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한민 지음 | 부키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한민 지음
부키 / 2022년 1월 / 396쪽 / 18,000원
한국 문화와 일본 문화 이렇게나 다릅니다
한국과 일본은 꽤 다른 나라입니다. 문화의 방향성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비슷한 점도 많습니다만 차이가 나는 부분은 명확합니다. 여기서는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와 함께 그러한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문화적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은 보편적인 욕구를 갖지만 그 욕구를 충족하는 방식은 문화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죠.
쉽게 말씀드리자면, 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지만 옷의 재료나 형태, 기능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과 미의식, 습관에 따라 다 다르지 않습니까. 한국인과 일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호모 사피엔스에다가 유교, 집단주의 문화 등 비슷한 점도 많기에 살면서 해야 할 일과 원하는 바는 비슷할 수 있죠. 하지만 그것을 충족하는 방식까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과 일본 사람들은 비슷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어떤 방법들을 찾았을까요?
사람을 믿는 한국인 vs 시스템을 믿는 일본인2012년 OECD에서 실시한 행복지수 연구 중, 힘든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묻는 항목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36개국 중 35위를 차지했습니다. 과연 그렇겠다 싶은 것이 대한민국은 사기 범죄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2013년 한 해 동안 한국의 사기 범죄는 27만 4,086건이 발생했습니다. 같은 기간 일본은 3만 8,302건에 불과합니다.
2018년 3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7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2017년 우리 국민의 가족, 이웃, 지인 등 일반인에 대한 신뢰는 4점 만점에 2.7점으로 그리 높은 편이 아닙니다. 공공 부문에 대한 신뢰는 더 가관입니다. 의료 기관이 2.6점으로 상대적으로 가장 높고, 다음으로 교육계, 금융기관이 2.5점, 검찰과 대기업에 대한 신뢰는 2.2점으로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부 부처에 대한 신뢰도는 그나마 전년에 비해 0.3점이나 올라서 2.3점이지만, 국회는 1.8점으로 가장 낮습니다. 2점보다 낮다는 것은 대놓고 믿을 수 없다는 뜻이죠. 정치 사상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신의 저서 『트러스트』에서 ‘국가 경쟁력은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군요. 우리는 이래서 아직 ‘선진국’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한국인하면 정(情) 아닌가요? 끈끈한 우리-정 관계로 맺어져 있고 매일같이 ‘우리가 남이가’를 부르짖는 한국인들은 왜 서로 사기를 못 쳐서 안달이고 어려울 때 도움받을 사람이 하나 없을까요?
지금까지 인용한 조사 결과만 보면 한국인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사회 시스템에서 서로 사기 치기 바쁜 사람들이 호시탐탐 서로 등쳐 먹을 기회만 노리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족속처럼 느껴집니다. 각계의 전문가들과 언론도 한국은 ‘저신뢰 사회’라는 전제에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국가 비교 통계 사이트인 넘베오(NUMBEO)에서 2018년 120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해외 여행객들이 꼽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한국이 뽑혔습니다. 2019년 조사에서는 순위가 조금 내려가긴 했지만 한국은 다년간 많은 외국인이 밤늦게까지 돌아다녀도 안전한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에는 유럽의 관광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소매치기도 없고 커피숍이나 식당에 가방이나 노트북을 놓고 다녀도 집어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하철에 놓고 내린 물건도 나중에 분실물 보관소에 가면 웬만큼 찾을 수 있죠. 한국에서는 전기가 끊어지거나 심지어 시위를 할 때에도 도시가 파괴되거나 상점이 털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신뢰 수준이 높다는 국가들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일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의 치안 수준과 이런 문화는 신뢰와는 별 상관이 없는 걸까요?
요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뢰에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사적 신뢰와 공적 신뢰가 그것입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 수준과 그 사회의 기관 및 시스템에 대한 신뢰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한국인 심리를 연구해 온 연구자의 입장에서 한국인의 일반적 신뢰 수준은 높은 편이나 기관 및 시스템에 대한 신뢰 수준은 낮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공적 영역에 대한 낮은 신뢰는 우선 한국의 국가 시스템이 한국인들에게 행해 왔던 일들을 떠올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한말에서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국가 시스템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망국과 식민지, 내전과 독재를 경험한 이들이 시스템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유지되고 이만큼이나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들의 사적 신뢰 체계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도 내 마음 같을 거라는 전제 아래 살아갑니다. 그래서 정도 많고 다른 이들과 가까워지기도 쉽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속상할 일도 많죠. 이러한 믿음 체계가 커피숍에 노트북을 놓고 다녀도 집어 가는 사람이 없는 이유이고, 사기 범죄가 많은 것 역시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설마 내 노트북을 가져가겠어?’라는 생각으로 물건을 두고 다니고, 사기범들은 ‘저 사람이 설마 나한테 사기를 치겠어?’라는 사람들의 신뢰를 거꾸로 이용하는 것이죠.
