꿰어보는 러시아와 중국
오강돈 지음 | 산지니
꿰어보는 러시아와 중국
오강돈 지음
산지니 / 2023년 2월 / 272쪽 / 20,000원
1장 러시아와 중국, 제이 세계의 갈등과 협력
광활한 만주 벌판과 연해주, 17세기 러시아와 청의 각축동북아는 격랑의 지역이다. 만주는 동북아의 중심에 있다. 만주를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는 오랜 곡절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만주 벌판’이 귀에 익었다. 그러나 현대 중국 당국은 만주를 ‘지리적’ 개념으로 언급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그 지역을 ‘동북’이라고 표시하는 것이 공식적이다. 현대 중국에서는 ‘지리적 만주’보다 소수민족 ‘만주족’을 거론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중국의 주류인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만주족’은 인구로 볼 때 세 번째 내지 두 번째를 점한다.
만주족인 여진이 후금을 세우고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나라는 중국 대륙 마지막 봉건 왕조로 기록된다. 중국은 청나라는 말할 것 없고, 그 이전 어느 시기에도 만주 지역이 중국 땅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만주족의 땅은 백산흑토라 했다. 백산은 백두산이다. 만주는 백두산이 흘러내린 흑토의 땅이다. 만주족이 강성해지면서 17세기 중반 만리장성 동쪽 초입 산해관의 서쪽을 넘어 화북으로 진입하며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 중국의 역사에 산해관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산해관의 서쪽이 고래로 중국의 주 무대이기 때문이다. 만주도 동북도 모두 산해관의 동쪽에 있어서 관동인 것이다.
17세기 차르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시베리아는 러시아어로 시비르다. ‘시비르’는 러시아어로 북쪽을 뜻하는 세베르가 어원이라는 설이 있다. 시베리아는 중국어로 시보리야다. 중국은 시베리아의 일부도 원래 중국 땅이었다고 본다. 시베리아의 어원도 ‘선비(鮮卑, 시엔베이)’라는 말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고, 몽골어로 진흙·진창을 뜻하는 ‘시보얼’에서 왔다는 쪽도 있다. 17세기 차르 러시아는 유럽에서 동진하여 만주에 이르자, 얼지 않는 부동항을 바라고 청나라 강희제와 다투게 되었다.
연해주도 만주의 일부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이 지역은 ‘연해주(沿海州)’라는 말로 통한다. ‘바다와 붙어 있는 땅’이라는 의미겠다. 러시아에서 더 포괄적으로는 ‘원동(遠東)’이라고 부른다. 유럽 쪽 러시아에서 아주 ‘멀리 있는 동쪽’이라서 원동이다. 원동 중에서 행정 구역 ‘연해주 지방’은 우수리강 동쪽이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러시아 원동을 ‘러시아 극동’이라고 번역한다. 중국 사람들에게 연해주라고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 중국인에게 ‘연해’는 ‘상하이, 천진, 청도 등 중국해 연안 지역’을 뜻한다. 중국인들은 연해주와 러시아 원동 지역을 ‘외동북’ 혹은 ‘외만주’로 표현한다.
청나라 때에는 외만주가 청나라 땅이었다. 만주의 우수리강은 중국과 러시아 사이를 북쪽으로 흘러 하바롭스크에서 흑룡강(아무르강)과 만난다. 외만주에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다. 러시아어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뜻은 ‘동쪽을 소유하라’, ‘동쪽을 지배하라’다. 중국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푸라디워스퉈커’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해삼위 또는 해삼외라는 지명의 청나라 땅이었다. 더불어 중국 이름으로 하바롭스크는 보리, 사할린섬은 쿠예섬이다.
만주에서 러시아와 청나라가 조우했는데,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은 외만주를 청나라 땅으로 하여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대패하면서 국운이 기울고 난징 조약으로 홍콩 등을 빼앗겼다. 이 와중에 러시아는 1858년 청나라와 우수리강 동쪽의 연해주를 두 나라가 공동 관할한다는 아이훈 조약을 맺고, 연이어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우수리강 동쪽 연해주를 차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게 현재 러시아의 원동 지역 즉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사할린섬을 포함한 지역은 러시아에 의해 빼앗긴 땅이 되는 것이다. 중국은 이 조약들을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이라 한다. 베이징 조약 이후 중국은 한반도의 동해 쪽 태평양으로 나가는 해안이 막혔다.
