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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의 정신

박영봉 지음 | 산지니


요리의 정신

박영봉 지음

산지니 / 2023년 2월 / 224쪽 / 20,000원





‘먹방’ 유감 그리고 K-푸드, 김치



‘먹방’ 유감


소위 ‘먹방’이라는 유행어가 대세다. ‘먹는 방송’을 줄인 말인 듯한데, 스포츠계에서 돈값을 못 하는 유명 선수들에게 주로 쓰이는 ‘먹튀’처럼 부정적 이미지의 연상이 일어나곤 한다. 이유라면 요즘 ‘먹방’이 연출하는 추하고 해괴한 장면들 때문이다.

‘먹방’의 홍수 속에서 생각한다. 방송에서 보여 주는 일부 행위들을 보면, 소비를 진작하는 일도 아니고, 오락의 목적에도 벗어난다. 더구나 청소년을 생각하면 도대체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다. 쇼 프로그램인 것을 잘 알지만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다’라는 말이 그렇게 적절할 수가! 하는 탄식이 터지는 요즘이다.

<한국인의 밥상>처럼 일관된 주제를 맛깔나게 보여 주는 프로그램도 간간이 눈에 띄긴 한다. 일정 부분 방송의 역할을 다하려는 노력을 볼 수 있으며, 우리 음식에 대한 서사시의 일부로 남을 만하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엄청난 제작비와 시간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진 <누들로드> 같은 고품격 다큐멘터리도 있었다. 국수라는 음식을 통해 인류 음식 문명을 조명하거나 국가별, 지역별 면 요리를 통해 하나의 식재료로 인류의 삶을 담백하게 보여 주었다.

또한 <요리인류>라는 프로그램도 낙원의 향기 스파이스, 불의 맛, 모험의 맛 커리, 생명의 선물 고기, 위대한 진화 김치 등 다양한 주제로 인류의 사랑받는 요리를 안방으로 전달하며 요리에 대한 인식을 넓혀 주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릇이 없는 요리였다는 점에서 요리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보여 준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가진다.

음식을 소재로 하는 방송이 쏟아지는 것은 경제적 풍요가 가져온 자연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많다는 것이 꼭 다양함으로 이어지는 게 아님을 잘 안다. 의미 있는 콘셉트를 찾는 것이 방송의 역할과 고민일 터이지만 도저히 그냥 봐줄 수 없는 방송 그리고 재방송들이 이곳저곳에서 전파를 날리고 있다.

음식 문화도 추구하는 단계가 있다. 요리를 하나의 예술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그것을 말해 준다. 보다 나은 음식 문화, 합리적이며 이상적인 요리를 지향하는 것은 당연한 길이다. 하지만 그 길에서 역행하는 조악한 ‘먹방’은 어찌할 것인가.

특히 이런 장면은 경악스러울 정도이다.



<장면 1>

방송이 시작되면 3, 4명의 출연자가 식탁에 둘러앉는다. 그저 평범한 몸매의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다. 10분도 채 안 되어 100개의 꼬치구이를 먹어 치운다. 어떤 출연자는 양손에 꼬치 3개씩을 들고 이쪽저쪽 두어 번 훑어 빈 꼬치 6개가 남게 한다. 곧이어 갈빗살 10인분을 추가 주문한다. 순식간에 빈 접시다. 그러고도 상상을 넘는 주문은 계속된다. 매우 익숙한 장면이니 계속되는 주문을 늘어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식당 주인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카메라가 간간이 잡아 준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스튜디오의 진행자들은 감탄과 놀라움을 덧입힌다.

<장면 2>

이번엔 육중한 몸매의 출연자들이다. 메뉴가 뭐가 되었든, 어떤 상차림이든 상관없다. 입은 가능한 한 크게 벌리고 게걸스럽게 먹어 준다. 많이 먹는 것이 기본이다. 한입에 얼마나 많이 욱여넣는가가 더욱 중요한 장면이다.

어떤 때는 근육질의 스포츠맨이 얼굴 크기의 고깃덩이를 뜯는데 순식간에 뼈만 남는다. 어떤 때는 먹고 난 후, 몸무게가 얼마나 늘었는가를 측정하기도 한다. 평소 몸무게에 민감한 사람들도 부끄럼 없이 체중계에 오른다.

