’ 같은 문장은 그럴듯한 일반론이지만, 두루 통용돼 세부를 놓치고 마는 일반론의 한계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공간의 운명에 ‘어떤’ 사람은 더 쉽게 흔들린다. 더 쉽게 무너지며, 더 쉽게 돌아오고, 다시 더 쉽게 흔들린다. 또 더 쉽게 무너진다. 강민우는 쉽게 흔들리고, 떠나고, 돌아온 사람인데, 그렇다고 자기가 무너지고 외면당한 도시를 저주하지 않는다. 웬만한 군산 사람들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강민우는 한국지엠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실직했는데, 2018년 실직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은 만나고서 알았다.

비정규직 1세대


45살 강민우가 군산 산업 단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차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23살 때인데, 대우차 공장 노동자가 되기로 했다. 1997년 강민우는 군산 대우자동차 직업 기술 훈련원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직업 기술 훈련원에 들어가 교육받고, 해외 연수를 다녀오고, 공장 노동자가 된다’는 자동차 공장으로 향하는 당연한 경로가 있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이 시점까지, (그를 만난 이유이자 정체성인) 비정규직은 중요한 단어가 아니다. 사실 강민우는 존재하는지도 모른 단어다.

‘한국에서 비정규직은 1996년 12월, 노동관계법이 통과되며 저변을 크게 넓힌다. 노동자 쪽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다만 법 하나가 수백만 노동자의 피부에 닿는 변화로 곧장 이어지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참고로 노동관계야 어쨌든 사람 사이의 일이다. 그런데 사람의 일은 법보다 관행이나 관성에 더 크게 좌우된다. 제조업 노동은 최소한 1980년대 후반 이후 10년 정도 비교적 균질한 노동자 지위, 그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연대, 그를 바탕으로 한 나날이 좋아지는 처우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1년 뒤인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이전의 관행? 그 무엇이었든 뒤엎어 버릴 만큼 강렬한 충격이다. 위기는 많은 것에 새로운 정당성을 부여한다. 세상이 뒤집혔으니 새로운 표준이 필요하다. 이미 세계 모든 나라가 ‘이 표준’을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비정규직은 걷잡을 수 없이 노동의 표준으로 번져 갔다. 이제 노동자와 기업의 관계는 오로지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일’과 그에 대한 ‘대가’라는 계약 관계로만 엮였다. 그나마 온정적인 시야에서도 복지랄지 노동자 교육이랄지 훈련 같은 것은 정부가 복지 제도 확대를 통해 메워야 할 영역으로 여겼다. 복지 제도를 확충했으나, 물론 역부족이다. 마치 예상한 듯 맞물린 제도와 확산의 계기가 절묘하다.’


모든 약속은 무너졌다. ‘직업 기술 훈련원 → 공장 노동자’라는 입직 경로는 사라졌다. 공장에 잠시 남기는 했다. 협력 업체에서 파견된 비정규직 형태라고 했다. 받아들였다. 그렇게 강민우는 비정규직 1세대가 되었다. 다만 잠시 일하다가 공장을 떠나기로 했다.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이후 공장의 행로는 알려진 대로다.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됐다. 2000년 대우차는 최종 부도 처리됐다. ‘보이지 않는 비전’은 공장 자체의 몰락 때문만은 아니다. 강민우 자신의 처지 때문이기도 했다. 그나마 정규직 노동자는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며 공장에서 버틸 수 있었다. 공장을 떠나며 강민우는 군산도 떠났다.

여러 도시를 돌았다. 컨테이너로 된 가건물 짓는 일을 해 봤다. 택시 회사에 들어가 봤다고도 했다. 반면 대우차 군산 공장 정규직 노동자들 분위기는 상대적으로 잠잠했다. 그때 군산 대우차 공장 정규직이던 박철수는 동료들과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낡은 부평 공장은 위험해 보였지만 군산은 신식 공장이었으니까 누구라도 인수해 갈 거라고들 했어. 부평 쪽 노동조합에서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긴 했는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했던 것 같지는 않아. 우리는 어차피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자리에 따라, 각자 다른 크기의 고통을 짊어졌다.

