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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드론 독서 4

정광모 지음 | 전망


작가의 드론 독서 4

정광모 지음

전망 / 2023년 2월 / 544쪽 / 20,000원





[문학]



[문학일기 18] 반지의 제왕 1-6권


J.R.R. 톨킨 / 김번 외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절대 반지란 무엇인가? 절대 권력이다. 인간은 절대 권력을 쥐는 순간 절대 권력의 노예가 된다. 권력은 인간의 뇌와 행동을 변형시킨다. 인간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력이 인간을 움직이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이 절대 권력의 힘을 중간계라는 가상 세계의 판타지를 통해 세밀하게, 리얼하게 보여 주는 걸작이다.

반지는 그것을 지닌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1권에서 간달프가 프로도에게 말한다. “프로도, 인간들은 위대한 반지들 중 하나만 가져도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어. 물론 더 성장하거나 힘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소한 죽지 않고 생명이 유지되는데, 그러다가 결국은 순간순간이 권태로워지지. 그리고 만약 다른 사람에게 자기 형체를 감추기 위해 반지를 자주 사용하게 되면 몸이 점점 ‘소멸’되지. 그러다가는 영원히 우리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되고, 결국에는 반지를 지배하는 악의 세력이 감시하는 미명의 지대를 헤매게 되어 있어. 언젠가는 말이야. 혹 의지력이 강하거나 원래 선량한 사람이라면 그 순간이 다소 지연될 수도 있겠지만, 의지력이나 선량함이라는 것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일세. 결국엔 악의 세력에 사로잡히고 만다는 것이지.” 권력이 지닌 부정적인 힘을 잘 짚고 있다. 유교가 선비와 권력자에게 권력 실체를 경계하고 또 경계하면서 많은 자기 수행과 견제 수단을 내놓았지만 결국 실패한 것도 이 때문이다. 권력은 인간의 의지력이나 선량함을 뛰어넘고 만다.

엔트(나무수염으로도 불림)가 마법사 사루만에 관해 한 말을 들어 보자. 엔트와 사루만의 관계는 이랬다. “그때까지도 사루만은 사악하게 변신한 것은 아닐 거야. 어쨌든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았지. 난 그와 말을 나누곤 했어. 그가 내 숲 주변을 거닐던 때가 있었거든. 그 당시 그는 아주 정중했지. 언제나 숲에 들어오기 전에, 적어도 나와 마주쳤을 땐 내 허락을 먼저 구했지. 그리고 내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어. 난 그에게 그 스스로는 절대로 알아낼 수 없는 많은 사실을 가르쳐 주었지. 그러나 그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내게 보답한 적은 결코 없었어. 그가 내게 무언가 알려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그는 계속 그런 식이었지. 그를 본 지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내가 기억하기론 그의 얼굴은 돌벽에 나 있는 창문처럼 되어 버렸지. 안에 덧창이 달린 창문 말이야.” (3권 109쪽)

마법사 사루만도 결국 권력의 덫에 걸려들었다고 엔트는 말한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이젠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권력을 잡으려는 거야. 그는 차가운 강철 같은 심장의 소유자여서 자기에게 쓸모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어떠한 생물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그가 사악한 배신자라는 건 이제 분명한 사실이야. 그는 더러운 오르크들과 결탁했어.” (3권 110쪽)

엔트는 사루만과 오르크를 왜 미워할까. 숲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 아래 숲 경계 지역의 나무들을, 좋은 나무들을 베어 넘어뜨리고 있어.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베어 버리고는 썩히는 나무도 많아. 그 나무들은 처음 싹을 틔웠을 때부터 내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내 친구들인데, 그중 대부분은 말을 할 수 있는 것들인데 이제 영원히 가 버리고 말았지. 그리고 한때 노래하는 작은 숲을 이루던 곳이 이제는 그루터기와 가시덤불만 뒤덮인 황무지가 되고 말았어. 나도 너무 무심했지. 손을 놓고 있었어.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어!”

곤도르의 수도 미나스 티리스의 전사인 보로미르와 그의 동생 파라미르는 반지를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 파라미르는 반지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프로도에게 말한다. “난 그게 대로에 놓여 있다고 해도 절대 줍지 않을 것이오. 미나스 티리스가 몰락하고 있으며, 그것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오로지 나뿐일지라도, 나는 곤도르와 나의 영광을 위해 암흑의 군주 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요. 아니오. 난 그러한 승리는 바라지 않소. 드로고의 아들 프로도여.” (4권 120쪽)

파라미르는 형인 보로미르가 반지를 탐내고 또 거기 유혹되었으리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보로미르는 반지의 힘을 이용해 미나스 티리스를 방어하고 힘을 키우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반지 원정대의 한 명이었던 보로미르는 프로도에게서 반지를 뺏으려 하다가 실패하고 오르크들에게 죽고 말았다.