원동을 획득한 차르 제정 러시아는 1898년에 만주 서남쪽 여순·대련을 조차권을 통해 자신들의 수중에 넣었고 차차 만주의 다른 지역들도 점령했다. 한편 만주에서 러시아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고 한반도를 유린하던 일본은 남만주를 노려 러시아와 러일전쟁을 시작하고 1905년 승전했다. 이후 일본은 만주를 사실상 지배한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일본은 야욕을 구체화하여 1932년 만주 땅에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족 청나라 마지막 황제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일본의 공식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장춘을 수도로 삼고 이름을 신경으로 바꾸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1934년 만주국 황궁 가운데 하나인 근민루에서 만주국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괴뢰 ‘만주국’은 현대 중국이 ‘만주’라는 단어를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다.
현대 러시아에게 원동은 석유와 가스를 비롯한 자원의 땅이다. 또 태평양과 동북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적 요지다. 푸틴은 이 지역의 경제 개발을 위해 원동 개발부를 설립했다. 원동 지방과 시베리아에서 열리는 ‘보스토크’는 러시아 최대 규모의 군사 훈련으로 러시아 대통령이 참관한다. 중국, 몽골, 튀르키예도 이 군사 훈련에 참가한다.
2장 ‘먹고 자고 즐기기’ 다른 듯 비슷한 두 나라
너에게 아파트를 줄게-공우, 스탈린카, 흐루쇼프카한국은 산업화, 도시화하면서 아파트가 주거 형태의 대안으로 자리 잡았다. 작은 땅에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공동 주택을 지어 개인에게 분양하는 방식은 한국의 아파트, 미국의 콘도, 영국의 플랫, 일본의 맨션처럼 각 나라별로 그 비중과 표현하는 단어에 차이가 있다. 공동 주택은 일견 효율적이지만 차차 집단 슬럼화되는 등 각국에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세계에서 가장 광활한 러시아이지만 주거 형태 중 공동 주택, 소위 아파트의 비중이 매우 높다.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인구가 도시에 몰려 살다 보니 택지를 확보하기 쉽지 않았다. 둘째, 소련 시절 국가가 주택을 공급하면서, 많은 집을 빠르게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부터 소련에서 지어지기 시작한 ‘흐루쇼프식 아파트’다. 러시아 사람들은 흐루쇼프식 아파트를 ‘흐루쇼프카’라고 불렀다.
흐루쇼프에 앞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역임한 스탈린은 소련을 공업화된 나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공업화는 도시 인근에 공장을 건설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도시 인근의 공장에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으며 이들이 거주할 집이 있어야 했다. 임시방편으로, 몰수한 집 내부에 가벽을 만들거나 칸막이를 설치하여 많은 사람이 뒤섞여 살게 했다. 이것을 ‘코뮌의 공동 아파트’ 즉 ‘코뮤날카’라고 했다. 워낙 생활하기 열악한 주거 환경이어서 코뮤날카는 사람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한편 스탈린은 자신의 우군인 당 간부들과 성장의 주역인 과학·기술자들에게 ‘스탈린카’를 새로 지어 살게 했다. 스탈린카는 6~8층 높이의 아파트로, 층고가 높고 코뮤날카와 견줘 고급스럽고 넓은 주거 공간이었다. 이를 따라 북한도 당 간부와 과학·기술자를 새 아파트에 살게 해 준다. 주택 이외에 스탈린 시기 대학과 관청 등 공공건물은 ‘스탈린식 건축’이라 하여 지금도 구소련과 동유럽, 중국에도 상당수 남아 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 건물이 대표적이다. ‘스탈린식 건축’은 과장되게 높은 첨탑이 특징이며 ‘스탈린의 엠파이어’를 상징했다. 이러한 건물들을 ‘사회주의적 고전주의 건축’, ‘스탈린 고딕 양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흐루쇼프는 전임 통치자 스탈린을 강력히 성토했다. 스탈린이 권력을 사유화했고, 무자비하고 불법적인 숙청을 벌였으며, 또 자신을 우상 숭배하도록 했다는 취지였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체제하에서 공급된 아파트도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 주변 인물들을 위한 것일 뿐이며 스탈린식 공공건물도 과장되어 우스꽝스러울 뿐이라고 비판했다. 흐루쇼프는 노동자들의 주거를 위해 ‘흐루쇼프카 아파트’를 대량으로 지어 공급하기 시작했다.