일본은 어떨까요? 앞서 언급한 『트러스트』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한국을 대표적인 저신뢰 사회로 분류한 반면, 일본은 미국, 독일 등과 함께 고신뢰 사회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통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연구 결과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사토 요시미치의 한국과 미국, 일본을 비교한 연구에서, 한국인들의 일반적 신뢰 수준은 53%로 미국(34%)과 일본(20%)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도쿄대 사회심리학 교수 하리하라 모토코는 2010년 서울과 뉴욕, 도쿄의 지하철에서 승객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비교했습니다. 100구간당 상호 작용의 빈도에서 서울 45.4회, 뉴욕 26.2회, 도쿄 6.6회의 상호 작용을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자리를 양보하는 등의 행동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리하라 교수는 한국인들의 대인 관계망의 크기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크다고 말합니다. 인간관계를 맺는 데 적극적이고 스스럼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심리학자 야마기시 토시오는 일본은 신뢰가 높은 사회는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일본은 ‘안심할 수 있는 사회’이지 ‘신뢰가 높은 사회’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에 따르면 신뢰란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그런 믿음과 기대가 있다면 일본인들의 일반적 신뢰 수준이나 대인 관계망의 크기가 작게 나오지는 않았겠죠. 저는 ‘알고 봤더니 한국이 고신뢰 사회고 일본이 저신뢰 사회더라.’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뢰에는 일반적 신뢰와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가 있고, 둘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한국 사회의 공적 영역에 대한 낮은 신뢰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사안입니다. 그러나 일반적 영역에서의 높은 신뢰 수준 역시 우리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자 우리가 당면한 여러 사회적 문제의 해결에 핵심적인 열쇠로 작용할 수 있는 자산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높은 신뢰는 그들의 사회 시스템과 공적 영역에 기반한 것입니다. 반면, 타인에 대한 낮은 신뢰 역시 일본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며 일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 역시 제가 강조하고픈 지점입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종특’의 탄생
여기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문화적 성격에 대한 글들입니다. 성격이란 한 사람의 고유한 행동 특성입니다. 개인의 타고난 기질과 주어진 환경이 성격을 만드는 요인이죠. 개인에게 성격이 있다면 집단에는 문화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어떤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습관과 가치를 발달시켰습니다. 그것이 문화입니다. 서로 다른 문화는 서로 다른 성격을 만들어 냅니다. 부모의 양육 방식에 따라 아이들의 성격이 달라지듯이 말이죠. 한일 두 나라 문화의 주된 특성은 결국 두 나라 사람들의 문화적 성격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선을 넘는 한국인 vs 선을 긋는 일본인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람처럼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하고 쿨하게 갈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답은 ‘지나가던 선비’입니다. 우리의 많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지나가던 선비’들께서는 이렇게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셨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죽을 고비를 맞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선비들은 그 장면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조상에 그 후손들 아니랄까요. 한국인의 오지랖은 유명합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뜻은 남의 일에 지나치게 참견한다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한국인 대인 관계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단연 ‘오지랖’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서 어디 넣었니?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명절 때마다 미혼 취준생들을 괴롭히는 친척들의 오지랖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누가 무슨 옷을 입는지, 누구랑 밥을 먹는지, 애들 학원은 몇 개 보내는지 등등 인터넷에는 주변인들의 오지랖으로 괴로워하는 사례가 넘쳐 납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오지랖이 부정적인 편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프로 참견러 ‘지나가는 선비’들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지언정 중생들의 목숨을 구하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왔습니다.