<장면 3>

이번엔 외국이다. 장소와 음식이 다를 뿐, 콘셉트는 다를 게 없다. 게걸스럽게 먹어 대고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운다. 신기한 듯이 바라보는 음식점 주인의 표정을 클로즈업시킨다. 돈을 써 가면서 국제적 망신까지 사 먹고 있다.

걸신이라는 말이 있다. 빌어먹는 귀신이다. 늘 빌어먹다 보니 항상 배고프다. 그러니 음식만 봤다 하면 달려들어 먹어 치운다. 위의 장면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걸신 증후군’이다.

나름대로 콘셉트가 정해져 있는 쇼 프로그램임을 왜 모르겠는가. 출연자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극본에 충실했다면 오히려 박수를 받아야 할 일이다. 하지만 방송을 기획한 부류들에게는 아니다. 의도를 이해했다고 결과적 현상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우선, 많은 프로그램이 기획 의도도 불분명하지만 내용마저 비슷하다. 등장인물과 음식과 공간이 다를 뿐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기획은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이어야 하는데 출발부터 기승전결이 없다. 하물며 오락과 재미를 추구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사회와 시대적 공감에서 나와야 하는데 말이다. 부실하고 가벼운 시나리오가 첫 번째 도마에 올라야 한다.

그리고 기획자는 출연자 캐스팅에 사활을 건다. 어떤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이건 유명세를 타는 스타들이 표적이다. 그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어차피 그들 스스로 공인이라 자처하기도 하며,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라는 친근함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섭외는 시청률에만 방점을 찍은 것이다. 프로그램 예산이 거의 출연료로 소진되더라도 말이다.

음식 방송인데도 음식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결여되었다는 점은 가장 치명적이다. 파격과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에만 골몰해 있다. 무식하게 마구 퍼먹는다고 맛있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요리의 본질을 무시하는 행태이고 그걸 보면서 역겨움을 느끼는 양식 있는 시청자들도 무시하고 외면하는 일이다.

사자가 물소 고기를 찢어 먹는 듯한 연상을 일으키는 장면에서는 인간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청소년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직접 수확하고 요리로 만들어 보는 농장 체험을 통해서 먹거리의 소중함을 체득하도록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일거에 망가뜨리고 있다.

또한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에서는 하루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긴 그런 프로그램은 이런 반론을 하는 것이 뜬금없다고 할 게 분명하다.

우리 먹방에는 왜 그릇이 없는가. 이 테마는 앞으로 지나치리만큼 반복할 내용이라 여기서는 환기하는 정도로 접는다. 우리 먹방에는 향신료나 식재료에 대한 꾸준하며 근본적인 그리고 다양한 접근은 왜 보이지 않나. 김치나 된장 등을 말로는 세계적이라 앞세우면서도 왜 방송에선 보여 주지 않나.

그런데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사람들이 이런 현실적 평가를 몰라서 그렇게 할까? 그게 더 무서운 일이긴 하지만 그들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기획자들은 도전하지 않을까?

가장 큰 요인은 방송의 존립이 돈에 좌우되는 것이다. 공영 방송은 좀 차이가 있지만 방송국도 시장의 논리를 따른다. 그게 바로 광고나 협찬과의 동행 이유다. 방송이 지닌 파급력을 이용한 광고에서 기업과 방송국의 이해관계는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당연히 시청률이 높으면 광고료도 높다. 결국 프로그램의 성패는 시청률이라는 결과로 판정 난다.

이 너무나 당연하고 합리적인 관계가 소위 ‘먹방’의 저질스러움을 가져오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게 된 것이다. ‘먹방’ 콘텐츠가 대세를 얻으면서 상대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끌어내기 위한 전쟁을 치른다. 새로운 기획도 중요하지만 상대보다 유명한 출연자를 캐스팅하는 데 사활을 거는 것이다. 이미 유리한 시청률을 선점한 상대를 짧은 시간 안에 제압하는 길은 비슷한 콘셉트에 뭘 더하면 될 것인지 생각해 보면 쉽게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매우 기본적인 과정이지만 그다음이 문제다. 보다 많이 먹을 수 있어야 하며, ‘게걸스럽다’가 적절한 표현이 되도록 구성해야 눈길을 빼앗아 올 수 있다는 발상이다. 육중한 몸매의 출연자가 자장면 곱빼기를 단 한 번의 젓가락질로 해치울 수 있다면 곧장 대한민국의 ‘먹방신’으로 등극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참신한 것, 새로운 것이 저질스러움과 혼동된다. 충격적 장면을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이 결국 ‘먹방’의 역겨움을 낳은 것이다.