‘흐루쇼프카 아파트’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철근과 콘크리트로 지은 것, 벽돌을 쌓아 지은 것, 그리고 나중에 지어진 시멘트 패널을 이용하여 조립식으로 대량 건설한 것이 있다. 패널을 이용하여 지을 경우 일정한 높이 이상으로 올릴 수 없었기에 5층짜리가 많았다. 그래서 흐루쇼프카의 별칭이 ‘5층짜리’다. 장점은 난방 설비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겨울이 길어 석유와 가스 소비가 많은 러시아이지만 지하자원이 풍족하기에 난방 공급은 잘 되는 편이었다.
흐루쇼프카는 고작 방 1~3개에 조부모, 부모 그리고 자녀들까지 3대가 사는 경우가 많았다. 조립식 패널이기 때문에 방음도 잘 안되었다. 그래서 만일 자녀가 친구라도 데리고 오면 조부모, 부모가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가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열악한 주거 문화는 여러 가지 양상을 수반했다. 러시아에 만연한 조혼 풍조도 결혼을 해야 집을 주던 소련 시기의 유산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러시아의 공동 주택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구소련 해체 후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들은 고급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밀집되어 있다. 이는 한정된 주거 면적 탓이다. 통계 주체와 조사 시점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1인당 주거 면적으로 따져 한국, 일본은 세계 하위권이다. 그런데 큰 국토의 러시아와 중국의 1인당 주거 면적도 매우 낮다는 점은 놀랍다. 각국으로 기업 주재원들이 파견될 때 각국의 주택 등 생활 여건과 비용을 지수화해 발표해 주는 머서라는 회사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모스크바는 세계 최고 비용 도시 중 하나이고, 중국의 주요 도시도 고 체재 비용 지역에 속한다.
중국도 러시아처럼 아파트의 비중이 매우 높다. 공우(公寓)는 ‘공공 우소(公共寓所; 공공이 거주하는 곳)’의 줄임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도 상하이 등 대도시에는 공동 주택이 있었으나, 소련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했던 건국 이후 더 많은 공동 주택이 지어졌다. 국가가 나눠 준 집은 보장방이다. 개혁개방 후 주택 거래가 허용되었고 이것을 상품방이라고 했다. 상품방이라고 해도 공식적으로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가 가지고 개인은 몇십 년간 토지 사용권을 갖는 형식으로 운용된다.
러시아 사람들은 주말에 아파트를 벗어나 교외의 다차로 향한다. 다차는 러시아 사람들 상당수가 갖고 있는 주말 농장 겸 작은 별장이다. 제정 러시아 때에도 있던 문화인데, 1970년대 소련 정부가 다수 인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매우 즐기는 러시아식 사우나 바나가 구비된 다차도 많다. 바나 안에서 자작나무로 몸을 두드리며 피로를 푼다. 농어촌, 산간의 전통적 주택 이즈바는 통나무로 지어졌다. 그리고 카테쥐는 원래 ‘오두막집’이라는 뜻이었는데, 현대 러시아에서는 ‘고급 단독 주택’의 의미로 바뀌었다.
중국에서 일반적인 집은 ‘민거’, ‘주방’이라 한다. 중국의 전통적 주거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화북 지역은 사합원으로 대표된다. 사합원은 가운데 중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박공지붕 거주 공간을 배치한 집이다. 강남 지방 즉 강소, 절강, 안휘의 수향마을 주택이나 휘파 주택은 흰색 벽에 장식을 중시한 집이다. 남으로 더 내려가 광동 등 화남 지방은 뱀, 벌레를 피하기 위해 나무로 2층 이상 집을 지었다. 이 밖에 초원 지역의 천막 주택과 복건성의 원형 ‘토루’ 집단 주거도 유명하다. 별서(別墅)의 원래 뜻은 별장이지만 의미가 바뀌어 러시아의 카테쥐처럼 고급 단독 주택을 나타낸다.
현대 중국인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부동산에 자산을 집중한다. 온주 사람들은 단체로 자금을 모아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파트, 별서의 경우 한 집 한 집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동이나 단지를 확보한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해외 부동산 구매에도 나서, 이들 때문에 세계 각지 부동산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중국 내에서는 부동산 투자 광풍의 거품이 꺼지면서 전역에 빈집, 빈 상가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유령 도시화 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중국 전역의 빈집 숫자가 수천만 채 이상이라고 보도된 바 있다. 경기 하강, 금융 경색과 맞물릴 경우 거품 부동산은 가계와 국가 경제에 재앙이 된다.
