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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많은 미술관

정시몬 지음 | 부키


할 말 많은 미술관

정시몬 지음

부키 / 2022년 8월 / 328쪽 / 18,000원





루브르 박물관 - 왕궁에서 미술관으로, 절대 왕정의 보물단지




루브르는 프랑수아 1세가 파리의 센 강변에 있었던 중세 군사 시설을 왕궁으로 개조하기로 한 1546년부터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 정착한 1682년까지 역대 프랑스 국왕 8인의 정궁이었다. 그들은 예술 애호가로 생전에 미술품 수집과 예술가 지원에 열성이었고, 그렇게 모은 예술 컬렉션은 오늘날까지도 루브르 소장품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공공 미술관으로 변신한 루브르는 나폴레옹이 대권을 잡으면서 더욱 성장했다. 유럽은 물론 지중해, 중동에서까지 정복 전쟁을 벌인 나폴레옹 군대가 각지에서 거둬들인 예술품과 문화재들이 루브르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상당 수준의 인문 교양인이었던 나폴레옹은 뛰어난 예술품, 역사적 유물을 보존하고 전시하여, 프랑스 국위 선양에 기여할 시설로서 루브르의 역할에 주목했다. 당시 루브르의 공식 명칭이 다름 아닌 ‘나폴레옹 박물관’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루브르는 그야말로 프랑스 역대 지배자들이 남긴 보물단지다.


때론 완전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 - <날개를 펼친 승리의 여신> <밀로의 비너스>


루브르 관람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면 두 조각상, <날개를 펼친 승리의 여신>과 <밀로의 비너스>를 만나는 경험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두 조각은 원래의 모습에서 일정 정도 훼손된 상태로 발굴되었다. 그럼에도 두 작품은 완벽함 혹은 완성됨을 영영 잃어버린 덕분에 전혀 새로운 차원의 미적 자산을 획득하는 역설, 반전을 이루어 냈다. 비록 온갖 상상력과 과학적 추정을 동원하더라도 결코 완성에는 다시 도달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그 조각들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날개를 펼친 승리의 여신>은 <사모트라케의 니케>라고도 불린다. 영어로 ‘나이키’라고 발음하는 니케는 운동화 회사 이름이기 훨씬 전에 이미 그리스 신화 속 승리의 여신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니케는 원래 티탄족 출신 거인 팔라스와 물의 정령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데, 제우스의 총애를 얻어 승리의 메신저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문명 초기에 니케는 그저 전쟁의 신 아테나의 들러리 비슷한 역할로 별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점점 각광받은 끝에, 드디어 폴리스마다 큰 전쟁이나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며 니케에게 감사의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성행하게 되었다.

1863년, 프랑스 외교관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샤를 샹프와조가 니케상을 발견했을 당시 몸체와 날개, 옷자락 일부 등이 모두 따로따로 흩어져 있었지만, 파리에서 수년간의 복원 작업 끝에 오늘날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니케상을 떠받치던 뱃머리 모양의 받침대 역시 1879년 조각난 상태로 발견되어 이후 복원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전통과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여신상은 옷깃의 방향과 활짝 편 날개로 볼 때 강한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막 지상에 내려앉은 순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물론 현재의 모습이 너무도 유명하고 우리에게 익숙하기는 하지만 애초에 머리도 팔도 없는 여신상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실제로 1차 발굴 당시부터 샹프와조는 현장에서 사라진 머리를 찾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고, 2차 발굴에서는 오른손과 손가락 등을 수거하는 수확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여신상이 만들어질 당시 얼굴은 물론 정확히 어떤 포즈를 취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파손된 지금의 형상으로도 니케상이 새로운 차원의 미학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날개’ 덕분이다. 그 활짝 펼친 날개의 존재감은 조각이 지닌 다른 모든 결함을 압도할 정도로 크고 강력하다. 여기서 날개는 여신에게 부속된 기관이기는커녕 오히려 여신의 몸체가 활짝 펼친 날개를 지탱하기 위한 받침대 역할을 하는 듯한 시각적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렬하고 찬란한 포스를 발산한다.