이렇게 시청률에 목숨을 거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당연하다. 적은 예산으로 보다 높은 시청률을 만들어 내야 하는 생리에 충실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별 새로울 게 없는 극본에다 무리함을 첨가하는 것이다. 편의성이 작동하며, ‘새로움’은 가장 쉬운 쇼킹한 장면 연출로 이어지는 셈이다.

방송은 문화의 리더이다. ‘먹방’도 쇼 프로그램이라 하지만 언론이라면 언론이다. 따라서 언론의 역할이나 영향력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메이저 언론일수록 그 영향력이 어떠한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거짓이라도 언론이 옳다고 한목소리를 내거나 노출 빈도를 높이면 사실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방송이 추구할 바가 재정적 현실과의 충돌에서 밀리면서 지금의 현상을 낳았다. 예산을 면죄부로 삼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독립영화 한 편이 수백억 쏟아부은 영화보다 뛰어난 작품인 경우도 있지 않은가. 소위 가성비 뛰어난 작품들은 얼마든지 있다. 보다 근본적인 연구와 기획으로 유익하고 새로운 그리고 시청률도 높은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있다. 그게 그들의 존재 이유인데도 현실의 이런 결과는 방송의 책임이다.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고 했다. 예산이 적은데 어떻게 차별화하겠느냐는 기획자의 하소연이나 방송국의 절박함도 이해한다. 이렇게 방송을 몰아붙인다고 해서 퍼진 들불이 쉽게 꺼지지는 않을 것이다. 괜한 트집일 수도 있다.

한발 물러서서 방송에다 한마디 해야겠다. 방송이 힘이 센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힘의 분배를 부탁한다. 그 힘을 진정한 음식 문화를 이끄는 프로그램에도 나누어 달라는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을 모조리 없애자고 소리를 높이는 게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그 또한 자본주의의 한 속성이다.

답답해서 그랬다. 그들의 힘이면 가능한 것들을 알아 달라고 생떼를 쓴 것이다. 보고 느끼는 게 있는데 입 닫고 있자니 안달이 난 모양이다. 품격과 정신이 있는 우리의 요리를 위하여 좀 덩치다운 넓이와 깊이도 추구해 달라는 것이다.



요리, 그 너머



요리인의 자격


오래전 이야기인데 일본 교토에서의 일이다. 점심을 일본 라멘으로 해결할까 하여 교토역에 있는 조그만 식당에 들어갔다. 500~600엔 정도 하는 비교적 저렴한 라멘집으로 기억한다. 한쪽 벽면 장식장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발이 진열돼 있었다. 자동판매기에서 식권을 끊어 주인에게 내밀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손님에게 자기가 사용할 라멘 사발을 선택하라는 게 아닌가.

요정 같은 고급 음식점에서라면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에비스(惠比壽)에 있는 요리점에서의 일이다. 손님을 맞은 주방장이 술잔 상자를 내밀며 손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네모 상자엔 다양한 종류와 크기, 모양의 술잔 열댓 점이 진열되어 손님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와 다른 문화라고 생각하면서도 비싼 요리 가격 때문이라고 넘겨짚고 말았지만 라멘집의 경우는 달랐다. 몇 사람 앉지도 못할 선술집 같은 식당이었기에 놀라운 사건으로 각인되었다.

‘가장 위대한 요리는 가장 단순한 요리’라고 주장하며 메뉴와 식탁의 간소화를 이끌었던 프랑스 요리사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수천 가지의 요리를 개발한 ‘요리의 제왕’이었다.

“두 시간 동안 이 식탁은 나의 왕국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며, 독실한 신자에게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마음으로 요리한다.”

