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가 재미있어지는 39가지 길 이야기
일본박학클럽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사가 재미있어지는 39가지 길 이야기
일본박학클럽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3년 2월 / 354쪽 / 18,500원
1. 고대 세계를 혁명적으로 바꾼 10가지 길
역설적으로 아테네에 ‘민주주의의 길’을 열어 준 페르시아 전쟁의 길
- 병력 면에서 그리스군을 압도하는 페르시아군이 판판이 패배한 이유는?오늘날의 이란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아케메네스 왕조가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다. 이후 키루스 2세(재위 559~530 BC) 시대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키루스 2세는 소아시아를 점령한 데 이어 신바빌로니아제국을 함락시키고 바빌론 유수 중인 유대인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키루스 2세의 뒤를 이은 캄비세스 2세(재위 530~522 BC)가 기원전 525년에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고대 오리엔트를 통일했다.
마침내 동쪽의 인더스강 서안으로 서쪽의 소아시아, 그리고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한 페르시아는 소아시아를 사이에 두고 그리스 문명권과 경계를 접하게 된다. 두 세력은 이오니아 반란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해 결국 12년간 이어진 페르시아 전쟁에 돌입했다.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하고 소아시아반도까지 휩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페르시아라는 국명은 이란고원의 파르스(Fars) 지방 사람들을 ‘페르시아인’이라고 부른 데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페르시아인은 자신을 ‘이란인’(‘아리아인’이라는 의미)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한때 메디아 왕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나 아케메네스 가문이 권력을 잡으면서 독립, 건국한 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라고 불렀다.
기원전 6세기 후반 무렵 아케메네스 왕조는 에게해 건너편 소아시아반도를 휩쓸었다. 당시 소아시아 에게해 연안의 이오니아 지역에는 밀레투스 등 그리스인이 세운 식민 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강력한 불길이 확산되어 오자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들은 아테네에 긴급히 지원군을 요청했다. 이는 기원전 499년의 일이다.
마침내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 제국 황제 다리우스 1세(재위 522~486 BC)가 제1차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그런데 운 나쁘게도 에게해로 나아간 페르시아군 함대가 아토스곶 부근에서 풍랑을 만나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그에 따라 육로를 통해 그리스 본토로 진격하던 페르시아군이 고립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진군을 멈추면서 원정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후인 기원전 490년, 전열을 가다듬은 다리우스 1세는 다시 그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당시 페르시아군이 선택한 원정로는 제1차 그리스 원정 때와 달랐다. 즉, 에게해로 진격한 페르시아군은 에게해 섬들을 지나쳐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를 바로 공격하는 길을 택했다. 이는 에게해를 가로지르는, 말하자면 그리스군의 허를 찌르는 방법이었다.
페르시아는 어떻게 복잡한 에게해 섬들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영리하게 항해할 수 있었을까? 이는 아테네 출신의 한 인물이 물길을 안내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한 덕분이었다. 그의 이름은 히피아스. 그는 한때 아테네의 참주였으나 폭정을 펼치다 독재 정치에 불만을 품은 민중의 반발로 추방되어 페르시아로 망명해 있었다.
아테네를 향해 가던 페르시아군은 아티카반도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다. 당시 페르시아군은 3만여 명으로 추산했다. 페르시아 원정군에 맞선 그리스군은 아테네의 중장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부대로, 적군의 3분의 1 수준인 1만여 명에 불과했다.
결전 당일, 그리스군과 페르시아군은 서로 활을 겨누고 대형을 유지한 채 마주 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전술 능력이 탁월한 그리스군 총사령관은 적군과의 거리가 차츰 좁혀지자 재빨리 중장보병을 내보내 기습하게 했다. 그런 다음 동요하는 적군을 향해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 대자 페르시아군은 마침내 당해 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결과적으로 해안선을 따라 그리스로 향한 제1차 원정로도, 에게해를 가로질러 그리스로 향한 제2차 원정로도 모두 페르시아에는 쓰라린 ‘패배의 길’이 되고 말았다.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이 아테네에 ‘민주제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고?: 두 차례에 걸친 다리우스 1세의 그리스 침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원대한 계획은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486~465 BC) 황제에게로 이어졌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제3차 그리스 원정을 감행했다. 기원전 480년의 일이다. 병력 20만 명, 함선 1,000척으로 꾸린 대규모 군대였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페르시아 육군을 소아시아에서 출발해 에게해 북쪽 연안을 따라 그리스로 남하하게 했다. 또한 그는 식량과 무기 등 주요 군수 물자를 해로로 이동시켜 보급하는 등 만일의 사태에 치밀하게 대비했다.