같은 자리 다른 노동자


예감대로 군산 공장의 새 주인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기대가 많았는데, 약간의 의구심도 섞였다. ‘2002년 지엠이 새로운 공장 주인이 됐다. 다만 공장은 쪼개어졌다. 승용차 공장만 지엠으로 팔렸다. 상용차 공장은 또 얼마간 주인을 기다렸다. 다시, 이번에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나뉘었다. 그때 상용차 공장에서 일했던 최재춘 민주노총 군산지부장은 팔려 가는 승용차 공장을 마냥 부러워했다. 1년 뒤 상용차 공장도 인도 타타그룹에 팔렸고, 타타대우상용차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지엠에 견주면 어딘지 미약해 보이는 회사였다. 다만 운영 방식에서 지엠 공장과 좀 달랐다. 타타대우상용차 군산 공장에는 나름대로 기업 경영과 노동자 처우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자율성이 부여됐다. 헤드쿼터의 영향력이 적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공장의 자율성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그때 많은 이들은 알지 못했다.’

강민우는 2003년 다시 군산에 돌아왔다. 일터는 한국지엠 군산 공장이었다. 2003년 군산시 자동차 관련 노동자는 18.6퍼센트 늘었고 이듬해에는 무려 85.1퍼센트 증가했다. 증가한 이들은 누구였는가. 강민우였다. 소속 업체 이름표를 가슴에 단 ‘한국지엠 비정규직 사내 하청 노동자’로 공장에 다시 들어온 이들이다. 한국지엠 군산 공장의 채용 방식은 달라져 있었다. 교육받고 곧장 정규직이 되는 일은 사실상 없었다(이제부터 내가 아는 취업이다). 일단 비정규직을 뽑았다. 협력 업체에 소속된 사내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발탁 채용’ 형태로 정규직이 되는 통로 정도가 그나마 열려 있었다.

막 돌아온 2003년, 공장에는 아직 일감이 많지 않았다. 딱히 우리 회사 사람으로 대우해 주는 것도 아니고, 충분한 임금을 주는 것도 아닌 회사에 비정규직은 별다른 애착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실망하고, 혹은 못 버티고 다시 떠났다. 2003년 입사한 강민우는 그래도 참고 머물길 선택한 쪽이다. 좋아질 날만 기다렸고, 정말 좋아지기 시작했다. 30만 대를 최대치로 보는 한국지엠 군산 공장 자동차 생산량은 2006년 24만 2,000대, 2007년 25만 8,000대까지 늘어났다.

공장의 생산이 늘어나는 동안 누군가는 정말로 정규직이 될 기회를 얻었다. 누군가는 그대로 비정규직에 머물렀다. 기준은 불확실했다. 지게차를 몰던 비정규직 고현창은 2005년 정규직이 됐다. 강민우처럼 2003년 비정규직으로 공장에 들어와 주말이든 야근이든 가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이룬 결과”다. 고현창은 정규직이 되고 차체 라인으로 자리를 새로 배정받았다. 정규직이 되지 못한 강민우는 여전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른 기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도 정말 열심히 일했다. 일을 잘해서 리더, 조장, 반장 같은 직책을 두루 돌았다. 하지만 끝내 정규직만은 못 됐다.

강민우는 어느 순간 공장의 분위기가 변했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다 “형, 동생” 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점점 정규직 전환자가 늘고, 공장 안의 위계가 엄격해졌다. 강민우는 “사람들이 어딘지 이기적이 되어 가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싫어도 싫다고 입 뗄 수 없는 비정규직 쪽으로 궂은일이 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민우는 그냥 묵묵히 일했다. 해고도 겪었는데 이쯤이야.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했다. “아내랑 맞벌이하고 있으니까, 정규직보다 훨씬 적어도 이 정도 임금이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정규직처럼 든든한 노동조합을 가지지 못한 것도 그러려니 했고, 정규직을 맹목적으로 싫어하지도 않았다. “귀족 노조 귀족 노조 하는데요. 정규직 노조가 임금을 올려야, 우리 같은 비정규직도 그나마 조금은 임금을 올려 달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정규직 노조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았어요.”

‘같은 시간, 본사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타타대우상용차 공장에서는 변화가 나타났다. 2003년부터 정규직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임금을 동결하거나 인상률을 제한하고 대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조금씩 정규직 전환이 이뤄졌다.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공장이었고, 그래서 노동자의 의견이 좀 더 반영될 수 있었다는 점이 이룬 결과”라고 김현철 교수는 평가했다.’