그는 손님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요리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했다. 이런 배려를 받는 손님의 행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다도에 ‘일기일회(一期一會)’란 말이 있다. 비단 다도의 철학만은 아니다. 인생도 한 번이지만 모든 만남도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라는 의미다. 일본 전통 다도에서 매우 중시하는 정신이다.

일본에는 차회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른바 차회를 연 날의 기록이다. 언제 어떤 참석자들이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를 기록한다. 사용한 찻사발을 비롯한 온갖 다도구나 족자, 향로, 꽃꽂이 등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 기록을 남겼을까? 여러 이유도 있겠지만 ‘일기일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조그만 병원을 경영하는 분의 차실에서 두 차례 차를 대접받은 적이 있다. 인상적인 것은 찻사발이 매우 많았다는 것이었다. 종류뿐만이 아니고 한국, 중국, 일본의 것 모두 있었는데, 슬쩍 비치는 말에 의하면 소장하고 있는 사발이 백여 개에 달한다고 했다. 게다가 찻사발 하나의 가격이 우리 돈 1억 원에 가까운 것도 많다고 했다.

다도란 수행이며 탐냄을 다스리는 일로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비싸고 많은 찻사발을 가졌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그분은 이에 대해 ‘손님을 배려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일기일회란 말처럼 지난 만남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언제 만나든 첫 만남이며, 단 한 번의 만남처럼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오히려 백 개로도 모자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주인은 손님을 감동적으로 모시기 위해 때론 욕심(?)마저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처럼 주인의 자격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해야 주어지는 것이다.

가난한 부부 이야기를 다룬 수필이 있다. 아내는 돈 벌러 나가고, 일자리가 없는 남편은 밥상을 차렸다. 어느 날 쌀독을 보니 쌀이 한 줌밖에 없었다. 반찬거리도 물론 없었다. 남편은 상을 차려 놓고는 울적한 마음에 집 밖으로 나갔다. 곧 아내가 돌아와 밥상보를 들췄다. 상에는 밥과 한 종지의 간장, 그리고 쪽지 한 장이 있었다. 남편의 마음은 ‘왕후의 밥, 걸인의 찬’으로 표현되었다. 그 한마디로 소박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차림멋이자 따뜻한 밥상이 되지 않았을까?

주인의 자격, 요리인을 말한다. 자격은 곧 품격이어야 함을 말한다. 필자는 요리사가 아니다. 훌륭한 요리, 황홀한 맛으로 손님을 사로잡는 요리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소고기의 다양한 부위의 맛과 조리법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소위 비법이라 하는 육수 이야기 등속도 아니다. 오묘하리만치 뛰어난 조리법, 레시피는 많고도 넘친다. 그건 요리사가 뽐내야 하는 게 아니라, 칼을 놓는 순간까지 연구하고 집중해야 하는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굳이 값비싼 그릇이나 음식을 요구하는 것만도 아니다. 요리, 그 너머에서 찾아야 할 상대를 지극하게 맞는 정신이 요리의 대전제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일종의 의식 혁명을 꿈꾸는 것이다.



문학으로 음미하는 요리



맛있는 집을 순례한 원조, 어느 소설가의 가치


오래전에 <백년의 가게>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다. 장인 정신을 보여 주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굳이 100년은 아니라도 그 정도의 역사를 이어 왔고 또 이어 갈 가게들이 대상이었다. 수백 년을 이어 온 구두 가게, 레스토랑, 과자 명인, 수제 가죽가방 등 다양한 장르를 보여 주었다. 오래도록 이어 온 전통을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유익한 프로그램이었는데 아쉽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2년이면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세계적인 장수 가게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그랬다.

프로그램이 단명한 이유는 한국적 상황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필자 나름의 분석이다. 방송 조건에 들어맞는 가게나 회사가 우리나라에는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니 자꾸만 외국의 사례가 방송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자격지심을 키운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을 지목할 수 있다.

우리라고 왜 없었겠냐만 우리 근대 역사에는 일제 강점기가 자리 잡고 있다. 많은 것들의 맥이 거기서 끊겼다. 그렇더라도 20세기 초에 생긴 가게라면 이젠 백 년의 역사를 지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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