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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항암녀의 속.엣.말

이경미 지음 | 예미


씩씩한 항암녀의 속.엣.말

이경미 지음

예미 / 2021년 10월 / 264쪽 / 15,000원





치유



뭣이 중헌디


내게 2017년은 잊을 수 없는 한 해이다.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 오가며, 병원에서 새벽을 맞이한 것도, 내 발로 응급실을 걸어 들어간 날도 여러 밤이다. 나는 그해 봄날, 치료가 필요한 병에 걸린 것을 알았고, 일도 육아도 내려놓고 치료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 모양새가 이상하다 싶고, 멍울이 만져지는 것 같아 병원을 찾았다.

“어떻게 오셨나요?”

“유두가 자꾸 들어가고 가슴에 멍울이 만져져서요.”

의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무서운 얘기를 하세요.”



함몰 유두와 가슴 멍울은 흔히 나타나는 유방암의 초기 증상이어서 내가 열거한 자가 검진 결과는 의사에게도 섬뜩했나 보다. 난 담백하게 대답했다.“사실이니까요.”



의사는 나를 눕혀 놓고 촉진을 했고, 이런저런 검사를 권유했다. 그리고 당일 검사 결과를 보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가슴에 바늘을 찔러 넣어 세포 검사를 했다. 빠르게 진행되는 검사 과정과 검사를 진행하는 의사의 얼굴로 보아 비관적이었다. 내가 암일 수도 있다는 확률이 높아지고 있었다. 결과는 일주일 후에 보기로 했다.

유방암이었다. 노랫말처럼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어두운 표정으로 결과를 전하는 의사는 항암을 먼저 하자고 했다. 그러고 나서 수술을 하자고 했다. 크기로 보아 전절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절제는 가슴을 모두 도려내는 것이다. 복원은 힘들다고 했다.

항암이 뭔지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몰랐던 나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항암은 힘들 것이라고 했다. 직장도 쉬어야 한다고 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가장인 내게 일을 하지 말라니……. 아득했다. “밥은 할 수 있나요?”

“할 수는 있겠지만 힘드실 거예요. 항암하고 일주일은 옆에서 돌봐 주시는 분이 있어야 할 겁니다.” 내 손길이 필요한 아이가 셋이나 되고, 나는 엄마인데 밥도 할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누가 나를 돌본다는 말인가.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살림은 어쩌란 말인가.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한다는 말인가. 그 흔한 보험도 깨고 없었다.

‘설마, 내가 암에 걸리겠어?’라는 마음에 몇 년 전 보험을 정리한 탓이다. ‘하필 내가 왜?’라는 원망은 없었다. 내겐 닥친 일을 처리하는 게 더 급했다. 아이들 케어와 치료, 그리고 어떻게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해야 할지가 더 중요했다.

부모님이 아시면 걱정을 하실까 봐 그게 더 걱정되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마침 부모님은 미국 갈 비행기를 예약해 둔 상태였다. 아시면 엄마가 안 가신다고 할 텐데, 계획된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될까 봐 싫었다.

나는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지 않고 병원 검사를 이어 갔다. 병원을 옮겨 다시 검사하고 수술 날짜를 받았다. 옮긴 병원에서는 가슴 복원이 가능하다고 했다. 헤벌쭉 웃음이 났다.

수술할 병원을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고, 결국 부모님께 내가 암 환자가 되었노라는 고백을 했다. 부모님 두 분이 가기로 했던 미국엔 엄마 대신 내 아이 둘이 동행했다. 그렇게 가족들의 도움 속에 나의 병원 생활은 시작되었다.

수술 후에 한 달의 회복 기간을 갖고 항암을 시작했다. 항암을 하며 나의 컨디션은 좋아졌다가 안 좋아지기를 반복했다. 항암은 그런 것이었다. 머리가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근육통에 밤새 끙끙 앓고 면역력이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입맛이 없어도 먹어야 했고,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무거운 다리가 버거워 눈물이 찔끔 났다. 얼굴은 호빵처럼 부었고, 손톱은 까맣게 변했으며 발톱은 피가 뚝뚝 흐르다가 결국 빠져 버렸다. 내 인생 중 가장 못생김을 걸치고 다니는 날들이었다.