찬란 ? 세계 도시를 꿈꾸다



하늘엔 애드벌룬


백일성은 1991년 고향인 정읍에서 군산으로 건너와 동사무소 직원부터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5월 7일 백일성은 군산 산업 단지 서쪽 끝에 앉아 있다. 시민 2,000명이 모였다. 무대에는 이날이 어떤 날인지를 알리는 데만 집중한 고딕체 글씨 - ‘경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 기공식 축.’ - 가 선명했다. 백일성은 기공식 행사 앞줄에 초대됐다. 이명박 대통령과 나란한 자리다. “7급 공무원이 이렇게 부각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들 주변에서 말했다. 그의 옆에는 협력 업체 노동자가 앉았다. 청와대는 이런 모습을 ‘실용’이라고 불렀다. 백일성의 공로라면 현대중공업 조선소의 군산 유치를 물밑에서 주도한 것이다. 백일성이 조선소 유치에 매달리기 시작한 건 2006년부터다.

이날 백일성과 대통령은 의심 없이 지역 도시의 성공을 규정했다. 대기업 공장 유치. 바다를 메우고, 땅을 고르고, 그 자리에 공장을 세우며 성장하는 방식을 도시는 믿었다. 모든 시민이 그랬다. 큰 공장은 딸린 협력 업체를 데려올 테고 노동자를 모을 것이다. 그들을 위해 지은 거주 시설과 문화 시설과 교육 시설은 노동자를 정착시킬 것이다. 일하는 사람이 군산에 있으므로 지역과 기업은 더욱 단단하게 얽힐 것이다. 대우차와 한국지엠을 경험한 터라 확신은 더했다.

괜히 장난친 이유


군산 산업 단지에 있던 번영중공업도 이 들썩임 속에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현대중공업 사외 협력사(블록 업체)가 되어 배의 일부 블록(선수나 선미)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을 해 보기로 했다. 김광중 번영중공업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들어온 현대중공업 협력사들은 대부분 외지 기업이었어요. 군산 기업으로서 한번 도전해 보자, 새로운 걸 해 보자, 이런 마음이었어요.”

김광중이 군산 산업 단지 안에서 일을 시작한 건 2000년부터다. 처음부터 조선을 생각했을 리는 없다. 군산의 또 다른 공장인 세아베스틸 사내 협력 업체로 일했는데, 공장 설비를 유지 보수했다. 이는 사실상 사람 파견하는 일이다. 내 공장 없이 하는 일이며, 회사에는 번영기공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때 현대중공업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공장을 짓고, 거기서 정말 뚝딱거리며 무언가 만들고 싶었다. 만드는 일이라면 뭐든 자신 있었다. 새로 들어오는 조선소는 그런 기회였다. 결국 현대중공업 1차 협력사가 됐다. 새로운 기술을 성공한 날이면 직원들 다 같이 환호하고 부둥켜안았다.

점점 감당할 수 있는 기술의 영역이 넓어졌다. 그때마다 현대중공업에서 받을 수 있는 일감도 늘었다. 그 시간을 정점이라고 적어도 무리 없다. 정점의 순간 김광중은 무엇을 하였나? 공장 터를 잡고 기계를 들였다. 아니다. 그쯤이야 별것 아니다. 그때 그는 사람을 모았고, 스승과 제자로 맺어 줬다. 기술을 나눠 준 어르신들은 고마웠다. 성실히 익히려고 애쓰는 젊은이들은 기특했다. 그러므로 그 시절 그가 성공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순간이다. “어르신들하고 소주 한잔할 때, 괜히 기숙사에 올라가서 젊은 애들하고 장난치면서 놀 때, 그런 때요.”