루브르의 또 다른 자랑인 <밀로의 비너스>는 니케상의 경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비너스상은 1820년 에게해의 밀로스섬에서 현지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뉴스는 마침 밀로스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두 명의 프랑스 해군 장교들의 귀에 들어갔다. 조각의 가치를 눈치챈 이들이 상부에 보고했고, 오스만 제국에 파견되었던 프랑스 영사 리비에르 후작이 조각을 1,000프랑에 구입하여 루이 18세에게 바쳤다. 이를 다시 루이 18세가 루브르에 기증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니케와 마찬가지로 비너스상에서 사라진 두 팔(오른팔은 팔꿈치 바로 위에서, 왼팔은 아예 어깨 부분 옆에서부터 사라졌다)이 어떤 포즈를 취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설이 제시되어 왔다. 이는 아무래도 그 조각이 어느 여신을 묘사한 것인지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가령 그 정체가 아르테미스라면 사라진 두 팔은 활을 들고 화살을 사냥감에 겨누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아프로디테라면 트로이 전설에서처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 앞에서 불화의 사과를 들고 유혹하는 포즈였을 수 있다. 혹은 연인인 전쟁의 신 아레스 (로마식 이름 ‘마르스’) 앞에서 한창 교태를 부리는 순간을 묘사했을 수도 있다. 특히 이 시나리오가 설득력 있는 이유는 골반 아래까지 내려온 튜닉 덕분이다. 완전히 벗은 것도, 완전히 입은 것도 아닌 그 모습은 성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2미터가 넘는 키의, 가볍게 몸을 뒤튼 여신의 자태는 감상자에게 다양한 각도에서 미적 흥취에 잠길 기회를 제공한다. 혹시 루브르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360도 돌면서 감상하는 기회를 누려 보기 바란다. 특히 ‘조각의 뒷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정말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뭐라고 딱 표현하기 힘들지만 하여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전문가들은 밀로의 비너스상이 감상자에게 강렬하게 어필하는 이유를 수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가장 조화로운 비율인 ‘황금 비율’이 반영된 오브제는 감상자에게 최대치의 만족감을 선사하는데, <밀로의 비너스>가 바로 이 황금 비율이 예술품에 적용된 가장 유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팔이 사라진 자리가 가슴 부분과 절묘한 균형을 이룬 덕에 상반신만 보고 있으면 파손된 작품이 아니라 애초부터 흉상으로 제작된 작품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니케상과 비너스상은 완성보다 훨씬 더 강렬한 미완성, 아니 파손의 독특한 미학을 뽐내며 오늘날까지 루브르를 찾는 관람객들을 끌어당긴다.



오르세 미술관 - 철도역에서 미술관으로, 프랑스 근대 회화의 전당


오르세는 원래 19세기 말까지 여러 관공서가 자리했다가 다시 1900년에는 철도 역사, 호텔, 쇼핑센터 등이 결합한 복합 기능 단지로 변신했다. 그리고 철도 산업의 부침과 함께 20세기 중반 폐쇄된 후 한동안 방치되었던 오르세 역사를 미술관으로 부활시키는 계획이 구체화한 것은 1977년 당시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역할이 컸다. 개조 작업이 마무리되어 1986년 문을 연 오르세는 오늘날 연간 방문객 300만 명을 헤아리는 파리의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오르세 컬렉션의 대부분은, 프랑스 정부가 오르세를 19세기 중엽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 미술 작품들을 망라하는 허브 미술관으로 성격을 규정하면서, 퐁피두 센터, 죄드폼, 루브르 3곳의 미술관으로부터 관련 미술품들을 골라 옮겨 왔다.


대세 ‘소방관 미술’의 이상과 한계 - <뮤즈와 시인> <사하라에서의 저녁 기도>


근대 프랑스 미술이라고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인상주의를 떠올리기 쉽지만, 알고 보면 인상파는 오랫동안 아웃사이더(비주류 화풍)였다. 인상주의가 등장할 무렵까지도 프랑스 제도권과 강단 미술을 지배한 화풍은 여전히 신고전주의였다. 당시 미술 경향은 흔히 라 퐁피에, 즉 ‘소방관 미술’이라고도 반농담조로 불렸는데, 이는 파리의 소방관들이 쓰던 헬멧이 신고전주의에서 즐겨 소재로 삼는 그리스ㆍ로마 시대 전사들이 머리에 쓰던 투구를 연상케 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고전주의 화가들이 바로크 미술의 과도한 장식성과 경직성을 탈피하여 보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극적 묘사를 강조하는 혁신성을 보였다면, 신고전주의자들은 그리스ㆍ로마의 역사 및 신화 속 명장면을 화폭에 담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며 점점 더 교조적 정형성으로 빠져들었다. 오르세 컬렉션에서도 신고전주의 회화 작품들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매우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창조력의 차원을 보여 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보수성을 띠기도 한다.