미나스 티리스의 섭정인 테네소르 역시 아들인 보로미르가 반지를 가져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테네소르는 반지를 자신이 가져도 제어할 수 있다고 마법사 간달프에게 말한다. “만일 곤도르가 쓰러지면 사람들은 어디서 도움을 얻을 수 있소? 만일 내가 반지를 이 궁성 지하에 갖고 있을 수 있다면 우린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며 떨지 않아도 될 것이고, 최악의 순간을 염려하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의 계획도 방해받지 않을 것이오. 내가 그것의 유혹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날 잘 모르는 것이오.”

간달프는 테네소르에게 이렇게 반박한다. “당신은 강하니까 어떤 문제들에 있어선 스스로 제어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당신 손에 들어가면 당신을 정복하고 맙니다. 만일 당신이 그걸 민돌루인산 아래 깊이 묻는다 해도 그건 마치 어둠이 번지듯 당신 가슴에서 불타오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후에 따를 더 나쁜 결과가 우리에게 닥칠 거요.” (5권 114쪽)

소설에서 강력한 의지와 불굴의 충성을 보이는 자는 프로도의 하인 샘이다. 모르도르 가까이에 있는 산맥에서 샘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는 돌아갈 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드디어 진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식량은 기껏해야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밖에 지탱이 안 될 것이며, 임무를 마치고 나면, 그들은 그 끔찍한 황야 한복판에서 집도, 먹을 것도 없이 결국은 외롭게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 떠날 때 결심했던 건 무엇보다 주인님을 끝까지 돕는다는 것이었어. 그러니 주인님과 함께 죽는 것도 내 소임이지. … 그러나 샘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사라지자, 아니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자, 그건 오히려 새로운 힘이 되어 나타났다. 샘의 평범한 호빗 얼굴은 안으로 다져진 의지로 인해 엄숙하고도 단호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6권 64~65쪽)

모르도르에 가까이 가자 프로도 역시 반지의 힘에 짓눌려 탈진해서 죽을 지경에 이른다. “그동안 프로도는 말 한마디 없이 반쯤 몸을 구부린 채 비틀거리며 걷기만 했다. 눈에는 더 이상 발아래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반지의 무게는 점점 가중되어 신체적으로 엄청난 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 가해졌다.” (6권 67쪽) “프로도는 의지를 모두 발휘해서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다시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간신히 두 눈을 뜨고는 높이 솟아오른 운명의 산 검은 비탈을 쳐다보고 측은하게도 두 손으로 기기 시작했다.” (6권 75쪽)

절대 반지를 파괴하는 유일한 방법은 불의 산 오로드루인 깊숙한 곳에 있는 운명의 산의 틈을 찾아 그 속에 던져 버리면 된다. 그곳은 용암이 끓는 화산이다. 악의 제왕 사우론은 반지가 자기 목 밑에까지 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그는 막판에야 자신의 엄청난 실수를 깨달았다. 그는 누군가가 반지를 사용해서 엄청난 힘을 행사할 것을 두려워했지만 반지를 가진 자가 반지를 파괴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지의 강력한 힘, 절대 권력의 힘은 프로도가 반지를 삼마스 나우르의 문, 화산의 용암에 던져 버리기 직전에 마음을 바꾸는 데서 나타난다. 프로도는 또렷하고 힘차게 외친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난 이 일을 할 수가 없어. 아니, 하지 않겠어. 이 반지는 내 것이야!” 그렇게 외치면서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 순간 프로도는 샘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샘은 입을 딱 벌렸지만 소리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6권 83쪽)

골룸이 보이지 않는 프로도와 싸우고 이빨로 프로도의 손가락을 잘라 내서 반지를 빼앗지 않았다면 프로도 역시 반지의 힘에 휩쓸려 무너졌을 것이다. 반지를 쥔 골룸이 화산의 벼랑에서 떨어지면서 반지는 파괴되고 말았다. 악마의 탑들은 무너져 내리고 성벽도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땅이 진동을 하며 평원이 갈라지고 융기하자 오로드루인 산 전체가 휘청거렸다. 드디어 반지를 파괴한다는 장대한 반지 원정대의 임무는 끝난 것이다.