그래도 사람은 만났다.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오는 이도 많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고맙고, 뭉클했다. 검사 때부터 늘 곁에 보호자처럼 있어 준 친구, 병상을 배우자처럼 지켜 준 친구, 잔소리 담당 엄마에, 말벗이 되어 주던 지인들. 한 번 다녀가는 것도 시간을 내어야 하는 일인데, 몇 번이고 찾아 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한 환자 놀이를 할 수 있었다.

병문안을 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요즘은 꽃을 선물할 수 없다는 것. 입원해서 병문안을 받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병으로 된 음료는 쌓이고 쌓여 퇴원할 때 짐이 됨을, 그래서일까.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봉투를 주고 간다. 받는 사람 필요할 때 쓰라고 말이다. 받을 때는 민망하지만 쓰게 되는 순간엔 고마운 게 현금 아닌가.

병문안을 갈 때면 늘 먹을 것을 챙겨 갔는데 생애 처음 입원한 환자가 돼 보니 현금처럼 고마운 게 없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일도 안 하는 백수인지라 용돈처럼 쥐여 주는 봉투가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나 싶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았으니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다녀간 사람들의 하나같은 말은 애들 걱정하지 말고 내 몸 하나만 챙기라는 것이었다. “밥은 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던 나는 전남편의 도움으로 애들 밥걱정을 하지 않고도 요양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덕분에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지인들 얼굴을 봤다. 그들 대부분은 밥을 사 주었고, 나는 또 그렇게 맨입만 가지고 나가 얻어먹기가 일쑤였다. ‘상전도 이런 상전이 없고,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싶은 날들이었다. 나는 아프기만 하면 됐고, 기꺼이 견뎌 내기만 하면 됐다.

나의 투병 생활은 주변 사람들 덕분에 수월했음을 안다. 눈썹이 다 빠져도, “내가 본 항암 환자 중에 젤 예쁘다.”라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덜 힘겹게 견딜 수 있었다.

망가진 모습에 속상해하는 내 모습을 본 엄마는 “그게 뭐가 중요하니? 건강만 회복하면 되지.” 하신다. 가슴 복원을 하려는 나에게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고생해서 그걸 만들어?” 면박을 줬다. 엄마에게는 중요하지 않지만 내겐 중요한 일인데 말이다.

그깟 가슴이 뭐가 중요하냐고 하던 엄마는 내 눈썹이 다 빠지자 “요즘은 속눈썹도 붙이더라.”라며 등을 떠밀었고, 딸내미 손톱이 까맣게 되자 평생 매니큐어라고는 발라 본 적도 없는 양반이 네일샵에 다녀오라며 잔소리도 했다. 보이지도 않는 가슴은 중요하지 않다더니 눈에 뵈는 모양새는 신경이 쓰이셨나 보다.

한 번은 점심을 같이 먹고 헤어지려는 친구가 내 손에 봉투 하나를 쥐여 준다.

“예쁜 모자 하나 사서 써.”

“지난번에도 줬잖아!” 손사래를 쳤다. 이미 병문안을 다녀간 친구였다.

“뭣이 중헌디!”

이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멀어져 갔다.



‘뭣이 중헌디…….’ 제법 상한가를 찍었던 영화의 대사였다. 공포스럽고 괴기스러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터라 보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패러디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서 그 대사는 알고 있었다. 뭣이 중헌디….

그녀에게 나는 돈보다 중했나 보다. 듬성듬성 빠진 나의 자존심을 예쁜 모자로 덮어 주는 그녀의 배려에 울컥 눈물이 솟았다. 내가 중요하다고 말해 준 나의 속상함을 함께 아파하는 그녀가 너무도 고마웠다.



상처



자존감이 뭐예요?