가령 루이 샤를 탱발(1821~1880)의 1866년경 살롱(주로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전람회) 출품작 <뮤즈와 시인>이 그 좋은 예다. 마치 당시 살롱 심사위원들의 입맛을 위해 맞춤형으로 제작한 듯한 이 그림은 신고전주의의 이상과 한계를 동시에 잘 보여 주고 있다. 깔끔하고 세련된 테크닉으로 그려진 그림은 매우 아름답지만, 등장인물들의 복장과 몸짓, 화면의 색조 등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말하자면 어떤 책에 들어가는 삽화 정도에 그칠 만한 소재를 불필요하게 확대했다는 인상을 준다.

신고전주의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제도권 미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경향이 오리엔탈리즘이다. 식민지와 시장의 확보를 위해 유럽 각 국가가 저마다 지중해 너머 동진을 시작하는 분위기 속에서 예술가들 역시 동방의 문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는 직접 이집트와 오스만 제국 등 현지를 방문하여 그 풍속과 풍경을 화폭에 담는 경우도 많았는데, 특히 프랑스 화가들이 이 방면에서 수준 높은 그림들을 많이 남겼다.

오르세는 뛰어난 오리엔탈리즘 화풍의 작품들 역시 대거 전시하고 있는데, 현지의 사정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저널리스트적인 시선보다는 먼 이국에 대해 유럽인들이 품은 동경과 판타지와 다소 타협한 듯한 낭만적 시선이 대세다. 동시에 오리엔탈리즘 미술은 신고전주의의 파생 상품이라고 볼 여지가 많다. 신고전주의 그림의 소재들이 시간적으로 동떨어진 고대, 중세였듯이 동양풍 회화들 또한 유럽인들이 이국의 신비를 물리적으로 한참 떨어진 현지까지 힘겹게 가서 경험할 필요 없이 안전하게 거실에서 즐길 수 있는 시각적 미디엄의 역할을 충실히 한 셈이다.

오르세에 전시된 오리엔탈리즘 작품 가운데 나름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귀스타브 아실 기요메(1840~1887)의 <사하라에서의 저녁 기도>다. 1863년경 살롱전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았던 이 그림은 막 해가 진 사막과 하늘을 배경으로 기도를 올리는 유목민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편견과 왜곡이 들어간 흔적이 별로 없으며 그야말로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나 수단을 방문한 유럽 여행자가 먼발치에서, 약간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을 현지인들의 삶 한 장면을 충실하게 화폭에 펼쳐 놓은 느낌이다.



오랑주리(Orangerie) 미술관 - 오렌지 온실에서 미술관으로, 전환기 프랑스 미술의 전당


파리의 튀일리궁 정원을 장식하는 오렌지 나무들을 겨울 동안 옮겨 보호하라는 나폴레옹 3세의 명령에 따라 1853년에 지어진 오랑주리는 1921년 미술관으로 탈바꿈되었다. 개관 당시 오랑주리가 내건 취지는 동시대 활동 중인 예술가들의 그림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화가들은 이미 오래전 고인이 되었고, 그들의 작품들 또한 이제는 미술사의 고전이 되었다.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 오랑주리는 오르세와 미술가들이 이따금 겹치는데, 특히 인상파 화가들의 경우가 그렇다. 공간의 규모나 전시품의 숫자를 생각했을 때 오르세가 대저택, 오랑주리는 그 옆의 아담한 별채쯤 된다. 그러나 때로는 별채가 본채보다 더 편안하고 즐거운 장소일 수도 있는 법이다.