프로도가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위험한 여행을 떠난 나이가 50세라는 게 놀라웠다. 영화에서는 프로도가 청년으로 보인다. 영화와 소설의 이미지가 어긋나는 지점은 여럿이다. 소설은 반지가 용암 속에서 파괴되는 최후의 장면을 건조하게 그린다. 영화는 샘이 반지를 끼려는 프로도를 말리고, 반지가 용암으로 떨어져 색이 변하고 요정 문자가 나타나면서 사라지는 과정을 장대하게 보여 준다. 문자 이미지를 영상 이미지로 바꾸는 과정은 쉽지 않다. 각색과 촬영과 배우의 힘이 보태져야 한다. 『반지의 제왕』 소설은 탁월하다. 각색해서 만든 영화도 탁월하다.

[문학일기 44] 토지 1-20권


박경리 / 나남출판



토지 전권을 다 읽었다. 예전에 읽었지만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한 훈련 과정으로 다시 읽었다. 토지는 인물 묘사가 백미다. 서희와 길상을 비롯해서 윤씨 부인, 최치수, 조준구, 평산과 칠성이, 함안 댁, 임이네, 두만네, 윤보, 문 의원 등등 인물 하나하나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시대에 꼭꼭 박혀 너무나 잘 살아 있다. 절절한 사랑 이야기도 백미다. 용이와 월선이, 귀녀와 강 포수의 사랑은 심금을 울린다. 현대의 막장 드라마와 연애 드라마의 원조가 『토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만 같다.

1권과 2권에 최 참판 댁이 재산을 모은 과정이 간간이 나온다. 흉년에 쌀 한 말 주고 논 마지기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다. 최 참판 댁 여인네들이 악착같이 매집해서 만석지기 땅을 모았다는 말이다. 소설 『혼불』에서도 청암 부인이 그런 과정을 거쳐 땅을 사 모았다는 말이 나온다. 한국 부동산 투기의 원조는 윤씨 부인과 청암 부인 같은 양반 댁 부인들인 셈이다. 조선의 양반은 곳간 열쇠를 부인에게 넘겨주고 재산의 유지와 형성은 모른 척하고 지냈다. 그런 문화가 세월을 따라 이어져서 지금도 월급봉투를 통째 아내에게 넘겨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 요지를 휩쓰는 부동산 투기는 상당 부분 여자들이 해내고 있다. 그리고 아직 한국 여자들은 주식에 손을 많이 대지 않는다. 한국 가계 자산은 80% 정도가 부동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유산은 뿌리가 깊다.

2권에서 김개주가 윤씨 부인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에는 김개주가 절에서 윤씨 부인을 겁탈해서 구천을 낳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바꾸었으면 좋겠다. 청상과부인 윤씨 부인은 절에서 잘생긴 김개주를 만나 한순간에 반해 정을 맺게 된다. 그러나 윤씨 부인은 김개주와 도망을 칠 생각은 없다. 집안을 짊어진 양반 부인의 무게를 계속 진다. 윤씨 부인을 시중든 어멈은 윤씨 부인이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아이를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진실은 윤씨 부인만 속으로 간직한다.

작품에 동학군을 이끌고 온 김개주가 야밤에 윤씨 부인을 만나는 장면을 넣으면 이런 대사가 어떨까?

김개주가 묻는다. “실수였소?”

윤씨 부인은 말이 없다.

김개주가 다시 말한다. “장난으로 한 번 놀아 본 것이요?”

윤씨 부인은 여전히 꼿꼿이 앉은 채로 입을 다물고 있다. 태산 같은 침묵만 방을 감싸고 있다.김개주가 묵직하게 말한다. “나는 그대를 잊은 적 없소!”

그 말을 하고 김개주는 방문을 열고 나선다. 다음 날 새벽에 동학군은 최 참판 댁에서 물러나간다.