이수현 씨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2001년 일본 도쿄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 목숨을 잃은 분이죠. 이수현 씨는 일면식도 없었던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지하철 앞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지하철역에 스크린 도어가 생겨서 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한국에서는 얼마 전까지 선로에 떨어진 사람들을 구한 시민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죠.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랬다.”라는 겁니다.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달려오는 열차 앞에 뛰어드는 사람들, 교통사고 현장을 지나치지 못하고 교통정리를 하거나 사고 잔해를 치우는 사람들, 그들이 남 일에 참견하는 이유는 남이 ‘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님 같아서, 우리 아들딸 같아서 걱정을 하고 개입을 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말이죠.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참견은 사생활 침해입니다. 또한 나이나 직위 등 위계가 개입된 참견은 갑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일에 참견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동기는 파편화되어 가는 현대인의 삶을 지지해 줄 버팀목이 될 수도 있고, 공통의 문제에 대처하는 사회적 연대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IMF 금 모으기 등 사회가 어려운 시기마다 빛을 발하는 소위 ‘국난 극복의 유전자’. 최근 요소수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소방서 같은 곳에 갖고 있던 요소수를 두고 가는 시민들을 볼 수 있었죠. 이런 현상들은 남 일을 남의 일만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오지랖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떨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일본인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습니다. 참견을 극도로 꺼린다고 할까요. 일본인들이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 민폐를 저지르지 않으려는 동기에서입니다. 민폐, 즉 메이와쿠는 일본인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규범 중 하나로 ‘조용하고 깨끗하고 질서 잘 지키는 일본’이 작동하는 원리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메이와쿠가 적용되는 맥락은 한국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죠. 예를 들면, 일본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서도 민폐라고 인식하는 것은 물론, 국가나 사회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서도 그것이 자신이 끼친 민폐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구조된 한 할머니가 구조대원들에게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겨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2015년 IS에 납치되어 살해당한 기자의 부모 역시 “제 자식 문제로 민폐를 끼쳐 죄송하다.”라는 인터뷰를 했지요. 어떤 이들은 지진의 잔해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사랑하는 자식이 만리타국에서 살해당한 와중에도, 자신을 낮추고 사회를 생각하는 일본 문화와 일본인들의 정신력에 찬사를 보냈지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위험에서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존재 이유가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죄송할 일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의 민폐에 대한 이런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恩)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약하면, 일본인들에게 온은 태어나면서 주군, 천황, 국가, 일반적인 사회와 타인들의 존재로부터 받게 되는 사회적 의무를 뜻합니다. 또한 일본에는 온가에시(恩返し)라 하여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데요. 은혜를 입고도 갚지 않으면 이는 온을 입힌 상대와 사회에 엄청난 민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회로부터 제공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늘 갚을 길 없는 온을 입은 죄스러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실제로 죄스러움을 느낀다기보다는 이러한 행위 양식이 문화적으로 행해지고 또 의사소통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앞에 예로 든 상황에서 “폐를 끼쳐 죄송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일본인들은 그 행동이 문화적으로 적절치 않다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죠. 대개의 경우, 그 결과는 이지메입니다. 따라서 일본인이 남의 일에 참견을 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참견은 어떤 이에게 온이 될 수 있고, 온을 입은 이는 반드시 온을 갚아야 하는데,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준으로 온을 갚는 것이 부담이 될뿐더러, 온을 갚지 않는 것은 더 큰 민폐가 되기 때문에, 남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일 자체를 피하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죠.
일본인이 누구에게 한 끼라도 얻어먹는 것을 꺼리고 철저히 와리캉(더치페이)을 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 나한테 밥을 사 줬다면 나도 다음에 그에게 밥을 사 줘야 하니까 말이죠.
한국인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도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만, 일본인들에 비하면 융통성이 있죠. 은혜는 언젠가, 때 되면, 능력 되면 갚는 것이지, 은혜 하나 입으면 하나 갚아야 되고 못 갚으면 갚는 날까지 전전긍긍하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한국에는 이러한 점을 악용해서 선의로 은혜를 베푸는 사람들을 등치는 유형의 인간들도 존재합니다. 이런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불필요한 일에 서로 참견하지 않고, 받은 만큼 주고 준 만큼 받는 일본식의 대인 관계가 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남의 일이라서, 내가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태도는 또 다른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문화를 뜯어 보면 숨은 그림이 보인다
여기에서는 조금 관심이 있어야 알 수 있는 문화의 차이를 다뤄 봤습니다.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 빌헬름 분트는 사람들의 심층적인 심리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 전설, 민담, 가치관 등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고 ‘민족심리학’을 제안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그러한 시도입니다. 두 나라 사람들이 만들고 향유해 온 이야기와 놀이들은 꽤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과 일본의 문화에는 보다 본질적인 차이가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