호텔이 아니라 손님집 ‘빈관’과 ‘가스찌니짜’중국의 숙박 시설 가운데 초대소(招待所)라는 것이 있다. 중국에서 초대소는 각종 기관, 군, 그리고 기업이 내부 인원의 출장 등에 활용할 목적으로 만든 숙박 시설이다. 또 외부에서 손님이 왔을 때 영빈관으로 쓰기도 했다. 북한에도 우리가 흔히 들어 왔던 ‘백화원 초대소’, ‘문수 초대소’ 등이 있다.
중국의 숙박 시설에 해당하는 명칭들과 그 개념들을 살펴보자. 우선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숙박 시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역참’이다. 군사, 관리들이 공무상 잠자고, 먹고, 말을 갈아탔던 곳이다. 그 이후에는 공무와 상인 장사치들이 같이 사용했던 숙박 시설 객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 상인들이 옮겨 다닐 때 잠을 자고 음식을 먹을 뿐만 아니라 특정 물건을 놓고 장사까지 했던 숙박 시설은 ‘객잔, 저점, 반점’이라 한다. 이 가운데 ‘반점’은 후일 아편전쟁이 끝난 뒤 중국 대륙에 생겨나기 시작한 서양식 호텔의 명칭으로 다시 부활했다. 1863년 천진에 만들어진 서양식 호텔 ‘리더 반점’, 1900년 프랑스인이 베이징에 세운 ‘베이징 반점’, 1900년 영국인이 베이징에 지은 ‘육국 반점’, 상하이의 ‘리처드 반점’ 등이 그것의 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반점이라는 단어가 ‘중화요리 식당’을 뜻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반점은 ‘숙박과 식사를 겸하는 시설’, 또는 단순히 ‘음식물을 파는 식당’의 의미도 있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단순히 ‘음식물을 파는 식당’을 말할 때 일반적으로 ‘반관, 찬관, 주루’라고 한다.
한편 러시아의 경우 제정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연방으로 바뀌면서 소련의 모든 숙박 시설이 국유화되었다. 중국 역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모든 숙박 시설이 국유화되었다. 이때 ‘국유 숙박 시설 명칭’으로 중국에 다시 등장한 것이 ‘빈관’이다. ‘손님 집’이라는 뜻이다. 숙박과 음식, 그리고 부대시설을 갖춘 장소로 기능했다. 예기 등 옛글에 ‘빈관’이라는 말이 나오니 신조어는 아니다.
중국 사람들이 호텔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러시아도 ‘호텔’이라는 러시아 단어가 있지만 잘 쓰지 않는다. 소련과 러시아에서 호텔은 ‘가스찌니짜’라고 하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의 ‘빈관’과 똑같이 ‘손님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다.
중국 대륙의 개혁개방 후에 서양의 많은 대형 체인 호텔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주점(酒店)’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1983년 쉐라톤은 ‘시라이덩 주점’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쉐라톤’ 같은 글로벌 브랜드의 호텔 이름을 사람들에게 얘기해도 잘 못 알아듣는다. 대부분 중국식 이름을 쓰기 때문이다. 1986년 하얏트는 천진에 ‘카이위에 주점’을, 1988년 힐튼은 상하이에 ‘시얼뚠 주점’을, 1991년 웨스틴은 상하이에 ‘웨이스딩 주점’을, 1997년 리츠칼튼은 ‘리쓰카얼둔 주점’을 열었다.
현대 중국 도시들의 마천루에는 글로벌 호텔들이 들어서 있는 경우가 많다. 상하이의 월드 파이낸셜 센터나 진마오 빌딩의 높은 층에서도 ‘글로벌 호텔’들이 영업을 했다. 그런데 더 높은 632미터짜리 상하이 센터를 지으면서 고층부에 중국 ‘본토 호텔’이 들어가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한편으로는 관광업에 대한 중국의 의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장 러시아인과 중국인의 일상 속으로
국영 백화점과 상회18세기 청나라 건륭제가 민정 시찰을 하기 위해 변복을 하고 어느 상점에 들어갔다. 상점은 ‘손님이 원하는 만 가지 물건을 전부 다 갖추고 있다’고 해서, 이름하여 ‘만화전’이었다. 건륭제는 점원에게 ‘이 상점이 그야말로 만 가지 물건을 갖추고 있다는 그 상점인가?’라고 물은 후 주인장을 불러오도록 했다. 건륭제가 이제 다시 주인장에게 물었다. “이 상점이 손님이 원하는 만 가지 물건을 갖추고 있다는 그 상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