임이네의 성격 묘사를 보자. 임이네는 이런 사람이다. “칡넝쿨같이 줄기찬 생활력과 물가의 잡풀같이 무성한 생명력을 지닌 임이네, 식욕과 물욕과 성욕이 터질 듯 팽팽한 살가죽에 넘쳐흐르듯 왕성한 임이네는 대지에 깊이 뿌리박은 여자, 풍요한 생산의 터전이라고나 할까.” (4권 122쪽)

서희의 성격은 어떤가? 열한 살이면 행세하는 집안의 규수는 음전해야 했다. 그러나 윤씨 부인이 죽고 조준구가 최 참판 댁을 장악하고 난 후에도 서희의 성격은 꺾이지 않는다. 서희가 조준구의 아들 꼽추 병수를 만나자 하는 말이다. “가아! 다시, 두 번 다시 별당에 얼씬거렸다간 당산나무에 매달아서 때려죽일 테야.” (3권 358쪽)

서희는 별당 아씨 흉을 보는 삼수를 발견하고 말채찍으로 삼수의 등짝을 후려치고 외친다. “수동아! 길상아! 이놈을 묶어라!” 조준구의 아내 홍 씨가 앞으로 다가서려 했을 때 서희는 말채찍을 흔들며 홍 씨를 칠듯한 기색을 보였다. (3권 363쪽)

서희는 어리지만 강인한 성격과 놀라운 의지를 지녔다. 최 참판 댁을 지키던 수동이가 죽고 난 뒤에 서희가 하는 말을 들어 보자. “정말 그렇다면 나는 귀신하고 싸울 테야! 신령님네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시오 골백번 그래 봐야 아무도 살려 주진 않던걸. 구구하고 치사스러워.”

놀라며 봉순이 쳐다본다. “모조리 다아 잡아가라지. 하지만 나는 안 될걸. 우리 집은 망하지 않아. 여긴 최 씨, 최 참판 댁이야! 홍가 것도 조가 것도 아냐! 아니란 말이야! 만의 일이라도 그리 된다면 봉순아? 땅이든 집이든 다 물속에 처넣어 버릴 테야. 알겠니? 난 그렇게 할 수 있어. 내 원한으로 불살라서 죽여 버릴 테야. 난 그렇게 할 수 있어.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테야. 내가 받은 수모를 하난들 잊을 줄 아느냐?” (4권 147~148쪽)

5권부터는 용정으로 옮겨 간 서희와 평사리 사람 이야기로 이어진다. 서희는 공 노인과 어울려 뛰어난 사업 수완을 보인다. 고루한 김 훈장은 이런 서희가 탐탁잖다. “명색이 양반이면 사내도 못할 짓을, 그래 규중의 규수가? 아무리 낯선 땅이기로, 겨우 열아홉 나이의 처녀 몸으로 미천한 시정배하고 한당이 되어 장사라니? 투기사업이라니?” (5권 27쪽)

어떻게 서희는 상업에 성공한 것일까? “어쨌든 신용 하나가 밑천인 공 노인은 서희에게 둘도 없는 좋은 길잡이였다. 윤씨 부인이 농발 대신 괴어 두었던 막대기 속의 금은을 국자가 청인에게 주선하여 거금 삼천 원을 만들어 준 것도 청국 말에 능하고 그쪽 사회에 면식이 많은 공 노인이었다. 자금 삼천 원을 굴리는 데 적절하게 주선한 것도 역시 공 노인이었다.” (5권 80쪽) 서희는 콩 특히 백두를 매점하여 곳간에 쌓아 올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안방에 앉은 서희는 촉수와도 같은 그 예리한 신경을 사방으로 뻗쳐 삼 년 동안 자본을 두 배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공 노인과 길상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못한 일이었다. (5권 81쪽)

떠나온 사람들은 모두 고향을 앓는다. 길상이 환상에서 떠올리는 평사리와 사람들을 보자.



“적막한 바람과 눅진눅진한 현기증과 오색의 환상과 환상, 장작불 타는 시꺼먼 밤의 오광대놀이가 한마당 막을 올리고 지나간다. 숲이 나타나고 황톳길이 나타나고 섬진강을 따라 굽이쳐 뻗은 삼십 리, 하동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그 위로 세월이 발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마음 바닥을 쿵쿵 밟으며 지나가는 세월의 발자국 소리, 끊이지 않는 기나긴 세월의 행렬, 지나가다가 어떤 것은 되돌아오곤 한다. 윤씨 부인의 모습이 지나간다. 우관 스님이 지나간다. 문 의원, 최치수, 김 서방, 봉순네, 수동이, 돌이, 이들은 무리를 지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죄악의 늪같이 꺼무한 눈동자를 깜박거리지도 않고 쳐다보며 지나가는 여자는 귀녀가 아닌가. 텁석부리의 강 포수는 곰같이 뒤뚝거리며 가고 도포 자락을 너풀거리며 뻐드렁니의 김평산이 지나간다. 헤일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세월과 팔짱을 끼고 어두운 길을 지나가는 것이다.” (5권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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