균열 ? 불안한 여유



피로함과 무례


‘2009년. 현대중공업 조선소 유치가 도시의 기대를 한껏 키우는 동안, 자동차 공장도 별 탈 없이 생산했다. 그런데 세계 금융 위기 여파로 2008~2009년 생산량은 이전보다 다소 줄었다. 그래도 제 몫을 했다. 여전히 20만 대 넘게 자동차를 만들었다. 유가의 상승과 하락이 한국 제조업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고유가는 최소한 그 시점 수출을 이끌던 한국의 자동차와 조선업에 준비된 기회쯤으로 여겨졌다. 석유를 캐낼 드릴십이나 해양 구조물 수요가 늘었다. 더 효율적인 연비를 지녀 인기 있는 선박과 자동차가 한국에는 있다. 위기 이후 따라붙을 수요 회복, 특히 (역시 상대적으로 금융 위기 타격을 덜 입은) 중국 수요 회복에 기댈 수 있었다. 위기는 역시 V자 반등을 만들었다. 다수가 위기에서 탈락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회복의 수혜를 고스란히 받는다.’

‘그런데 2013년부터 삐그덕대기 시작했고, 한국지엠 공장의 자동차 생산량은 14만 대 수준까지 떨어졌다. 치솟던 유가도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한국지엠이 만드는 연비 낮은 작은 차가 이제 더는 인기 품목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줄어든 생산량이야 경기에 따라 늘 때도 줄 때도 있으니 이해하고 넘어갈 만하다. 그런데 2013년 지엠은 쉐보레 브랜드를 유럽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당시 한국지엠은 대우의 이름을 완전히 떼어 낸 쉐보레 브랜드 제품을 만들고 있었고, 유럽에 팔리는 쉐보레 차는 군산 공장의 생존에 절대적이었다. 그럼 군산 공장의 앞날은? 불투명한 미래로 공장이 술렁였다.’


우아하고 불안한


지엠의 유럽 철수 발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늘 그랬듯 괜찮아질 것’이라고 공장 안 노동자들은 생각했다. 노동자뿐 아니라 지역 전체가 염려와 위안을 공유했다. 그런데 위기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졌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2015년 2교대였던 생산 방식을 1교대로 바꾸기에 이른다. 그리고 한국지엠 적자도 1조 원에 가까워졌다(9,868억 원). 그렇게 생산량이 줄자 공장 정규직 노동자 박철수에게도 쉬는 날이 생겼다. 물론 불안했다. 임금은 다소 줄었지만 큰 폭은 아니다. 한국지엠 군산 공장의 임금 체계는 직장 이상 관리자부터는 잔업이나 특근 수당보다 기본급 비중이 높다. 박철수는 관리자였다. 박철수는 일단 나름대로 즐겁게 살았다고 했다.

또 다른 정규직 노동자였던 정순철의 생활도 비슷했다. 그는 관리자 아닌 직원이었으니, 잔업ㆍ특근을 기대할 수 없는 공장에서 받는 임금은 꽤 줄었지만, “기본적으로 돈보다 사람들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여유가 생기자 클럽에 나가 탁구를 치거나 배드민턴을 쳤다. 운동도,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그런데 세계 각국에서 펼쳐진 앞선 사례들을 보건대, 생산량이 줄어드는, 즉 쓸모를 잃어 가는 공장을 지엠이 그대로 남겨 둘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미국 공장은 세계 금융 위기 때 버려졌다. 지금의 미국 지엠은 2008년 위기 때와 완전히 다른 회사다. ‘뉴’ 지엠이 맞다. 허울뿐인 점유율 1위, 내연 기관 자동차 업계의 공룡이기를 거부한다. 작고 효율적인 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몸부림친다. 전 세계 생산 공장을 무참히 차례로 잘라 낸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미래 차에 투자한다니, 주주에게는 반가울 일이다. 다만 깎아 낼 뼈였던, 심지어 작은 뼛조각에 가까운 한국 작은 도시에서 지엠의 돌변은 공포다.’


낚시와 골프


공포는 정규직 노동자들한테는 애써 부정할 수 있는 느릿느릿한 일이었다. 하지만 협력 업체한테는 당면한 아수라장이었다. ‘자동차 공장이 힘을 잃는 사이, 조선소가 먼저 요동쳤다. 2014년 현대중공업의 영업 이익은 3조 2,490억 원 적자를 기록한다. 100달러를 가뿐히 넘기던 유가도 2015년에 이르러 배럴당 40달러 수준으로 떨어진다. 고유가를 바라보며 국내 조선사들이 야심 차게, 혹은 무모하게 뛰어들었던 해양 플랜트 사업은 손실만 남겼다. 선박 수주도 줄었다. 조선업 호황이 저물고 있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