한편 아테네를 중심으로 연합군을 형성한 그리스군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보완하고자 그리스 내륙으로 페르시아 군을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그런데 이 전술은 그야말로 ‘자신의 살을 베어 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다’라는 의미의 ‘육참골단’이라 할 만한 작전이었다. 왜냐하면 이 전술을 구사하게 되면 아테네 같은 그리스 도시가 페르시아군에게 철저히 유린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재위 489~480 BC)가 이끄는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 부대는 테르모필레의 좁고 험한 길에 매복한 채 발칸반도를 남하해 쳐들어오는 페르시아 육군을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기로 했다. 이곳은 가파른 해안 절벽을 등진 험로로 천혜의 요새였다. 길이 워낙 좁아 대군이 한 번에 지나갈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전투 초반에 스파르타군은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잘 싸웠으며 엿새 동안이나 페르시아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밀고자가 스파르타군의 배후로 도는 사잇길을 페르시아 군에 알려 주면서 형세는 역전되었고 테르모필레를 지키던 스파르타군은 전멸당했다. 페르시아군은 그 기세를 몰아 아테네까지 함락시키겠다며 진군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남하했다.
그때 아테네는 뭘 하고 있었을까? 아테네는 도시를 모두 비운 채 꼭 필요한 소수 인원만 남아서 지키며 인적 피해를 최대한 줄였다.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아테네 병사는 모두 군함에 올라타 페르시아 함대를 해상으로 유인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아테네 해군은 좁은 살라미스 물길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해 섬멸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페르시아 군함은 대형이라 움직임이 둔했다. 반면 아테네 군함은 소형이라 기동성이 뛰어났다. 아테네는 좁은 살라미스 물길을 잘만 활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적선을 교묘하게 살라미스 물길로 유인하지 못하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기 십상이었다.
아테네 해군을 지휘한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은 ‘테르모필레의 패전으로 아테네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이미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는 식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페르시아군을 방심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아테네 해군은 페르시아 해군을 살라미스 물길로 유인해 파상 공세를 펼쳐 격파했다. 한때 아테네를 점령한 페르시아 육군도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로 보급이 끊겨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아 서둘러 퇴각해야 했다. 승리의 여신은 페르시아의 제3차 원정에도 미소를 보내 주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 낸 아테네에서는 중장보병 시민과 함께 노잡이로 싸운 무산 시민의 지위가 향상되었고 민주 정치가 확립되었다.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이렇게 아테네에 ‘민주제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 주었다.
2. 동서 교류를 촉진하고 글로벌화를 앞당긴 중세의 12가지 길
유럽이 중세를 끝내고 근세로 이행하는 계기가 된 십자군의 원정길
- ‘예루살렘 탈환’을 숭고한 명분으로 내걸었으나 탐욕과 야망으로 점철된 추악한 전쟁수 세기에 걸친 바이킹 원정 이후 유럽의 대략적인 판도가 결정되었고 봉건 제도가 확립되었다. 유럽 여기저기에 성립된 노르만인 국가가 안정을 찾아갈 무렵 십자군 원정의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11세기 무렵의 일이다.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일어난 십자군 원정에는 유럽의 국왕과 제후는 물론 수많은 봉건 영주가 참여했다. 200여 년에 걸쳐 원정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충돌로 시작된 종교 전쟁은 다양한 정치적ㆍ경제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의 손에 남겨졌고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유럽 봉건 제도의 붕괴로 이어졌다.
성지 탈환을 촉구한 로마 교황의 속내와 정치적 의도는?: 1095년 클레르몽 종교 회의에서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재위 1088~1099)는 성지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도에게 돌려주어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교황의 발언은 십자군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중해 동부 연안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승천한 땅이기에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중요한 성지로 여겨졌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이슬람 측은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한 후에도 그리스도교도의 예루살렘 성지 순례에 관용을 베푸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소아시아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한 셀주크 왕조가 1071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이후 예루살렘 정세는 불안정한 상황으로 치닫다 결국 그리스도교의 성지 순례길이 차단되고 말았다.
당시 국력이 쇠퇴해 가던 비잔틴 제국은 셀주크 왕조의 거센 침입을 막아 낼 힘이 없었다.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재위 1081~1118)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스도교 순례자가 박해받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음에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클레르몽 종교 회의에서 촉구한 요청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지 탈환’이라는 대의명분의 배후에는 신앙심으로 위장한 갖가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도 속내가 복잡했다. 사실 비잔틴 제국과 가톨릭은 로마 교황의 존재를 놓고 오랜 세월 대립해 왔다. 4세기에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 그리스도교는 황제가 교황을 겸임하는 ‘황제 교황주의’를 채택했다. 이 황제는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기에 서로마 제국 붕괴 후에도 비잔틴 제국 황제가 ‘최고 권위자’로서 그리스도교 세계에 군림해 왔다.