지금은 흔한 말이지만 예전에는 ‘그런 말이 있었나?’ 싶은 단어가 있다. 요즘은 자기계발이나 육아에도 필수가 되어 버린 그것. 바로 자존감이다. 생각해 보면 자존심은 흔했지만, 자존감은 낯선 것이었다. 세월이 만든 아니, 시대가 발견한 단어가 아닐까?

자존감(self-esteem)의 사전적 정의는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당신의 자존감 지수는 얼마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할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시간을 벌며 생각하려고 하지 않을까. 나를 정확히 알고 거침없이 대답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가진 부모에게 다시 한번 질문을 해 보겠다. 많은 부모의 대답은 아마도 ‘내 아이는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어요.’일 것이다. 세상 어느 부모도 ‘내 아이는 자존감 따위는 없이 자랐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 주려고 노력한다. 나 역시 그랬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자존감 하나만큼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내가 특별히 내 아이의 자존감 키우기에 집중한 이유는 다름 아닌 나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보상 심리가 작용한 것이었다. 바닥을 치는 자존감에 존재감 없이 자랐던 성장기를 내 아이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핍은 필요를 부르고, 필요는 노력을 이끌었다.

2남 2녀의 첫째인 언니는 공부를 잘했다. 둘째인 오빠도 공부를 잘했다. 셋째인 나는 뭐 그냥 그랬다. 보통보다 잘해도 그건 잘하는 게 아니었다. ‘전교 1등이네, 2등이네’ 하는 언니랑은 감히 비교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막내는 못 해도 상관없다. 낳기도 전부터 할머니 사랑을 독차지한 막내는 아들이다. 그런 집에서 못난이 딸로 자라기란, 말하면 입만 아플 일이고, 시퍼런 멍을 건드려 통증만 더하는 일이니 말을 아끼는 게 낫겠다. 그냥 개밥에 도토리라는 표현이 딱 맞을 것이다.

시부모님께 완벽한 며느리였던 엄마는 늘 부지런했고, 돈 버는 데 선수였고, 자식에겐 의무적이었다. 밥해 주고, 입혀 주고 우리 세대의 엄마가 그렇듯 헌신적이었다. 그런 엄마도 벅찰 때가 있었으리라, 무언가 안 풀리고 속상한 날이 있었으리라. 그럴 땐 셋째 딸이 제일 거슬렸나 보다. 행동이 느려터진 나는 엄마 속을 터지게 했다.

엄마는 속이 터지면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가끔 매를 들기도 했다. 난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매를 얻어맞는다. 엄마는 도망도 안 가고 맞고 있다고 속이 터진다며 더 붉으락푸르락하셨다.

잘못해서 매를 벌었으니 응당 맞아 드려야 하는 게 죗값을 치르는 길이라는 생각은 어린 나의 소신이었다. 내가 맞아서 엄마 분이 풀리면 그 자리에서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설의 고향’을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종아리를 맞고 물볼기를 맞아도 그 자리를 지키는 죄인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는 착한 아이였지만 여전히 매를 벌었다.

그러다 결국 엄마 입에서 참지 못한 말이 튀어나온다.

“뒷산 호랑이는 저것도 안 잡아먹고 뭐 하나 몰라.”

‘뒷산 호랑이….’



실제로 우리 집 뒤엔 뒷산이 있었다. 호랑이가 살 만한 곳이다. 엄마는 내가 호랑이 밥이 되길 바란 거다. 내가 사라졌으면 한 거다. 그것도 호랑이에게 잡아 먹혀서. 엄마는 나에게만 그 말을 했다. 언니 오빠 동생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다. 나만 우리 집안의 미운털이었다.

알고 있다. 그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 그냥 내뱉은 말이었고 홧김에 그랬다는 것. 하지만 열 살 안팎의 어린아이에겐 분명 크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후로 나는 뒷산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호랑이가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기진 호랑이에게 살냄새라도 흘렸다가 엄마가 말한 것처럼 될지도 모를 터였다. 덕분에 나는 아직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구박은 받았어도 내 목숨 보전하는 데 일가견이 있으니 충분히 강인하다 하겠다.