영원히 울려 퍼질 백조의 노래 - <수련> 연작(<아침> <버드나무의 아침>)


오랑주리 미술관을 대표하는 간판 화가, 터줏대감은 역시 원조 인상파의 영수 모네다. 그의 그림은 오르세에도 많이 전시되어 있지만, 특히 오랑주리에 있는 모네의 작품들은 비단 개인의 예술적 성취뿐 아니라 인상주의 운동, 나아가 근대 유럽 미술사의 한 챕터를 마무리하는 듯한 무게감과 존재감을 뿜어낸다. 어떤 의미에서 오랑주리는 모네의 예술에 바친 영예의 전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네는 당대 프랑스 화가들 가운데서도 상당히 장수했다. 86세까지 살다 보니 인상주의 운동이 신고전주의에 도전하는 아방가르드 세력이었던 시절을 한참 지나다 못해, 그 인상주의가 도리어 신진 화가들의 기세에 밀려 구시대의 유물 비슷하게 취급받는 역전의 상황까지 모두 지켜봐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한물간 화가로 찌그러져 있지 않았고, 마지막 남은 예술혼을 불사르며 걸작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이 현재 오랑주리에 잘 보존되어 있다.

노년의 모네는 시력이 약화되고 여러 건강 문제에 우울증까지 겹쳐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그런 그를 다시 창작 활동으로 몬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모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재개하여 사망 직전인 1926년까지 총 8점의 초대형 그림을 그렸다. 엄청난 수의 사상자를 낸 전쟁이 끝난 며칠 뒤, 모네는 당시 프랑스 수상으로 평소 친분이 있던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고 평화를 기리는 마음에서 전쟁 동안 그린 자신의 그림들을 국가에 기증하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클레망소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장소 선정과 비용 문제 등으로 그림들은 모네 사후인 1927년에야 겨우 오랑주리에서 시민들에게 공개될 수 있었다.

이렇게 모네가 국가에 바친 것은 다름 아니라 물과 꽃을 묘사한 그림들이었다. 더 정확히는 자택 정원에 있는 연못 위를 떠다니는 수련을 그린 것인데, 흔히 이 그림들은 <수련 연작>으로 불린다. 사실 모네는 그 시점까지 30년간 수련을 그려 왔지만, 그가 1차 대전 직후 국가에 헌납한 8점의 유작은 <수련 연작>의 피날레를 이룬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그리려는 대상과 빛이 이루어 내는 충돌과 조화에 몰두했던 모네의 기법은 오랑주리의 <수련 연작>에 이르러서는 아예 화면에 등장하는 형태와 색깔, 구도 등을 자유자재로 뒤섞고 해체했다가 다시 모이도록 하는 경지에 다다르고 있다.

빛을 한껏 받아들였다가 다시 뿜어내는 연못, 수면 위에 비치는 푸른 하늘을 고스란히 담아낸 그림 등은 거꾸로 걸어 놓아도 알아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혹은 이따금 거꾸로 걸어 놓고 보아야 그림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명암과 형태가 모호하다. 비평가들이 이 그림들을 추상 미술의 전조로 거론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화가는, 야외에서 캔버스를 펼쳤다가도 구름이 잠시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면 더는 붓을 놀리지 못하고 다시 햇볕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는 일화로 유명한 ‘젊은 시절의 모네’가 아니다. 빛을 기다리기보다는 마음 내키는 대로 빛을 만들어 내는 대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어쩐지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라는 성경 창세기의 구절이 연상될 정도다. 연작 그림 속의 깊고 그윽한 물과 풀잎의 이미지 또한 창세기 속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등의 문장과 연결되는 면도 없지 않다.

또는 지구 역사에서 생명의 탄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 분주하게 진행되던 원시의 바다, 그 정적과 정열이 함께하는 세계를 떠오르게도 한다. 화가의 그림에 천지창조의 순간을 연결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예술가는 자기 작품에 관한 한 창조주이니 무리한 비유도 아니라고 본다. 영어에는 ‘백조의 노래’라는 표현이 있다. 백조는 죽기 직전 단 한 번 아름다운 소리로 운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말로, 대개 어떤 사람이 마지막으로 이루어 낸 업적, 유종의 미를 거둔 성공을 일컫는다. <수련 연작>은 문자 그대로 모네가 부른 백조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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