그런데 다섯 총대주교구 중 하나인 로마 총대주교가 서로마 제국 멸망 후인 5세기 말에 느닷없이 예수의 첫 번째 제자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의 특수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로마 총대주교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 교황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을 계승한 비잔틴 제국의 동방 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서방 교회로 분열되어 서로 반목하면서 중세를 맞이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비잔틴 제국 황제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구원군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자 로마 교황은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이 기회에 ‘동서 교회의 통일’을 달성해 자기 지배하에 두고자 했다.
제각각 사리사욕에 따라 움직인 원정 참가자들: 교황의 요청에 응답한 측 역시 각자 계산이 서 있었다. 11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총 일곱 차례 이루어진 십자군 원정에는 왕후장상부터 서민까지 수많은 사람이 참가했다. 그런데 그들이 길고 힘든 원정길을 감수한 것은 순전히 신앙심의 발로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 길을 나선 이들 각자의 이기적 동기가 다분히 작용하고 있었다.
국왕과 제후는 영토와 전리품을 획득해 지위와 권력을 확대하고자 했으며 기사들은 당장 수중에 떨어질 보수를 절실히 원했다. 봉건제가 정착하며 장자 상속제가 확립되자 장남 이외의 자식은 토지 등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없었기에 밖으로 나가 자기 영토를 스스로 획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사로 참전한 사람들은 대부분 차남 이하였으며, 제1차 십자군 사령관으로 성지 탈환 후 예루살렘 왕국 초대 국왕 자리에 오른 고드프루아 드부용 역시 그런 배경을 지닌 인물이었다.
십자군 원정에 끌려간 서민들은 만일 성지 탈환에 성공하면 모든 십자군 병사의 죄를 사해 준다는 약속과 빚을 탕감해 준다는 파격적인 조건에 이끌렸다. 또한 원정에 자금을 제공한 상인들은 무역을 확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현실적인 욕망과 신앙심이 뒤섞인 사람들의 열정이 이교도를 향한 적의로 표출되면서 성전이라는 명분으로 대학살과 약탈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아시아에 상륙한 십자군은 요격 태세를 갖추지 못한 셀주크 왕조를 무시한 채 약탈과 학살을 반복하고 영내를 휘젓고 다니며 분탕질을 쳤다. 이어 지중해 연안 경로를 통해 예루살렘에 당도하자 일제 공격에 나서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들에 대한 살육이 벌어져 일반 시민 7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렇게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예루살렘을 공략한다는 목적을 달성했고, 1099년에 예루살렘 왕국이 수립되었다. 나아가 십자군이 정복한 지중해 동안 지역에는 기사나 제후를 국왕으로 추대해 ‘십자군 국가’가 줄지어 세워졌다.
십자군 원정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여러 도시가 르네상스 발원지가 되었다는데?: 십자군 원정이 일곱 차례에 걸쳐 행해지는 동안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수중으로 돌아갔고 십자군 국가도 차례로 멸망했다. 맘루크 왕조가 아크레를 함락하면서 십자군 원정은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이는 1291년의 일이다. 성지 탈환을 내세우며 이슬람 세계를 공략한 결말은 비참했다. 로마 교황의 권력이 흔들리고 제후와 기사는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제각각의 동기를 지닌 채 십자군에 참전했던 이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말로를 맞았다.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이득을 얻은 계층은 상인들이었다. 봉건 제도하에서는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했기 때문에 상업이 발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으로 지중해를 거쳐 ‘동방으로 가는 길’이 열려 사람은 물론 물자, 자금이 활발하게 오고 가면서 동방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원정의 거점이 된 제노바,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항구 도시에는 성지로 향하는 수많은 기사와 팔레스타인에서 들어오는 대량의 물자가 모였다. 특히, 베네치아는 십자군 측에 선박과 선원을 대여했을 뿐 아니라 저렴하게 제공하는 대가로 정복지 할양을 요구하는 등 수익성 높은 계약을 체결했다.
1202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을 요청했다. 비잔틴 제국을 밀어내고 라틴 제국을 세우려는 목적이었다.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발판으로 소아시아 연안과 지중해 동남의 이집트를 거점으로 이슬람 세계와 사업을 전개하고 있던 베네치아는 라틴 제국을 건국해 세력을 확고히 다지고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베네치아는 꾸준히 영토를 확장했고 십자군 원정이 종말을 맞이할 무렵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도시 국가로 성장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화폐 경제’가 발전했다. 또 상인에게 원정 비용을 빌린 후 갚지 못하는 제후와 귀족이 생겨나면서 봉건 제도의 신분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상공업이 발전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오래도록 유럽 사회에 뿌리내린 토지를 매개로 한 봉건 제도가 붕괴하게 된 것이다.
십자군 원정이 미친 영향은 이러한 사회 제도 변혁에만 머물지 않았다. 자신이 태어나 자란 지역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타국의 상황, 동방 지역의 정세를 보고 듣고 돌아온 후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찰하게 되었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이슬람 세계와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 ‘이슬람 문화’가 유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