하지만 자존감은 바닥이다. 부모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유년기는 정서적 결핍을 낳았고, 정서적 결핍은 자존감의 부재로 연결됐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아이는 본인이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알지를 못하게 되니 고질적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알지 못했던 나는 자신을 아끼는 방법을 몰랐고, 모른 채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것 하나 달라지지 않고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천성이 순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자존감이 없었던 거였다. 귀한 대접을 받아 보지 못하니 노예근성이 생겼다고나 할까. 부당해도 부당함을 모르고 억울해도 억울함을 모르는 거다.

어린 시절 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다. 착한 아이는 성장하면서 그대로 착한 여자 콤플렉스로 이어졌다. 결혼 후에도 착한 여자 콤플렉스는 착한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이어져 살았던 것 같다. 착해야 사랑받을 수 있었던 내 어린 시절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착해야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착하고 순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포용할 수 있어야 사랑인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의 어른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유년 시절의 유치함을 닮아 있었다.

유치함을 벗어 내는 데는 큰 고통이 따랐다. 당연한 과정인지 모르겠지만 학습되지 않은 자존감을 키우는 데는 혹독한 값을 치러야 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던 가사처럼 처절히 아프고 얻은 것은 인생을 피해 가지 않고 살아 내는 방법을 딱 필요한 만큼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은 내가 나를 아끼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고 아낄 줄 알아야 다른 이에게도 대접받을 수 있다. 나만 중요하다고 말하자는 게 아니다. 모두가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가 소중하니 나를 존중하듯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을 존중하듯 나를 위하자는 말이다. 그게 자존감의 시작이요 종착지가 아닐까?



인정



I don‘t care


요즘 아이들은 거침이 없다. 말을 하는 데도 거침이 없고, 행동하는 데도 망설임이 없는 듯 보인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 어릴 적 생각이 가끔 떠오르곤 하는데, 요즘 아이들과 닮은 듯 다른 모습 때문이다. 사춘기가 더 일찍 시작된다는 것일 뿐, 놀기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고 그맘때 아이들이 겪는 과정은 비슷하다.

나 어릴 적 그러니까 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르는 시절 얘기를 할까 한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시장 한가운데에서 신발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 덕에 지금은 하이힐이라 부르는 뾰족구두를 신고 아가씨 놀이를 하며 놀곤 했다. 반짝반짝 선명한 빨간색의 뾰족구두는 어린 소녀의 눈에 너무나 영롱한 것이었다. 그 영롱한 것을 장난감 삼아 놀 때면 어찌나 신이 나던지.

잘 신고 놀다가 제자리에 다시 넣어 두면 됐으니, 진열장 뒤의 내 어릴 적 놀이터는 비좁지만 충분했다. 80년대 시골 장터 신발 가게는 운동화에 구두, 성인화, 아동화가 한데 있었고 장화와 고무신도 늘 손이 닿기 좋은 곳에 있었다.

고무신은 가게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여전히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으니 고무신 없는 신발 가게는 신발 가게가 아니었다. 색깔은 두 가지로 하얗거나 까맣거나 흑백텔레비전과 같았고, 발바닥이 납작하니 신는 대로 쭉쭉 늘어나는 고무신은 어린아이부터 어른 사이즈까지 두루 준비돼 있었다.

물건이 빠지면 새 물건이 들어오기를 반복했는데, 어느 날 내 마음을 사로잡는 신발이 하나 들어왔다. 꽃고무신이었다. 말 그대로 알록달록 어여쁜 꽃이 그려진 고무신! 희고 까만 고무신만 보다가 눈을 번쩍이게 하는 신상이 들어온 것이다. 심지어 그동안 보아 온 납작 고무신이 아니고 아찔한 높이의 굽도 있었다. 매력적이었다!

한눈에 들어온 그것을 그냥 두고 바라만 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내가 누군가, 신발 가게 딸내미가 아닌가! 내 발 크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내 손으로 발에 맞는 고무신을 찾아 신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나는 냉큼 신어 본 내 인생 첫 꽃고무신에 매료되어 신었다가 벗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차마 부모님께 달라는 말은 못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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